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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애정이 있는 판타지 시리즈인데, 한국 판타지가 주로 마법의 현상-4원소설을 연상시키는 오컬트 마법-에 집중하느라 서로 다른 생물 및 종족에 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보니 그렇기도 하고, 거의 호러 소설에 가까울 정도로 괴기스러운 생물체가 주로 등장하는 판타지다보니 더 그렇기도 하다. 소위 "뉴 위어드" 운동의 선발대에 섰던 소설이기도 하고. (지금은 한풀 꺾인 운동이지만) 개인적으로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나 여타 호러에 준하는 요상한 게임들(<Hylics>, <Gingiva>, <Sunless Sea>, <Pathologic 2> 등)에 대한 애정 때문에라도 더더욱. 게다가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매체는 비단 게임(<We Happy Few> 등)이 아니더라도 상당히 단순한 구조-억압적이고 단단한 정부와 탄압당하는 시민-를 가져가는 경우가 많은데 <바스라그> 같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더더욱 <바스라그>를 흥미롭게 만들지 않나 싶다. 나방은 그것이 돈을 벌 수 있는 한 도시에 계속 남았을 것이다. 별일이 있었든, 없었든.
다만 <바스라그>를 다시 읽으며 느끼는 것이지만, 재미로서의 판타지와 호러는 확실히 함께 가기 힘들다. 판타지는 괴기스러운 생명체를 세계의 동등한 일원으로 삼으며, 그 강약과 특수성이 어떻든 호러의 대상이 되긴 힘들다. <바스라그>에서 등장하는 영혼을 흡수하는 나방이 아무리 천적 없는 강대한 괴물이고 이들이 희생양을 추적해 습격하는 서사가 호러의 문법을 연상시킨대도, 관건은 어디까지나 이 괴물을 '어떻게' 무찌르느냐에 달려 있다. 스티븐 킹이 예전에 <Why Hollywood can’t do horror>라는 글에서 언급한 내용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호러는 악몽과 연결되고 악몽은 당연하게도 논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판타지의 환상성이 독자를 몰입시키기 위한 핍진성을 구축하는 동안, 호러는 그 주변부로 밀려난다. 이는 판타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의 갈등이다. 호러 영화가 늘 괴물을 물리치고 난 뒤 이것이 언제든 돌아올 것이다, 하고 끝나는 게 꼭 속편 예고를 위한 것만은 아니란 뜻이다.
나방을 물리치는 핵심 인물인 컨스트럭트 의회(고물 기계에서 자연발생한 자의식)의 존재도 그런 점에서 묘한데, 아무리 비인격적인 출신과 성분을 강조하더라도 의회는 여전히 사람처럼 행동한다. 여러 매체에서 등장하는 군체 의식은 서사 속에서 늘 인격체의 틀을 쓰곤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비인격성을 제대로 드러내는 데에 실패하곤 한다. (나는 아직 렘의 <솔라리스> 이외의 성공 사례를 본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곧잡을 수 없는 총체적 관점에서 세상을 '꾸미는' 직조자 거미 역시 노골적으로 말하면 주역에 심취한 절대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직조자의 비합리성은 예측불허한 느낌보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느낌을 주고, 실제로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다. 다원주의적 판타지를 쓰는 건 늘 힘들 테고, 덕분에 판타지를 포기하고 철저히 외부 관찰자의 시점을 차용하는 <서던 리치: 소멸의 땅>에서나 이를 해낼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런 한계가 <바스라그>의 매력을 떨어뜨리진 않지만, <바스라그>가 무엇을 의도하고 쓰였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점에 있어선 실패하지 않았나 싶다.
별개로 <바스라그>의 마법을 구성하는 유기체 변조 수술은 참 흥미로운 요소다. 기괴하게 변형되어 특정 용도를 수행하는 기계가 되는 몸뚱이는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지만, 판타지의 설정은 아니다. 그건 호러다. (예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쇼거스, 버로스와 크로넨버그의 작품에 곧잘 등장하는 부드러운 기계soft machine) 실제로는 형벌을 몸에 기입한다는 푸코와 데리다에게서 모티브를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는 SF와도 맞닿을 수 있는 요소지만, 아무래도 SF는 인간의 기계화, 기계의 인간화에 집중하지 인간과 기계가 인간다운 방식에서 하나가 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덕분에 요즘 이쪽에 관심이 많아, 역학적 도구 역할을 하는 동물 기계와 역-숨쉬기 역할을 하는 식물 기계에 대한 망상을 하고 있다. (<All Tomorrows>의 콜로니얼이 함께 생각난다) 마저 <바스라그>의 다른 두 책-그리고 역자가 열심히 번역 중인 마지막 권까지-을 뒤적거리며 구체화시키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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