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9일 서울 용산의 한 사무실에서 최원일 천안함장이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34년 군 생활을 마치고 최근 전역한 최 함장은 "천안함 승조원들이 패잔병 취급을 받지 않도록 명예회복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련성 기자
안녕하세요 오는 26일은 천안함 폭침사건 11주기를 맞는 ‘제6회 서해수호의 날’인데요, 이를 앞두고 지난 19일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함장이었던 최원일(53·해사 45기) 예비역 해군 대령을 1시간 반 가량 인터뷰했습니다.
지난달 28일 전역해 34년간의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그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구 사양해왔는데요, 그동안 저도 해군 공보계통을 통해 몇차례 그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었지만 정중하게(?) 거절당하곤 했었지요.
‘최원일’이란 이름은 해군 수병(병사) 출신인 아버지가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고 손원일 제독(1909~1980)과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며 지은 것이라는데요, 한때 대양해군의 지휘관을 꿈꿨던 그에게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패장’ 멍에가 씌워졌고, 인사 때마다 진급에 탈락하다 군 생활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이 됐습니다. 오늘은 최원일 함장을 인터뷰하며 몇가지 느낀 점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천안함 사건 당시 포술장 너무 당황해 ‘좌초’ 최초 보고”
그와 인터뷰하면서 대략 세가지 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우선 천안함 좌초설의 발단이 됐던 사안에 대한 ‘진상’을 공개하며 천안함 음모론자들의 의혹을 정면 반박한 점입니다. 당시 천안함 포술장이 북 어뢰공격을 받은지 6분 뒤인 3월26일 밤 9시28분쯤 2함대 상황실에 ‘좌초’라고 보고해 좌초설의 빌미가 됐는데요, 최 함장은 이에 대해 “뒤에 포술장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너무 당황해 ‘침몰'’빨리 구조해달라'는 말이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3월19일 서울 용산의 한 사무실에서 최원일 천안함장이 사건 당시 승조원 명단을 가리키며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장련성 기자
이른바 ‘멘붕’이 와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는 얘깁니다. 당시 전쟁시도 아닌 평시에 적 잠수함정이 우리 영해에 침투해 실제로 어뢰 공격을 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사건 직후 천안함 장병들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은 2함대 상황실에서조차 처음엔 ‘장난치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니까요.
최함장은 인터뷰에서 “함장실에서 나오니 당직사관, 작전관, 부함장 등 장교들 모두 ‘어뢰 같다’고 입을 모았다”며 “나도 분명히 수중 무기라고 생각했고, 백령도 기지국에 ‘어뢰’라고 얘기했던 것이 녹음돼 언론에 보도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좌초였다면 누구 하나 양심 선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겠나”며 “두 사람 중 하나가 잘못해도 학교 폭력으로 논란이 되는 시대인데 비밀이 있을 수가 있나”고 반문했습니다.
◇”천안함 사건은 경계 실패 아닌 정보, 작전, 정부의 실패”
두번째는 한동안 군 안팎에서 제기돼온 “천안함 사건도 결국 경계실패 아니냐”는 질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최함장은 단호한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잠을 잤거나 근무에 태만했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억울합니다. 몇 번을 복기해봤지만 당시 배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게 승조원들이 자신들이 살려고 했던 게 아니라 더 다친 사람들을 챙긴 것입니다. 이함(籬艦)할 때도 이병 먼저, 아픈 사람 먼저 옮긴 다음에야 자신들이 내리더군요. 천안함 폭침은 정보의 실패고, 작전의 실패고, 정부 정책의 실패였습니다.”
여기서 “천안함 폭침은 정보의 실패고, 작전의 실패고, 정부 정책(대북정책)의 실패였다”는 지적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사건 당시 북 잠수함정의 출항에 따른 대잠 경계령이 내려졌었는데 천안함이 대잠 경계를 소홀히 해 공격을 당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 최함장은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당시 북 연어급 잠수정이 서해 모기지를 출항한 것이 포착돼 대잠 경계령이 내려졌었던 건 맞지만 뒤에 곧 북 잠수정이 서해상에서 발견됐다며 경계령을 해제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연어급 잠수정 1척은 백령도를 우회해 사건 해역에 침투, 해저에 매복하고 기다리다가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보의 실패이고 경비구역에서 기만 당한 작전의 실패라는 것입니다.
◇”생존장병 58명 중 12명만 상이 유공자 인정”
정부의 실패는 당시 남북 정상회담 물밑 접촉, 사건 초기 청와대의 지나치리만큼 ‘신중했던’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최함장은 “초기 천안함 보도가 나왔을 때 청와대 관계자가 ‘북한 가능성 매우 낮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라며 “당시 정부는 북한과 막후 접촉해 정상회담을 하려 했었다”고 했습니다. 북한과의 막후 접촉은 사건 뒤에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는 또 “당시 대통령은 백령도에 와서도 ‘내가 배를 만들어 봐서 아는데 부러질 수도 있다’고 했다”며 “국방장관이 국회에서 어뢰 피격 가능성을 언급하니까 바로 쪽지가 와 ‘VIP가 불편해 하신다’고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최함장은 “사건 초기 무기고 폭발 등 배에서의 ‘반란’ 가능성부터 조사를 받았다”며 억울해 했습니다.
2010년 4월 7일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침몰사건과 관련한 각종 의문점에 대해 밝히고 있다. 이날 실종된 동료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생존 장병들이 환자복을 입고 회견에 임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조선일보 DB
세번째는 천안함 생존장병들에 대한 처우 문제입니다. 최함장은 “군에서조차 한동안 우리들을 회피했다. 천안함 출신이 배를 타면 ‘재수없다’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생존 장병 상이(傷痍)로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은 건 지난 11년 동안 34명 중 12명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진급 불이익 받을까봐 정신과 진료도 못받아”
최함장은 “그렇게 큰 사고를 당했는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군 특성상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정신과 진료도 받지 못했는데 군에서는 병원 진료기록이 없으니 유공자 신청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어서 이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최함장 말 중 가슴 아팠던 대목중인 하나는 이런 얘기였습니다. “생존 장병들을 보면 이상한 습관 같은 게 있습니다. 식당에 가면 구석에 앉으려 하거나 작은 일에도 쉽게 주눅이 듭니다. 우리는 방이 있는 식당에서만 모임을 가집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희는 패잔병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불의의 일격을 당했는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패잔병으로 남는다는 건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전준영 천안함생존장병전우회장이 쓴 ‘살아남은 자의 눈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사건 당시 최고참 병장이었는데 동기 4명이 모두 전사하고 혼자만 살아남았습니다. 전역후 한때 심한 PTSD에 시달리다가 이를 극복하고 천안함 생존장병 처우개선과 명예회복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서 생존 장병들이 심각한 후유증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고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우리 언론과 국민, 정치권이 이에 무관심했었는지 깊은 반성을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천안함장 최원일'로 남을 것”
최함장은 인터뷰 말미에 “저는 13년째 천안함장입니다. 해군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함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천안함장 최원일’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전사자와 생존 장병들의 부모,자녀들이 천안함 사건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정치, 보수,진보를 떠나 그의 꿈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성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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