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에게 붙잡혀 안긴 어쩡쩡한 자세가 된 여화는
쑥스러운듯 급히 자세를 고쳐잡으며 수줍게 웃었다  
내 나리께 보여줄 것이 있습니다
기쁜것도 잠시, 기와집 지붕위를 단숨에 뛰어오르며 안개처럼 빠르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
수호는 다시금 기가 찼다
다시 본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럼에도 열심히 그녀의 뒤를 쫓을 수 밖에 없는 수호였다
도착한 곳은 어느 빈민가의 낡고 허름한 빈 집이었다
그 집에서는 다치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여화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는 겁먹은 눈동자들이 수호를 경계하던 와중에 여화가 복면을 벗고 등장하자
병든 노파가 그들을 대표해 배웅하러 나왔다

아이고 아씨 오셨습니까..
여화는 아연실색하며 말렸다
아니~ 움직이면 안된다니까요 어서 쉬세요 어르신
저쪽에 내 구해다놓은 쌀이 있으니 다들 균등하게 배분하여 어서 가져가시오
문앞에 놓인 쌀주머니를 보자 다들 기쁨으로 반색하며 얼른 달려들기 바빴다

여화의 따뜻한 마음이 그들에게 닿은 것 같아 수호는 저도 모르게 흐뭇함을 내비쳤다
그대는 참 여전하시오
내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 이것입니까?
다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여화를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가자
여화는 다시금 심장이 세차게 뛰며 얼굴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는 급하게 손사레를 쳤다

아..아니요! 나리께 보여드리려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옵고 이것 이옵니다  
돌아가신 오라버니 성호가 남긴 창포검을 꺼내온 여화는 비장한 표정으로 칼집을 돌리며 하나의 문서를 꺼내고는 그것을 수호앞에 대령했다.

혼인무효증명서

얼마전 혼자 지내던 여화의 행방을 알아낸 이소가 여화에게 신하들을 시켜 건넨 문서였다

네가 가진 그동안의 억울함과 한을 풀기에는 역부족이겠으나 내 너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성군이 될 기회를 얻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순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이것을 받고 부디 네 남은 생을 원하는대로 살길 명한다

이소의 명을 받고 여화는 그저 감흡할 따름이라며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수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혼인무효증명서와 여화를 번갈아 보았다
여화는 당황한듯 조심히 말을 이었다
그, 그 그러니까 나리께 이제는 저도 과부가 아니라 여자로 보일 자격이 있다 이말입니다 제말은 크흠!! 이 이제는 저도 당,당당하게 나리를 넘볼 수 있겠다! 그런 ..아니!! 나리와 함께할 수 있겠..

여화의 뒷말은 갑작스레 덮쳐온 수호의 부드러운 입술과 말캉한 혀의 압력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
엉켜대는 혀의 움직임을 뒤로하고 수호가 잠시 입술을 떼며
올곧은 눈동자속에 여화를 담았다

부인의 말에는 어패가 있군요

첫째, 부인은 처음부터 내게 여인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내 말했었지요 과부든 아니든 나는 상관없다고 그 말들은 다 어디로 잊.은.건.지
긴 손가락들에 의해 툭툭 건드려진 여화의 목덜미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옴짝달짝 할 수 없게 만든다음 다시금 입술을 밀어 붙여 오는 그에게 여화는 그만 넉다운되어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둘째, 혼인합시다 그대는 앞으로 내 부인이니 나리가 아니라 서방님이라 부르도록 하세요
부드러운 입맞춤에 완전히 취해버린 여화가 저도 모르게 수호의 어깨를 두팔로 감싸자 수호는 이성이 툭 끊어지는 것을 느끼며 여화의 입안을 혀로 집요하게 헤집었다 붉은 입술을 사탕굴리듯이 빨아당겼다 놓아주었다 하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내자 여화가 숨을 켁켁댔다

켁켁..하우으.. 입맞춤이라는것이 본디 이런 것입니까? 두번 했다가는 제명에 못살겠습니다

달아올라 숨차하는 여화의 찡그린 표정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수호는 피식피식 웃으며 능글거렸다 입맞춤을 할때 숨을 참는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코로 숨을 쉬지 않으니 그렇지요 제가 차차 알려드리겠습니다 부인

헛 참..거 너무 능글맞아지셨습니다!
부인을 감당하려면 그정도 그릇은 되어야하니까요
경악하는 여화의 표정에 수호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길고 곧은 손을 뻗어 옷깃 품속으로 가져간 그는 오랫동안 전해주지 못했던 것이라며  정표를 꺼내 여화의 머리에 장식해 주었다 이전에 석정을 통해 얻게 된 꽃 머리장식이었다
여화의 단아하고 고운 얼굴에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패이며
반짝이는 머리장식이 너무나도 잘어울렸다

아니 이건..귀한것인데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나리..아니 서 서방님
괜시리 간질거리는 부끄러움에 얼굴에 부채질을 하는 여화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내게 가장 귀한것은 부인입니다
수호의 단호한 말에 입을 다물게된 여화였다

며칠간 빈민가와 수호의 집을 오가며 생활하기로 한 여화는
같이 가자는 수호의 제의를 거절하고 정리가 되면 직접 찾아가겠다고 말하자 아쉬움을 뒤로한채 수호는 떠날 채비를 시작한다

날이 밝아 집으로 돌아가는길 피곤할만 했을텐데도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발걸음을 느끼며 수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춤을추듯 호선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는 가장 행복한 여인으로 내 꼭 그리 만들겠소 부인
머리장식을 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던 여화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호는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