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찬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입을 맞춰 "나는 별이 아니라 벌레다"라고 합창하며 자학적인 쾌감으로 위로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는가? 지금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가 전국 노래방 선곡 1위를 차지했다고 하는데, 이건 웃기거나 놀랄 일이 아니라 그냥 통탄할 일이다. 이런 자학과 절망이 극단화된 노래가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는 것은 청년들 스스로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무의미한 수준까지 내려갔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청춘의 열정은 사라지고 벌레 같은 체념만 남은 것이다.
사실 문학과 음악은 늘 그 시대의 정신과 철학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한국은 과거부터 시와 음악을 통해 고난, 슬픔, 희망을 전달했다. 윤동주의 시에 나오는 별은 꿈과 희망을 상징했다. "별 헤는 밤"에서 윤동주는 별 하나하나를 세면서 고통 속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한국 청년들은 별 대신 벌레를 노래한다. 도대체 별에서 벌레로의 이 퇴화가 정상적인가? 더 비극적인 것은 이 자학적 정서가 청년들에게 위안을 준다는 것이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 스스로를 벌레로 여긴 그레고르 잠자가 되어 자기 파괴적 쾌락을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자존감의 결여를 넘어 자존심의 완전한 상실을 드러내는 자기 비하를 통해 현실을 회피하는 병적인 위안이다.
문학이나 음악 속 자기비하는 인류 역사상 드물게 존재했고 대부분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독일 전역에서 유행했을 때 수많은 젊은이가 베르테르처럼 극단적 선택을 했다. 문학과 음악은 그만큼 사람의 정신세계를 형성하고 방향을 결정짓는 강력한 힘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청년들의 이런 병적 자조에 대해 아무도 경고하지 않는다. 아무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오히려 상업적으로 활용하며 기이한 집단 광기와 자기비하를 부추긴다.
이 노래의 음악적 퇴행은 더욱 처참하다. 단조롭고 평범한 멜로디는 마치 이미자의 70년대 트로트를 방불케 할 만큼 퇴보한 상태다. 그런데도 이 음악이 인기 있는 이유는 자기혐오의 편리함 때문이다. 화려한 지드래곤 같은 수퍼스타의 노래나 비범한 아티스트의 혁신적 음악은 듣는 이에게도 일정 부분 이상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곡은 그런 노력 자체를 포기하게 한다. "너는 어차피 별이 아니라 벌레니까 그냥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거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 속 그레고르가 변신한 벌레처럼 현실을 회피하고 자기혐오 속에서 웅크린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무책임한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음악사적으로도 이런 퇴행은 위험하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으면서도 절망 대신 '합창 교향곡'을 써냈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민중은 절망 속에서도 투쟁하고 희망을 노래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젊은 층이 현실 앞에 별을 꿈꾸기는 커녕, 그저 반딧불 벌레의 초라한 빛을 자신이라 여기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다. 두 팔이 뜯기고 두 다리가 뜯기고 두 눈이 멀어도 반드시 이긴다는 마음가짐이 없다. 톰 아스피날과 리언 에드워즈를 단번에 때려잡는다는 마음가짐이 없다. 심지어 적과 언제라도 맞서 싸워야 할 군바리들이 군 내 노래방에서 이것을 유행처럼 소비하며 위안을 얻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GROUND C 김성원, 김우중, 이건희, 변희재, 차명진, 김승연, 정문홍, 캡틴 김상호 등은 이런 자학적 노래를 질색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언제부터 스스로의 초라함과 무능력함을 자랑스럽게 노래하게 되었나? 부끄럽지도 않나?
내 결론은 간단하다. 이 노래가 보여주는 것은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스스로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자학을 넘어 자멸의 단계로 가는 것이다. 해결 방법은 단순히 정치나 사회제도적 변화에 있지 않다. 궁극적 해결책은 이 청년들 각자가 스스로 자기혐오의 늪에서 벗어나 자신을 '벌레'가 아니라 다시 '별'로 보려는 내면의 각성과 자각 뿐이다. 한마디로 좁밥에서 벗어나 센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 끝없이 몸부림쳤고 단테의 신곡은 지옥 가장 밑바닥에서 천국까지 올라가는 여정을 통해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절망은 인생의 필연적 부분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절망은 깨뜨리고 이겨내야 의미를 갖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희망을 버리고 절망 속에 기생하고 있다. '나는 반딧불'이란 노래를 부르며 초라함을 받아들이고 마는 순간 인생은 그 자체로 파멸을 향한다. 스스로를 벌레로 부르짖으며 자기 위안에 빠져있는 청년들을 보니 정말로 안타깝다. 그들이 자조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도 삶은 여전히 무관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삶이 달라지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별을 향해 몸부림쳐야한다. 벌레의 빛을 자랑스러워할 수는 없다.
이 노래는 우리 사회의 병적인 정신상태를 보여주는 징후다. 절대 유행의 장난으로 여겨선 안 된다. 이 글을 쓰는 내 정신이 이상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 마음대로 생각하라. 단,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 자기혐오와 자기연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건 대한민국이 망조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 각자의 내면에 숨어 있는 별을 발견하고 되찾아야만 한다. 그러지 않는 한 이 사회는 반딧불보다 더 초라한 벌레들의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과연 당신은 벌레가 되고 싶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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