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사생활 심각히 침해했는지에 따라 몰래 녹음한 통화 내용이라도 증거 능력 여부가 갈릴 수 있다는 대법원 첫 판단이 나왔다.사생활 침해 소지가 작다면 증거로 인정할 수 있지만, 사생활이나 인격 이익 침해 여지가 지나치게 크다면 증거로 쓰일 수 없다는 취지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지난달 14일 위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 등 4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들은 2019년 3월 실시된 지역수협 조합장 선거에서 선거인들에게 금품을 건네고 법이 허용하지 않는 선거운동을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A씨 여자관계를 의심하던 그의 아내는 자동 녹음이 될 수 있도록 남편 몰래 휴대전화를 조작했는데, 여기에 남편의 조합장 ‘금품 살포’ 불법 선거 내용이 녹음됐다. 경찰은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A씨의 휴대전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녹음 파일을 알게 돼 증거물로 제출했다. A씨는 해당 녹음파일에 대해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통신비밀보호법상 불법감청에 해당되고, 증거로 사용됐을 때 침해되는 사생활의 비밀 등 사익 침해가 형사소송상 공익보다 크다는 이유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누구든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청취할 수 없고, 이를 위반했다면 재판이나 징계절차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돼 있다.
1심과 2심은 A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화 녹음에 수사기관이 개입하지 않았고, 금품 선거 규정에서 사건 녹음 파일의 증거가치가 높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1·2심 재판부는 이 녹음파일이 증거로 사용된다고 해도 사생활이 본질적으로 침해된다고 보기는 어렵고, 정당한 형벌권 실현이라는 공익이 개인 사생활 보호 보다 중요하다는 이유도 제시했다.
대법원은 1·2심이 인정한 녹음파일의 증거능력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이 녹음파일의 경우 사생활 침해 여지가 크지는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법원은 아내가 통화 내용을 녹음 되도록만 했을 뿐 제3자에게 유출한 적이 없는 점, ‘돈 선거’는 중대 범죄에 해당하는 점 등을 언급하며 "녹음 파일이 A씨의 사생활을 침해했더라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다만 대법원은 “증거수집 절차가 개인의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해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한도를 벗어난 것이라면, 곧바로 형사소송에서 진실발견이라는 공익이 개인의 인격적 이익 등 보호이익보다 우월한 것으로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통화 녹음파일이 증거능력이 인정된다고 해도 녹음 경위, 녹음 내용 등에 비추어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한 경우 증거능력이 부정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면서 “하지만 이 사건에선 ‘중대한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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