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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핀오프 옥경혜랑 드라마 후의 이야기_26_26.초대

정갤러(221.145) 2025.02.07 21:29:28
조회 584 추천 12 댓글 17




26.초대


내가 김과 미국으로 온 것은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나이도 마흔이 넘었고, 나도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공부를 다 끝낸 김이나, 겨우 소학교만 졸업하고 배우로만 살아온 내가 

새삼스럽게 대학 공부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할리우드를 기반으로 하는 다국적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김은 한국에서의 감독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조연출 가운데 한명으로, 

나는 비중이 낮은 조연이지만 배우로 출연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일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배움의 기회였기에 

김은 관심을 보였고 고맙게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기도록 해주었다.


사실 5-60년대의 한국 영화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어차피 국극을 그만두고 영화판으로 넘어갈 때 그렇게 대단한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 

인기나 성공에 대해서 그렇게 아쉽지도 않았고, 늘 뻔한 국극 남역에도 지쳐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때 내 나이도 30대 초반이었으니 새롭게 스타가 되고 싶은 꿈을 꿨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을 해보는 것에 의의를 둔 것이었는데,

그러나 막상 가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보다 더 적었다. 

국극에서의 역할이 한정되었던 것처럼 한국 영화의 제작 편수 자체가 많지 않다보니 

그 역할이란게, 특히 여배우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이란 뻔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 중에 김은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감독이었고, 

그의 영화는 더러 유럽의 큰 영화제에도 초대될 만큼 신선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국내에서 흥행은 참패했다 할지라도.

나는 김의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을 했지만 더러 다른 감독과도 일했다. 

그러나 그들과 일하는 것이 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극단에서 여성들과 오랜 시간을 보냈던 내게 

영화 현장의 분위기나 일이 진행되어가는 방식은 익숙하지 않았고 

5년 정도 그렇게 쉴 새 없이 지내다보니 나는 다소 지쳐있었다. 


201호의 그녀는 세계적 규모의 일본계 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예술 문화계의 거의 전방위적인 후원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특히 아시아, 소수민족, 제국주의의 피해를 받은 국가와 민족의 문화와 예술에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집안은 일본의 아주 명망있는 가문으로 천황과도 관계가 있는 집안이라 했다. 이미 오래전 부터 막대한 부를 지니고 있었는데다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군수산업에 손을 대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특히 일본이 패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통해 패전의 경제적 위기를 깨끗이 씻어낼 때,

그녀의 가문은 천문학적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로비스트로 키울 생각으로 일찌감치 그녀를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문화쪽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집안에서 벌어들인 돈을 다시 세상에 돌려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누군가의 피로 벌어들인 돈이므로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전쟁으로 인해 잿더미가 된 곳마다 찾아가 그들의 전통과 문화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 


처음에는 그녀의 일을 사사건건 반대하던 그의 아버지와 조부는

오히려 그녀의 활동 덕분에 기업과 가문의 이미지가 좋아지면서 그냥 그녀를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집안을 대단한 예술후원재단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군수산업으로 세계의 검은 돈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그녀의 막강한 배경이었다.


특히 그녀는 일본과 가까운 조선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전방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해방 후 일본 자본에 대해 예민한 조선의 현실까지 고려하여

한동안 모든 지원을 익명으로 처리할 만큼 자신의 일에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예술, 영화, 미술계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녀 또한 그 세계에 대한 놀라운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한마디로 우리같은 조선 촌뜨기들과는 계급자체가 다르다는 말이지. 부르조아 중의 부르조아. 세상이 좋아져서 그렇지, 예전같으면 이렇게 겸상도 못할 높으신 분이랄까.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며 김이 말했다. 


-그리고 바로 누이와 내가 참여하는 프로젝트의 후원자가 바로 눈 앞에 이분이시라는 거지. 


아무튼 연출팀인 그는 가족과 휴가를 보내고, 브로드웨이에서 몇 달 눈이 빠지게 연극을 본 후 연출팀에 합류하는 것이 계획이었고, 

일단 나는 언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겠기에 조금 쉬고 나서 언어를 공부하며 일정에 따라 팀에 합류할 계획이었다. 


나는 뭐라 딱히 할 말이 없어, 와인잔만 만지작거린다.

-저야, 뭐…두 분이랑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영광이지요.


-이 예술가들께서 무슨 겸손의 말씀이신지. 저는 돈 쓸 줄밖에 모르는 걸.

그녀가 부드럽게 말하자 


-사실 그게 제일 부러워.

하고는 김은 이내 다시 장난스럽게 나를 보며


-사실 난 이 잘생긴 누이가 제일 부러워. 

하고 말한다.

-나도 다음 세상에는 잘생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김 역시 조선에서 손꼽을 명문가의 아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시절에 유학이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조선은 지금도 전후 복구가 되지 않아 민중들은 비참한 가난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미국이란 나라에서 대저택 정원에서 이런 호사스러운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조선사람 대부분에게 꿈도 못 꿀 일이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이나 정치적 상황에는 약간 비껴간 집안으로 대대로 과학도의 집안이라 들었다.

그가 말한 그의 형님도 미국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누나도 그렇다고 들었다.

오로지 그 집안 막내인 김만이 돌연변이처럼 딴따라를 하겠다고

집안의 내놓은 자식? 이라고 늘 김은 떠들고 다녔다. 


-형님네는 언제 가?

그녀가 김에게 묻는다.


-벌써부터 난리유. 형님이랑 누님이랑 벌써 휴가 내고, 조카들도 싹 다 불러모았데. 뭐 남쪽에 무슨 섬인가 놀러간다고 그러던데. 사실 나 입국 날짜 알려주지도 않았잖아, 공항 나올까봐.


-왜, 바로 가지 그랬어?

내가 묻자 김은 약간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이 여인 보고 가야지.

하며 그녀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내 자기 표정이 진지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이 여인 비싸. 얼굴 한번 보기.

하며 농담으로 표정을 덮지만, 웬지 나는 그의 얼굴이 좀 쓸쓸해보인다.


-누이,

그가 내게 말한다.

-같이 갈래? 

-어딜?

-우리 가족한테.

-아, 내가 거길 왜 가.

-가자. 어차피 우리 형이랑 누나 맨날 한국 신문 읽는데 기사보고 며느리감 데려온 줄 알거 아냐. 가서 누이가 해명해야지. 며느리 아니고 누이라고. 아니면 그냥 며느리 하든가.

-감독님, 쉰 소리 그만하시고 가서 좋은 시간이나 보내고 오세요.


-나 없는 동안,

그가 말한다.

-너네 둘이 나 버리고 도망가면 안된다.

그의 말이 우리 셋을 순간적으로 침묵하게 만들었으므로

약간의 긴장감이 흐른다.


우리는 서로 너무 잘 아는 것과 너무 모르는 것이 혼재되어 있어 

긴장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너무 잘 안다는 것에 그 사람의 역사나 정보보다는

정서와 감정이라는 부분의 비중이 더 커서

서로가 어떤 긴장과 눈빛과 숨결을 주고받는지 숨길 수 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야릇한 즐거움이자 어려움이었다.


우리 각자가 가진 서로에 대한 애정의 수준과 깊이란 것이 너무 커서

이렇게 가까이 지내면 부딪혀 다 드러나버리지 않을까.

그래서 우린 지금 이 시간이 마치 삼각관계에 빠진 청춘같이 설레기도 하면서

무엇이라도 하나 잃을까 봐 살얼음을 걷듯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의 대화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나는 그들의 박식함에 비하면 

너무 아는 것이 없으므로 거의 듣기만 한다. 

나는 그들의 박식하지만 허세없는 대화가 좋고, 진지한 열정이 좋고, 아름다운 꿈이 좋다.

사실 내가 딱히 무엇이 되지 않아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 계속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좋다.


우린 늦게까지 저녁을 먹고 김은 내일 비행기를 타야한다고 먼저 올라갔다.

정원에 나와 그녀만 남고, 선선한 바람이 분다.


-너 같다. 

그녀가 뜬금없이 그렇게 말한다.


-바람부는 거 말야. 너 같아.

소리를 해서인지 나는 누가 말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느껴질 때가 많은데,

오늘 그녀의 목소리는 좀 쓸쓸하게 들린다.


-내가 그런가.


-응, 너 그래. 

그녀는 담배를 한개피 꺼내며 말한다.


문득, 그녀가 담배를 태우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나의 기억은 다시

조선 호텔 201호의 마지막 밤으로 옮겨간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혜랑의 혼례동안 마치 호텔방에 나를 감금하듯

그렇게 처박혀 있었다. 술을 잔뜩 마시고, 자고,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가,

 TV를 좀 보다가, 괜히 거실과 침실 여기 저기에 있는 가구들 문을 다 열어보다가,

축음기에 이 레코오드판, 저 레코오드판을 걸어봤다가, 

혼자서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다가. 누워있다가. 

얼마나 시간이 가질 않든지…


자정이 되어서야 나는 호텔을 나서 합숙소로 갔다. 

떠들썩한 잔치가 끝난 후의 쥐죽은 듯이 고요한 합숙소.

나는 혜랑이 한동안 혼자 지내던 방으로 가 방문을 열었다.

깨끗이 잘 정돈된 방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녀가 쓰던 이부자리를 펴고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엎드렸다.


-잘 가, 혜랑아…


그날은 조선호텔 201호도, 매란 국극단도 얼마나 조용하던지,

세상에 꼭 나 혼자만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서 일, 특히 연습에 매진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 첫공연의 기쁜 소식이 찾아왔다. 

게다가 익명의 후원자가 큰 금액을 기부하여, 

우리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국극단 건물을 마련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꺼번에 경사가 겹쳤다며 더 이상 다른 일 없이 연습에만 매진해도 좋다는 말에 

다들 뛸듯이 기뻐했지. 


우린 대한극장에서 춘향전으로 첫 공연을 하게 되었고, 

나는 그중에서 방자 역을 맡게 되었다. 

게다가 국극단 이사를 하느라 우린 정신없는 몇 달을 보내고 

소복은 이사를 하면서 정식으로 연습생 단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나도 한동안 혜랑이 생각을 좀 덜하게 되었다. 

그렇게 잊혀지겠지, 하는 희망도 내 안에 자라는가 했다.

그리고 나는 어쨌거나 구두로 약속했던 집에 대한 계약을 마치고

국극단이 이사할 때 나도 이사를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국극단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잘 지냈어요? 문옥경씨.

그녀였다.

벌써 1년이 그렇게 흘렀나.

그녀를 보는 것이 웬지 반갑기도 하고, 새삼스럽기도 하였다.

좀 그립기도 하였나, 

모르겠다.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기에 내가 물었다.


-이번에도 조선 호텔에 묵나요?

-네, 아쉽게도 201호는 아니지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놀러 오실래요?

-아니오. 

내가 대답했다.

약간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내가 말했다.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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