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 김 씹스압. 정성 글이니 걍 참고하기 바람.
중국 러시아에 대한 관점도 그렇고 나치에 대한 관점도 영미권 주류 관점에서 탈피해야 된다고 본다.
경기침체와 미국 연준
대공황뿐만 아니라 미국을 주기적으로 엄습한 경제위기의 본질은 과잉경쟁이나 과잉생산이 아니라 과잉투기였다. 과잉투기의 본산은 은행투기였고 은행의 투기를 방치한 건 연준이었다. 연준은 투기를 방치한 것을 넘어 투기의 앞잡이였다. 1913년 미국 연준이 탄생했는데 이름만 보면 국가기관처럼 보이고 실제로 미국의 통화공급과 금리조절로 중앙은행 역할을 맡았고 지금도 그렇지만 민간은행들이 지분을 가진 민간은행이다. 연준은 주주들에게 매년 배당금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국고로 귀속시킨다. 은행들에게만 돈을 빌려주지 일반 투자자에게 직접 돈을 빌려주진 않는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안 그랬다. 수익을 주주들이 독차지했고 주식중개인에게 직접 돈을 빌려줬다. 연준은 19세기 후반 미국 경제를 주기적으로 강타한 금융위기의 재발을 막는다는 핑계로 만들어졌지만 ‘지킬 섬의 괴물’을 쓴 에드워드 그리핀에 따르면 연준 설립을 주도했던 미국 동부의 은행가들이 정말로 걱정한 것은 자신들의 영향력 감소였다. 1910년 당시 미국 남부와 서부에서는 지역은행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지역은행은 불과 10년 전보다 2만 개로 증가했다. 지역은행의 비중은 1896년 예금 총액의 54%에서 1913년 57%로 늘었다. 대은행들의 입장에서 더욱 우려인 것은 은행에서 돈을 안 빌리고 이익금으로 재투자하는 기업이 증가하는 현실이었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 기업의 성장 동력 중 70%는 은행이 아니라 자체 조달한 자본에서 나왔다. 정부도 금을 비축하면서도 빚을 꾸준히 줄여나갔다. 은행들은 기업과 정부의 은행의존도가 낮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기업과 정부가 은행에 의존하도록 만들려면 아껴쓰는 쪽보다 빌려쓰는 쪽이 낫다는 생각을 하도록 이자를 낮춰야 했다. 그래야 기업과 정부를 빚더미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없고 경쟁은행이 많아서 이자가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에서는 이자를 일률적으로 낮추기가 쉽지 않다. 은행들이 연준을 만든 중요한 의도중 하나는 돈을 펑펑 풀어서 기업과 정부를 다시 채무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대공황은 자연스런 그 결과였다.
군수산업으로 부활하는 미국 경제
미국 실업률이 정부의 과감한 재정지출로 내려가던 1937년부터 다시 상승한 바 있다. 실업률이 다시 상승한 이유는 기업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가격담합으로 물가가 폭등해서 소비자의 소비력이 감소한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소비력이 감소한 또다른 이유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부가 방대한 재정지출을 뒷받침하느라 세금을 크게 인상해서였다. 소득세와 법인세같은 직접세의 최고세율도 물론 높였고 유류세나 전기세같은 간접세도 크게 높였다. 루즈벨트 정부에서 늘어난 세금은 직접세보다 간접세가 액수로 따졌을 때 더 많았다. 간접세는 소득과 무관하게 모두 동일하게 부담하므로 간접세 증가는 저소득자에게 불리하다. 고소득자는 세금인하한다고 해서 소비를 확 늘리지 않는다. 어차피 필요한 지출은 이미 하고 있었으니 저축만 늘어날 수 있다.
저축증가는 경기회복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고소득자는 감세로 수입이 늘었다고 해서 투자를 확 늘리지도 않는다. 고소득자에 대한 감세가 투자와 경기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저소득자의 소비력이 늘어났을 때뿐이다. 그런데 고소득자에게 감세하면 정부는 그만큼 다른 부문에서 지출을 줄여야되니 저소득자의 소비력이 늘 수가 없다. 반면에 저소득자는 세금부담이 줄면 소비를 바로 늘리는 편이다. 부자들은 얼마든 살 수 있는 물품을 저소득자는 돈이 없어서 못 사던 것을 바로 사는 것이다. 빈부격차는 늘어나서 서민은 힘든데 부자들의 돈은 쓸 곳이 없어 고여있는 것이다. 저소득자의 소비증가로 인한 수요증대는 경기회복으로 이어지고 경기회복은 일자리를 늘린다. 루즈벨트 정부가 간접세를 크게 늘린 것은 결국 경기회복에 악영향을 미쳤다.
루즈벨트가 취임하기 전이었던 32년도 1138만명이던 실업자는 37년 6월에 446만까지 감소했다. 그 뒤로 실업률이 급증해서 37년 11월에 700만으로 증가했다. 38년 1월 내부보고서에서는 실업자를 1000만명으로 추산했고 조만간 118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전임 정부의 최고 실업자 수를 능가했다. 실업률이 다시 오르면서 루즈벨트의 입에서 전쟁을 암시하는 발언이 나왔다. 원래 미국에서는 1차대전 때처럼 다시 전쟁이 발생해도 미국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반전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미국 해병대 사령관 출신이며 미국이 벌인 침략전쟁에 앞장섰던 스메들리 버틀러는 자신이 자본가의 개 노릇을 했음을 깨닫고 ‘전쟁은 사기다’라는 글도 쓰고 전국적인 반전 연설을 할 정도였다. 루즈벨트도 1936년 대통령 재선 유세기간 동안 미국은 절대 유럽 전쟁에 다시 끼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압승을 했다.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에 미국이 참전한 원인이 영국에 빌려준 거액의 전쟁빚을 안전하게 돌려받으려는 은행들의 압력 때문이었음을 규명하려고 조사위원회를 만든 상원의원들에게 미국의 대외 전쟁개입을 불허하는 중립법을 제안하고 1935년 말에 통과시킨 주역도 루즈벨트였다. 1936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부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루즈벨트는 바로 중립법을 적용해서 불개입 원칙을 지켰다. 같은 해 스페인 내전 때도 개입 안하도록 중립법 개정을 의회에 요구했다. 그런데 미국이 다시 불황으로 확실히 진입한 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공했을 때는 선전포고가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일본과 중국 모두에게 무기를 판매했다. 37년 10월의 연설에서 루즈벨트는 무법이라는 전염병이 퍼진다면서 미국은 개입의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조치를 하겠지만 확신과 안보가 깨진 무질서한 세계에서 완벽한 보호는 있을 수 없다며 전쟁을 암시하는 듯한 충격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적자재정을 감수한 과감한 지출에도 실업률이 다시 급증해서 의기소침했던 루즈벨트에게 다시 자신감을 준 것은 하버드대학의 앨빈 핸슨을 필두로 하는 일군의 소장 경제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미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인구증가, 서부개척, 신기술 혁명이었지만 이제는 이 셋 모두 끝나서 더이상 성장동력을 잃었고 민간부문도 이를 알기에 투자를 꺼리는 것이므로 이럴 때는 공공부문이 더 적극 투자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미국 국내에서 이뤄지는 공공시설 건설은 지방정부에서 유지비 부담을 이유로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마침 유럽과 아시아에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루즈벨트가 착안한 것은 군수산업이었다. 38년부터 루즈벨트 정부는 군수산업에 거액을 쏟았고 실업률은 다시 내려갔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아무 존재도 아니고 평범한 일반인이었을 때, 즉 1차대전 종료 직후부터 사실 2차대전은 예견되어 있었고 독일 민중들은 연합국의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독일 민족이 말살에 처해 있는 상황에 분노해 복수를 부르짖고 있었으며 대전쟁을 예견하는 학자들,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연합해야 한다는 학자들도 이미 있었다. 1차대전을 겪고 경제가 멸망 수준으로 파탄났음에도 독일이 부활한 근본 원인은 미국 영국이 프랑스 견제를 위해 독일의 회생불씨를 남겨두었기 때문인데 독일의 산업시설은 멀쩡했었다.
독일 경제부흥과 실업률 감소
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으로 유럽에서 군수물자 수요가 급증하면서 미국 경제는 호황을 맞이했다. 미국 대기업들의 나치독일 후원 및 돈벌이에 관련해서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참고하기 바란다. 미국은 일본에 석유금수조치를 함으로써 사실상 미국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 없었고 일본군은 항공기도 못 굴리고 전함도 못 띄우게 하는 석유금수조치로 나라가 마비될 수준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제재로 자원부족이어서 동남아 자원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걸림돌이었던 진주만의 미 해군을 박살내기 위해 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에 직접 뛰어들면서 미국 실업률은 더욱 하락했다. 미국을 1929년 대공황의 늪에서 구한 것은 사실상 뉴딜정책이 아니라 전쟁준비였다. 뉴딜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나온 대대적인 전쟁 관련 투자가 미국을 뉴딜을 루즈벨트를 구한 셈이었다.
루즈벨트는 1933년 3월 4일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히틀러는 그보다 한달 앞서 1월 30일 독일 수상이 되었다. 독일 경제는 1920년대에 미국에서 투자되는 달러에 기대어 공장을 가동해서 상품을 수출하면서 전쟁빚을 갚아왔지만 29년 미국발 대공황으로 자본이 독일 밖으로 유출되자 치명타를 입었다. 히틀러가 취임했을 때 독일 실업자는 600만이 넘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데 히틀러 정부가 집권하면서 독일 실업자 수는 급감했다. 무너진 인프라 복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히틀러는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폭스바겐(국민차라는 의미)을 보고 만족했다. 33년 1월부터 35년 7월까지 독일의 취업자는 1170만에서 1690만으로 증가했다. 안정된 생활급을 주는 5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나치당의 독일경제는 전쟁준비를 위한 군수산업 투자가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나치독일은 집권 초반 폴란드가 독일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여도 아무 대응을 못할만큼 군사력이 약했다. 그렇게 군사력이 나약했는데도 1935년까지 독일의 국방비는 국내총생산의 4% 수준이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국방비는 8% 소련은 9%였다. 나치당은 집권하자마자 줄곧 다른 열강들에게 군비축소를 요구했지만 묵살당하면서 위협을 느끼고 뒤늦게 재무장에 나섰지만 독일 재무장 본격화 이전에 독일의 실업률은 이미 낮아진 상태였다.
히틀러 정부가 독일 실업률을 낮춘 방법은 루즈벨트가 했던 것과 비슷하다. 투자를 민간보다 국가가 적극 주도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나중에 실업률이 다시 급증했지만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엇다. 루즈벨트 정부는 세금을 올리고 국채를 찍어서 돈을 마련했다. 세금이 오르면 소비력이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 소비력이 줄어들면 기업은 여유자금이 있어도 위험부담이 큰 생산부문에 투자하기보다 안전한 국채를 사서 이자수입을 얻는 데 만족한다. 민간부문의 투자는 점점 줄어든다.
증세와 긴축 회피
히틀러 정부는 당장은 세금을 올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이었던 1928년만 해도 2%대의 지지도였던 독일 나치당은 32년과 33년에 각각 33%와 44%가 넘는 득표율로 정권을 잡았다. 대공황으로 인해 생긴 수많은 실업자를 선동해서가 아니었다.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자들은 나치당보다 독일 공산당이나 사민당을 더 많이 지지했다. 선거에서 나치당을 지지한 사람들은 중하류층 이상의 유권자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대공황 이후 증세와 긴축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하려고 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반감이 심해서였다. 1차대전 종전 후 연합국에 의해 수립된 ‘독일 바이마르 체제’는 헌법이 아름다운 허울만 민주주의 정부였으며 정치 혼란으로 가득한 무질서 수준이었고 국민들의 여론은 황제가 통치하던 제정 시절로 돌아가자는 쪽이 강했다. 대공황이 닥치자 독일의 브뤼닝 민주정부는 보건복지예산, 교육예산, 주택예산을 각각 14%, 33%, 38%나 삭감했다. 1920년대 말까지도 계속 하락하던 사망률도 1932년에 다시 상승했다. 사망률이 다시 오를 정도였으니 민주정부에 대한 불만은 폭발하고 있었다. 1918년~1933년까지 연합국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독일 민주정부는 수많은 총리가 수시로 교체되며 국정마비 상태였다. 인기있던 나치당과 히틀러를 이용해먹어 정권을 유지하려던 세력은 오히려 몰락했다. 히틀러 정부는 당장 증세도 긴축도 피해야 했다. 그 방법은 돈을 찍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돈풀기는 무책임한 국가로 낙인 찍힐 수가 있다. 1차대전 직후 경험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의 악몽이 있었다. 히틀러 정부는 간접적 방식으로 돈을 찍었다. 정부가 발주한 사업을 시행하는 사업자에게 노동창출증이라는 어음을 지급했다. 어음은 나중에 현금으로 갚겠다는 약속이다. 노동창출증의 만기는 3개월이었지만 20번까지 연장가능했다. 당장 돈없는 사업자는 노동창출증을 만기가 되기 전에 은행에 갖고가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물론 은행은 만기가 되기 전에 어음을 현금화해주는 것이었으니 액면가보다 돈을 깎아서 지급했다. 이걸 할인이라고 한다. 은행이 노동창출증을 받고 사업자에게 현금을 내준 것은 은행이 다시 이 노동창출증을 중앙은행에 제시하면 중앙은행에서 현금을 지급해주어서였다. 중앙은행이 은행으로부터 어음같은 증권을 받고 대신에 현금을 지급하는 것을 재할인이라고 한다. 결국 히틀러 정부가 발행한 노동창출증이 유통될 수 있었던 건 중앙은행이 지급보증을 해줘서였고 이건 결국 정부가 노동창출증이라는 어음을 필요에 따라 발행한 만큼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었다는 뜻이다.
발행한 어음이 한꺼번에 몰리면 중앙은행이 어음을 결제하려고 돈을 찍어낸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티나니까 이목이 쏠려 중앙은행으로서는 부담이다. 그런데 은행들은 사업자에게 할인을 해서 현금을 건네주고 넘겨받은 노동창출증을 바로 중앙은행에 가져가서 재할인을 통해 현금화하지 않고 그냥 갖고있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창출증에 4%의 이자가 붙어서였다. 은행 입장에서는 노동창출증이라는 어음이 투자대상으로서도 요긴했다. 대공황의 여파로 많은 군소 독일은행이 파산했지만 대형은행들은 파산한 은행, 기업의 주식과 부동산을 똥값에 매수해서 순자산이 더 불어났다. 투자대상이 마땅치 않았을 뿐이다. 노동창출증을 바탕으로 정부가 발주한 사업을 시행하게 된 기업은 고용을 늘렸고 새로 일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소비했고 세금을 냈다. 기업이 내는 법인세, 취업자가 내는 소득세가 늘어나고 실업률 감소로 실업수당 지급액이 줄어드니 정부는 재정여력이 생겼고 기왕에 발행한 어음을 갚아가기 시작했다. 민간부문에서도 소비가 늘고 따라서 수요가 늘고 수요가 늘어서 기업은 투자를 늘렸다. 은행들도 잠자던 돈을 기업에 빌려주기 시작했다. 국가가 중앙은행의 도움을 얻어 먼저 당겨 쓴 돈은 마중물 노릇을 하면서 나치독일의 경기는 악순환에서 선순환으로 바뀌었다.
나치당 집권과 독일의 변화
흔히 알려진 바로는 독일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35년 3월 자를란트 귀속, 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 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 38년 9월 나치의 체코 주데텐 점령, 39년 9월 1일 폴란드 선전포고에 이르는 과정을 히틀러 정부의 호전성과 전쟁광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설명된다.(히틀러 정부가 대규모 전쟁을 벌일 의도가 별로 없었을 때도 있었다는 것은 히틀러 정부가 선택한 해군력 증강 추진 사업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38년도 말에 에리히 레더 제독은 히틀러에게 2개의 해군력 증강방안을 건의했다. 하나는 잠수함, 기뢰부설함 건조 사업이었고 하나는 10년 계획의 최신 수상함 건조 사업이었다. 히틀러는 10년 계획을 6년만에 달성하라는 조건으로 후자를 선택했다. 이것은 당장 전쟁할 계획은 없었다는 것이다. 태평양 지휘로 명성있는 미국 체스터 니미츠 제독도 ‘대해상전’에서 히틀러가 왜 후자를 택했는지 의문을 표명하면서 히틀러 정부의 해전 준비가 별로였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자를란트부터 주데텐까지 모두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해 빼앗긴 땅이었거나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으로 인해 타국 영토가 됐지만 절대 다수의 독일인이 살던 땅들이었다. 히틀러 정부가 들어선 뒤 독일 경제가 눈부시게 부활하자 재외 독일인들은 독일로 귀속되기를 열망했다. 오스트리아는 1차대전에서 패배한 국민투표로 나치독일과의 통일을 결정했지만 승전국들이 불허했다. 대공황 시기 경제난 속에서 집권한 오스트리아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반나치 노선을 추구했지만 오스트리아 대중들 중에는 독일과 통일을 원하는 여론이 점점 강해졌다. 나치당 집권 이후 독일 실업률이 갑소하고 국경 너머 독일 경제가 번영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38년도에 국민여론의 압박으로 독일과의 통일여부를 묻는 투표를 시행하겠다고 했지만 갑자기 투표권을 24세로 올리는 등 부정투표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일 찬성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공정한 투표가 보장되도록 선거절차를 바로잡으라는 요구에 오스트리아가 응하지 않자 투표가 예정됐던 3월 13일 군대를 보냈다. 이듬해 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독일과의 통일은 압도적인 찬성을 받았다. 성인 3명 중 1명이 실업자였던 심각한 경제파탄의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통일한 후에 실업률이 1년 만에 1.2%로 감소했다. 1차대전 뒤 체코 땅이 된 주데텐의 다수 주민도 독일인이었다. 타국에서 소수민으로 차별과 폭력을 당하며 살다가 독일과 오스트리아 경제가 부활하자 주데텐의 독일인도 독일로의 귀속을 열망했다. 그런데 1차대전 패전 직후 독일의 여러 공국들은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시키기 이전, 즉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전의 지방분권 시절로 돌아가길 원했으나 1차대전 승전국들은 평화조약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교적 훈련과 질서를 존중하는 국민성을 가진 독일인의 단결을 막을 기회를 연합국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빌헬름 1세 독일 황제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가서 독일제국을 선포하는 등 프랑스인에게 엄청난 민족적 치욕을 안겼고 1차대전 승전 후 프랑스는 베르사유조약으로 이를 그대로 독일에 보복한다. 민족말살 수준의 평화조약을 겪은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없던 시절에도 전쟁을 외치고 복수를 부르짖었다. 이런 흐름으로 보복이 이어지고 민족감정이 서로 악화되었다. 이는 2차대전의 도화선 중 하나였고 베르사유조약 체결 당시에도 엄청난 우려를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체코 실업자의 60% 이상이 주데텐 거주 독일인이었다. 사망률은 폭등하고 혼인률과 출산률은 추락했었다. 그러나 38년도에 독일 귀속 이후 주데텐의 혼인률과 출산률은 급등했다. 1940년의 출산률은 37년보다 60%가 늘었다.
히틀러 정부에서 독일인의 출산률이 증가한 건 젊은층의 혼인을 정부가 장려한 덕분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신혼부부에 낮은 이자로 1000마르크의 혼인 자금을 대출했다. 9개월분의 봉급 수준이었다. 아이 1명 낳으면 양육비 보조금 명목으로 대출상환 부담을 250마르크 덜어줬다. 아이 4명 낳은 부부에 혼인지원금이 양육지원금으로 고스란히 전환됐다. 정작 히틀러 본인은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었으나 히틀러 정부는 결혼장려정책을 추진했다. 직업을 갖기보다 가정주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에게 혜택을 줬다. 현대 페미니스트가 보면 여자가 애낳는 도구냐고 분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집에서 아이 기르고 살림하는 여성에게 혜택준다는 것은 가정주부를 어느 직업보다도 대우한다는 뜻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당시는 여성들까지 주부가 되길 포기하고 노동시장에 뛰어들어 남자와 힘든 경쟁을 마구 하던 때가 아니다. 구직자에게 단순히 일자리를 준 게 아니라 남자 혼자 일해도 아이를 키우며 가정을 꾸리도록 안정된 생활급을 지급했다. 한국은 빚쟁이가 되어 서민층 학생들은 대출받은 학자금 대출 갚느라 힘들고 금융위기를 핑계로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미국의 돈찍어내기로 전 세계 부동산 폭등과 양극화를 겪고 집세내기도 힘들어졌다. 현대에 흙수저 집안에 태어난 절대다수의 대중들은 취업은 생존을 위한 고통스러운 시도가 되었다. 군사정권이 이룩한 경제발전의 성과에 똥칠하는 민주주의 정부 특유의 천박한 적자 정치로 사회가 병들어 서민층은 고통받고 있는데 이런 사회를 만든 사악한 위선자이며 국민을 떠받드는 척하는 민주주의자들은 히틀러를 그저 독재자라는 단어로만 폄하하기 바쁘며 그 시대의 특징과 그런 사건들이 벌어진 일련의 과정은 전부 무시하고 전쟁 중에 당연히 일어나는 학살과 참사들만 부각한다. 중국의 고도성장으로 인해 전 세계 대기업들이 중국에 공장을 지어 저렴한 인건비로 생산하여 저물가의 혜택을 누렸고 과학과 산업 발전 덕분에 민주주의로 인한 폐해는 전부 커버되고 있으나 미국 연준의 정책으로 악영향받아 외환위기와 국가부도를 겪고 금융수탈을 당해 국가경쟁력이 떨어져가는 몇몇 민주국가들과 개도국은 특유의 사회적 질병을 앓고있다.
유럽의 각국의 영토 경쟁
나치당이 집권한 1933년부터 전쟁이 터진 1939년까지 독일의 소비자물가는 연평균 1.2% 상승했다. 집권 전과 집권 후를 비교하면 1932년과 38년 사이에 독일인의 실질임금은 21% 상승했다. 집세는 안정됐고 난방비와 전기요금도 내렸다. 고정 지출이 감소하니 가계 지출은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독일인의 식량소비는 6분의 1, 의류 지출은 25%, 가구 포함 가사용품 지출은 50%, 와인 소비도 50%, 샴페인 소비는 무려 500% 증가했다. 관광비 지출은 2배, 자동차 소유는 3배 증가했다. 히틀러 정부 시절에 국내총생산은 인플레이션 없이 연평균 11%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보여주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36년 8월 히틀러 정부는 독일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경제회복을 선전하고 과시하고 독일의 기술력을 전 세계에 뽐냈으며 세계 최초로 올림픽을 텔레비전으로 중계하였다. 당시 독일의 텔레비전은 유럽에서 가장 품질이 좋았다. 일본선수로 출전한 식민지 조선의 손기정은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했고 한민족 중에 유일하게 히틀러를 대면하여 악수를 한 사람이 되었다. 1937년 중반부터 다시 실업률이 치솟던 미국의 루즈벨트 정부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경제난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1925년 36살의 젊은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영토확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긴 했다. 매년 90만명 씩 증가하는 7천만 독일 민초들을 나날이 올라가는 생활수준에 부응하여 뒷받침하려면 기존의 토지 생산력만으로는 한계에 직면한다는 이유였다. 히틀러 정부는 1차대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복기하면서 독일이 영토확장을 추구했으려면 방대한 땅을 가진 러시아에 맞서 영국과 동맹을 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했었고 반대로 수출확대로 국민을 먹여 살리는 산업경쟁전략을 추구했으려면 영국에 맞서 러시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여야 했었는데 아무 실익도 없는 오스트리아와 동맹해서 전쟁에 휘물려 패전했다고 ‘나의 투쟁’에서 진단했다. 식민지 침략으로 방대한 영토를 가진 영국이나 프랑스와 비교되는 것이다. 히틀러 정부가 39년에 폴란드 침공에 이어 41년 소련을 침공한 건 나의 투쟁에서 주장했던 영토 팽창 야욕의 자연스런 결과로 보일 수 있었다. 패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던 1925년의 파탄난 독일과 경제부활하던 1939년의 독일은 너무나 달랐다.
독일은 1차대전에서 패하면서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 민족 말살 수준의 배상금과 처벌을 받았고 당시 명성이 자자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패전국을 이 따위로 취급하는 1차대전의 베르사유조약은 잘못됐다며 영국측 협상 대표단에서 사퇴해버렸다. 식민지와 영토를 많이 잃었지만 특히 폴란드에게 많이 잃었다. 1차대전 이후 폴란드 땅이 된 서프로이센 지역이다. 당시 분쟁의 씨앗으로 작용한 지도를 찾아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서프로이센에는 독일인이 엄청 살았지만 승전국들은 투표를 실시하지도 않고 폴란드에게 서프로이센을 넘겨주었다. 승전국들이 서프로이센을 폴란드에게 넘긴 중요한 명분의 하나는 폴란드에게 바다로 통하는 항구를 내줘야한다는 핑계였다. 그 항구가 바로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태어난 단치히였다. 단치히는 공식적으로 국제연맹(국제연합 UN 전신) 관리 아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폴란드가 통치하고 있었다. 국제연맹의 관리로 넘어간 1922년 단치히의 폴란드인 비중은 겨우 2%였고 1939년 시점에서도 4%에 불과했다. 분쟁의 씨앗인 것이다. 독일에게 더 큰 문제는 서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가 되는 바람에 동프로이센이 독일 본토로부터 뚝 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히틀러 정부는 폴란드에 두 요구를 했다. 하나는 단치히 반환, 하나는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잇는 지하 혹은 고가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대신 히틀러 정부는 서프로이센을 폴란드 영토로 인정하겠다는 파격안을 제시했다. 과거 독일 민주정부에서는 상상도 못할 양보였다. 히틀러 정부는 단치히로 들어오는 폴란드 상품에 영원히 관세를 부과하지 않아 적어도 경제적으로 단치히를 폴란드 자유항으로 남기겠다는 제안도 했다. 폴란드는 시간을 반년 끌다가 거부의사를 밝혔다. 폴란드가 시간 끈 것은 군비증강을 하던 영국의 요구가 있어서였다. 영국은 독일과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폴란드가 히틀러 정부의 파격 제안을 거절한 것은 미국도 정황상 전쟁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폴란드는 1795년 이후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에 분할됐다가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전으로 독립을 되찾았기에 미국의 힘을 잘 알았다. 미국 쪽에 붙어서 독일을 누르면 독일 영토를 더 먹고 나아가 발트 3국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호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루즈벨트의 최측근이었던 주프랑스 미국 대사 윌리엄 불리트는 1939년 2월 파리에서 율 루카시에비츠 주프랑스 폴란드 대사에게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편에서 싸울 것이라고 확언했고 이 대화는 폴란드 외교부에 보고됐다. 이런 사태는 미국 프랑스 영국이 다시 연합해야만 장차 발생할 전쟁에서 독일을 막을 수 있다고 히틀러가 아무것도 아닌 평범 일반인이었던 1920년대에 예상한 학자들도 이미 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던 제임스 포리스털도 2차대전 직전 주영 미국 대사로 있었던 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다)와 전쟁이 끝난 뒤 골프를 치면서 나눴던 대화를 일기에 적었다. 케네디 전 대사에 따르면 당시 영국 총리는 전쟁에 부담을 느꼈으며 미국의 압력만 없었어도 폴란드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나서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히틀러 정부는 단치히가 경제적으로 폴란드와 붙어있고 사회적으로는 독일과 닿아있다는 선까지만 합의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폴란드는 이것도 거부했다. 히틀러 정부는 영국에 중재요청했으나 영국은 폴란드에게 겉으론느 협상에 응하라고 하고 뒤로는 타협불가라는 입장을 보였으니 중재될 수가 없었다. 결국 히틀러 정부는 폴란드가 영국과 프랑스를 믿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느낌을 받고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 1주일 만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8월 29일 동원령을 먼저 내린 것은 폴란드였다. 폴란드군이 국경 너머 독일군 기지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했다는 보도가 폴란드 신문에도 8월 초에 보도됐다. 몇 달 전부터 폴란드 안에서는 소수민 독일인이 탄압받고 있었다.(전쟁 발발 후 폴란드 거주 독일 민간인 사망자 1만 2천 여명, 실종 4만 5천 여명. 폴란드 내 독일 소수민에게 폴란드가 저지른 학살과 만행 The Polish Atrocities Against the german Minority in Poland)
미국은 첩보망을 통해 독소 불가침조약 사실을 조약 체결 다음날 알았으면서도 폴란드에 알리지 않았다. 독일과 소련이 밀약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폴란드는 독일의 절충안을 수용했을 수도 있다. 미국은 이를 알고도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정황상 방치했다. 바로 1년 전이었던 1938년 9월 체코 주데텐 반환 문제를 놓고 갈등이 고조됐을 때만 해도 루즈벨트는 유럽에서 다시 전쟁 발생하면 그 피해가 멀리 떨어진 미국에 끼친다면서 협상으로 문제해결을 당부했다. 그런데 1939년 8월에 독일의 거듭되는 절충안을 수용하지 말라고 강경책을 영국, 프랑스, 폴란드에 당부했을까? 미국 역사학자 찰스 캘런 탠실은 1938년 9월에 영국, 프랑스, 폴란드, 소련 공산당이 동맹해서 경제부활하던 나치당의 독일과 싸우면 독일이 금세 무너질 가능성이 높아서 미국 참전 명분을 찾기 어렵겠다고 루즈벨트 정부가 판단했으리라는 것 말고는 다른 논리적 설명을 찾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1년 후에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서로 맺어 상황이 변했다. 전쟁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았고 그동안 미국은 참전할 구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봤을 것이다.
1차대전 끝난 직후부터 예견된 2차대전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미국은 경기 대호황을 맞이했지만 워낙 반전 여론이 강했던 미국에서 참전 명분을 찾기 쉽지가 않았다. 이 시기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동차산업의 대재벌 헨리 포드는 히틀러 정부를 지지하고 반유대주의를 미국에서 선동하고 있었으며 히틀러도 헨리 포드를 존경했고 포드는 나치로부터 훈장도 수여받았다. 포드 이외의 수많은 미국 대기업들도 히틀러 정부에 군수물자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런 주제는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참고) 루즈벨트 미국 정부는 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에서 참전 명분을 찾았다. 미국은 일본의 해외자산을 동결하고 석유금수조치를 하여 제재로 일본에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궁지에 몰려 제재로 군대조차 굴리기 어려운 일본은 동남아 침공으로 자원 확보를 위해 진주만의 미 해군이 걸림돌이라 판단하여 선제공격했다. 미국은 정황상 일본의 이런 전쟁 움직임도 알고있었다. 1940년 초부터 진주만 공습 당일이었던 41년 12월 7일 도청과 첩보국의 활동으로 입수한 일본군 동향을 보고받았다. 그러면서도 대통령 3선을 위한 유세 과정에서 미국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겠다고 루즈벨트 후보는 거듭 다짐했다.
루즈벨트 정부는 미 함대를 진주만에 정박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한 해군 장성을 경질했다. 공습 피해가 커야만 반전 여론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인데 미국의 고의라고 단정하긴 어려워도 모든 정황이 들어맞았다.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전쟁여론을 조성한 ‘메인호 침몰 사건’의 미스테리를 생각해보거나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앞서 스스로 통킹 만에서 미군이 자작극을 벌인 사태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진주만의 벗겨진 가면 Pearl Harbor Umasked, 2차대전 참전한 퇴역 군인 로버트 스티넷의 Day of Deceit은 일본 진주만 공습이 미국 참전으로 이어진 내막에 대한 20만 건의 미국 정부 문서를 파헤쳤다.) 루즈벨트 정부는 일본의 외교 협상안을 거부했으면서도 진주만 공습이 있기 직전이엇던 당일 아침 일본에 평화를 호소했다. 루즈벨트 정부가 암호해독을 통해 일본의 계획을 좀 알았으면서도 해군 일선 지휘관들에게 대비를 준비시키지 않아 미군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고 엄청난 반전 여론은 참전 여론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자원이 빈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동맹이 침략전쟁으로 일군 식민지 덕분에 자원이 풍부했던 영국이나 역시 영토 넓고 자원이 많은 소련이나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높았다.
프로이센을 당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든 당대 천재적인 외교관이자 다양한 언어능력으로 국제정세를 꿰뚫은 정치인으로 평가받던 수상 비스마르크의 균형외교는 독일이 프랑스를 고립시키되 절대 러시아와 싸워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빌헬름 1세 황제와 최고의 조합이던 비스마르크 수상은 분열된 독일을 통일하는 역사적인 업적을 달성했으나 빌헬름 2세와의 갈등으로 수상에서 물러난 후 비스마르크가 구축한 외교적 고리는 전부 붕괴되었다. 이는 비스마르크 자신이 담당자가 아니면 제어할 수 없는 외교적 전략이었고 이 천재 정치인의 사퇴와 동시에 물거품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과 영국처럼 식민지도 별로없던 독일의 성장은 대영제국이 위협을 느낄 정도였고 영국은 독일 고립을 위해 사력을 다한다. 이후 영국과 독일의 패권 경쟁은 1차대전의 핵심 원인으로 작용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전하지 않았으려면 영국이나 러시아 중 하나와 동맹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영국이나 러시아 두 나라를 상대로 양면 전선을 감당했으니 후 세대들이 보기에는 승산이 없었던 것이고 당시 전쟁이 발생할 과정들을 전부 무시하고 학살이나 전쟁중 사건만 부각시켜 전쟁광에 미친 독재자로 묘사하는 것은 아무리 승전국에 유리한 역사를 쓴다 하더라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히틀러 정부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 등이 기득권을 차지한 비유럽 지역보다는 유럽에서 독일의 생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영토 확장 정책을 드러내긴 했다. 히틀러 정부가 2차대전 전야 폴란드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프로이센의 군사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는 이론을 펼쳤는데 히틀러 정부는 국익을 위해 더이상 승전국에 양보할 수 없었고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폴란드와의 충돌은 프랑스, 영국과의 전쟁을 암시하기도 했다. 히틀러 정부는 영국과 동맹을 성사하고 싶어 했는데 승산 없는 전쟁을 처음부터 벌인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은 금서 처분을 받는다든지 유대인 세력에 의해 위험한 책 취급을 받지만 영국 예찬론도 많다. 히틀러는 독일은 영국의 호의를 사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경쟁도 해군력 증강도 심지어 영국 산업과의 경쟁도 가급적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영국과 독일이 동맹하여 만약 1904년에 일본 대신 독일이 러시아와 싸웠다면 1차대전에서 치른 희생의 10분의 1도 안 치르고 방대한 러시아 영토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나의 투쟁에 썼다. (러시아 역사학자 니콜라이 스타리코프는 Who Set Hitler Against Stalin에서 영국측이 나치당 초기에 자금지원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히틀러 정부는 오판한 것이다. 다시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게 불가피하다면 독일은 영국에게 미련을 두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러시아는 자원 부국이었으므로 독일에 큰 힘이 될 수도 있었다. 러시아는 독일과 비슷한 체제였는데 당시 소련은 공산체제고 독일은 국가자본주의였다. 무슨 소리냐면 중요한 것은 돈을 누가 찍어내느냐다. 발권력이 한 국가에서 누구에게 있느냐다. 영국과 미국의 발권력은 연준같은 민간은행들에 있었다. 정부는 돈이 필요하면 채권발행을 해서 빚을 얻어야 했다. 채권을 찍으면 이자를 내야되고 이자 낼 돈은 세금으로 조달한다. 채권 발행이 늘면 이자지급액이 는다. 이자 지급액이 늘면 채권보유자의 이자수입은 늘어난다. 이자지급액이 늘면 채권보유자의 이자수입은 늘지만 증세로 인해 국민 소비력은 감소한다. 경기는 하강한다. 악순환이다. 이자수입으로 금융만 배불리고 국가와 기업과 가계는 어려워진다. 소련과 독일에서는 정부가 중앙은행을 통해 필요에 따라 돈을 공급할 수 있었다. 채권을 찍으면 이자를 내야하지만 돈을 찍으면 이자를 안 내도 된다. 국가가 필요에 따라 생산적인 부문으로 돈을 적절히 늘리면 생산은 증가하고 채권이라는 나라빚이 줄어 세금을 깎아도 되니까 국민 소비력이 늘어서 생산된 제품도 원활하게 소비된다. 경기는 다시 활기를 띤다. 금융에 이자를 안 뜯기니 실물경제가 살아난다.
독일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견제
히틀러 정부도 물론 국가가 중앙은행보다 우위에 서서 발권력을 보유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런 체제를 영국과 미국의 세력들이 매우 싫어한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영국과의 동맹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도 영국에 평화안을 끝없이 제안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1939년 9월 한 달만에 폴란드 서부를 점령하고 독일은 단치히와 동프로이센 연결구역만 빼고 원래 독일영토였던 서프로이센을 포함해서 모든 폴란드 점령지에서 철수하겠다고 했으나 영국은 독일의 평화안을 거부했다. 1940년 5월 독일은 영국군 수 십만명을 덩케르크에서 전부 몰살할 수 있었으나 히틀러 정부의 지시로 독일군이 공격을 중단하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발생해서 영국군 수 십만명은 포위 당해 몰살 당할 위기에서 벗어나 탈출했다.(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는 이 상황을 묘사한다.) 독일은 먼저 선심을 베풀면 영국이 평화안을 수용할 것이라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1939년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에 독일에게 식량 등 군수물자를 열심히 공급하던 소련이 영국-독일 동맹이 성사될까 위협을 느껴 영국의 접근을 수용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던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히틀러의 대소련 정책 정당화Hitler’s Policy Toward the USSR Justified) 대영제국 국왕 조지 6세의 형이자 현대 엘리자베스 여왕 2세의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는 상당한 친나치 행보를 보였고 반유대 성향이었다. 독일로 건너가 나치 인사들과 상당히 어울렸다. 대독강경 노선을 추구했던 앤서니 이든 영국 총리를 총살해야 된다고 말했다. 독일 장군 오토 슈코르체니에 의하면 에드워드 8세는 영국과 프랑스, 나치독일이 동맹해야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8세는 1945년 영국령 바하마 총독을 관둘 때도 나치독일이 미국을 꺾어버리는 날에 복귀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으나 전쟁중 검열로 보도되지는 않았다. 영국 BBC 다큐에 의하면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독일 혈통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독일을 좋아했고 아버지 조지 5세가 1차 대전으로 인해 국민들의 반독 감정이 폭발할까봐 우려해 왕조 이름을 바꿨는데 아들 에드워드 8세는 독일 지지자가 되어 영국으로 귀국도 안하고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39년 8월 23일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10월 15일에 영국과 밀약을 맺은 문서를 공개했다. 에르키 하우타매키라는 핀란드 퇴역장교는 2005년에 낸 태풍의 눈속의 핀란드라는 책에서 영국이 소련과 동맹하고 스칸디나비아를 거점삼아 독일을 공격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공개했다.(finland-in-eye-of-storm-erkki) 핀란드와의 국경 가까이에 레닌그라드라는 중요한 산업도시를 두고 있어서 안보위협을 느끼던 소련은 영토교환 제의를 핀란드가 거부하자 39년 11월 말 핀란드를 침공했다. 일명 겨울전쟁이다. 겨울전쟁은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을 통해 과거 러시아제국에 속했던 발트 3국과 핀란드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을 독일이 묵인 했기에 가능했던 전쟁으로 알려져왔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에게 침공당한 핀란드를 도우려던 정의로운 나라들로 알려졌고 핀란드는 두 나라의 지원을 간청했다.
하우타매키가 공개한 문서에 의하면 영국 소련은 핀란드는 물론 노르웨이, 덴마크, 중립국 스웨덴까지 점령한 뒤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거점으로 독일에 총공세를 펼 작정이었다. 독일은 원래 핀란드에 관심없었으나 기 문서를 입수한 뒤 당시 핀란드군 만네르하임 장군에게 전했고 만약 소련이 핀란드와의 전쟁을 서둘러 끝내지 않으면 독일이 개입하겠다면서 소련을 압박했다. 소련이 겨울전쟁 초반에 고전하다가 승기를 잡았는데도 3월 13일 핀란드와의 종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독일의 압력이 있어서였다는 것이 하우타매키의 분석이다. 소련과의 종전협정으로 주권을 지켰지만 많은 땅을 잃은 핀란드는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독일 편에서 싸워 소련으로부터 영토를 되찾지만 독일의 패색이 심해지자 소련과 종전협정을 맺고 다시 영토를 돌려주며 유연하며 현명한 외교를 보여주며 주권을 지켰다. 2차대전 뒤 대통령이 된 만네르하임 장군은 비밀문서를 공개하여 소련을 자극하는 데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 게 하우타매키의 주장이다. 이 비밀문서가 사실이라면 독일은 스칸디나비아를 무대로 반독 전선이 구축되는 걸 막으려고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선제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겨울전쟁은 소련이 영국, 프랑스의 개입을 두려워한 바람에 끝난 게 아니라 소련이 독일의 개입을 꺼려한 바람에 끝났다는 뜻이다. 영국은 핀란드를 도우려던 게 아니라 핀란드를 소련에 팔아넘긴 수준이다. 핀란드가 영국의 군사지원 제의를 수용했으면 영국은 핀란드 지원을 구실로 노르웨이 스웨덴까지 점령했을 것이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영국의 방패막이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소련은 1940년 말부터 발칸반도, 발트해, 루마니아 등에서 독일에 무리한 이권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독일과 전쟁중이던 영국 대표단을 모스크바에서 맞아들이기도 했다. 1941년 봄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반독 쿠데타의 배후에는 소련과 영국이 있었다. 소련이 독일과의 국경선에서 병력을 대거 증강하자 결국 히틀러 정부는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선제 공격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소련은 연합국의 멤버가 됐는데도 영국과 미국은 앞에서는 소련을 돕는 척하며 뒤에서는 독일과 소련 공산당의 멸망을 추구했다. 영국과 미국이 소련에 온갖 군수물자를 정말 일반인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이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수 백만명의 소련 군인이 죽어나갔고(소련측 전사는 상상도 못할 수치인 1천만명을 넘어선다) 무기는 소련이 거의 자력으로 전세를 뒤집은 1944년 이후에야 집중 공급하게 되었다. 소련이 가장 힘들게 후퇴만 반복하던 1941년과 1942년에 제공된 무기는 겨우 7% 수준이었다. 소련은 서유럽에서 작전을 펼쳐 제 2의 전선을 열어달라고 요구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질질 시간만 끌다가 독일의 패배 가능성이 보이던 1944년에야 제대로 된 두 번째 전선을 열었다. 그래서 2차대전의 별명이 독소전쟁이며 독소전쟁사라는 제목의 책도 많다.
영국은 부실한 무기를 소련에 보내기도 했다. 1942년 여름 영국은 북극해를 통해 수송단을 보내면서 호위함들을 갑자기 철수시켜 35척의 수송선 중 24척이 독일군에게 격침당하도록 한 정황도 있다.(니콜라이 스타리코프의 How Britain assisted the Soviet Union’s fight aginst Hitler) 1차대전 말엽 러시아에서 백군을 돕는 척하면서 백군을 방해했던 수법의 재활용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2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뒤에 실제로 총부리를 돌려 항복한 독일군을 활용해 소련과 전쟁을 하려고 생각했지만 소련을 동지로 여겼던 연합국 군인들의 반발로 실현되지는 못했다.(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15장 반소 십자군 전쟁) 2차대전 이후 냉전은 필연이었다. 화폐발행을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금융체제가 독일에서 무너졌지만 소련에서는 무너지지 않았다. 2차대전 이후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굳건해진 미국은 저유가 상황을 활용해 소련 석유 수출을 파탄내고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소련을 상대로 군비증강 경쟁을 벌였고 결국 공산주의 소련의 허망한 체제도 무너졌다. 그렇게 소련은 분열되어 많은 나라가 독립했고 이런 러시아 민주화 과정에서 수많은 민영화가 이루어지고 부패를 통해 재산을 축적한 과두집단, 러시아말로 올리가르히들이 설치게 됐다. 러시아 민주화 여파로 외환위기를 맞고 러시아 옐친 대통령은 무능을 보여주며 푸틴을 후계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푸틴은 체첸전쟁을 해결하고 국민적 인기를 얻어 부패로 재산을 쌓아온 올리가르히라는 재벌들과 전쟁을 벌여 복속시키고 민주화로 처참한 경제위기를 겪은 러시아 대중들은 민주화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고 원자재 붐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경제는 성장했고 푸틴 장기집권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후 영국과 미국의 세력은 나토 확대와 더불어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조지아 등 여러 국가에 장미혁명 등 반러 감정을 촉발하는 공작을 확대했고 소련 해체는 결국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와 현대러시아가 갈등하는 분쟁의 씨앗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2차대전 이후 독일
유럽 전체에 인종주의가 당시 유행했고 히틀러도 당연히 인종주의자였다. 그러나 독일 히틀러 정부를 견제하고 독일이 경제대국에 이어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철저히 견제하던 세력은 히틀러 정부가 못마땅했고 독일의 국가주도의 금융체제에도 불만이었다. 공적이고 생산적인 수요와는 무관하게 자본을 투기수단으로 삼아 통화량을 조절하고 국가와 기업과 가계가 어려워지고 금융위기 속에서도 돈을 버는 그런 자본가들은 다시는 히틀러같은 국가주도 경제체제가 꼴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견제할 정부가 사라지는 것이 이상적인데 국경을 초월해 금융으로 돈을 버는 세력에게 국가주도 경제체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유대인 탓하며 사회불만을 유대인에 돌린 나라들은 많았다. 러시아 제국이 가장 먼저 유대인 탄압을 했고 영국 미국 자본가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정을 무너트리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에 자금을 지원하고 일본제국에 자금을 지원하고 러시아제국의 팽창을 견제했다. 이 때부터 유대인 음모론도 마구 돌아다녔고 미국 최고의 대재벌이자 포드 창업주 헨리 포드도 반유대주의를 선동했다.(나치당을 지지했던 미국 재벌 포드가 직접 쓴 international jews 참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민족증오 속에서 벌어진 전쟁 중 벌어진 독일같은 전쟁 만행도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독일 사회를 적대시하고 독일 사회를 치부의 대상으로 삼았던 유대인 세력도 당연히 문제가 있다.
1차대전 이후 독일이 겪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주역은 민간은행들이다. 그런데 독일 민간은행들은 대부분 유대인 소유였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화폐가치가 똥값이 되고 연금생활자, 봉급생활자는 굶어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헐값에 집도 팔아야 생존할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독일 중산층은 완전히 무너지고 재산을 잃고 몰락했다. 반면 유대인 은행가들은 독일 중산층이 굶지 않으려고 헐값에 파는 부동산을 닥치는대로 투기해서 떼돈을 벌었다.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이 인플레에 시달려 죽어가던 시절 은행원으로 일했는데 유대인들의 투기로 독일인들이 피해받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revelations from Goebbels’Diary 괴벨스의 일기장에서 밝혀진 내용) 나치당이 집권하고 유대인을 탄압했다고는 하지만 그 5년 후인 1938년 11월에도 독일 부동산의 3분의 1을 독일 인구의 1%에 불과한 유대인 세력이 소유할 정도였다. 부동산의 대부분은 독일 민족이 죽어가던 인플레이션 시대에 똥값에 마구 사들인 것이었다.
나치당의 독일이 수용소에 유대인을 가둬 노역을 시켜 엄청난 참상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수용소에서 사망자가 급증한 것은 전쟁 후반에 물자부족 탓도 있었다. 수용소 재소자들은 영미 연합군이 종전 몇달 전 감행한 무차별 폭격으로 독일의 생산과 유통망이 붕괴되어 생겨난 측면도 분명히 있다. 수용소에 갇혔던 많은 유대인은 전쟁중에 다양한 원인으로 죽었다. 600만이라는 단어는 고유명사 수준으로 자리잡아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엄청난 인구가 학살되었다는 말은 2차대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극렬 시온주의자들의 입에서 나온 숫자이기도 했다. 러시아제국은 국정실패 탓을 유대인 탓으로 몰아가 유대인 세계지배 음모론을 활용해 유대인을 탄압했는데(러시아제국의 유대인 대학살 포그롬 참고) 이런 시절 유행하던 숫자가 나치당의 독일에도 옮겨붙었다. 600만이라는 숫자가 성역화되어 있는데 언젠가는 다시 평가될 날도 있을 것이다. 강제수용소는 19세기말 20세기초 보어전쟁에서 처음 만들어졋다. 대영제국은 남아프리카 식민지의 금을 차지하기 위해 네덜란드계 보어인과 전쟁을 했는데 병력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보어인의 항전이 거세자 농가를 불태우고 가축을 학살하고 노약자, 부녀자, 어린이를 수용소에 가두는 무차별 작전으로 승리했다. 강제 수용소에서 최소 2만 명이 죽었다.
캐나다 역사학자 제임스 바크에 의하면 1945년 5월 2차대전이 끝나고 연합국의 식량공급 제한으로 인해 불필요하게 죽은 독일인의 수치는 최소 600만명이 넘는다. 연합국 기록에 따르면 1946년 10월부터 1950년 9월까지 포로로 외국에 있다가 귀국한 독일인은 260만명이다. 동유럽에서 쫓겨나 귀국한 독일인도 600만명으로 추산된다. 같은 기간에 태어난 신생아는 417만이다. 그렇다면 1950년 독일인구는 7770만에 달해야한다. 그런데 같은 기간 집계된 사망자는 323만이고 해외 이민간 독일인은 1950년 기준 7394만이 되어야한다. 그런데 1950년 9월에 전후 두번째로 이뤄진 인구조사에서 독일 인구는 6800만으로 집계됐다. 약 570만 명의 간극이 있다. 전후 독일을 쪼개 분할통치한 연합국은 식량 배급량을 줄였다. 1000칼로리도 못받는 곳도 있다. 아사자가 속출했지만 연합국은 국제구호단체의 식량반입도 불허했다. 소련군이 독일에 진주하여 최소 100만 이상의 여성이 잔혹한 성폭행에 시달렸으나 연합국은 아무 처벌도 하지않고 묵인했으며 이는 엄청난 참상이었다. 독일의 전쟁범죄를 재판한다고 목숨걸고 달려들어놓고 막상 연합국 본인들의 전쟁범죄는 철저히 침묵했고 일본이 인간을 생체실험한 잔학성의 결과로 얻은 의학 연구물을 미국이 넘겨받는 대가로 731부대 책임자 이시이 시로 중장은 아무 처벌도 안받고 석방되었다. 국익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역사는 철저히 승전국이 썼다. 미국 CIA와 이스라엘의 정보국 모사드는 이제는 독일 유능한 나치 군인들을 고용해 소련 공산당을 붕괴시키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이탈리아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성공시키고 온갖 비범한 작전으로 연합국을 괴롭힌 특수부대 대장으로 활약한 나치 독일의 유능한 장군 오토 슈코르체니는 이스라엘 모사드의 제의를 거절했다.)
미국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는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 산업기반을 붕괴시켜 농업국가로 만든다는 독일 경제파탄 계획을 44년에 짜서 루즈벨트와 처칠의 재가를 받았다. 그런데 정보가 유출되어 미국과 영국 정치권에서 모겐소는 비난을 받았고 이 계획은 취소된 것처럼 보였으나 그게 아니었다. 570만은 1946년 10월부터 집계된 수치다. 1945년 5월 유럽 전선이 종료된 시점부터 연합국의 배급 제한으로 죽은 독일인은 최소 30만이 될 것이다. 전쟁 종료후 독일 국내에서 다양한 이유로 죽은 독일인도 500만이 넘는다. 여기에 동유럽에서 쫓겨나 독일로 가는 피난길에서 죽은 독일인들을 더하면 2차대전에서 종료된 뒤에 연합국의 탄압과 부당한 대우로 죽은 독일 인구도 최소 800만으로 추산된다. 41년부터 50년까지 연합국 수용소에 있다가 죽은 독일군 전쟁포로 100~200만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다. 아우슈비츠같은 참상도 우리는 기념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 세력은 이를 과장하고 성역화하고 연합국의 전쟁범죄로 항복한 독일인이 피해입은 일은 묻어가는 건 잘못된 일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로랑 기예노에 의하면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들어서는 유대인 국가 건설만을 지상 과제로 삼고 자신들의 계획을 관철하는 데 유대인의 희생을 활용하려고 독일을 자극했다. 히틀러가 취임한 지 2달도 안된 33년 3월 24일 영국 일간지에 전 세계 1400만 유대인이 60만 독일 유대인 편에서 독일을 상대로 경제 금융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유대인 법률가의 선언이 1면에 보도됐다. 다수의 독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위험에 빠트리는 미국 시온주의자들의 발언에 분노했다. (Laurent Guyenot, A Holocaust of Bilical propertions시온주의자 유대인이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같은 동족 유대인을 희생시키는 내용)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서로 다 친한 것도 아니고 동맹도 아니고 유대인들끼리도 사이가 안좋은 일도 있다. 이웃과 원수가 되고 형제도 서로 원수가 되듯이 말이다. 5일 뒤 유대인 사업체에 대한 반일 불매운동마냥 반유대인 불매운동이 독일에서 시작됐다. 미국이 아직 참전하지 않은 41년 초 시어도어 카우프만이라는 유대인 미국 기업가는 ‘독일은 사라져야 한다’는 책에서 60세 이하 모든 독일인, 45세 이하 모든 독일 여성에 불임수술을 해서 독일민족을 지구상에서 제거하고 의사 2만명을 동원하면 독일 민족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같은 언론에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 뒤 독일에서 유대인은 다윗별을 달고 다녀야 했다. 현대 이스라엘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로비를 통해 영국 정부와 뒷거래를 하여 벨푸어 선언 이후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이스라엘을 건국한 결과물이다. 커서 군인이 될까봐 팔레스타인의 초등학교를 폭격해서 어린이를 죽인 뒤 변명한 이스라엘군의 만행도 이스라엘 정부는 별일 아니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39년에 2차대전이 시작됐을 때 독일에는 27만 유대인이 살았다. 미국은 유대인 망명자 및 난민을 받으려고 했지만 미국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은 강력 반대했다. 독일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 탄압받는 유대인이 살 곳은 팔레스타인 영토 뿐이라는 주장이 안 먹혀서였다. 전쟁이 막바지이던 44년에도 미국은 영국과 협의해서 각각 15만씩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고 다른 나라들의 협조를 얻어 모두 50만의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유대인 시온주의 지도부의 강한 반발에 좌초되었다.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은 시온주의를 받아들여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유대인만 유대인으로 대접했지 나머지 유대인은 험지로 몰아 유대인은 희생자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땅에서 팔레스타인을 싸그리 몰아내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불소시개로 써먹었다.
히틀러 정부의 일명 ‘최종 해결책’은 유대인을 독일 밖으로 전부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에도 협조했다. 유대인은 재산을 갖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했다. 33년부터 39년까지 유대인 거주 팔레스타인 투자의 60%는 히틀러 정부가 도와줬다. 전후 아르헨티나로 도망해 살다가 1960년 이스라엘 첩보국의 납치작전으로 처형당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독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영토로의 이주를 주관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 인물은 한나 아렌트라는 여성 학자가 쓴 ‘악의 평범성’이라는 책으로 유명했다. 재밌는 사실은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열렬한 나치 추종자와 결혼했는데 독일 유명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아이히만은 히브리어까지 배울 정도로 관심이 있었다. 이스라엘 첩보국이 아이히만을 추적해 제거한 것은 나치당과 시온주의자들의 관계좋았던 시절이 들통날까 두려워했다는 주장도 있다. 한쪽의 얘기만 듣지말고 다양한 관점을 보자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후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사람들에게 한때 말만 나오면 전쟁광 독재자로 욕을 먹었으나 시간이 한참 지나 재평가를 받았다. 히틀러 정부는 승전국에 의해 싸이코패스, 정신병자 등 온갖 악명이란 다 뒤집어쓰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자, 식민주의자 제국주의자였던 세실 로즈. 옥스퍼드대학에 아직도 동상이 있는 영국 자본가 세실 로즈같은 인물이 앵글로색슨 영국이 세계정복을 해야 된다고 주장한 얘기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