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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득고(求不得苦)는 간절히 얻기를 원함에도, 얻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괴로움이다. 이 고통은 정말 광범위하다.
배고픔에도 먹지 못하는 경우, 금연의 고통, 잠들지 못하는 고통, 간절히 원하는 사랑이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 부자가 되길 원하나 가난한 경우...
인간이 살면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고통이 구부득고로 설명되며, 심지어 물리적 고통마저 그것을 '피하고 싶다' 여기는 순간 구부득고로 확장된다.
물리적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지만, 그것은 이미 벌어진 사건이기에 결코 바꾸지 못하는 흘러간 과거의 일이며, 인간은 고통을 느끼도록 생겨먹었고, 방금 생겨먹은 그대로 조건이 맞아 신경을 타고 전기 신호가 흘러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원하지만, 결코 얻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고 괴로움이 된다.
너무 당연한 구조다. 물리적으로 우주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인과에 따라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원인->결과
IN PUT->OUT PUT
이미 벌어진 사건이란, 인간이 그 구체적인 과정과 패턴을 이해하는지 여부와 관계 없이, 오직 인과에 따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그 패턴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면 '과학'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다면 '우연'이라거나 '운명'이라 부를 뿐이다. 단지 인간이 모를 뿐, 인간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실관계는 발생한다.
인지부조화 개념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이는 인간의 인식과 현실이 다를 경우, 정신적 스트레스가 발생하는 경향이다.
이미 인과에 따라, 조건이 모두 맞아 발생한 사건이 틀렸을까? 아니면 그걸 부정확하게 구성하는 인간의 인식이 틀렸을까?
여기서 '내 인식이 옳다'라는 결론이 나온다면 논리가 부족한 사람이자, 왜곡된 사고를 가진 경향이고, 진정한 구부득고, 구조적 구부득고의 길에 진입하여 '윤회'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특정 예시를 보자.
페미니스트는 '피해자 서사'를 공유한다. 페미니즘이란 사상역병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결국 구조적으로 보면 자신이 피해자라는 인지를 형성한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 절대성을 부여하여, 자신이 절대적인 약자이자 절대적인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형성한다. 자신이 피해자이자, 당연히 보상 받아야 하며, 세상 모든 사람이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는 왜곡된 인지를 '절대적 진리'의 속성으로 구성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현실 세계에서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례를 끝없이 마주하며, 이는 본인의 '인지'와 현실 세계의 '경험' 사이 큰 간극을 발생시킨다. 자신의 신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실관계를 끝없이 마주하며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괴로움이다. 하지만 사상역병의 속성은 그걸 알아차리기도, 빠져나오기도 어렵게 만드는 구조다. 이건 PC주의, 언더도그마, 공산주의, 민족주의, 나치즘, 사이비도 모두 동일하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는 인지부조화라는 괴로움과 마주하는 순간, '현실'이나 '사실'을 인정하여 자신의 '인지'를 수정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의 왜곡된 '인지'를 강화하고, '현실'과 '사실'을 비틀어 왜곡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경향은 PC주의, 언더도그마, 공산주의, 민족주의, 나치즘, 사이비와 같은 사상역병이 가진 구조적 특징이다.
흔하게 보던 것 아닌가? 그녀들은 현실이나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들이 설명하는 현실이나 사실관계는 기괴하며, 망상적이고, 도저히 객관적으로 나타낼 수 없는,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체계다. 객관적인 현실이나, 과학적으로 교차검증 가능한 매우 높은 신뢰도의 사실관계조차 부정한다.
문제는 이게 포지티브 피드백 루프라는 점이다.
애초에 왜곡된 인지로 인해 현실을 바르게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인지부조화가 발생하여 괴로운데, 이 고통의 원인을 바르게 직시하지 못하고 외부에 전가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의 왜곡된 인지가 더 강화되고(확증편향, 강화), 그로 인해 더욱 현실이나 사실관계와 멀어지게 된다. 한 싸이클을 돌면 더욱 현실과 사실을 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신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현실이나 사실관계와 마주하며, 이전보다 강력한 인지부조화(스트레스,불안,괴로움)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결국 최초에 자신이 왜곡된 인지를 가졌음을 직시하고, 인정하며, 잘못을 시인해야 한다. 최초에 그런 선택을 한 자기 자신조차 미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관계로 인정하며, 그럴 수 있다며 용서해야만 비로소 페미니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사실관계, 현실을 긍정해야만이 이 고통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그걸 인정하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하고, 다가올 미래가 암담하여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기적이고 유아기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타인은 같은 조건에서 더욱 큰 고통을 받았고, 그들의 미래를 파괴했다는 생각에 미쳐 더 높은 차원의 윤리와 공감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용서하고 직시하게 되면 당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고, 그래서 사과하게 되고, 자존심이 상하여 거기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전과 같은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조금 더 문명인처럼 바뀌는 것이다. 이러면 사고와 행동이 바뀌게 되고, 그 경향은 세상을 용서하는 것과 같다. 잘못된 인식이든 뭐든, 세상을 미워하다가 그것을 멈추었다면 용서의 모습 아닌가? 결국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타인을 용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타인을 진정성 있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며, 타인을 미워하는 자는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타인에게 자비로우면서, 그 자비에 자기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 자가 악인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다. 결코 진정한 자비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건 그저 보여지는 모습, 타인에게 자비로운 척을 하는 것이며, 그러한 사실조차 직시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자비로우면서 타인에게 포악한 자는 설명조차 필요치 않다.
그러한 자들은 여전히 마음속에 증오를 품고 있으며, 그저 증오를 쏟아내는 방향이 타인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혹은 자신에서 타인에게로 옮겨갔을 뿐이다. 그런 자는 자학하거나 타인을 공격하며, 심한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 상태에서 좋은 의도로 시작한 행동은 언제나 악으로 돌아온다. 용서와 자비 없이 타인에게 이타적이라면, 결국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죽이니까. 타인을 이유없이 공격한다면 그 자체로 타인의 정신을 죽이는 것이다.
순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나를 향하든, 세상을 향하든 방향도 우선하는 것이 없다. 어느 순서나 방향으로 시작하더라도 결과는 이어진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과 같으며, 직시한 뒤에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 괴로움이 사라진 뒤에 직시하는 것과 같다.
숭고한 마음이 들어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과, 이타적인 행위를 하다보니 숭고한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것이다.
이런 구부득고의 성질과 구조적 특성이 파괴적이므로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구부득고는 워낙 광범위하기에, 굳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보편적인 괴로움의 성질인 것이다.
절대성, 진리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는 이유다.
페미니스트가 '나는 피해자다'라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왜곡된 인지이자 구부득고를 발생시키는 구조다. 그런 왜곡된 것에 절대성, 정언명령, 진리의 속성을 더하면 아예 반복되는 구조적인 성질로 진화하는 것이다.
불완전성 정리, 불확정성 원리라는 꽤 높은 수준의 논리 체계로 그러한 진리의 속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아직까지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인다. 존재하지 않음에도 존재한다 믿고 찾으니 그 자체로 구부득고이며, 그러한 왜곡된 전제 아래 끊임없이 왜곡된 인지와 사고를 지수의 자리에 쌓아올리니 괴로움도 비례해서 커지는 것이다.
현실을 긍정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얘기는 그러한 현실과 사실이 영원불변하는 절대적인 진리라 인정하고 순응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단지 이 순간, 찰나의 지나가는 순간, 최소한 내가 절대적이라 믿었던 무언가가 틀릴 수 있고, 그보다 더 현실과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 존재함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며, 직시하라는 뜻이다. 현실과 사실을 바르게 정렬해야 문제를 바르게 인식하게 되고, 대안을 찾게 되며, 비로소 자신이 처한 현실과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값을 거부한다. 그것은 매우 본능적인 성향이며, 미지에 대한 두려움, 원초적인 코즈믹 호러에 가깝다. 정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빠르게 판단하지 않은 개체는 적자생존 과정에서 불리했기 때문이다. 미지의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비록 사실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특정 값으로 정해서 인식하는 개체가 더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하여 살아남는 것에 유리했고, 결국 번식해서 이어진 것이 현생 인류이다. 그러니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본성에 가깝다.
그러나 본성이 그러하다고 무조건 따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적응적이지 않은 부분은 의지를 가지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단지 모른다고 인정하고, 방법이 없다면 모르는 상태로 그대로 두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모든 인과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모르는 것인데, 굳이 지금 당장 알려고 원하니 구부득고에 빠지는 것이다.
CPU 연산 루프처럼 끝없이 해결되지 않는 연산을 수행하다가 뇌가 타버리는 것이다. 단순하게 일정 연산이 반복되는 구조를 감지하면 연산 수행을 정지하는 것으로 해결 가능하다.
연산 루프를 멈춰야지만 리소스를 다른 곳에 할당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며, 그 상태에서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사실을 객관적으로 '연산'할 수 있는 것이다.
불안과 스트레스에 빠진 사람이 뇌 기능이 떨어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불안과 스트레스를 발생시키는 생각의 루프를 반복하다보니, 상시 그 연산에 자원을 소모하느라 다른 무엇을 신경쓰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는 피암시성이 증가하며, 타인을 조종하려는 자에게 완전히 노출된 것이다.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성인이 '아줌마'라는 단어를 들었다고 흉기로 공격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뇌에 당한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생식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소개했다는 이유로 평생 자신을 돌보고 부양한 부모보다 높은 순위의 신뢰도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뇌에 당한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이다.
괴로우니 페미니즘에 빠지고, 페미니즘을 하니 괴롭고, 괴로우니 또 페미니즘을 하는 루프는 무엇인가? 구부득고이자 고통의 순환, 육도윤회인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얻지 못하여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을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허상이고, 망상이라는 사실관계를 직시하고 인정하는 방법 외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세뇌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외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의 순환이고, 윤도육회와 같으며, 구부득고를 반복한다.
주식이야기 : 분산투자, 장기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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