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거문오름 일대에서 펼쳐진 ‘2023 세계유산축전 제주’.
축전 기간 동안 만장굴 미공개 구간과 김녕굴, 뱅뒤굴 등 3개의 용암동굴이 사전 신청자들에게 개방되었고, 거문오름에서부터 월정리 바다까지 용암이 흘러간 길을 따라 걷는 워킹투어 코스도 열렸다. 평상시에는 접근이 금지된, 축전 기간인 5일간만 일반에 공개되는 코스들이다. 또 거문오름 인근 마을인 김녕리, 행원리, 선흘1리, 선흘2리, 덕천리, 월정리, 성산리 등 7개 마을에서는 각각 하루의 일정으로 ‘세계자연유산마을을 찾아서’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웃산전굴 근처의 웃산전못
용암이 분출한 거문오름에서부터 에메랄드빛 바다색이 고운 월정리 바다까지 용암이 흘러간 흔적을 좇아가는 워킹투어인 ‘불의숨길’은 총 4개 구간으로 운영되었다.
1구간인 ‘시원의 길’은 축전 기간이 아니더라도 탐방이 가능한 거문오름 코스로 약 5.5km이며, 2구간과 3구간은 축전 기간에만 공개되는 구간이다. 2구간 ‘용암의 길’은 세계자연유산센터에서 출발해 웃산전굴까지 약 5km, 3구간인 ‘동굴의 길’은 지상에서는 잘 보기 어려운 용암교에서 시작해 북오름굴, 대림굴, 만장굴 3입구를 지나 만장굴 매표소까지 이른다. 마지막 4구간인 ‘돌과 새 생명의 길’은 만장굴에서 출발해 만장굴 1입구를 지난 후 김녕굴과 용천동굴, 당처물동굴을 거쳐 월정리 바다까지 이어진다.
4개 구간 중 이번 축전 기간에 2구간과 3구간을 다녀왔다.
세계유산축전 제주
2구간 ‘용암의 길’의 시작 지점은 세계자연유산센터다. 매 30분 단위로 해설사분들이 탐방을 위해 모인 사람들과 함께 출발한다.
센터 왼쪽으로 들어가 거문오름 탐방코스의 끝 지점인 출입금지 구역으로 진입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지는 삼나무숲길이 펼쳐진다. 거기서 조금 더 걸으면 2구간의 시작이다.
2구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지는 2구간 초입의 삼나무숲길.
축전 기간이지만 워킹투어는 자율탐방도 가능하다. 코스별로 색깔을 달리한 리본과 거리 표시가 부착돼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2구간의 표식은 붉은 색이다.
용암의 길
용암의 길은 5km가 조금 안 되니 짧은 구간이지만 1/3 정도까지는 한라산 둘레길과 비슷한 수준의 산길을 걸어야 한다. 평소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 이끼가 잔뜩 낀 현무암 돌무더기와 돌무더기 아래로 뿌리를 내리며 굳건히 버티고 선 나무들이 울창하다. 원시림 곶자왈의 신비가 그대로 느껴지는 구간이다. 혹여라도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를 대비해 안전줄을 매 놓았지만, 어제 많은 비가 내려 낙엽이 쌓인 바닥은 미끄럽기 그지없다.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낭떠러지 같은 곶자왈의 깊은 숲 속으로 떨어질 수도 있겠다.
길을 나선 지 40분쯤, 곶자왈의 한켠에 숯가마터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 제주 사람들이 곶자왈에서 나무를 베어 숯을 구웠던 흔적이다. 숯가마터는 원래 무덤의 봉분처럼 동그란 모습인데, 이곳의 숯가마터는 위가 깎여나가고 그 위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그래도 가마 안은 잘 보존돼 있다.
불의숨길 2구간
숯가마터를 지나 또다시 돌길을 따라간다. 비로 인한 미끄러움이 더해지니 한발 한발 내딛는게 쉽지 않지만 편한 길보다는 이런 돌길이 더 친근한 내겐 상당히 만족스러운 코스다.
2구간의 첫 1/3 구간은 거친 용암 돌길이다.
11/30은 거리 표시다. 각 번호의 단위당 거리가 200m이니 전체 구간이 약 6km라는 말이 된다. 이제 막 3/1 정도를 지난 셈이다. 꽤 걸은 것 같은 느낌인데 거친 돌길이어서 그런지 1/3밖에 오지 않은 게다.
불의숨길 워킹투어의 거리 표시.
하지만 곧바로 드넓게 펼쳐진 빌레(용암이 흐르며 만들어진 너른 암반)가 드러나더니 이내 조림한 삼나무숲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로 쭉쭉 뻗은 삼나무 구간, 제주의 삼나무숲은 어디든 동화 속 세상 같다. 이후부터의 길은 돌부리가 거의 없는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 그만큼 발걸음도 가볍고 빨라진다.
발이 편한 길을 20분쯤 걸으니 왼편으로 거대한 동굴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용암의길에서 만나는 유일한 동굴인 웃산전굴이다.
웃산전굴 제1입구.
웃산전굴은 총 길이 약 2.5km의 대형 동굴로, 동굴 천정이 무너져 형성된 2개의 입구가 있다 한다. 먼저 만나는 건 제1입구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볼 수는 없지만 입구까지 내려가는 건 가능하다. 물론 축전 기간에 한해서다.
웃산전굴 제1입구.
눈앞에 펼쳐진 동굴은 웅장하면서 압도적이다. 그동안 몇 차례 크고 작은 동굴들을 마주한 적이 있지만 이처럼 큰 동굴 입구는 처음인 듯싶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상류 동굴군으로 화산폭발이 일어날 당시 처음으로 만들어진 동굴다운 위용을 뽐낸다. 제주어 ‘웃산전’은 ‘산의 밭’을 의미하는데, 이 동굴이 그만큼 장엄하고 거대하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한참을 동굴 입구에서 컴컴한 동굴 속을 멍하니 응시하다 다시 길을 나선다.
동굴을 나오니 이제 키 큰 나무들은 보이지 않고 키 작은 덤불숲 사이로 난 비교적 넓은 평지 같은 길이 펼쳐진다. 10분쯤 걸었을까? 또다시 눈을 즐겁게 하는 멋진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멀리 오름을 배경으로 아담하게 자리한 습지, 웃산전못인가보다. 근처의 동백동산에만 습지가 100여개라던데, 과연 이 주변은 생태계의 보고가 틀림없다.
불의숨길 제2구간
멀리 오름을 배경으로 자리한 작은 습지도 탁 트인 시원함을 선사했는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몇 발짝 더 가니 오른편으로 훨씬 더 큰 규모의 아름다운 습지가 보물처럼 숨겨져 있다.
보물처럼 숨겨진 습지
이제는 코스가 거의 끝나가는 구간이라 뭔가 별다른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습지를 지나 조금 더 가니 또다시 용암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축전 기간이라 그런지 철문이 열려 있다. 사람들이 오간 곳인 듯, 돌계단도 가지런히 정비돼 있다. 조심스럽게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 본다. 이곳이 아까 만났던 웃산전굴의 제2입구다. 제1입구에 비해서는 동굴 입구가 작지만, 동굴 입구만으로도 웃산전굴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된다.
웃산전굴 제2입구.
거친 돌길 이후로는 평지 같은 길이어서 걷는 구간이 다소 심심했었는데. ‘용암의길’은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마지막 구간에서 감동을 더한다.
지난해 축전 기간에 워킹투어를 해볼까 하다가 ‘용암이 흘러간 길이라지만 땅 위를 걷는 건데 뭐 특별한 게 있을까?’ 하는 생각에 오지 않았었는데, 미공개 구간인 이곳은 특별한 게 차고 넘칠 정도다.
거대한 규모의 웃산전굴과 웃산전못 두 곳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약 5km의 '용암의길'은 그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워킹투어를 걷는 동안 목에 거는 목걸이. (아쉽지만 반납해야 한다.)
올해 축전은 종료됐지만, 세계자연유산축전 제주는 내년에도 계속된다. 사전신청을 한다면 7.4km의 만장굴 전 구간은 물론이고, 김녕굴, 벵뒤굴까지도 탐험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축전 기간에만 특별히 개방되는 워킹투어 코스까지 있으니 한발 더 가까이 제주의 속살에 다가가고 싶다면 내년 축전을 미리 체크해두는 게 좋겠다. 제주올레길, 한라산둘레길, 그리고 제주의 다른 숲길과는 완전히 다른 또다른 제주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세계자연유산 축전 기간에는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되므로 차를 주차한 후 워킹투어에 참가한다 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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