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번 질문 : 시이나가 다시 살아난 이유?>
작품의 세계관 설정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세계관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정황을 보고 추측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렵지만 그만큼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집니다.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이 작품이 설정한 세계관이
크기 때문이죠. 작품 내에서 이 장면을 설명해주는 장면을 보자면
쿠리가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이나 쿠리가 원폭피해 입은 츠루마루에게 몸은 왜 안 바꿨냐고 물을
때 어차피 머리가 다쳐서 복구불가능해서 그런 것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밖에도 스도우가 용의
아이는 영혼(생명) 빼고 뭐든지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살아난 시이나를 만난 츠루마루가 시이나의 시체를 수습할 때 머리만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볼 때 용의 아이는 영혼 빼고는 뭐든지 만들 수
있고 영혼이 깃든 머리만 보존하면 얼마든지 재생이 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머리를 용의 아이가 수습해서 시이나를 재생한 것이죠. 머리에서 영혼이
빠져나가기 전에 처리했다고 볼 수 있죠.
한가지 더 알려드리자면 설정상 영혼은 대체가 불가능합니다.
용의 아이는 그래서 생명 빼고는 다 만들 수 있고 정신도 가지고 있지만 생명을 만들 수가 없죠. 그래서
영혼을 수집하는 것이 용의 아이라는 존재입니다. 정신과 영혼이라는 것이 다르다는 것도 이 작품의 설정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에 대해서는 키토 모히로 씨의 후속작인 ‘마지막과 시작의 마이르스’에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죠. 그래서 설정상 이 작품의 세계관은 생명이란 영혼이 육체와 정신에 깃든 것이라고
보고 있죠.
용의 아이는 영혼이라는 여의주(보물)를 얻고 성체인 용이 되어 용궁에서 때를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승천하여 완전한 생명이 됩니다. 그리고 이 완전한 생명은 영혼이 가진 꿈을 이 세상에 이루게 됩니다.
<2번 질문 : 츠루마루가 시이나의 아버지이자 아들인
이유?>
츠루마루의 용의 아이의 정체는 호시마루입니다. 이
호시마루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깨닫는다면 츠루마루의 저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호시마루의 귀여운
형태는 시이나의 모성애를 일깨우기 위한 방편입니다. 후에 호시마루의 원래 모습을 보면 원래 저런 귀여운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의도적으로 귀엽게
만든 것입니다. 이게 또 흥미로운 것이 아이가 귀여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이유가 어머니의 사랑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는 학설이 있죠. 즉, 호시마루는 시이나의 아들(자식) 역할입니다. 그
목적은 시이나의 어머니로서의 각성이죠. 그리고 본체인 츠루마루는 시이나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는 아버지
역할입니다. 특히 남자아이에 대한 흥미를 가르쳐주는 것이 츠루마루의 역할이죠. 이것 또한 어머니로의 각성이 궁극적인 목적이죠. 보통 딸들이 어렸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남자가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프로이트 심리학을 보면 엘렉트라 컴플랙스라는 것이
있죠. 이것이 바로 성욕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본다면 카이즈카 히로코가 시이나를 위해서도 시이나의 아버지가 없어져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사도 이해할 수가 있죠. 타마이 슌지는 어머니가 되기를 거부하는 시이나에게 있어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남자이기 때문이죠. 한 여성이 어머니가 되려면 남자에 대한 흥미가 있어야 되고 연인이 생겨야 되고 성관계를 맺어야 하고 아이를
바라야 합니다. 츠루마루는 시이나의 아버지이자 아들 역할은 할 수 있지만 연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바람둥이라서 그 자신도 시이나와 같은 신성한 존재(특별한 존재)의
연인이 되는 것은 피할려고 하죠
이 작품에는 두 대립세력이 나오는데 타마이 시이나와 츠루마루 타케오, 코가 노리오의
빛과 창조의 아이들, 쿠리 마미코와 스도 나오즈미, 타카노
분고, 코모리의 어둠과 파괴의 아이들이죠. 사토미는 파괴였다가
창조로 돌아서는 역할이죠.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다가 나중에는 어머니를 긍정하는 역할입니다. 아키라의 경우는 창조도 파괴도
아닌 인물입니다. 미래를 부정했지만(아버지의 살해, 파괴) 꿈(성욕의 충족, 창조)을 포기하지는 않았죠.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파괴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창조에 대한 갈망을 더 아름답다는 암시를 보여줍니다. 코가
노리오의 경우도 어찌보면 아키라와 비슷합니다. 창조를 바라지만 창조할 수 없는 그런 존재죠.(그래서 그의 꿈은 아이를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용의 아이를
가진 아이들의 꿈을 집약한 존재가 창조의 상징인 어머니로 각성하는 시이나와 파괴의 상징이자 모든 사람이 평등해 질 수 있는(죽음 앞에서만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다르기 때문이죠.) 죽음의 신으로 각성하는 쿠리입니다.
<3.
츠루마루가 시이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유?>
코모리가 처음 한 대사를 기억하시는지요? 그는 시이나에게 용의 아이는 별의 기억이고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도 용의 아이가 물론 있었고 그 용의 아이의 종류에 따라
그들의 목적을 알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상당히 중요한 기억을 가진 용의 아이가 스도의 용의
아이인 협작꾼과 츠루마루의 용의 아이인 호시마루입니다. 그들 용의 아이는 지구라는 용의 아이의 최측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그림자와 빛, 흑과 백, 파괴와 창조를 모시는 허무와 혼돈의 상징으로 서로 대립하는 존재입니다. 허무는
파괴로 수축하고 혼돈은 창조로 확산한다는 말은 쿠리와 스도, 시이나와 츠루마루의 관계를 설명해줍니다. 이 밖에도 작품 전체에서 엮이는 관계를 살펴보시면 잘 암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도는 쿠리가 지구라는 것을 알고 있고 츠루마루는 시이나의 정체가 지구라는 것을 용의 아이와 링크했을 때부터 알게 됩니다. 단 스도는 시이나의 정체는 모릅니다. 그래서 파괴의 지구가 아닌
창조 쪽의 지구를 찾으려고 하는데 스도는 시이나가 아니라 아키라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아키라에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시이나가 지구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4번 질문 : 아키라는 자살했는가?>
이것은 자살이 아닙니다. 시이나 주변 사람들은 용의 이를 잃은 사람들에 의해
차례차례 죽어가는데 아키라도 타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 것은 결국 그녀가
성적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했음을 상징하죠. 프로이트 심리학에 따르면 비행은 성욕의 충족을 상징하고 추락은
그 반대를 상징합니다. 아키라의 마지막 대사도 이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한 번도 날지 못했네...”
<5번 질문 : 스도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스도는 자신이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실행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용으로 진화해서 특별한 존재가 되고픈 중2병, 자의식 과잉을 대변하는 존재입니다. 7권에서나 11권에서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전에도
물론 나오고요. 그는 그리고 허무와 무성욕, 파괴의 상징입니다. 그는 자신이 지구를 지키는 자이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고 말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죽인다. 그것이 스도의 원래 사상입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자를 선별하려고 여러 방법을 쓰죠. 그 수단이
핵전쟁입니다. 하지만 누가 능력 있는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용도 결국은 대체가능한(쿠리가 마지막에 떠 있는 용들을 보고 대체가능하다고 말합니다.)존재라서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에 스스로를 혐오한 끝에 죽음에 이릅니다. 그의 비극은 자신을 혐오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했던 것이고요. 그리고 그것은 가족을 없애버린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가치를 가지려면 세계가 아니라 개개인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이 작중 인물을 통해 이러한 사상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신랄한 멘트인 12권 권말 작가 코멘트도 이 인물에게 하는 말이죠.
<6번 질문 : 용의 아이의 정체?>
이 작품의 설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잘 짜여져 있죠.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작품의
설정 중심에 있는 것이 용이라는 존재입니다. 용의 아이는 영혼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습니다. 오직 영혼을 가진 생명만이 죽음을 경험합니다. 죽지 않기에 용의
아이는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젠가 죽기에 역설적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꿈을 꾸게 합니다. 용의 아이는 꿈을 꾸기 위해 영혼을
얻는 것을 대가로 힘을 빌려주고 아이들과 계약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영혼을 얻고(이 영혼이 용 전설에 자주 나오는 용이 지키는 보물, 여의주입니다.) 성체인 용이 되고 완전한 생명이 됩니다. 이것들은 오래 살기는
하지만 죽기는 합니다. 죽음의 정의가 영혼이 떠나는 것이라면 그렇게 되는 것이죠. 영혼을 잃어버린 지구(시체가 된 별)가 다시 영혼을 찾기 위해 용의 아이를 이용해 혼을 수집하는 것이 이 작품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수단이 바로 용의 아이죠.
<여담으로 결말에 대한 해석>
마지막에 많은 용들이 떠다니는 것을 보고 쿠리가 생명은 대체가 가능할 만큼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영혼이 그만큼 충분히 수집된 것이죠. 게다가 지구도 용의 아이라고
할 수 있으니 생명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자면 개개의 영혼은 복제할
수가 없으니 시이나의 경우 소중한 존재를 대체할 수는 없게 됩니다. 그 절망이 인류멸망으로 표현된 것이죠.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세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지어스에도
나옵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당한 남자가 싸움을 포기하고 세계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죠.
마지막 결말은 그래서 생명의 가치는 대체가능한 존재로서 평등하지만 개개인의 관점에서 대체불가능한 영혼이 있고 그래서 생명은 불평등한
가치를 갖는다. 이 두가지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 있어서 둘도 없는 목숨에 구원을 바라도 대체되는 가치밖에 없으니 개개인에게 있어 좀 더 소중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죠.
마지막화 표지나 시이나와 쿠리가 각각 빛과 그림자, 개인과 세계, 백과 흑, 창조와 파괴, 탄생과
죽음 등을 상징하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면 멋진 결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좀 더 쉽게
풀어 쓴 것이 후속작 지어스입니다. 여러모로 지어스는 나루타루의 사상이나 캐릭터 등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워드파일로 저장까지 해뒀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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