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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제 6편. 승부사의 고통, 패배를 알다

판타마린 2005.08.05 06:33:38
조회 870 추천 0 댓글 3



어린 시절의 창호(맨 왼쪽)와 창호에게 바둑을 만나게 해준 할아버지 이화춘씨(안경 낀 분)





                                                    까만돌 하얀돌 창호사범~^^





          이창호 9단과 이 9단의 친동생이자 매니저 겸 보디가드인 이영호님










"전류" 전영선 7단은 프로기사로는 처음으로 창호를 가르친 사범이 된다.

전 7단은 어린 시절부터 장래가 유망한 기재(棋才)였으나 술을 좋아하고 특유의 자유스러운 가치관에 의한 기행때문에 대성하지 못했다. 또한 승부에 있어서 그 당시 한국바둑의 풍습처럼 낭만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천성에 걸맞게 파격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싸우지 않고 자기 집만 지으려 하는 안전지향적이고 소극적인 바둑을 "화초바둑"이라고 하며 경멸했다.

판을 휘어잡는 주도권 즉, 기세를 중요시한 탓에 "(상대의 짓쳐들어오는 행마를)끊지 않으면 바둑도 아니다. 그렇게 비겁하게 두어서 이기면 뭐하냐." 는 말을 외치던 전 7단. 그 전 7단이 자신의 기풍과는 전혀 달라보이는 바둑을 가진 창호라는 소년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 때 창호는 9살이었다.

전 7단은 당연히 자신의 그런 바둑관을 창호에게 전하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타이르고 말을 해도 창호는 여전히 상대의 공격을 맞받지 않고 그저 비켜갈 뿐이었다. 때로는 길을 내주기도 했다. 창호는 보고 있는 전 7단이 답답하리 만큼 전투를 하지 않으려 했다.

예전에 창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던 이정옥 사범과 비슷한 이유로 전 7단 또한,

"이 녀석이 정말 재능이 있는 건가...?"

하고 늘 스스로에게, 그리고 대답하지 않는 창호를 향해 무언의 질문을 가하고는 했다.

전통적인 바둑교육관에 따르면, 바둑을 시작하고 배우고 있는 소년들에게 전투를 장려하는 편이다.
국지적인 전투이건 판 전체의 대세를 가름하는 전투이건 그 치열한 돌들의 공방을 자신의 승리로 평정하려면 수읽기, 대세 운영, 형세 판단 등 바둑의 모든 테크닉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총체적인 실력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기도 한 전투를 통해 경험과 기량을 쌓게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년 기사들은 전투를 즐긴다. 굳이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한창 패기가 솟구칠 나이인 그들은 대개가 화려하고 스릴있는 승리를 위해 끊임없이 전투에 임하는 것이다.

창호는 달랐다.
창호의 바둑은 전 7단이 그렇게나 독설을 가하던 "화초바둑"외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 7단은 자신이 가르치는 기풍을 따르지 않는 창호에게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바둑을 두는 폼새를 보면...눈을 바둑판에 고정시키고 가끔 졸린 것처럼 눈을 뻐끔뻐끔 깜박이면서 말없이 그 한판에만 집중을 하고 있는데.

상대가 싸움을 걸어도 슬쩍 양보하고 피해가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정 어쩔 수 없이 전투를 감내해야 할 때는 정말 답답하리만큼 견실하게 수비를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상대에게 싸움을 거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전 7단은 그런 창호를 보고 "화초바둑"이라고 호통을 치며 패기가 없다느니 하는 말을 하기 보단, "이녀석은 무슨 재미로 이리도 열심히 바둑을 두는 것인가..."하고 궁금증을 감추지 못했다.

대개의 기사들의 대국에서는 소소한 전투에서부터 대공방전까지 한 판에 무수한 전투가 벌어진다. 더군다나 어린 기사들의 패기어린 대국에서는 그야말로 장닭싸움을 연상시킬 정도다.

그런데 창호의 대국은 어떠한가. 주변에서 바둑을 좀 둔다하는 사람들과의 대국을 보면...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긴다. 창호가 이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데 판을 보면 별로 느껴지는 것이 없다.
승자의 찬란한 기세라던가 일발에 상대를 사지로 몰아넣는 묘수가 눈에 번뜩이거나...아니면 패자의 결정적이 패착이 보이기 마련인데.

무미건조한 한판의 바둑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굵은 선 하나가 수평으로 곧게 지나가는 느낌만 들뿐이었다.



전영선 7단은 그런 창호를 보며 반신반의한다.
상대의 급을 가리지 않고 많은 승리를 낚아내는 것을 보면 실력은 있는 것 같은데...
왜 이겼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 두고 있는 것을 보고 있거나 창호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은 모험을 잘 하지 않고 견실하다는 것. 너무 아는 길로만 가려 하는 것 같았다. 아이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창호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창호는 이겨나갔다.
승률이 계속 좋아지고, 바둑도 늘어가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전 7단은 서서히 창호에게 어떠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창호를 새롭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아이는 계속 이기고 있다.
그런데 왜 이겼는지...도통 뚜렷한 이유가 잘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
운으로 이겼거나.
아니면...
이 아이가 나같은 범부는 알아볼 수 없는,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거나.
운으로 그 많은 판을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니.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할 것이다...




2학년 여름방학.
창호는 해태배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 출전했다. 창호로서는 생애 처음 출전하는 첫 바둑 대회인 것이다.
바둑돌을 집은 지 1년만에 전 7단을 따라 서울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 대회에서 창호는 16강까지 진출했으나 당시 6학년 생이던 류시훈에게 패배하고 만다.
류시훈과는 그때 처음 만난 것이다.

류시훈은 이후 도일하여 근대바둑의 본고장 일본에서 바둑을 두게 되며 이후 일본의 타이틀전에서도 자주 얼굴을 내비치게 되는 기사가 된다.

어쨌든 아쉽게 16강전에서 떨어졌으나 16강 멤버 중 가장 어렸던 창호는 장려상을 받았다.
또 전영선을 따라 한국기원에 가서 전북 출신의 프로기사들과 5점 치수대국을 해서 이기기도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창호의 기재를 칭찬했다.

그렇지만 창호는 그리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무표정 속에 숨겨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괴로움.
생애 처음으로 "패배"라는 승부사 된 사람들의 고통의 근원이자 그림자 같은 존재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난다긴다 하는 프로들의 칭찬보다도 창호는 그 첫 패배가 가슴에 박혔다.
시종일관 그 16강전(류시훈과의 대국)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전주로 돌아온 창호는 이후 더 열성적으로 바둑에 매달렸다.
전에는 재미를 추구하는 목적으로 바둑을 두었다면...
이제는 바둑을 두는 목적에 "승리"라는 새로운 가치가 추가된 것이다.

실로 그 패배가 창호에게 끼친 영향은 심대했다.
그 패배는 선생님들과의 대국에서 패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고통"을 주었다.

우물 안 개구리...
자신보다 강한 자기 또래의 경쟁자들이 많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 때 졌었던 상대가 류시훈인지 알았나.
"몰랐다."

-그 바둑은 몇번 정도 놓아봤나.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왜 졌는지 궁금해질 때마다 이기는 길이 없을까 하고 복기를 해보곤 했던 것 같다."


이무렵부터 창호는 자정이 넘도록 기보를 보며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채수희씨가 여러번 말렸지만 어디 창호고집이 보통 고집이던가.
훗날 창호는 자정부터 새벽 2시가 넘도록 공부를 하게 됐다.
그 이유를 물으면,

"밤이 깊어지면 머리가 맑아져요. 그 때부터 진짜 공부를 하는 거죠. 어릴 때부터 그래서 이젠 습관이 되었거든요."

라고 한다.

실전을 위주로 하던 창호의 바둑공부의 패턴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제 창호는 바둑책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 책들은 창호에게는 신비의 세계로 안내하는 동화책과 같았다.
책장을 여는 순간, 무한한 361로의 세계가 펼쳐졌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는 형형색색의 스토리가 수도 없이 들어있었다.
매일 밤이 이슥하도록, 밤벌레 소리 우는 소리조차 사라질 때까지 창호는 그 기기묘묘한 세계 속에서 노닐었다. 자연히 늦게 일어나게 되었다.
잔칫날 친척들이 오랜만에 모여도 잠시 있다가 창호는 이내 자기 방으로 조용히 사라져 다시 자신만의 유토피아로 빠져들고는 했다.

안그래도 없던 말 수가 더 없어졌다.
머리속은 온통 바둑으로 가득해서 누군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마저 허다했다.
그야말로 창호는 바둑판 침대에서 바둑알로 된 이불을 덮고 잘 것만 같을 정도로 "바둑"에만 온 신경을 몰입했다.

그 한 번의 패배가 창호에게는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처음으로 승부사의 짐인 "패배"를 만난 창호는...
어떤 다짐을 한 것일까.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패배라는 것이 바둑에 모든 것을 담은 자신에게 그리 유쾌하지 못한 것으로 다가온 것은 분명하다.

아는 것은 안다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창호.
순수의 지혜를 가진 창호는 그 때 "패배"는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승부사는 수없이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시련속에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살아가야하는 것이 업일지 모르지만...

자신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패배"는 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해가 바뀌어 84년 1월.
육영재단에서 주최하는 어깨동무 어린이 바둑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 대회 최강부 결승에서 창호는, 자신에게 패배를 가르쳐 준 류시훈에게 설욕하며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창호에게 있어서는 첫 우승인 셈이다.

바둑을 배운지 1년 반, 첫 패배를 맛 본지 5개월 만의 일이다.



"매우 기뻤습니다."
                                                                                  -李昌鎬 9단



                                                         ...투 비 컨티뉴...






※ 이 글은 중앙일보 바둑전문기자 박치문 위원님의 <이창호 이야기>를 토대로 수정, 각색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처는 www.leechangho.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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