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우린 너무 일찍 태어났어. 혹은 너무 늦게.
우리는 별이야, 그렇지만 걸려있을 하늘이 없어. 그러면 별은 별똥별이 되어 떨어지는 거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떨어지는 거야.
그리고 그 별의 무덤에서 새로운 별이 태어나겠지.
우린 거기서 죽는 거야
너도, 나도. 스승님도, 단장님도…정년이도.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우리의 피가 흐르는 아이가 태어나겠지. 우리는 알 수 없는.
아니 아이가 아니라 아예 그들의 시대가 올 거야.
그 때는 모든 별이 하늘에서 빛나는 때가 오겠지.
그 전까지 우리는 그냥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어
아무도 보지 않는 춤을 출 수 밖에 없어.
1. 은재
은재는 기어이 일본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럼 너는 엄마랑 살 수 없어.
은재는 괜찮다고 했다. 아마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고른 단어가 괜찮다인 것 같았다.
나는 은재가 선택하는 것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은재가 내 인생의 전부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을 아이에게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어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은재는 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엄마는 나 싫어하잖아. 엄마는 내가 없기를 바랐잖아. 그래서 엄마는 내가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했잖아.
아이는 크면서 자주 그렇게 말했다. 손 끝이 부르르 떨렸지만, 어쩌겠는가 다 나의 죗값인 것을.
몇 년 전에, 내 마음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을 때 은재 아빠가 나를 찾아왔었다.
나는 꽤 오랫동안 그에게 돈을 보내고 있었다. 노름으로 큰 빚을 져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도 들었고, 혹시 은재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웠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에 대한 옛정이란게 있었는지…그건 잘 모르겠다. 아마 오누이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어디라고 찾아와. 왜, 또 돈이 필요해?
-혜랑아…미안해. 그게…여기서는 쉽지가 않아. 그래서 나 이참에 일본에 가려고. 거기 가면 돈벌 수 있는 길이 많데.
-나한테 그 많은 돈을 받고도 해결이 안 되던게, 일본에 간다고 해결이 되니?
-돈 이라니?
그의 순박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짚히는 게 있었다 하지만…
-돈 받은 적 없어? 내가 공연 끝날 때마다 고 부장한테…
-무슨 소리야? 나 형님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처음에 빚졌을 때 한 번, 그때 돈 좀 빌려볼까 하고 찾아 갔다가 문전박대 당한 게 다고…그 이후로는 한번도 만난 적 없어.
아…그 때였구나. 그래, 내가 그딴 썩어빠진 놈의 말을 믿고 선뜻 그 큰 돈을 그에게 보내기 시작했던 것도, 꼬박꼬박 입금증이라고 내밀던 것 믿은 내가 잘못이지.
쓴웃음이 났다. 그 새끼가 다 가로챘구나.
-저기…….혜랑아. 아니, 은재 엄마. 나랑 일본에 같이 가자. 나 열심히 살게.
거기 사람 말이 5년만 열심히 일하면 빚도 다 갚고 그 돈 가지고 한국에 와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을 수 있데. 응?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그에 대한 신뢰도 없었고, 낯선 곳에서 은재를 키울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 고생을 왜 나랑 은재가 해야 하니? 그냥 우리 원래 살던대로 모르던 사이로 지내자, 응?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니가 일본 가서 뭐를 하든, 한국에서 노름빚으로 죽든, 이제 나는 알바가 아니야.
그는 내가 매몰차게 대할 때마다 우물쭈물하며 두 번을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좀 더 신뢰가 가는 말과 행동을 보였더라면 나는 그를 따라 떠났을까?
은재 핑계를 대서라도 몇 번 더 붙잡았으면 못이긴 척 그를 따랐을까? 아니 어쩌면…어쩌면 신뢰를 주지 않았던 것은 나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를 믿으면 그를 따라 나서야 할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를 따를 수 없었기에.
그는 좀 무능력하긴 해도, 사실 착한 남자였다. 그리고 가엾은 사람이었다.
기방 앞에 갓난 아이로 버려진 것을 경리부 부장이 데려다가 머슴 삼겠다고 키운 것이다.
그의 집에서 먹고 자라다가 10살도 채 안된 나이에 기방 경리부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기방에서 자랐다.
천성이 온순하고 싹싹한 사람이라 기생과 관리부 남자 직원들한테 귀여움도 많이 받았다.
그런 곳에서 그렇게 험하게 자라면서도 사람이 기본적으로 순박한 데가 있었다.
처음 내가 기방에 팔려갔을 때, 거기서 가장 어린 아이가 나였고, 그리고 기방 주방에 허드렛일을 하는 언니가 몇 있었다.
기생 언니들은 나를 보고
-얘는 딱 관상이 이쪽이야.
라고 말했는데 당시에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는 주방 쪽이 아니라 기생쪽이라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기방에 데려갔을 때도 그 비슷한 말을 하였다.
-이 정도 반반한 얼굴이면 값을 제대로 쳐 줘야지.
그 뒤로 나는 그 반반한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거나 그놈의 ‘반반한’ 얼굴에 반해서인지 그는 처음부터 내게 잘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기댈 곳이 없는 그곳에서 그는 나에게 유일하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도 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기방 앞에 버려진 남자와 기방에 팔려간 여자. 우린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감정 전에 연민 같은 게 있었다. 나는 그가 불쌍했다. 마치 나처럼. 그리고 나에게 다정한 그가 나에게는 유일한 쉴 곳이었다.
그게 사랑일까? 그건 아니었다. 아마 그 사람처럼 내게 다정한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란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어떤 아이, 그 아이를 만나고서부터 나는 사람을 향하는 아주 다른 방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불쌍하거나, 나 같다거나 이런 생각 자체가 사라지는,
아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를지라도
그냥 내 존재가 온통 그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모두,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그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그 아이를 통해 알게 되었고
은재 아빠는 내게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엄마, 내 말 듣고 있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은재가 나를 부르고 있다.
항상 기억은 그곳까지 달려간다. 은재한테만 집중하려 해도, 국극단 후배들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려 해도
일단 생각에 틈이 생기면 내 기억은 언제나 그 순간까지 달려간다.
그리고 기어이, 그 아이 앞에 서고야 만다.
-응? 미안해, 엄마가 잠시 딴 생각했네.
-엄마. 난 엄마랑 좀 떨어져서 지내도 괜찮은데, 엄마는 괜찮아? 지금이라도 말해. 안 괜찮으면. 그러면 내가 생각을 다르게 해볼 수도 있어.
사실 모르겠다. 내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나는 누군가 늘 내게 그런걸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지금 은재를 위해서, 그 아이를 일본에 보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있어봤자 아버지 없는 아이, 기생 출신의 엄마를 가진, 쇠락한 국극 배우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은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영리한 아이였다. 뭐든지 배움이 빨랐고, 총명했다. 기회를 주고 싶었다.
은재 아빠가 다시 연락을 한 것은 지난 겨울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5년만인가…그가 약속했던 딱 그 기간만에
그는 몰라보게 밝은 얼굴로 은재와 내 선물을 한아름 사가지고 우리를 찾아왔다.
경리부 아저씨들이랑 어울리면서 노름판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다가 노름에 빠졌던 그는 사실 그런 일들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혼 초에 나랑 은재 호강시켜 주겠다고 노름에 손을 대는 과정에서 경리부 재정을 유용했고 말도 안되는 빚을 진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런 사람들과 교제도 없고, 일본에서 정말 고독하게 일만 했는지 그의 얼굴은 다소 수척해졌고, 손은 두텁게 변해있었다.
-이제 아예 들어온 거야?
-아니, 저…그게..
우물쭈물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뭔가 미안한 일이 생기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말해 봐. 뭔데.
-나 결혼하려고.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아직 젊고,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도 그의 삶을 살아야지.
-일본에서 일하다가 만난 사람인데…식구들이 다 일본에 살고. 성실하고 착한 여자야.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 하는 거야?
내용인즉슨 은재를 키우기가 어려우면 자기한테 보내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이제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리고 아내 될 사람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은재만큼은 잘 공부시켜서 ‘우리’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약간의 배신감과 화와 슬픔 같은 것이 솟구쳤지만 그의 눈빛은 진실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의 말, ‘우리’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 앞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저 혜랑아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보내도 괜찮아.
-은재한테 물어볼게. 은재가 간다고 하면 가는 거야. 은재가 싫다고 하면 안 가는 거고.
-그래, 그럴래? 있잖아 혜랑아 자주는 아니지만 1년에 꼭 한두번은 데리고 올게. 네가 와도 되고…
-됐어. 무슨 재벌이나 됐니? 니 앞가림이나 해. 은재가 알아서 편지할거야.
그리고 오늘이 되었다. 이미 은재를 데리고 가려고 은재 아빠가 그의 아내 될 사람과 문 밖에 서 있다.
이번 기회에 한국에 들어와 부모도 없는 은재 아빠지만 자식처럼 거둬준 양부모에게 인사를 할 참이라고 했다.
그의 아내를 보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생활력이 있고 단단해 보이지만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은재를 안정되게 키워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가 먼저 말을 건네기 전에 가볍게 목례를 하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은재 아빠가 은재 짐을 가지러 간 사이에 내게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은재 엄마가 되려는 건 아니예요. 하지만 좋은 어른으로 잘 해 보고 싶어요. 언제든지 은재 보러 오세요. 방학 때는 한국에 꼭 보낼게요.
그 여자 앞에서 나는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내 삶에 그런 어른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였을까.
나는 갑자기 은재의 엄마라는 이름만 가진 사람이고 정말의 엄마는 이 사람이라서
이제 진짜 엄마가 아이를 찾으러 온 것일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쓸쓸한 기분과 약간의 모멸감이 들었지만, 내가 그런 엄마였던 것에 대해서 난 더 이상 변명을 하거나 탓을 하고싶지 않다.
인생에서 어리석은 때가 찾아왔었는데, 그게 하필 너를 가졌을 때 그리고 네가 어렸을 때였어. 은재야.
하지만 나는 한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그 말을 평생에 언제 한번 은재에게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엄마. 혼자 술 마시지 말고. 밥 꼭 챙겨 먹어. 그리고 내가 초록이 이모한테 일주일에 한번은 엄마한테 오라고 했어.
은재가 나를 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나는 눈물을 참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재를 떠나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심지어 은재도 아닌.
그 아이란 것에 헛웃음이 났다.
-나 오늘도 망가지지 않으려고, 자식까지 떠나보냈다. 이제 더 뭘 내놓아야 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이젠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더 이상 어떻게 갚아야할지도 모르겠어.
난 네게 여전히 좋지 않은 사람이니?
그 아이,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녀.
옥경이 나를 떠난 것도 벌써 5년이 지났다.
사실 은재 아빠가 일본에 가자고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옥경이 바보와 공주 초연을 이후로 홀연히 영화판으로 사라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때, 어떻게 은재에게 밥을 먹였는지, 어떻게 옷을 입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은재를 보내고 대문을 들어선 순간, 지난 5년간 꾹 마음에 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솟아오르며 마치도 파도처럼 나를 덮쳐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그냥 5년동안 미친듯이 은재만 보고 살았고, 그동안 국극배우랍시고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한 것,
그리고 옥경이 떠나고 나서 한동안 아이에게 보였던 못난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서, 나는 정말 평생을 은재 엄마로만 살겠노라 다짐했다.
그게 은재 앞에 있는 동안은 가능했다. 그리고 국극단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며 어느 정도 벌이도 할 수 있었다.
문득 생각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을 인지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냥 은재 엄마로 살자, 하는 다짐이 그 생각을 어느 정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항상 기억의 끝은 그 아이.
기방에서 고단하고 외롭게 지내던 내게 노래를 불러주던 아이.
어린 문옥경이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무성하게 자라난 덩굴처럼, 기억의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늘 은재 엄마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자는 나의 결심이 그 줄기를 다 잘라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은재를 보내고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것이 온 집을 휘감고 자라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느껴졌다.
이곳은, 옥경의 집이다. 우리가 함께 했던.
우리가 가장 젊고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했던 곳이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리고 가장 아름다웠던 옥경이 있는 곳이다.
그가 어디를 걸었고 어디에 앉아있었는지, 어떻게 서서 어떻게 말하고 웃고,
어떻게 은재를 안고 어떤 목소리로 은재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리고…
어떻게 내 이름을 불렀는지.
이 공간에 피할 수 없을만큼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이 쌓여 있다.
그 어떤 지점에서도 그를 떠올리지 않고는 이 공간에 있을 수 없다.
문득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녀는 나를 떠났지만, 나는 한번도 옥경을 떠나 보낸 적이 없다.
이제 나를 잡아줄 은재도 없고, 몰두하며 잊어버릴 국극도 없는데.
이 집의 모든 장소에 그가 있다.
-혜랑아
그가 나를 다정하게 불렀다가.
이내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뒤돌아 서서 나를 떠난다.
나는 참았던 눈물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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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잘 지내냐
블레도 망하고 정년이는 OTT 리스트 중 하나를 차지하는 드라마가 되었다만
여전히 마음 속에서 잘 안 잊혀지네
문옥경 찾아서 한번 가보려고 이런거 써본다
제목도 못 정했고 얼마나 어떻게 갈지 모르겠지만
멜로없어 미안타
드라마에 누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으니 그저 재미로 관대하게 봐다오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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