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산업정책연구원이 \'브랜드전문가 과정\'을 이수 중인 재학생 및 수료생 130명을 대상으로 \'국내외 최고 브랜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일본 내 욘사마 신드롬을 일으키며 한류열풍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배용준이 43%, 드라마 <대장금>으로 아시아 전역에 한국사극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이영애가 30%의 높은 지지율을 얻으며 최고의 모델에 꼽혔다. 배용준과 이영애 다음으로는 안성기(23%)와 전지현(24%), 장동건, 정우성, 비, 김정은, 송혜교 등이 이들의 뒤를 이었다. 기업분야에서는 66%의 지지를 얻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 삼성이 1위를 차지했다.
데뷔 때부터 톱스타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고, 일본 내의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배용준의 브랜드 가치는 누구나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이영애의 경우는 “벌써 이영애가 저 만큼 성장했단 말인가?”라며 다소 의아해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드라마 <대장금>이 50%라는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긴 했지만, 국내 여배우 브랜드 1위가 될 정도로 히트작을 연속적으로 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영애라는 배우의 가치가 낮다는 뜻은 아니다. 이영애의 연기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갑자기 튀어오르는 신데렐라형이 아니라 꾸준히 조금씩 조금씩 올라온 노력형 스타였기 때문이다.
이영애는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 2학년 재학시절이었던 1990년도에 홍콩 최고의 인기스타 유덕화와 투유 초컬릿 CF 모델로 브라운관에 데뷔했다. 물론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모 덕에 중학교 시절부터 청소년 잡지 모델 활동을 한 경력이 있지만, 이영애라는 얼굴을 알린 것은 이 때부터였다. 이 당시 초컬릿 회사에서는 신인모델의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매체와의 일체의 인터뷰를 금지시켰고 이영애도 쑥스럽다는 이유로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영애는 무려 6년 7년이 지난 1997년 자신이 직접 쓴 스타 스토리에서 이 당시의 에피소드를 설명한 적이 있다. 초컬릿 모델이 된 이후에도, 그냥 평범한 대학생들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어찌됐든 백화점의 한 식품 코너에서 친구와 함께 보름간의 초콜렛 판매를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내가 전속해 있는 초콜렛회사의 광고가 나가는데 괜찮을까 하는 떨떠름함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투유초콜릿 광고에 나오지 않았어요?’
‘아니에요, 난 아니에요. 몰라요!’
난 혹시라도 날 알아볼까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도망을 갔다."
그러나 이영애가 지닌 가치는 그냥 이렇게 묻히지 않았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영애의 모습을 눈여겨 본 한국 최고의 화장품회사 태평양화학은 새로운 브랜드 ‘마몽드’의 대표 모델로 이영애를 찍은 것이다. 유덕화라는 대형스타의 옆에서 단 한 컷만 나온 신인 여대생 모델과 새로운 브랜드를 위해 전속계약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영애는 이것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조차 당시로서는 알지 못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화장품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새 브랜드의 모델을 구하고 있는데 카메라 테스트를 하자는 것이었다. 화장품 모델이 된다는 것이 여자로서 최고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길이었지만 솔직히 그때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것은 의상 CF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쁜 옷을 많이 입을 수 있으니까. 더구나 카메라 테스트를 하는데 수영복을 입으라는 것이 아닌가. 질겁을 했다.
‘난 수영복은 안 입을 래요!’"
옷을 많이 입지 못하는 화장품 모델이 되었다고 투덜거린 이영애는 이 CF 한편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CF는 문자 그대로 대박이 나고 말았다. 이 CF의 카피이자 이영애를 상징했던 ‘산소 같은 여자’는 신세대 직장여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코드가 되었다. 이영애는 1993년 화장품CF의 전속 모델 중 무려 25%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이를 ‘이변’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영애가 당시 월드스타로 각광받던 강수연마저 제쳤기 때문이다. 한국일보의 김지영 기자는 이영애 신드롬을 신세대 문화현상으로 분석하였다.
"신세대 여자들의 이러한 고민을 가장 정확하게, 환상적으로 짚어낸 광고가 있다.「산소같은 여자」이영애가 미모의 여형사로 나오는 마몽드 화장품 CF가 그것이다. 운동과 사격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사건현장에서는 남자들을 지휘하는 이영애의 모습은 능력있는 여자를 상징한다. 동시에 그는 모델같은 얼굴과 아름다움도 잃지 않고 있다. 다소 비현실적인 이 상황설정은 타인과 자신 모두를 만족시키고 싶은 신세대 여자들의 강한 바람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는 이 CF 한편으로 일약 최고의 광고 스타가 되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녀에게 하나의 족쇄가 되었다. 데뷔 때부터 너무 하나의 이미지에 붙잡혀 있어, 연기자로 변신하기에는 오히려 장애가 된 것이다. 이영애는 이 때의 갈등과 고민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산소 같은 여자>. 세상에 나를 알려준 고마운 광고 카피지만 그 덕분(?)에 광고모델에서 변신해 연기자로 뿌리를 내리기에는 몇 배의 남다른 인내와 노력이 뒤따라야 했다. 중요한 것은 예쁜 얼굴이 아니라 바로 연기력이기 때문이다.
어떤 드라마에서 많은 변신을 해도 사람들이 나를 \'산소 같은 여자\'나 드라마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93년)의 \'도도희\'로만 기억하고 있다면 곤란하지 않는가.
아무튼 94년 한해동안 꼬박 매달려온 SBS TV 생방송 <출발! 서울의 아침> MC를 끝내고
95년 <아스팔트 사나이>의 가련한 미혼모 \'동희\'로 본격적인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이어서 <사랑과 결혼>의 신세대 패션디자이너 \'오은지\', <서궁>의 요녀 \'개시\', <찬품단자>에서 1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여인 \'박월남\', <파파>의 신세대 이혼녀 \'세영\', <그들의 포옹>의 어두운 전과자 \'승혜\', <동기간>의 왈가닥 여고생 \'용자\', 스크린 데뷔작인 <인샬라>의 강인한 생명력의 여인 \'이향\', 현재 <간이역>의 대학원생 \'채원\'과 <의가형제>의 내과전문의 \'차민주\'에 이르기까지 5년동안 10편의 드라마와 1편의 영화를 통해 연기자로서의 이영애란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고 변신을 보여주기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그리고 욕심껏 달려왔다."
그녀는 뛰어난 외모와 CF에서의 인기 탓에 너무나 많은 섭외를 받았고, 남들이 보기에 \'저것 너무 많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할 정도로 과다 출연했다. 그녀가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많은 드라마와 오락프로에 나오게 된 것도 사실 바로 그 \'산소 같은 여자\' 이미지에서 탈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영애는 대형스타가 되고자 했다기 보다는 어쩌다 CF에서 캐스팅되었고, 그 이미지로 사랑을 받다가, 그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톱스타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경우이다. 이는 처음부터 스타를 꿈꾸며 기획사 소속으로 착실히 준비를 하는 지금의 스타지망생과 달리, 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연예인들이 겪는 일상적인 경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개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꿈꾸는 일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타라는 공인의 지위에 오르면서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연예인들의 첫사랑은 아프게 끝나는 법이다.
"내게도 첫사랑이 있었다. 대학 2학년 겨울방학때 우연한 자리에게 만났던 3살 위의 복학생이었다. 첫눈에 그것이 사랑이란 것을 느꼈을 만큼 강렬했던 그 느낌이 지금까지도 지워지질 않는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정설(?)처럼 나 역시 첫사랑과 아름답지만 이루지 못할 사랑을 나누었다. 더 이상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언제 들어도 가슴 저려오고 설레는 첫사랑. 그런 첫사랑의 감정이 내게도 있었다는 것이 아련하게만 피어오른다"
CF와 드라마에서만 활약하던 이영애가 연기자로 완전히 변신하게 된 계기는 이민용 감독의 영화 <인샬라>에 출연하면서부터이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북한 외교관으로 나오는 최민수와의 감동적인 사랑을 연기했다. 그러나 이영애 본인의 욕심과 달리 이 작품은 그녀의 첫 영화 출연작이라는 의미 이외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이렇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무래도 스크린은 브라운관보다 크니까 작은 연기 단점이 크게 보이는 것 같아요. 가급적 부드럽고 자연스런 모습을 보이려 했는데 뜻대로 다 되지 않더군요. 하지만 꼭 지켜봐 주세요.”
<인샬라> 이후 이영애는 SBS 드라마 <사랑하니까>를 비롯하여 몇 편의 드라마를 거쳤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연기력으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이영애는 일반적인 여성스타와 달리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는가 하면, KBS의 모험프로그램 <도전 지구탐험대>에서 인도 서부 사막지대 라자스탄주에서 카스트 최하계층인 집시들과 함께 먹고 자기도 했다. 이 프로를 통해 깔끔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소박하고도 털털한 매력을 본 시청자들은 이영애의 색다른 모습에 놀라와 하기도 했다.
이영애는 1999년까지도 CF의 이미지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연기를 위해 남들이 하지 않는 독특한 경험을 하면서도 인터뷰 때마다 연기자로 평가받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CF는 나를 키웠지만 또 힘들게도 했습니다. CF의 고정적 이미지를 벗어나 연기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무던히도 몸부림쳤죠. 그러다가 만난 ‘사람’이 애숙이죠.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두렵다가 어느 순간 연기의 즐거움을 느끼게 됐으니까요"
이영애의 연기에 대한 집착은 그를 연극무대로까지 이끌었다. 연극은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출연료가 많지도 않으면서 연기자 자신에게 큰 부담을 주는 장르이다. 그래서 톱스타들이 연극무대에 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연극 만큼 연기력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장르도 없다. 이영애는 “제 연기가 마음에 안들면 분에 못이겨 울 때도 있어요”라며 연기자로서 거듭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이영애는 단막극 <은비령>을 통해 윤석호 감독을 만난다. 물론 톱스타가 흥행성이 담보되지 않는 단막극에 출연하는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었다. 윤석호 감독은 이영애에게 그 동안 CF에서 얻은 도시적인 매력에 자연의 순백미를 더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이영애의 캐릭터는 그의 미니시리즈 <초대>로 이어진다.
<초대>의 이영애는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한 결혼을 희망 하며 혼전순결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커리어우먼 ‘최영주’역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이 드라마에서 이영애는 청초하고 깨끗한 순백의 이미지, 고상하고 활달한 도시여성 이미지를 혼합시킨듯한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윤석호 감독은 이때의 이영애에 대해 “너무나 예쁘게 나왔다”며 만족했고, 이영애는 “이번 작품처럼 조명이나 카메라에 공을 들인 것은 드물다”며 윤석호 감독의 공으로 돌렸다.
이영애가 <초대>로부터 얻은 것은 두 가지였다. 브라운관에 비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순백미와 함께, 성과 사회에 대해 고민하는 지적인 여성의 이미지였다. 이는 이영애가 연기생활 내내 줄타기했던 CF에서의 아름다움과 연기자로서의 평가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영애는 이를 위해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과 함께, 대학원을 다니며 끝없이 공부하고, 남미와 아프리카 등에서 거친 경험을 하며 착실히 준비해왔다. 윤석호 감독의 <초대>로 이러한 노력이 서서히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노력은 한국영화 여성캐릭터 사상 최고의 지성미를 보여준 영화 <JSA>에서의 육군 소령 소피장을 맡게 되었다. <JSA>는 한국영화의 흥행기록을 세웠고, 이영애는 이 작품 하나로 드디어 연기력을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잡는다.
“사람들은 자꾸 어떻게 연습했느냐고 묻는데 결정적인 것은 마음 가짐인 것 같아요. 그간 7년 연기를 했고, 앞으로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책임감도 생기고, 껍질을 벗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영애는 <JSA>의 성공 이후에 영화 <선물>, <봄날은 간다> 등 끝없이 연기에 도전했다. 2000년 이후에도 이영애가 최고의 광고모델 조사에서 늘 1위를 차지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인정해줄 만하다. 한국의 스타들의 수익 중 CF 모델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래서 대부분의 스타는 어떻게 하면 거액의 CF를 따낼 것인가 고민한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 연기력을 검증받는 영화나 드라마 출연을 고사하고 CF에만 집중하는 스타들도 허다하다. 이영애로서도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법했다. 이영애는 1993년도 최고의 CF모델로 일찌감치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녀의 연기력은 늘 검증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러한 비판에 맞서, 그녀는 연기를 포기하기 보다는 연기자로서 인정받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JSA>의 성공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는 2003년 50%라는 기록적인 시청률을 올린 <대장금>의 여주인공으로 분했다. 그 역할 역시 <JSA>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적이고 리더십있는 여성이었다. 1999년 <초대>에서 얻은 지적인 이미지를 인고의 노력 끝에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영애의 연기과정을 보면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렵게 돌아간 흔적이 역력하다. “이영애의 연기는 안 돼”라는 말을 묵묵히 들어넘기며, CF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도전해 얻은 성과도 그래서 “외모가 예쁘니까”라고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이영애는 1997년에 자신이 직접 쓴 스타 스토리에서 이렇게 각오를 다진 바 있다.
“난 연기를 사랑한다. 연기를 하게 된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연기자\' 이영애로서 팬들의 기억에 남고 싶다. 아직은 서툴고 미숙한 점이 많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내 연기를 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긴 여운을 주는 연기자가 되리란 희망을 갖고 있다”
이 글의 제목은 이영애를 단 한 마디로 평가할 수 있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자”였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할 그녀의 미래를 그때부터 짐작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
윤석호 감독은 <여름향기> 때 이영애의 캐스팅도 고려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은비령>과 <초대>에 때의 이영애와 지금의 이영애는 다르다. 그 만큼 이영애는 성장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다시 만날 날을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 이 글은 일본 코사이도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윤석호 감독의 드라마 작품세계>(가제)의 원고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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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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