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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 팬텀 - 원수는 동료가 될 수 없다 -1-

소설(220.127) 2022.02.08 13:10:43
조회 105 추천 2 댓글 1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용을 써도 잊히지 않는 원수의 얼굴이 눈앞에 얼쩡거리는 게 신기루였으면 하고 생각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스우가 살아달라고 간절한 바람을 귓가로 불어넣었기 때문일까.


 

오르카는 알 길이 없었다. 빗물에 늘어진 풀을 짙은 안개로 즈려 밟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팬텀을 눈꼬리 치켜세우며 노려보던 오르카는 점점 가까워지는 그 발이 시야에서 희미해져가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애써 눈 끝에 힘을 바짝 실어내며 동공을 떠보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점차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안 돼. 이대로라면 스우의 원수의 손에 오르카도 허무하게 죽고 말거야.


 

복수 따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오르카는 포기 안 해. 이대로 저 녀석 손에 죽을 수 없어. 악을 써가며 중심을 잡으려 비틀비틀대는 오르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팬텀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무겁게 가라앉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지금 이대로 오르카가 죽어도 상관없다. 아리아를 무참히 살해한 살인자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라는. 어린 아이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필요에 의해 잠입했던 기억 속,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한 켠의 어두운 필름에 자연스레 동화돼 있는 그 둘은 영락없는 '악'이었다. 재미삼아 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살인자가 하는 말에 맞장구 치며 '시시하다' 했던 오르카 또한 스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그날, 스우를 망설임없이 죽인 것에 후회하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살아갈 이유를 얻은 대가로 무언가를 잃은 한낱 인간과 다를 게 없는 오르카를 보며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같은 질문을 한다해도 단칼에 똑같은 대답을 내뱉을 것이다. 후회할리 없잖아. 하지만.

 

 

"일어나."

"....?"

"같은 말 두 번씩이나 하게 하지 말고. 일어나."

"...뭐...!"

 

같은 일을 반복할 여지 따위는 없다. 오르카가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방금까지 몸을 침식했던 어지럼증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 앉은 팬텀은 손을 올려 빗물에 젖은 로브의 어깨죽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웃기게도 자신은 오르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 굳은 자존심을 단번에 긁어 미동없는 반응을 움직일 수 있는지, 지금처럼. 슬쩍 시선을 올려 본 오르카는 씩씩대는 통에 휘둘리기라도 한듯 열에 달아올라 있었다. 무감각하게 시선을 내린 팬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앉아.

"오르카가 스우의 원수인 네 녀석 말 따위를 들을 것 같아?"

"앉으라고."

"익...! 당장 **!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앉으라는 말. 안 들려?"

 

순간 빗줄기를 뚫고 귀로 날카롭게 박히는 음성에 오르카의 몸이 움찔했다. 그늘져 보이지 않는 눈매에 잠깐이나마 덜컥 겁을 먹은 게 자존심 상했는지 콧방귀를 끼며 다리를 팩 굽혀 앉는다. 팬텀은 페르소나를 들어올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을 옮겼다. 둔탁하게 얼굴을 때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으면서 미동조차 않는다. 팬텀은 제 온기를 그대로 머금어 따뜻하기만 로브를 끌어 내려 빗물로 냉기가 어려 얽히고 설킨 그 위를 던지듯 덮었다. 그칠 생각 없는 비를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던 오르카의 눈이 안개로 얼룩진 시야가 순간 어둑해지자 놀라 동그랗게 뜨였다. 이내 의심스런 눈초리를 곤두세우며 아무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팬텀을 거세게 쏘아보았다.

 

 

"너, 뭐야? 오르카를 죽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

"갑자기 왜 잘해주는 건데. 위선이야? 아니면 동정? 그것도 아니면 그 망할 비공정에서 합심 한 번 했다고 없던 정이라도 생긴 거야, 뭐야? 왜 말이 없어? 무슨 얘기라도 해!"

"...웃기는 소리 그만하지. 오히려 정은 내가 아니라 네가 생긴 것 같은데."

"무, 무슨...! 너야말로 웃기지 마! 오르카는 너랑 달라! 한 번 원수는 영원한 원수라고!! 오르카가 널 용서할 것 같아?!"

 

씩씩대며 빠르게 말을 이어가는 오르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팬텀의 벌어진 틈으로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용서?

 

"적당히 해. 봐주는 것도 슬슬 한계니까."

"뭐?"

"왜, 뭣하면 그때 못한 승부. 지금 내볼까? 난 자신있어. 네 쌍둥이 오빠처럼 단번에 널 죽이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거지."

"이, 익...!"

"도발도 정도껏 하라는 경고야. 맘만 먹으면 널 죽일 수 있는 적 앞에서 강한 척 하지 말라고."

 

그 날 선 경고와 함께 팬텀의 손아귀 안으로 시린 날이 단번에 자리잡았다. 동시에 한 치의 망설임없이 오르카를 표적으로 달려든다.

 

"...윽...!"

 

어느새....! 몸 그 어느 곳도 관통되지 않고 옆구리를 가볍게 스치기만 했는데도 몸은 버티지 못하고 휘청였다. 괴로움에 살풋 인상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살갗이 뜯겨나간 부근을 부여잡는 오르카를 팬텀은 무감각하게 쳐다보았다. 서슬퍼런 칼 끝을 번득였던 케인을 원상복구 시키며 짓이기던 입술을 살며시 벌려 차디찬 숨을 토해낸다.

 

"이 정도면. 봐주고 있다는 걸 알아야하지 않겠어?"

"....익, 그래. 뭐, 그렇다고 쳐! 어차피 네 놈이 오르카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으니까. 알았어?"

 

가지런한 입술을 비쭉 내밀고선 턱하니 주저앉나 싶더니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달싹거리는 무릎을 꽉 움켜쥐더니 이내 고개를 푹 떨구어 어둠으로 묻은 오르카의 나지막한 음성이 조용히 들려왔다.

 

"이제는....오르카를 죽이는 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으니까."

 

 

급작스런 성장을 겪은 탓에 고통을 새기지 못한 미성숙한 어린 아이와 같다. 어이없는 이야기지만 팬텀은 아리아의 죽음 이후로 수백 번 그 둘을 원망하고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을 계속해 해왔다.만약 처음으로 인간의 몸을 얻고 경험한 일들이 검은 마법사의 진두지휘 아래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잔혹한 짓 따위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는, 예상 아래 펼쳐진 생각들. 그리고 골백 번 이러한 예를 그린 자신을 자책하고 자괴감에 괴로워하기를 끝없이 반복해 왔다. 팬텀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미동없는 오르카를 보던 눈동자를 거둬 정면에 두었다. 거센 빗줄기가 안개를 무자비하게 헤치며 내린다.

엘린 숲으로 발을 디디는 일, 답지 않게 고민했다. 겔리메르가 죽고 전쟁이 끝났다. 간만에 지긋지긋할 만큼 얼굴을 맞대온 동료이자 친구들인 그들과 회포를 풀기 위해 발길을 돌리던 순간, 시그너스가 다급히 말문을 틔웠었다. 저, 팬텀!

 

'부탁이 있어요. 누구보다 당신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는 탓에....들어줄 수 있나요?'

 

'뭐, 무슨 부탁이냐에 따라서 다르지. 또 전투라면 상당히 곤란하다고.'

'....아, 그게....말이에요. 오르카를...그녀를 만나러 가봐 줄 수 있나요? 이대로 도망쳐서 행적을 감추고 무슨 일을 꾸미지 않을까 해서 이 일이 끝나고 레지스탕스에게 오르카의 추적을 부탁했거든요. 그런데....뜻밖의 얘기가 전해져서요. 오르카, 그녀가 엘린 숲으로 건너가 대정령 구와르를 만났다고 해요. 어떤 대화를 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

'미안해요. 무엇보다 당신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건데....용서해줘요. 그리고, 부탁할게요. 그녀를, 한 번만 만나러 가주세요.'

 

망설였다. 지금의 오르카는 어둠의 정령으로써 있으려 한다지만 그때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증오하는 마음 또한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자욱하게 낀 숲에 발걸음한 이유는 단 하나. 그녀,

아리아가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끝까지 그 둘을 용서했기 때문이었다. 오르카를 마주하는 순간마다 소름끼치도록 닮은 그 얼굴이 머릿속을 헤집었음에도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것은 아리아 덕분이었으니.

고마워 해야하나, 아리아 넌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아마도 너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지금 널 죽여줬으면 좋겠어?"

 

 

처음 너와 내가 만났던 달빛 아래의 슬픈 표정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다. 팬텀은 무의미한 시선을 두었던 정면 아래로 눈꺼풀을 감았다. 점차 멀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감았던 눈을 떠 고개를 돌렸다. 오르카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복숭아뼈를 꽉 움켜쥔 채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대답을 할 것 같지 않아 시선을 돌리려던 그 귀로 문득 눅눅해진 음성이 가라앉았다.

 

"원한다면 그러든가. 말했지, 이제 상관없다고."

"....."

"....오히려 고마워 할지도 몰라. 오르카를 스우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는 거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힘없이 끌려나오는 어조에 잠시 아무 말 하지 않던 팬텀은 이내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은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말이야."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너 죽일 생각으로 여기에 온 게 아니야. 그렇다고 너같은 놈이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짙은 그늘로 파고들던 고개가 사뭇 다른 분위기로 올라섰다. 오르카는 더러운 웅덩이가 번진 눈동자를 굴려 가만히 팬텀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죽이고픈 충동이 일던 얼굴인데. 저의 동공 안에 담기는 얼굴은 그저 쓸쓸해보이기만 했다. 처음 인간이 되어 빗물에 젖은 땅을 밟았던 때처럼 생소한 감각이 머리를 어지럽게 메운다. 그 낯설기만한 무엇에 더 젖어들까 황급히 시선을 틀었다. 스우의 원수에게 이런 걸 느끼면 안 되는 건데.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 자신의 몸에서 자유롭게 활개친다. 오르카는 입술이 새하얗게 질릴만큼 굳게 깨물었다. 한참을 그러길, 제멋대로 뜯겨져 피가 흐르는 입술을 벌려 물었다.

 

"그럼 뭔데. 너는 왜 오르카 옆에서 이러고 있는 건데? 대체 이유가 뭐야?"

 

답답한 건지. 미미하게 격앙된 그 말을 들은 팬텀은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반쯤 벌리다 그 사이로 뜨거운 열기를 흘렸다. 식을 수 없는. 채 식지 못한 과거였다. ...용서했으니까.

"답답하게, 진짜. 대답을 하란 말이야."

 

그 바보같은 여자가 원망이 아닌 용서를 두고 가버려서. 수백 년이 지나버린 나 또한 같은 길을 밟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게 아리아 너여서.

 

"야! 너!"

 

그래서 할 수밖에 없다. 팬텀은 어두운 과거에 젖어 있던 고개를 들었다. 옅은 머리카락을 덮고 있던 로브를 도로 제 손 안에 거두어가며 팬텀이 그림자에 덮힌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마. 시그너스 여제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곳으로 올 일 따위 없었어."

"...흥, 착각은 무슨.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다만 궁금할 뿐이야. 그 무력하기 그지없는 레지스탕스와 여제가 오르카를 주시하라고 했다면, 그 일만 하면 될 걸. 왜 이러는 건지. 오르카는 너의 최대의 적수이자 원수잖아?"

 

팬텀의 비틀린 대답에 어이없어하며 오르카는 콧방귀를 꼈다. 어느덧 잦아든 빗줄기는 고인 웅덩이 위로 얕은 파동을 하나씩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의 얇은 선을 그리던 빗방울 또한 더디게 흙으로 떨어졌다. 팬텀은 저를 노려보듯 올려다보는 오르카를 내려다보다 찬 공기가 유영하기 바쁜 허공에 펄럭이는 로브를 마저 어깨에 둘렀다.

 

정적에 어린 손에 잡힌 로브가 아무런 잡음도 없이 얼굴을 덮는다. 짙은 안개에 가려져 다물릴 것 같았던 말문이 다시금 조용히 열렸다.

 

"지금의 나는 모르겠지만 수백 년전의 난 너희 남매를 용서할 생각 조금도 없어.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테지."

"....."

"하나만 기억해 둬."

 

돌려진 발길 끝에 짓눌러진 풀이 따사로운 햇빛을 머금은 듯 나직이 올라선다. 반쯤 몸을 돌린 팬텀의 눈은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얽매여 있지 않았다. 오르카.

 

"어둠의 정령으로 돌아가 속죄하면서 살아. 네가 저질러왔던 악행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면서."

"....흥."

 

단 하나도.

"잊지 않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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