[IT동아 차주경 기자] ‘정밀 의료’는 환자의 병세와 신체의 특징, 생활 습관과 식습관, 병력 등 여러 정보를 수집·분석해서 알맞은 치료 방법을 제시하는 기술이다. 환자 맞춤형 의료이자, 병의 통증과 부작용을 줄이고 치료의 예후를 좋게 만들 선진 의료 기술로도 꼽힌다. 세계 각국의 의료진이 정밀 의료를 연구 개발하고 개선하는데 힘 쓰는 이유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중국의 환자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정밀 의료의 수혜를 누렸다. ‘한의학’ 덕분이다. 한의사는 환자를 진단할 때 ‘망문문절’을 지킨다. 환자의 행동과 안색, 정신 상태를 보는 ‘망진(望診)’, 환자의 목소리와 몸에서 나는 냄새를 확인하는 ‘문진(聞診)’, 환자의 증상과 생활 습관, 병에 걸린 동기와 지금까지 무슨 치료를 했는지 묻는 ‘문진(問診)’에 이어 환자의 몸 곳곳을 만지며 맥박 수와 피부 상태, 체온을 재는 ‘절진(切診)’을 한다. 이렇게 풍부한 정보를 얻은 한의사는 환자에게 알맞은 맞춤형 치료 방법을 제안, 실행하고 회복을 도울 한약도 처방한다.
데이터 한의학을 돕는 임상의사 결정 지원 시스템 예진 / 출처=헬리큐어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이 오히려 한의학의 불신을 불러왔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의사마다 망문문절을 하는 방법, 해석하는 방법 모두 달랐던 까닭이다. 같은 환자를 보고도 한의사마다 각기 다른 병의 분석 결과, 한약 처방을 내놓을 때가 있었다. 기술이 누구에게나 보편 타당한 효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객관성’, 실험을 다시 해도 늘 같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재현성’이 부족했던 셈이다. 이 탓에 환자들은 한의학의 효능을 의심했다.
한의학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임상·치료·처방 기록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점도 문제였다. 당시의 의료 정보를 집대성한 저서 '동의보감'처럼 잘 짠 한의학 저서가 있었으나, 이를 제외하면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져 내려오는 한의학 저서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한의학 용어의 표준화도 제대로 되지 않아 한의사마다 각기 다른 용어를 쓰는 일도 잦았다. 새로운 기술과 한약이 등장해도 이것을 새로 반영, 기존의 것을 더 좋게 만들려는 연구도 미흡했다. 혁신이라고 할 만한 한의학 기술이나 한약이 등장해도 연구, 보존 모두 잘 되지 않은 셈이다.
데이터 한의학을 돕는 임상의사 결정 지원 시스템 예진 / 출처=헬리큐어
홍릉강소연구특구 스타트업 헬리큐어를 이끄는 양웅모 대표는 이것을 항상 안타깝게 여겼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도운 한의학은 수많은 임상과 치료 데이터를 가졌다. 환자의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풍부하게 모으는 문진 기술도 있다. 이런 장점을 제대로 강화하지 못한 탓에 오히려 효능이 떨어진다는 오해를 산 것이다.
그는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도입한 새로운 한의학, ‘데이터 한의학’을 만들 생각을 했다. 먼저 용어를 표준화해 한의학 데이터의 호환성을 확보한다. 환자의 데이터를 효율 좋게 모은 후에는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인공지능으로 정보를 비교 분석한다. 가장 효과 좋은 정보를 토대로 기술을 꾸준히 개선한다. 디지털 기반이기에 객관성과 재현성도 확보한다. 이렇게 태어난 데이터 한의학은 기존의 단점을 해결하고, 양한방 협진을 유도해 동반 성장을 이끌 것이다. 양웅모 대표의 생각을 현실로 이끌 기술, 데이터 한의학의 마중물이 될 기술이 바로 ‘예진(Yejin)’이다.
환자가 보는 예진의 화면. 자신의 병세와 불편한 곳, 증상을 쉽게 입력 가능하다 / 출처=헬리큐어
헬리큐어의 서비스 예진은 한의학 최초의 ‘임상의사 결정 지원 시스템(CDSS, Clinical Decision Support System)’이다. 한의사가 망문문절 문진을 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온라인으로 옮긴 개념이다. 서비스의 이름은 인기리에 방영된 한의학 드라마 ‘허준’에서 명의 허준의 조력자로 등장한 간호사 ‘예진아씨’의 이름에서 본땄다. 예진아씨처럼 친절하고 섬세하게 환자를 돌보면서 유용한 치료 방법과 한약 처방을 알려준다는 의미다.
예진은 웹 서비스라서 언제 어디서든 쉽게 이용 가능하다. 환자는 원하는 때와 장소, 원하는 시간에 예진에 접속해 병의 증상과 자신의 신체 특징을 입력한다. 한의사가 환자에게 아픈 곳과 증상을 성심껏 하나하나 물어보듯, 예진 역시 다양한 질문을 하면서 환자의 정보를 모은다. 그리고 이 정보를 저장, 분석해 환자의 의료데이터로 만들고 클라우드 저장한 다음 한의사에게 전송한다.
환자가 입력한 정보를 토대로 예진은 한의사에게 자세한 환자 정보를 요약, 정리해서 전달한다 / 출처=헬리큐어
예진을 쓰는 한의사는 환자의 문진 내용을 저장해두고 언제든 참고한다. 환자의 일반 정보는 물론 병의 증상, 발병 시기와 시기별 변화도 기록 가능하다. 예진은 이들 정보를 한의학 의서 데이터베이스와 연동해 가장 알맞은 치료 방법과 한약 처방을 알려준다. 환자의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과정, 정보를 비교하며 고도화해 의료데이터로 만드는 과정은 예진의 자가학습 인공지능이 맡는다. 덕분에 환자의 데이터를 쌓을수록 예진은 더욱 똑똑해진다. 이 알고리듬이 헬리큐어의 핵심 경쟁력이다.
환자의 데이터를 나이와 성별, 생활 습관과 신체 특징, 질환별로 라벨링하면 개인 맞춤형 치료나 처방에 유용한 의료데이터가 된다. 환자의 예후와 치료를 받은 소감을 반영하고, 다른 환자의 의료데이터에 대입하거나 비교하면 완성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 이 의료데이터를 분석하면 특정 시기마다 유행하는 질환에 대비하는 것도, 환자의 건강을 지킬 생활 습관과 식습관을 제시하는 것도 된다.
예진은 한의학의 환자 맞춤형 진료를 디지털, 온라인으로 옮긴 기술이다 / 출처=헬리큐어
의료데이터를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전송하면 개인 맞춤형 건강 도우미가 된다. 제약 기업은 의료데이터를 활용해 유용한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환자나 질병 맞춤형 의약품을 만든다. 클라우드에 차곡차곡 저장된 의료데이터는 데이터 한의학의 완성도를 높일 자산이다. 동시에 동의보감처럼 후세에 전달할 소중한 한의학 지식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러면 예진은 한의사들의 진료 정확성을 높이고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환자도 예진을 쓰면 다양한 편의를 얻는다. 한의원에 가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든, 진료를 받으려고 기다리거나 다른 환자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천천히 자신의 병세를 입력한다. 가장 유용한 치료 방법과 한약 처방도 빠른 시간만에 받는다.
예진을 소개하는 양웅모 대표(강연자) / 출처=헬리큐어
양웅모 대표는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정교수이자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차세대회원이다. 그의 지식과 역량이 헬리큐어 예진에 고스란히 녹았다. 경희대학교와 우석대학교의 의학영양학과, 한의학과 교수들도 헬리큐어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이어 양웅모 대표는 헬리큐어의 개발 역량을 강화했다. 헬리큐어의 인공지능·빅데이터 개발 리더와 사용자 경험 기획자들은 국내외 주요 대기업에서 수 년 이상 경력을 쌓은 실력자다. 한의사 경영진의 지식에 정보통신 전문가 실무진의 경험을 더해 만든 것이 데이터 한의학의 교두보 예진이다.
이들은 힘을 합쳐서 도전 과제인 ‘규제 만족’과 ‘데이터 한의학의 전파’를 풀어나간다. 우리나라의 법률은 영상이나 진료를 다루는 의학 소프트웨어의 허가, 심의 기준을 정한다. 하지만, 헬리큐어의 예진과 같은 한의학 소프트웨어는 허가, 심의 기준이 아예 없다. 기준을 새로 만들려고 해도 참고할 항목조차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아주 어렵다고 한다.
홍릉강소연구특구 그랜드 K 창업학교에서 상을 받는 헬리큐어 / 출처=헬리큐어
데이터 한의학의 홍보, 전파도 풀기 어려운 문제다. 양웅모 대표의 선배이자 임상 경력 20년차 한의사인 조성옥 병원장이 여기에 힘을 싣는다. 그는 예진을 고도화하는데 필요한 한의학 데이터를 모으려고 동료 한의사들에게 적극 소개한다. 예진 상용화 후에는 자신의 병원에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조성옥 병원장은 예진을 ‘개인 맞춤형 진료인 한의학의 장점을 아주 잘 발휘하면서 장점과 개성을 뚜렷하게 할 기술’이라고 소개한다. 환자의 의료데이터를 꼼꼼하게 모으고 정량 특정, 평가하는 예진은 한의학의 객관성과 재현성을 확보할 기술이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세계 시장에 한의학의 효용을 증명하고 소개할 자산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진을 연구 중인 헬리큐어 임직원들 / 출처=헬리큐어
난관을 함께 헤쳐나갈 기관과 조력자를 확보한 헬리큐어는 이미 예진의 베타 서비스를 공개, 운영 중이다. 운영 경험을 쌓아 보완한 다음, 2024년에는 예진을 정식 서비스로 만들어 한의원과 한방병원에 보급한다. 예진을 비염이나 피부 질환, 비만 등 질환별 특화 서비스 혹은 치료 클리닉용 서비스로 고도화할 계획도 있다.
물론, 헬리큐어는 환자들이 예진을 더 쉽게 쓰도록 개선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쉽고 간편하게 한의학 문진을 하도록, 동시에 문진의 정확도를 높일 방법도 연구 중이다. 그러면 예진은 한의학 클라우드 EMR(Electronic Medical Record, 전자의무기록) 차트가 될 것이다.
예진을 설명하는 양웅모 대표 / 출처=헬리큐어
양웅모 대표는 이미 예진의 성장 동력이 될 기술들을 90% 이상 개발 완료했다고 말한다. 남은 것은 한의사들이 예진을 도입해 환자 증상 정보를 확보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데이터를 먹고 무럭무럭 자란 예진을 우리나라에 이어 세계인이 함께 쓰는 개인용 한의학 자가관리 앱, 한약 처방 서비스로 키우는 것이 헬리큐어의 목표다.
양웅모 대표는 “정보통신기술을 더한 데이터 한의학 시대를 열겠다. 맞춤형 의학인 한의학의 장점을 강화하고, 시공간 제약이 없는 온라인 서비스로 만들어서 세계인 누구나 한의학의 효용을 누리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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