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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ㄹㅈㄹ..당시 동남아와 조선이 교류가 어려웠던 이유...
태국 아유타야 왕국 국왕"야 저기 극동 지방에 조선이란 나라가 생겼다는데 한번 사신 좀 보내볼까?"조선 개국 1주년이 되던 1393년 6월,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의 사절단이 도착함장사도라는 사람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 었는데예물을 바쳤고, 조선에서도 멀리서 온 손님이라고 후하게 대접을 해주고 그래 12월에 예빈시(연회나 잔치등을 주관하는 부서)에서 일하는 소경 배후라는 사람을 회례사로 뽑아서 배웅해줌 여기에 진언상이라는 중국 화교 상인도 포함이 되어있었음그런데 이 사절단이 돌아가는 와중에 왜구들에게 털려버리면서겨우겨우 조선으로 돌아옴 이들은 조선왕에게 흑인 2명과 예물을 바치면서 배한척 달라고 부탁했고조선에선 이 부탁을 들어줌 이때 조선에서는 단장인 장사도와 화교출신 상인이었던 진언상에 벼슬을 수여하면서 위로해줌 여튼 이때 이들은 배를 얻어타서 아유타야 왕국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함태국왕: "어이고 고생들 많았다 다시 조선으로 답장을 보내자.."라면서 답장을 보냈는데이때 임득장이란 사람을 단장으로 삼아서 사신을 보냄 (여기에 진언상은 포함이 안됨)"히히 우리야"이 사신단도 왜구에게 또 털리고 납치를 당함이때 사신으로 보낸 조선인들중 배후는 난리통에 죽었고이자영이란 사람만이 가까스로 조선으로 탈출함 그리고 얼마 뒤 임득장과 일부 태국 사신도 일본에서 탈출해 조선에 도착했다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섬라곡과의 외교 기록은 실록에서 사라짐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1406년 8월에 진언상은 이번엔 조와국, 그러니까 자바섬의 사신이 되어서 조선을 방문하게 됨그런데 당시 자바섬의 지배자가 유명한 마자파힛 제국이었는데이게 마자파힛의 사신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자세하게는 모름 걍 조와국이라 실록에 적혀만 있어서여튼 121명의 인원을 데리고 오는데..."히히 또 우리야"왜구를 또 만나서 또 털림 15척의 배를 끌고 갑자기 나타나서 압도적 숫자 우위로 공격을 해대서 버틸수가 없었다함 전사자만 21, 납치된 사람이 60인이었고 40인만이 살아서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고, 화물도 죄다 약탈당한 채 자기가 탄 배만 건사했다고. 조선 조정에서 옷을 구해줘야 했을 정도라 하니 상당히 처참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임.이때 진언상이 정부에 2개의 글을 써서 올렸는데 첫 번째 보고: "영락 4년 5월 18일, 저희 류큐국 왕께서 '조선에 가서 특산물을 바치고 축하를 전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에 저희는 5월 22일에 배를 타고 출발하여 윤7월 초하루 미시에 조선의 전라도 진포 앞 군산도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구 배 15척을 만나 그날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초사흘 오시에 이르러 저희는 수적으로 열세여서 결국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류큐국 사람 21명이 목숨을 잃었고, 남녀 60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현재 살아남아 해안에 도착한 사람은 저 언상과 남녀 40명입니다. 저희가 가져온 조선에 바칠 특산물과 그 외 모든 물건들을 왜구들이 모두 약탈해 갔습니다. 지금 조선에서 옷과 양식을 주셔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저희 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믿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저희의 말만으로는 증명하기 어려우니, 조선에서 증거가 될 만한 답신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두 번째 보고:"영락 4년 5월 18일, 저희 류큐국 왕께서 '조선에 가서 특산물을 바치고 축하를 전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에 저희는 5월 22일에 새로 만든 2,200료 규모의 큰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윤7월 초하루, 조선 전라도 진포 앞 군산도 근처에 도착했을 때, 예기치 않게 왜구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배만 남았습니다. 지금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배를 다룰 뱃사람들이 왜구 때문에 대부분 죽거나 잡혀가서 배를 움직일 사람이 부족합니다. 저희 배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큰 바다에서 잘못될까 걱정입니다. 목숨이 중요하니, 저희가 가져온 큰 배를 조선에 바치고, 40척 규모의 작고 빠른 배로 바꿔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여튼 진짜 개털린 모양..여튼 진언상은 이런 내용의 글을 올렸고, 원하는 바를 얻었고 다음해에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떠남 하지만 진언상은 다시는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음 다만 6년뒤 진언상은 자신의 손자인 실숭을 포함한 사절단을 보내서 사정을 알렸는데그뒤 돌아가던 도중에 배가 침수 되어서, 일본 해안에 표류 했는데"ㅎㅇㅎㅇ"거기서 또 일본 도적떼를 만나서 다 털리고 말았다함"ㅉㅉ 내가 도와드리겠음"하지만 다행히도 일본 왕의 도움으로군함 1척과 예물을 얻어서 자바 섬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하고, 그 뒤로 자바섬의 사신이 다시 한번 되어서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하게 되었고본인은 오지 못했지만 사적으로나마 손자와 사절단을 보내서 예물을 바치고 나름 감사를 표한것이었음그리고 이후 한 달 뒤 진언상의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왜구의 포악성을 설명하며 호송을 요청했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해군력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 요청을 기각했으며 이것이 진언상에 대한 실록의 마지막 기록임진언상은 몇 안되는 조선과의 항해도중에 종 3번의 왜구들을 만난거임 우리야 뭐 역사적으로 대충 왜구가 많았다 뭐다 이런식으로 배웠고조선도 국제 무역이나 교류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다 치더라도 당시 진언상과 조선과의 기록을 봐도 우리 상상이상으로 얼마나 왜구들이 판을 쳤는지 알만한 상황임
작성자 : ㅇㅇ고정닉
아스날 구장의 역사
구단 최초 비서인 엘리야 왓킨스가 쓴 책에 따르면 구단 창단 후 최초의 경기는 Isle of Dogs라는 섬에 있는 땅에서 치뤄졌다고함. 이게 거의 오피셜인 분위기근데 이 책에 오류가 굉장히 많아서 사실인지는 모름.첫경기를 굳이 배타고 섬까지 가서 치뤘을까? 라는 의문과 증거 부족때문에 Plumstead common에서 첫 경기를 했다는 설이 조금 더 신빙성 있어보여서 둘 다 적어봄Isle of Dogs당시 울위치 아스날에서 배를 타고가야하는 위치. Plumstead common그냥 플럼스테드라는 지역에 있는 공터였음1886~1888년까지 홈구장으로 사용했음.엘리야 왓킨스에 따르면 주택의 뒷마당을 합친 느낌이였다고함.또한 주변이 도랑으로 둘러쌓여 있었다고 하는데 도랑이 아니라 열린 하수구 느낌으로 존나 더러웠다고함.대충 이런 뒷마당에쓰래기로 가득찬 도랑으로 둘러쌓여있던 느낌인듯1888년, 로컬팬들도 점차 생기고, 발전을 위해선 다른곳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 후, 약 1.6km 떨어진 Manor ground로 옮김.둘 다 같은 동네에 있는 땅이여서 크게 옮긴건 아님.여기서도 크게 발전한건 아니였음플럼스테드 커먼은 공유지여서 축구경기를 하는데 불편함이 있었음.하지만 매너그라운드는 사유지여서 편하게 이용 가능, 또한 골대 설치, 울타리 설치등 경기 진행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함. 그리고 당시 근처에 있는 star 라는 술집에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함.그런데 1890년, 땅 주인이 구단이 성장했다는 이유로 임대료를 2배나 더 달라고 했음. 그 당시 감당이 불가능했던 아스날은 800m정도 떨어진 Invicta ground로 옮겼음.현재 주택가로 개조되어서 이렇게 관중석만 조금 남아있음소규모 관중석과 울타리가 있어서 전보다는 훨씬 축구장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있었음.참고로 invicta는 라틴어로 “무패” 라는 뜻. 이때부터 근본 지리네그후 1891년 풋볼리그 세컨드 디비전(프로리그)에 합류하게되었음.인빅타 그라운드는 약 1000명정도 수용 가능했지만 풋볼리그는 최소 5000명 이상 수용 가능한 경기장이 있어야한다는 규정이 있었음.그래서 매너그라운드 주인과 협상 끝에 땅을 아예 매입하고 관중석과 시설을 확장했음.매너그라운드라고 불렸음.이제 정말 경기장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발전함.여기서 계속 지내다가 재정이 어려워진 아스날은 1910년 파산 직전까지 갔음. 근데 이때 헨리 노리스라는 부동산 부자가 나타나서 아스날을 인수함.참고로 헨리 노리스는 1차 세계대전 후 퍼스트 디비전이 20팀에서 22팀으로 늘어났을때 다소 억지로 토트넘을 제끼고 아스날이 1부리그에 참가하게 만든사람임ㅋㅋ나중에 이때 뇌물혐의로 축구계 퇴출당함노리스가 살짝 보니까 런던 중심에서도 멀고 교통이 ㅈㄴ 불편해서 관중석이 텅텅 빈걸 봄(평균관중 약 11,000명)그래서 런던 북부 이즐링턴으로 옮기기로 결정했고, 당시 £80,000를 들여서 땅을 매입하고 경기장을 지음. (그록3피셜 현재 가치 약 227억 700만원)1913년 당시 하이버리 모습1985년, 원래 6만명정도까지 수용이 가능했지만 힐스버러 참사에서 파생된 안전 규제로 약 3.8만명으로 줄어들었음. 그 후 수익 극대화, 현대화, 시설 개선등의 이유로 1990년대 뱅거와 이사회가 경기장 확장을 시키려했는데 불가능하다는것을 인지하고 근처에 있는 폐공장 부지인 Ashburton Grove를 인수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지었음.이때 1930년, 허버트 채프만이 하이버리 현대화의 일환으로 설치한 시계를 그대로 옮겨와서 남쪽 스탠드에 붙여놨음.아니 씨발 이거 말고도 존나 자세하게 처음부터 적어둔거 있었는데 사라짐 씨발련이 아 씨발 그래서 그중 일부인 시발 경기장만 다시 써봄 씨발 아
작성자 : 미켈아르테타아마트리아인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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