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프로그래밍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추가한 갤러리가 없습니다.
0/0
타 갤러리 프로그래밍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어릴적 조영구 아저씨랑 뽀뽀했던 아이돌은? 직붕이
- 안양예고 시절 아이돌 데뷔를 꿈꿨었다는 붐 ... JPG ㅇㅇ
- 돈도 없고 시간도 없을 때 인생 리셋하는 방법 ㅇㅇ
- 4050이 운동을 열심히 해야하는 이유 배그린
- 싱글벙글 니가 먼저 꼬셨잖아 ㅇㅇ
- 식민지 남성성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남성을 분석하다] 도다해
- 아니 신혼인데 와이프가 로맨스를 느끼고 싶다고 드라마를 보는데 갓럭키
- 공모전 박았다가 개같이 떨어진 만화) 고어틱 로맨스 4화 그림쥉
- '이물질 걸림' 한강버스…"정밀 조사·일부 구간 운영 계속" 윤어게인y
- 싱글벙글 극한직업 일본성우 ㅇㅇ
- 싱글벙글 헬창 남친 때문에 빡친 여친.manwha ㅇㅇ
- 싱글벙글 15살 56키로그램 소녀의 몸매 자랑 ㅇㅇ
- 미국 초토화 시키려던 중국인....JPG ㅇㅇ
- 제주도 의외의 수출품 1위 ㅇㅇ
- 결혼 후 혼자 살아보고 싶어서 옥탑방을 구한 황제성 ㅇㅇ
최근 일본 음식 가격
소고기 먹으러 갔는데 저거 각각 2점씩 들어있음. 한점당 한입거리 2명이서 갔으니 걍 9점씩만 먹은거 한국에서 먹는 와규보다 훨씬 맛있었음 그런데 가격이 저정도에 약 7만원 게다가 고기만 저렇게 딱 나오고 고기 찍어먹을 소스랑 소금 조금 나오는게 전부. 대부분의 반찬들은 따로 주문해야함 그냥 돌아다니다 보인 오므라이스집? 샐러드 3천500원 함박스테이크 얹어진 오므라이스 인데 1만얼마 했던거같음 일본 오므라이스는 유튜브에서 한번씩 보이는 그 윗부분 계란 배가르면 촤르르르 계란 반숙으로 흘러내릴줄 알았는데 걍 얇은 계란옷 하나가 전부더라.. 국물에 빠져있는 오므라이스 다해서 3만3천원정도 좀 외딴곳에 있는 돈카츠 집 들어갔는데 메뉴들이 6만원, 7만원, 이런게 있고 그나마 제일싼게 3만9천원짜리 저거더라. 양은 그냥 평범하게 한국에서 안심돈카츠 시키면 나오는 양과 비쥬얼 맛은 확실히 한국에서 1만5천원 정도에 파는 안심돈카츠 수준보다는 더 맛있음. 그런데 도저히 3만9천원의 가격 퀄리티는 아니라고보였음. 저정도 맛이랑 퀄리티면 한국에서는 한 2만5천원만 줘도 먹을수 있을거같았음. 된장국은 일본 미소국보다는 진하고 한국의 된장보단 살짝 연했음 앞부분에 젓가락 옆에 흰색은 그냥 치킨무 맛
작성자 : ㅇㅇ고정닉
우리는 이탈리아군을 벌레처럼 짓밟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러시아 초원을 가로질러 이탈리아군이 후퇴한다. 그들은 니콜라예프카 부근의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다. 치열한 전투와 막대한 사상자 끝에, 그들은 1943년 1월 말, 추축국 전선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에서 후퇴하는 이탈리아군 알피니 산악 보병대 병사들. 이탈리아군은 소련군의 포위를 뚫고 나온 추축군 군인들 중 하나였다. 1943년 1월 초, 스탈린그라드 외곽에서 소련군의 공세로 포위 당할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군은 끊임없는 후퇴를 강요받았다. 후퇴하는 내내 그들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고, 23만명의 이탈리아군은 그 중 13만명을 손실하게 된다.먹을건 떨어졌고, 챙겨 온 장비나 러시아 농민들에게서 훔친 음식 부스러기만 있었다. 띄엄띄엄 있는 러시아 인들의 가옥 말고는 쉴 거처 또한 없었다.마리오 리고니 스턴은 1942년 11월 10일, 최전선의 거점이 포위 공격을 받은 이후 탁 트인 초원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암울한 새해를 맞이했지만, 이제 그 일은 아득한 기억으로만 남았다.우리는 또 다른 좁고 황량한 계곡을 지나간다. 불안한 마음으로 계곡을 따라 걷는다. 숨이 막힐 것 같고, 계곡 밖으로 나가고 싶다.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귀를 기울이고, 숨을 멈춘다. 도망치고 싶다. 언제든 전차 포탑이 나타나고 기관총 사격 소리가 들릴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계곡을 통과 해야한다.배가 고프다.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안 난다. 대열은 1마일쯤 떨어진 두 마을 사이를 지나간다. 거기에 가면 분명 먹을 게 있을 것이다. 작은 무리들이 우리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마을들을 향해 식량을 찾아 나선다. 장교들이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거기에 빨치산이나 소련군 정찰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외친다.우리 소대원 몇 명도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 잠시 쉬는 동안 우물가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가장 가까운 이스바(러시아식 가옥)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은 마을에서 가장 큰 집 중 하나였고,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집안 곳곳을 뒤지고 난 후였다. 내가 찾은 건 러시아인들이 시럽을 만드는 데 쓰는 말린 사과 한 줌 뿐이었다.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었고 밤은 깊어만 갔다. 춥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춥다. 아마 영하 40도쯤 될 것이다. 입김에 턱수염과 콧수염에 얼어붙는다. 우리는 담요를 머리 위로 끌어올리고 말없이 걸어간다. 우리는 멈췄다. 대지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무도, 집도 없다. 오직 눈과 별, 그리고 우리뿐이다.나는 눈 위에 몸을 던졌다. 눈조차 없는 듯했다. 나는 허공 속에 눈을 감는다. 어쩌면 죽음도 이럴까? 아니면 내가 잠들어 있는 걸까? 나는 하얀 구름 속에 있다.누가 날 부르지? 누가 날 이렇게 세게 흔드는 거야? 그냥 내버려 둬!!! "리고니! 리고니! 리고니! 일어나. 일어나. 리고니."모시오니 중위가 걱정스럽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그가 내 위로 몸을 숙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두어 번 더 몸을 흔들자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의 검은 두 눈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흰 서리로 윤기 나고 뻣뻣한 수염과 머리에는 담요가 덮여 있었다."리고니, 이거 먹어." 그가 말했다. 그리고 작은 알약 두 개를 내게 건넸다. "삼키고, 어서 일어나서 따라가자고." 나는 일어나 그와 함께 걸었다. 우리는 점차 일행을 따라잡았고,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눈 위에 몸을 던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동료 첸치와 모시오니는 내게 말을 타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깨어나는 것보다 더 끔찍하다. 말 위에서 동상에 걸린채, 다시 내려서 걸어가는 것이 너무 두렵다.첸치가 내게 담배를 건네주고 우리는 담배를 피웠다. "리고니,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게 뭐야?" 내가 미소 지었고, 그들도 미소 지었다. 내가 밤마다 걸을 때면 늘 그렇게 말했기에 그들은 내 대답을 알고 있었다.집으로 들어가네. 우리 집 같은 집에 들어갔지. 옷을 다 벗고 부츠도, 가방도 없고, 머리에 담요를 덮어 쓰지 않은채.목욕을 하고 린넨 셔츠를 입은 뒤 커피 한 잔을 들이키고 침대에 몸을 던졌어. 난로가 있는 따뜻한 방에 커다란 침대, 매트리스 시트가 깔린 진짜 침대에서 말이야. 그리고 잠들고, 잠들고, 또 잠들었지. 그러다 종소리가 들려서 깨어나보니 식탁에 음식들이 차려져 있어. 와인, 스파게티, 과일들 포도, 체리, 무화과가 있지. 그걸 먹고는 음악을 들으면서 다시 잠들었지.첸치가 웃고, 안토넬리도 웃고, 나의 동료들도 웃었다.마리오 리고니 스턴은 행운아 중 한 명이었고,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 줄 수 있었다. 이탈리아군의 후퇴는 가면 갈수록 더욱 비참해져만 갔다..파수비오 사단 장교였던 유제니오 코르티는 더 심각한 사례들을 회상한다.지친 사람들은 눈밭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미쳐갔고,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가장 끈기 있던 사람들 만이 오랫동안 길을 따라 기어갔지만, 결국 이 불행한 사람들은 힘이 다할 때까지 계속 나아갈 뿐이었다.내가 가장 자주 보았던건 그들의 정신이 붕괴하는 것이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는 눈 더미에 앉아 부츠를 벗고 맨발을 눈 속에 파묻은 한 군인 때문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웃음을 마친 그는 큰 소리로 아주 즐거운 노래를 불렀다. 이런 일들이 주위에서 비일비재 했다.만약 붉은 군대가 그들의 후퇴 행렬을 따라 잡으면 아무런 자비도 없었다. 다음은 소련 제18전차군단 170 전차여단의 세르게이 오트로셴코프의 회상이다.흘레브니의 코사크 농장에 도착했는데, 결코 잊지 못할 일이다.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페트로프스키라는 또 다른 농장이 있었다. 그곳도 소련 전차들이 점령하고 있었지만, 우리 여단의 전차는 아니었다. 언덕 위에 위치한 농장들 사이에는 저지대가 있었다. 이른 아침, 거대하고 무리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제8군이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저지대를 따라 진격했다. 이탈리아 선발대가 모습을 보이자 "전진! 분쇄!"라는 명령이 종대를 관통했다. 그때 우리는 양쪽 측면에서 그들을 맹렬히 공격했는데 그런 아수라장은 다시는 본 적이 없었다. 이탈리아군은 말 그대로 땅바닥에 박살 났다. 우리가 얼마나 큰 분노와 증오를 품고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직접 봤어야 안다. 우리는 이탈리아 군인을 벌레처럼 짓밟았다. 겨울이었고, 우리 전차는 석회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전투가 끝난뒤 우리 전차들은 포탑 아래는 전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피 속에 헤엄친 것 같았다. 궤도를 힐끗 보았는데, 팔 하나가 끼어 있었고 다른쪽에는 두개골 조각이 있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날 수많은 이탈리아군 포로를 잡았다. 이탈리아 제8군은 사실상 사라졌다. 적어도 그 이후로는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https://www.ww2today.com/p/43-01-21-the-italian-retreat-from-stalingrad The Italian retreat from Stalingrad21st January 1943: Mussolini's's adventure on the Eastern front comes to a dismal end, as Italian troops make a desperate escape from Red Army encirclementwww.ww2today.com내용 출처 소련에서 로케이션한 1970년 작 이탈리아 영화 해바라기 장면 중
작성자 : 투하체프고정닉
(스압) 90년대 컴퓨터 추억 회상
싱붕이가 처음으로 개인컴터를 가지게 된건 97년도였음. 나는 학교나 주변 지인 어른들 컴퓨터를 저주 접해서 제일 구형컴은 286 컴터도 만져봤고 최신형은 486 컴터까지 만져봄 그러면서 그당시 가난했던 집안에서 계속 컴퓨터를 사달라며 떼를 썼고 컴터만 있으면 공부 열씸히할거라며 보챘음. 그때가 아마 96년도였을거임. 거의 1년동안 울고불고 떼쓰며 컴퓨터 사달라고해서 97년도에 결국 사주심 586 컴퓨터. 흔히 펜티엄 1 프로세서가 탑재된 컴퓨터임. 본체 + 모니터 + 키보드+마우스+잉크젯 프린터 이렇게 풀세트로 그당시 돈 200만원 정도를 주고 사셨음 그당시 200이면 지금 가치로는 400만원이 넘는돈. 그때는 주로 cd롬을 많이 썼음. 600메가 정도의 고용량 데이터를 cd 한장에 넣어서 쓸수있는 엄청난 장치였음. 그래서 고용량 게임이나 노래 등등 용량을 많이 먹는것들은 대부분 cd에 쓰여져 사용됐는데 당시 하드디스크 용량이 2기가바이트, 3기가바이트 수준일 때였으니 게임도 cd에 있는 데이터를 온전히 pc 하드에 옮겨서 설치하지않고 일부 데이터만 옮겨서 설치하고 나머지는 cd롬으로 실시간으로 읽으며 게임을 했음. 그때문에 cd롬 읽는 속도가 느리면 그만큼 게임 플레이중 로딩시간이 길어지거나 끊김이 발생하기때문에 cd롬의 배속 성능은 지금으로 따지면 뭐 그래픽카드 와 같은 느낌으로 게임 플레이 성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부품이었음. 게다가 지금 컴퓨터을은 전력소모량이 높고 발열도 심해서 열을 식히기 위해 쿨링펜 돌아가는 소음이 어느정도 있지만 당시 컴퓨터들은 쿨링펜 소음보다는 cd롬 돌아가는 소음이나 하드디스크 소음등이 지금 컴퓨터들에 비해 상당히 심했음. 그 완벽할듯한 cd 라는 고용량 저장매체는 가장 큰 단점이 바로 한번 데이터를 넣게되면 삭제나 덮어쓰기나 수정이 불가능했음 하드디스크라던지 우리다 평소 쓰는 usb 등등의 저장장치들은 마치 연필로 글을 썼다가 지우개로 지우거나 다시 쓸수있는등 여러번 지우고 쓰고 수정이 가능하지만 당시 cd들은 마치 볼펜으로 쓴것처럼 한번 쓰면 다시 수정을 못함. 그게 가장 큰 단점이었음. 그래서 cd롬과 더불어 많이 쓰였던게 바로 플로피 디스크. 8인치 플로피는 거의 본적이 없고 구형 컴퓨터에서 5.25 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많이 사용하는걸 봤었음.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많은 프로그램들에서 저장할때 쓰는 저장 아이콘으로 쓰이는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저게 내가 컴퓨터를 쓰던 시절엔 cd와 함께 주력 이동형 저장장치였음 저장가능 용량은 무려 1.44 메가바이트 당시 만들어지던 게임들은 용량에 목숨을 걸고 최적화해서 나오기 때문에 1.44 메가바이트라는 용량인데도 불구하고 엥간한 게임들은 다 들어갔음. 심지어 그당시에 사진들은 워낙 열악한 수준의 해상도를 가진 사진들이 대부분이라 사진 이래봤자 겨우 50키로바이트 이정도 용량이었음. 내가 친구한테 게임이 들어있는 플로피 디스크를 빌려오면 아빠는 항상 그 내용물에 음란물이 없는지 검사했음. 당시 주력으로 쓰던 운영체제인 ms dos 당시 내컴터는 97년도에 산 제품이라 윈도우 95가 있었어야 할때인데 없었고 존재도 몰랐음. 당연히 컴터 사기 이전부터 남들 컴퓨터 만져볼때도 ms dos 가 주력이었고 컴터 산 뒤에도 ms dos 를 당연하게 써왔어서 딱히 불편함을 못느꼈음 그러다 외삼촌중에 프로그래머가 계셨는데 시간날때 우리집 방문하셔서 컴터 손좀 봐준다고 하시더니 윈도우 95를 깔아주시더라 그 전까진 ms dos 를 주로쓰고 각듬 윈도우 3.1 이라는걸 썼는데 사실상 생소했던 윈도우 3.1은 별다른 기능도 잘 모르겠고 불편해서 잘안쓰다가 첨으로 윈도우 95를 써보고 신세계를 느낌 정말 ms dos 쓸때에 비해 너무 칼라풀하고 직관적이고 너무 너무 신세계였음. 물론 기존에 사용하던 게임들 대부분이 dos 기반이라 윈도우에서 제대로 실행이 안되는건 dos 를 사용해서 실행해야 했지만 윈도우용 게임도 많았고 윈도우에 포함된 기본 응용프로그램들도 너무 신세계였음 그렇지만 아무리 윈도우 95라 해도 결국에 뭔가 정보를 불러올때는 cd 나 플로피 디스크 같은거로만 정보를 입력할수 있었음 그러다 우연히 그당시 유행하던 컴퓨터 사용방법 과외를 받게되면서 과외 학습 내용중에 pc 통신이란게 있었음. 말 그대로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 같은 개념의 통신서비스. 이전까지는 아무런 인터넷이나 통신연결이 안된 로컬 컴퓨터만 사용해오다가 컴퓨터 과외수업을 빌미로 선생님이 부모님 설득하셔서 당시 엄청난 요금을 내야했던 pc통신을 가입하게됨 나는 선생님 추천으로 천리안 이라는 pc통신을 가입햇고 전화선을 컴퓨터 모뎀에 연결하여 접속시도를 할수있었음 그당시 사용하던 모뎀의 전송속도는 최대 56키로 비피에스 였는데 한마디로 실제 전송 속도는 초당 약 5키로바이트 수준 접속하면 이런식의 메뉴창이 뜨고 각 메뉴 번호들과 명령어를 입력하며 진입하고 사용가능했음. 윈도우에서 실행할수 있었지만 내용물은 윈도우 기반이 아닌 도스기반으로 제작된 프로그램같았음. 그래도 매번 cd 나 플로피 디스크로만 새로운 정보를 받을수 있다가 저렇게 pc통신으로 새로운 자료나 정보도 받고 다른사람과 실시간으로 채팅이나 소통을 할수도 있어서 정말 신세계 였으나 단점으로는 접속 1분당 요금이 계속 발생하는 구조이고 요금도 만만치 않아서 뭐 10분 20분 접속하는정도야 큰 무리가 없었지만 막 30분이상. 1시간 이렇게 접속하는건 너무 부담이됐음. 그래서 항상 오늘은 pc통신 접속해서 뭘하고 어떤자료를 검색해서 받고 막 이런 계획을 다 짠뒤에 pc통신 접속 하자마자 스피드런 하듯이 하려던 행동들을 빠르게 수행하고 심지어 긴 글을 읽거나 해야할때는 글들을 복사해서 컴퓨터 메모장 같은데 붙여넣기 한 뒤에 pc통신 접속을 끊고 붙여넣은 메모장에다가 글을 천천히 읽기도 했음 그리고 이전까진 간단한 아케이드 게임만 해도 시간가는줄 모르고 푹 빠져 살았다면 얼마 지나고 나서부터는 스타크래프트1 같은 엄청난 게임을 접하게 되며 정말 미친듯이 게임에 중독되기 시작했음. 그러다가 바람의나라 라는 게임에 중독돼서 pc통신 + 바람의나라 부가요금까지 해서 엄청나게 지불하게되어 엄마한테 죽도록 쳐맞기도 했고 디아블로2 라는 게임이 새로 나오며 엄청 열풍이 불었는데 당시 내 컴퓨터로는 거의 플레이가 불가능한 사양이라 또 부모님한테 엄청나게 떼를 써서 펜티엄1 컴퓨터 산지 딱 3년만에 펜티엄3 컴퓨터로 바꾸게됨. 물론 펜티엄1 컴퓨터때보다 펜티엄3 때가 훨씬 수월하게 게임플레이가 가능했지만 역시나 일부 구간에서는 엄청난 끊김이 발생했고 당시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집안 경제가 완전 폭삭 주저앉았기 때문에 또 새컴을 사는건 절대 불가능이고 결국 이걸 해결하기위해 컴퓨터 부품 공부까지 혼자 해가며 인터넷에서 램을 하나 사서 추가로 장착하며 여러 게임들이 더 수월하게 작동되게 됐음. 그때까지만 해도 그래픽카드를 장착하진 않았는데 솔직히 돈 몇만원 안하는 램하나 추가했더니 컴퓨터 게임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는걸 몸소 느꼈고 대기업 완제품 컴퓨터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찍게됨 램 업그레이드를 한 팬티엄3 컴퓨터도 슬슬 맛탱이가 갈 무렵쯤 점점 고사양 3d 게임들이 출시하게 되었고 딱 내가 고등 졸업후 바로 취업을 해서 번 돈으로 첨으로 부품 견적짜서 조립식 컴터를 주문하게 됨. 대기업 완본체들보다 훨씬 저렴하고 성능도 좋아서 그 후로는 계속 조립식 컴퓨터만 찾게되었음. 워낙 컴퓨터에 인생을 갈아넣다시피 해서 학업 성적은 굉장히 망쳐서 대학도 안갔지만 컴퓨터만큼은 상위권 이상으로 잘 다뤘고 컴퓨터 관련 직종을 하고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전혀 관련없는 직종의 일을 하게됨. 지금 사용중인 컴퓨터는 9800x3d 에 5090 이 달린 컴퓨터를 사용중임. 요즘은 스마트폰 시대라 컴퓨터는 예전처럼 인기가 많진 않은데 내가 군대 전역하고 아이폰 3g 가 첨 나왔을때 군대월급 10만원도 못받던 내가 아이폰같은거 사긴 무리였고 후에 국내 휴대폰 제작사의 스마트폰을 처음 구매하게 됐을때는 그때 아는 큰형님들. 당시 나이 30대 중후반인 머리벗겨진 형들이 돈이 많아서 아이폰부터 첨 사서 쓰기시작한 세대라 나한테 어플 설치법부터 스마트폰 사용법까지 알려주심. 한마디로 지금 영 피프티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스마트폰을 사서 쓸 능력이 됐기에 스마트폰을 가장 먼저 접했던 세대고 지금의 영포티들이 당시 돈을 겨우겨우 모아 한발자국 늦게 스마트폰을 구입해서 현재의 영피프티들한테 스마트폰을 배운 세대. 스마트폰 초창기엔 앱들이 그다지 없어서인지 기본 os 기능이 별로여서인지 폰을 자유롭게 사용하기위해 탈옥(루팅) 을 아재들이 많이 하고 다녔었던 기억도 남. 쓸데없이 긴 영포티의 it 추억얘기 끝.
작성자 : ㅇㅇ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