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삶은 관계에서 시작되는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개념에 대해 말할때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기주의니 집단주의니 그래도 남들과 어울리는게 좋다느니 등의 헛소리들을 하는데, 나 자신시초와 관계시초에 대한
말은 삶의 근본적인 자세를 뜻한다. 아주 기초적인 정신의 포즈를 뜻한다는것이다
삶이 이루어지는
시작 좌표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려면 일단 진실성이 있어야된다.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자신에게 진실된 인간은 관계적인 이득이
목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저절로 타인 또한 관계속에서 보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도 이루어진다. 가장
이기적인것을 추구하면 가장 이타적인것 또한 이루어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기본적인
부품들이 많이 부족하고 하자가 있어서 마음의 문을 여는경우, 거의 대부분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추악한 모습들을 드러낸다.
정신적으로 유아적이고 사물과 현상들간의 입체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기초적인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봤자 '관계속 자신'이기 때문에 언제나 외부의 작용에 의해 확인해야만 한다.
삶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면, 첫째로 한국의 인간 생태계상 주변 사람들에게 공격받을 일이 많아지게 되고, 둘째로는 자신의 수준 이상의것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셋째로는 거의 대부분이 추악한 모습들을 보여주게 된다. 또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고정시켜놓은 현대시대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껍데기적으로 균일하게 맞출 필요가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관계중심적인 포즈를 끊임없이 요구받게 된다. 이러한 이유들에 따라
영혼을 버리고 외부의 관계를 기준점으로 살게되는것이다.
두사람부터 민족까지, 부피여하
상관없이 관계 그 자체가 그 사람을 주장하게 된다면 그것은 노예의 삶이나 다를바없다. 옳은것은 옳은것이 아니며, 정답은 정답이
아니다. 자유 위에서 질서가 '표현'되는게 아니라 질서를 '흉내'내기 위해 사람들이 그에 맞추는것은 그냥 홀로그램이나 다를바 없다
만약
좋은게 좋은거라는 철학과 효율성, 실리성 등의 이유에 의해 도덕들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려면 그냥 애초에 모든 사람들을
클라우드로 묶고 안개처럼 뭉뚱그려 군집체로 만드는게 나을것이다. 모든 영역에 감시와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는게 나을것이다. 아예
그냥 유전자를 편집하거나 어린아이때부터 기계를 통해 지식들을 프로그래밍 시키는게 나을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개인의 눈과 귀와 코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오고, 눈과 입 등의 개인의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외부로
발산하게끔 생겨먹었다. 이 말은 인간의 근본 구조상 자기 자신이 먼저 있어야지만 직렬적으로 세상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예전에
남자는 시간의 동물이고 여자는 공간의 동물이라는 말을 했을때 누가 헤겔의 철학을 보고 쓴거 아니냐고 한적이 있었는데 헤겔이
아니라 폴 존슨이라는 사람의 책을 보고 영향받아 쓴 글이었다. 남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삶이 구성되며, 시간속에서 움직임의 방향을
가지기 때문에 바로 눈앞의 사물을 일점으로 깊이있게 보며 들어간다. 시간속 움직임의 방향을 가지기 때문에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상대성이 생긴다. 반면에 여자는 관계로부터 삶이 구성되며, 공간속에서 정지해있고 주어지는 정보에 의해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물과 현상이 절대적이다. 껍데기를 아주 훤히 잘 보는 장점을 가졌지만 깊이있게 들어가지 못하며
사물이나 현상이 가지고 있는 시간을 볼수 없다.
삶에 있어서 가치를 이루어내고 실체를
가지려면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상대성에 의해 눈앞에 있는것을 추구하다보면 밸런스가 깨질수 있다. 상대성을 가졌다는것은
좋게도 될수 있지만 나쁘게도 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옆에서 남자를 도와주는 배필로 존재하는것이다. 여자의 존재
목적은 일점을 깊이있게 보는 남자 옆에서 균형을 잡아주고 도와주기 위함이다. 그러면 한쪽이 우월하고 한쪽이 열등할까? 그렇지
않다. 시간속에서 사는 존재는 공간속에서 판단하고 다스리는것 같지만, 시간속에서는 공간속에서 사는 존재의 종노릇을 한다.
공간속에서 사는 존재는 시간속에서 주인노릇을 하는것 같지만, 공간속에서는 시간속에서 사는 존재의 종노릇을 한다. 서로가 서로의
주인이 되고 서로가 시너지를 일으키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런 기초적인 구조를 이해를 못하니까 남근
숭배를 하는 정신병자 페미니스트들이 세상에 나타나는것이다. 공간속에서, 관계속에서 잘나보이려고 자신의 본모습까지 버려가며 뻣뻣하게
남자 흉내를 내는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세뇌시켜가며 의식과잉에 의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연출하는것이다. 틀린
출발지점으로 시작해 99% 겉을 유사하게 흉내내는 사이비 종교의 인간버전이 바로 현대 여자들이다
남자가
상대를 소유하지 않고 상대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과 상대 둘 다 기만하는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삶이
시작되는 사람은, 자신이 주인이고 진실성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타인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상대를 위할수 없으며 사랑할수 없다.
만약
이웃 국가에서 실정을 오래도록 해서 사람들이 고통중에 있을때, 도덕이 도덕이라는 이유로 500억 달러 정도를 지원해주고 여러
기술적 조치들을 해달라고 한다면 어떤 국가도 해주지 않을것이다. 아무리 미디어를 통해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고통, 부조리, 무질서,
범죄의 창궐 등을 내보내고 감성을 자극하고 관계속 도덕을 강요해도, 그것이 아무리 인간의 높은 가치에 근거한 도덕, 윤리더라도
정답이 정답이 될수는 없는것이다. 공간속에서 그것이 절대 도덕이더라도 시간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자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부모에 의해 보호받고 양육받으면 당연히 자식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게 마땅하다. 그런데 교양이라느니
도덕이라느니 하면서 자식에 대한 권리 행사를 아예 못하게 막아버렸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더라도 자식에 대한 봉사와 양육이
관계로부터 시작되면 착취가 된다. 자식을 사랑하면 존중해야된다느니 하는 소리들을 하는것은 두 층위가 서로 다르다는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먼저 충만해진다음 외부와 소통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계약관계에서 봤을때 자식은 소유물과
같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권리를 누리는것은 마땅하며 자식에 대한 의무 또한 같이 지는게 마땅하다. 자식이 만약에 이를 거절한다면
자식이 계약 바깥으로 나가는것이 되기 때문에 부모에게는 자식에 대한 의무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자식을 '진짜로 사랑한다면' 자식이 계약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끔 매질을 하거나 권리를 행사해야하는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으로부터 삶이 시작되는것을 항구적으로 전제해야되기
때문이다. 자신으로부터 삶이 시작되지 않으면 세상은 전부 허상이고 허깨비가 된다
만약에
불교 스님이나 기독교 목사님들이 삶을 살면서 만나는 수백 수천명의 모든 사람들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줘야만 한다면 삶은
노예생활이 될 것이다. 아무리 타인이 무지속에서 살다가 영혼이 극락에 가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을 위해 염불을 외든 기도를
해주는것이 절대적으로 좋은것이라 해도, 좋은게 좋은것이 될수가 없는것은, 사람은 시간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타인을 소유하지 않았으니
타인에게 베풀수 없는것이다.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니 세월호 사건때 아이들을 위해서 슬퍼하지 않는다고 남들을 나무라는것이다.
남을 사랑하려면 일단 남을 소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것이 가장 건강한 삶이기 때문이다. 정답이 정답이라는
이유로 관계속 교리에 자신을 맞춘다면, 실리성이나 경제성은 있을지언정 그 모든것들은 착취가 되어버리고 가치와 실체를 잃어버린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타자를 소유하지 않은채 도덕을 추구한다면 자신이 소비되어버린다.
현대의
모든 국가들이 짬통처럼 된것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공화정 사람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권리를 돌아가면서 다같이 누린다는 말은
인간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온 망상이다. 아무리 의식주의적으로 애를 써도, 그것이 나오는 지점은 영혼이 아니라 의식이라는점에서,
만들어진 점의 연속이 될 뿐이다. 자연스러운 선으로 이어지질 못하고 만들어진 점 점 점으로만 계속해서 찍힐뿐이고, 이미지에
맞춰가는 흉내일뿐이다.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일시적으로는 이미지를 지킬지라도 필연적으로는 굵직굵직한것 위주로
신경써가며 빠께스 대충 포장하듯이, 쌍팔년도 씨름판 주변 비니루 대충 덮듯이, 쓰레트 지붕 파란색으로 마감처리 하듯이 하게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가라는것이 '소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을 이해하질 못하니까 권리를 '소유'하려는 남자들을
정신적으로 덜성숙하고 전근대적인 유치한 사람으로 여기는것이다. 시간속 소유가 아니면 공간속 소비만 있을뿐인데, 소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소유에 따른 의무를 부여하고 소유에 따른 권리는 지지 말라고 요구하는것이 바로 현대 공화정이다
남녀관계
또한 그렇다. 남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여자는 움직임이 없으므로 남자가 여자에게 들어가는것이 기본 모양이다. 남자가 여자를
소유하려고 하는것은 시간을 가진 존재로서의 당연한 본능이다. 상대를 소유한다는것은 자신의 마음을 상대의 그릇에 넣는것을 의미하므로
자신을 소유시키는것 또한 이루어진다. 그 같은 문에 의해 자신을 먼저 소유시켜야만이 상대를 소유하게 되는것이다. 시간을 가진
존재가 상대를 사랑할때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넣고 상대를 소유하려하는것이 본능인데, 이때 상대의 시간 또한
본능적으로 보게된다. 자신으로부터 사는 존재들은 외부에 착취당하기 싫어하는 본능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의 시간을
봤을때 자신이 손해보는것 같다고 여겨지면 그때에는 상대를 소유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건 당연한것이다. 처녀 유무를 따지는것은
여자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보는 수단일뿐이다. 몸을 허락해준다는것에는 소유된다는 의미를 가지며, 그정도의
전격적인 허락 행위에는 사랑에 대한 승인 또한 담겨있기 때문에 이전 주인에 대한 열등감과 현재 여자에 대한 질투심 등이
일어날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인간 본연의 마음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니 처녀인 몸을 보고 따진다느니 정신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헛소리들을 하는것이다. 순결을 따지는것은 사랑하기 위한 본격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하기 위함이다. 공간밖에 없는
현대인들과 여자들은 감정을 만들어내는것도 공간에서만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니 이해를 못하는것이다. 또 5번 정도는 괜찮지만
300번 정도는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는것도 인간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온것들이다. 순결은 그라데이션이 아니라 오로지 백과 흑뿐이고 절대적인것 또는 상대적인것 둘뿐이라는것을 모르는것이다
어쩔수없이
성욕과 타협해야만 하는 경우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부정당하지 않게끔 종교처럼 작동하는 심리적인 트릭을 만들거나 막연함을 만들어
회피한다. 한마디로 성욕을 위해 영혼의 문을 닫는것이다. 그리고 외부에 의해 그러한 사실들을 인지했을때, 시간속 동물인 남자의
본성상 그것을 다시 회피하기 위해서 남들을 부정하거나 남을 특정한 각도의 피사체로 이미지화하는 식으로 관계속 상대적인것들을
설정시켜 어떻게든 자신이 부정당하는것을 회피하려고 한다. 관계속 자신이 부정당하지 않으려고 관계속에서 자신이나 대상을
이미지화하려고 하는것이다. 현대사회에서의 결혼율, 이혼율이 늘어난것은 배우자가 '절대적인 하나'가 아니라 '상대적인 여러것들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연의 욕구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물줄기에 의해 삶이 구성되는것이 아니라 의식주의적인 메뉴얼에 의해
삶을 구성하기 때문에 늘 유지시켜줘야되고 반대쪽 자극이 더 셀때에는 반대쪽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배우자가 '절대적인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순결을 지켜야만 한다. 자신이 순결을 지켜야 배우자가 귀해지는것인
구조이다. 이것은 남자에게도 해당된다. 여자들이 남자의 순결을 보지 않는것은 그것이 안중요해서가 아니라 여자들은 공간속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공간속의 동물인것은 자연질서의 조화에 따른것이므로 필수적이었다. 결국 움직임이 있는 남자가 모든것을
이루는 모양새가 구성되어야하는데, 남자가 스스로를 여자에게 소유시키게 하고 여자를 소유하는 그 구조처럼, 남자가 스스로를 순결하게
하고 여자 또한 순결하게 하는것이다. 서로가 주인이면서 서로가 종이되는 그런 도식을 이해하질 못하니 남근숭배를 하는 정신병자들이
판치는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들을 선진국 다른 국가들은 알면서도 쉬쉬하지만 왜 한국에서는 이토록이나 논란이 되었을까?
그것은
한국에서의 성욕해소는 밀폐된 통짜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공간속에서 관계적 이득을 위해 '소비'되던 여자들이 '소유'의
층위에서 여겨지기를 바라는데, 남자에게 소유에 따른 대우와 의무를 부여하면서도 권리는 가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러한
말도안되는 거래구조는 사회적으로 성립할수가 없지만 한국에서는 성욕을 배출할 통로들을 이곳저곳 틀어막고 속물적인 여자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샛길하나 없는 통짜길로 만들어버려서 이런 말도안되는 배짱장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곳을
막고 저곳을 막고 껍데기적인 도덕틀을 강제시키자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는 동거혼이 일상이 되었다. 어느누구도 착취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성욕을 위해 영혼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거기다 한술 더떠서 인위적으로 기어코 모순을
실현시키려고 호스를 틀어막아대니 이에 대한 반발이 더 심할수밖에 없는것이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어느누구도 갈보를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소비'는 언제든지 환영일수 있겠으나 '소유'의 층위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소유라면 더더욱더 회피하려 할 것이다.
인간 본연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이런 모순들을 자꾸
시도하고 도덕이라는 이유로 강제하는것이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들을 유치하고 덜성숙한 모습으로 이해하는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사는것이, 권력을 추구하고 소유하고자 하는것이, 순결한 배우자를 소유하고자 하는것이, 자식을 소유하고자 하는것이 어째서
'유치한' 모습들이란 말일까? 가장 이기적인것이 가장 이타적인것이라는 의미조차 이해하질 못한다. 남을 소유하는것이 남의
종이되는것이라는 의미도 이해하질 못한다. 그냥 미디어적으로 단어 그 자체의 느낌만 보고는 즉물적인 반감부터 가진다. 공간속에서
살면서 시간속에서도 이득을 보려는 착취적이 인간군상들에 의해 이러한 논쟁이 만들어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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