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욕망
주연:안재욱 황수정 박선영 이병헌
재욱과 수정은 대학교 4학년 졸업반때 서로 눈이 맞아 사랑을 꽃피운 캠퍼스 커플, 즉 - CC이다.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서둘러 결혼을 한 두 사람.
재욱은 꽃다운 나이인 수정을 누가 채갈세라 얼른 자신곁에 두고 싶어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결혼을 결심했다.
두 집안 다 부유한 편이 아니었고 대학을 갓 졸업했기에 취업을 한 상태도 아니었던지라 미래가 불투명 했지만 그래도 수정은 재욱을 믿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오후에 대기업 면접이 있어 정장을 쫙 빼입고 거울 앞에선 재욱..
"여보, 오늘 면접 잘 보구 와~ 1차서류전형도 무사히 합격했으니 2차 면접도 좋은 결과 있을거야" -수정
"그래 제발 붙었음 좋겠다, 우리 생활 좀 피게." -재욱
수정은 구두를 신고 나가려는 재욱을 불러 세우곤 볼에 뽀뽀를 했다.
기습이라 깜짝 놀란 재욱은 넘 기분이 좋아 절로 광대승천하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수정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곤 예의 당당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수정은 면접을 보느라 초조해 하며 잔뜩 긴장했을 재욱을 위해 맛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맛있는 시금치 된장국을 보글보글 끓이고 있는데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오늘 면접 잘 봤어?" -수정
"뭐 그럭저럭, 대기업이라 워낙에 지원자들도 많아서.. 일단 맘을 비워야겠지." -재욱
"그렇구나.. 너무 맘 쓰지마, 혹시 떨어지더라도 다른 회사 면접보면 되지 뭐." -수정
"위로해줘서 고마워." -재욱
"씻고 얼른 나와, 저녁 먹자, 자기가 젤 좋아하는 국 끓여놨어." -수정
며칠 후...
낮잠을 자고 있는 재욱의 핸폰으로 연락이 왔다.
합격했다는 통보였다.
재욱은 너무나도 기뻐 부엌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수정에게 달려가 백허그를 했다.
"나 합격했데, 담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래." -재욱
"어머, 정말이야? 우와~ 역시 해낼 줄 알았어." -수정
"이게 나 네덕이야, 내 행운의 여신 수정~" -재욱
"그래, 앞으로 나한테 더 잘해, 알았지 서방님?ㅎㅎ" -수정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 헌대전자에 입사한 재욱...
빠르게 업무를 파악하고 적응한 덕에 입사한지 1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대리로 승진했다.
"이봐, 안대리!! 이번에 호주로 해외출장 좀 가야겠어. 개발 제품을 현지에 갖고 가서 직접 테스트 하고 와야해" -과장
"예, 알겠습니다." -재욱
"일 처리 잘하고 오리라 믿어." -과장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재욱
재욱은 태어나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게 된다. 그것도 해외 출장이라는 명목하에..
내 돈도 아니고 회삿돈으로 호주라는 나라에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강원도 촌구석에서 올라와 정말 출세한 것 같은 기분이다.
머리가 비상하고 업무처리에 능한 재욱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설계실 호주 담당직원을 만나 무사히 일을 마쳤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첫 해외출장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기쁨에 들떠 절로 웃음이 나는 재욱이다.
마침 옆에 스튜어디스가 지나가며 음료와 차를 권했다.
갈증이 났던 재욱은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달라고 했고
재욱 옆에 앉아 있던 한 아리따운 아가씨는 커피를 달라고 했다.
옆을 보니 같은 한국사람이고 미인이었다.
재욱은 웬지 호의를 베풀고 싶단 생각에 스튜어디스가 건네는 커피잔을 자기가 받아든 뒤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 건네려는데 그만 실수로 그 여자 무릎에 커피를 쏟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앗, 뜨거!!" -아가씨
"죄송합니다." -재욱
당황한 건 스튜어디스도 마찬가지...
얼른 수건으로 닦은 뒤 차가운 얼음주머니를 가져왔다.
"괜찮으세요, 손님?" -스튜어디스
"네,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시고 일보세요." -아가씨
재욱은 괜히 자기가 나서서 이런 사단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미안한 맘에 어쩔 줄 몰랐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데이신건 아니죠?" -재욱
"글쎄 좀 따끔거리긴 한데 얼음찜질 하고 있으니 나아지겠죠 뭐." -아가씨
굉장히 쿨한 성격의 아가씨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뭐라고 쏘아붙일것만 같은 새침한 외모인데 의외의 털털한 모습에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
"이거 제 명함입니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다면 연락주세요.
병원에 가야한다면 당연히 치료비는 제가 드려야죠." -재욱
재욱의 명함을 받아 든 그녀는, 안그래도 큰 왕방울 눈이 더 커지며 깜짝 놀랐다.
"헌대전자에 다니세요?" -아가씨
"예.. 그렇습니다만, 왜요?" -재욱
"아.. 아니에요." -아가씨
이름 안개리, 직함 대리...
자기 아버지 회사의 직원이라...
급 호기심이 생기는 선영이었다.
"안재욱씨... 이름 특이하면서도 멋있네요. 제 이름은 박선영이에요" -선영
"아.. 네.." -재욱
"한국가서 연락드리죠, 치료비 물어주셔야 해요, 아셨죠?" -선영
"그러죠." -재욱
방긋 웃으며 말하는 선영을 보니 이제야 맘이 놓이는 개리다.
한편 일주일간의 해외출장으로 인해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수정은 남편이 돌아온단 소식에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번 누르는 소리가 띠리릭 들리고 드뎌 오매불망 기다렸던 재욱이 왔다.
"여~보~오~" -수정
수정은 재욱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그의 품으로 달려들어 폭 안겼다.
"나 많이 보고 싶었어?" -재욱
"당연하지, 자기는 아니야?" -수정
"미치는줄 알았어, 보고파서." -재욱
일주일만에 만나는 건데도 마치 몇년 만에 보는냥 둘은 너무나도 반가웠다.
"여보, 얼른 씻고 밥먹자,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많이 해놨어." -수정
"역시 울 마누라가 최고다, 매끼 스테이크만 먹느라 완전 질렸었는데." -재욱
재욱은 씻고난 후 수정이 준비한 한정식 못지않은 맛깔스런 음식들을 먹었다.
소화도 시킬 겸 간단하게 맥주 한잔씩도 했다.
"일주일간 타국에 있었더니 정말 피곤하다." -재욱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 타고 호주간다니까 아이처럼 좋아하더니." -수정
"순간 좋긴 했는데 뭐 맘 편히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일하러 간거니까 그닥 좋지도 않더라." -재욱
"나두 따뜻한 나라로 여행 가고싶다." -수정
"따뜻한 나라 어디?" -재욱
"하와이." -수정
"가면되지, 나중에 내가 더 돈 많이 벌고 자리잡히면 우리 꼭 가자." -재욱
"정말?" -수정
"그럼~ 내가 너한테 그 정도 여행도 못시켜줄 정도로 무능하진 않아." -재욱
"말만 들어도 좋다." -수정
일주일만에 만난 부부 재욱과 수정...
그 둘은 그날 밤, 첫날 밤 못지않은 격렬한 정사를 나누며 깊은 잠에 들었다.
담날 아침 회사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재욱
"어제 비행기 안에서 저한테 커피 쏟으신 안재욱씨 핸폰 맞나요?" -선영
"아~ 선영씨.. 혹시 많이 데이신 건가요?" -재욱
"전화로 말하긴 뭐하고 좀 있음 점심시간인데 잠깐 만나죠, 헌대전자 앞 ㅇㅇ레스토랑으로 갈께요." -선영
"알겠습니다." -재욱
ㅇㅇ레스토랑..
"제시간에 맞춰 온다고 했는데 먼저 와계시네요." -재욱
"제가 먼저 온거에요ㅎㅎ" -선영
"많이 데이신거면 제가 치료비 물어드릴께요, 병원에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재욱
"헌대전자.. 안재욱 대리님.. 맞으시죠?" -선영
"네ㅎㅎ 맞습니다." -재욱
"반가워요. 전 헌대전자 박주영 회장님의 딸 박선영이라고 해요." -선영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재욱은 너무나도 깜짝 놀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많이 당황하셨어요?" -선영
"............................" -재욱
"사실 이렇게 첫 만남부터 제 신분 밝히는거 저도 첨 있는 일인데요,안재욱씨 넘 맘에 들어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이리저리 따지고 재기 싫어서..." -선영
"저는.... 사실...." -재욱
재욱은 사실 결혼을 한 유부남이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선영이 입을 막았다.
"다른 말 필요없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께요,
전 굉장히 쿨한 여자에요, 사람 마음이란게 억지로 되는게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구요,
제가 맘에 들지 않다면 그렇다고 얘기 하시고, 맘에 든다면 정식 교제 해보는거 어때요?" -선영
말하려던 타이밍을 놓쳐버린 재욱...
게다가 자신에게 아주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해오는 국내 최고 기업의 딸 박선영...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머리로는 사실을 말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성과 감성은 역시 다른것인가...
이미 입으로 말을 내뱉어 버렸다.
"네, 우리 교제 해보죠." -재욱
대답을 한 재욱은 순간 수정이 생각나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 주워 담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재욱과 선영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사실 선영이 대기업 딸이 아니었다면 사귀어 보잔 말에 일언지하 거절했을 것이다.
사람 맘이란게 그래서 참 간사한 것이다.
재욱은 자신도 모르게 지금보다 더 출세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혔고 그 길로 가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선영을 잡는 수 밖엔 없단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첨엔 성공에 대한 욕망땜에 선영을 사귀는 거였는데 날이 갈수록 정말 선영에 빠져들었다.
자신과의 신분차이가 많이 남에도 재욱을 기죽게 하는 언행을 한번도 한 적 없고 성격까지 유쾌해 항상 같이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는 기쁨을 선사하는 여자 였다.
게다가 얼굴까지 예쁘니 어찌 맘이 안 갈 수 있겠는가.
수정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조만간 이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재욱과 수정은 결혼한 사이지만 법적으론 남남이다. 왜냐면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젤 친한 지인들만 초대해 성당에서 간단하게 치른 결혼식때 둘만이 맹세한게 있었다.
나중에 아기를 가지면 그때 혼인신고를 하고,
혼인신고 하기에 앞서 양가 가족분들 친가친척 친구들 모두 초대해 아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자고...
한편 눈치가 빠른 수정은 재욱의 외도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걸 입밖으로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다.
수정은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재욱을 사랑하는 맘이 너무 컸기에 한번의 외도쯤은 그냥 넘어가자란 생각까지 했다.
언젠간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겠지하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수정은 재욱의 외도 상대녀가 엄청난 집안의 딸이란건 당연히 모르고 있다.
매일밤 야근이 있다며 늦게 오고, 심지어 새벽에 들어오는 경우도 다반사...
보다못한 수정은 재욱의 핸폰을 검사해 봤는데 비번을 걸어 잠가놓았다...
둘 사이 비밀은 없는거라며 비번을 걸어놓는 수정에게
나도 비번 풀테니 너도 풀라고 말했던 재욱인데 비번이 걸려져 있다.
결정적인건 재욱의 와이셔츠를 빨려고 보니 어깨선쯤에 새빨간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
이걸로 재욱의 외도를 100% 확신하게 된거다.
근데 재욱의 맘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수정은 기약없는 기다림에 너무나도 지쳤다.
그래서 미행을 해보기로 했다.
예전같으면 쉬는 일요일엔 친구들과의 약속도 잡지 않고 무조건 수정과 보냈던 재욱인데
요즘은 일요일도 약속이 있다며 거래처 지인과의 약속이라 안나갈수 없단 핑계를 대고 매번 나가는거다.
수정은 재욱 몰래 뒤를 밟았다.
얼마전 재욱은 차를 뽑았는데 엄청나게 비싼 차였다.
아직 그런 차를 살 정도의 형편은 안되는데 의심이 되서 물어보니 이번에 자기가 회사에 엄창난 기여를 해서 부상으로 차를 선물해 줬단다.
당연히 수정은 믿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는 재욱을 놓칠세라 뒤에 오는 택시를 얼른 잡아타고 미행을 했다.
재욱이 내린곳은 회사 앞 레스토랑이었다.
역시나 미리 자리 잡고 앉아있는 여자가 있었고
모자와 뿔테안경 마스크로 무장한 수정은 그들의 바로 뒤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가만히 앉아있을 순 없어 메뉴중 젤 싼 음식을 시키고 그들의 대화를 주목했다.
"오빠, 오늘 차 끌고 온거야?" -선영
"그럼~ 네가 사준 차, 끌고 왔지." -재욱
"맘엔 들어? 승차감 좋지?" -선영
"역시.. 비싼차라 그런지 끝내주더라." -재욱
"아빠한테 조만간 오빠 소개시킬거야, 맘의 준비 하고 있어." -선영
"박주영 회장님께 벌써 나를?" -재욱
"왜? 너무 빠른 것 같아?" -선영
"아.. 아니야, 나도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잘됐네." - 재욱
"오빠, 나랑 결혼하면 못해도 부장급으론 바로 승진할걸, 그 후에 차근차근 더 승진할테고.." -선영
"믿어지지가 않아." -재욱
"뭐가?" -선영
"가진게 아무것도 없는 날 이렇게 사랑해 주는 여자가, 그것도 국내최고 헌대전자의 따님이라니.." -재욱
"그럼 나 배반하지 않고 영원히 사랑할거지?" -선영
"그걸 말이라고 하니?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 배반 할리 없어." -재욱
"솔직히 오빤 나랑 결혼하면 먼 훗날 우리아빠 회사 고대로 물려받을거야, 난 외동딸이니까." -선영
"선영아, 내가 너 사랑하는거 너의 배경때문만은 아니란거 알아줬음 좋겠다." -재욱
"알고있어. 내가 여태껏 겪어본 남자들 중에 오빠는 젤 순수해. 거짓말 하면 얼굴에 바로 티도 나고ㅎㅎ" -선영
"내가 그런가?ㅎㅎ" -재욱
"그럼~" -선영
그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수정은 망연자실했다.
외도를 하더라도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했던 수정인데 영영 그럴일은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상대 여자는 국내 최고의 기업 헌대전자의 외동딸이다.
그럼 이미 게임은 끝난거다..
수정은 재욱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조용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왔다.
오늘 저녁은 재욱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진중하게 얘길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저녁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재욱이 왔다.
"늦었네? 오늘도 많이 바빴던거야?" -수정
"많이 바빴지" -재욱
"저녁은?" -수정
"지금 시간이 몇신데 벌써 먹었지, 일욜도 나가서 일보고 피곤해 죽겠다." -재욱
정말 피곤해 보이는듯한 재욱은 곧장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온 뒤 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뻗어 자는거다.
진중하게 대화를 해보려 했던 수정은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낮에 집에 오며 슈퍼에 들러 산 소주 한병을 꺼내 잔에 따르지도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안주도 없이 물처럼 마신 탓에 금방 취기가 돌았다.
갑자기 세상 살기가 싫어졌고 재욱에 대한 원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재욱에게 대놓고 화도 못내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특히 심장이 답답해 죽을것만 같았다.
수정은 부엌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너무 괴로워 그렇게라도 자기 몸을 자해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을 자다가 쿵쿵 소리에 깜짝 놀라 깬 재욱은 옆자리에 수정이 없단 걸 알고
방문을 열고 부엌으로 향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쿵쿵소리가 계속 들려 얼른 불을 켰다.
오마이갓!!
재욱은 너무나도 놀라 얼른 수정을 끌어안았다.
"야!! 너 지금 뭐하는거야?!!!!" -재욱
"놔둬, 내가 뭘 하던지 말던지 뒤지던지 말던지 상관말라구 이 나쁜놈아!!" -수정
머리를 벽에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얼른 수건으로 지혈을 했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자다말고 도대체 왜그래?" -재욱
"그걸 몰라서 물어? 내가 왜 그러는지 정말 몰라서 묻냐?" -수정
"답답하니까 말을 해보라구..!!" -재욱
"너 바람났지?" -수정
"..................." -재욱
"회장딸이랑 바람난거 다 알고 묻는거야, 빨리 대답해." -수정
"정말 미안하다." -재욱
"푸훗, 미안?? 내 가슴에 이렇게 깊은 생채기를 내놓고 고작 미안하다 말한마디면 다 끝나?" -수정
"......................." -재욱
"왜 말이 없어?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 거 아냐?" -수정
"정말 미안한데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자, 어차피 우리 법적으론 남남이잖아." -재욱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수 있어? 내 인생은? 내 남은 인생은 뭘로 보상해 줄건데?" -수정
"섭섭하지 않을만큼 돈을 준비할께. 우리 쿨하게 끝내자. 그동안 고마웠고 또 미안하다." -재욱
"난 너한테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 다 줬는데 결국 돌아오는건 이거냐? 돈 줄테니 먹고 떨어져라?" -수정
"......................." -재욱
"너 그 여자 진심으로 사랑하는거 아니지? 배경땜에 그러는거지? 다 용서할께, 제발 지금이라도 맘 돌려." -수정
"아니, 이제와서 내가 뭘 숨기겠냐, 첨엔 배경땜에 맘이 갔지만 점점 만나다보니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어." -재욱
"남자들 아내 두고 외도 한번씩은 한다더라, 그깟 육체적 관계 몇번 한거 다 이해할께, 그러니까 제발..." -수정
"한번도 하지 않았어." -재욱
"뭐??" -수정
"그녀랑 관계 한번도 맺지 않았다구." -재욱
수정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재욱이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라는 걸...
절대 자신에게로 돌아오진 않는다는 걸...
계속 매달리면 본인만 구차해 진다는 걸...
"그래, 가라... 나두 나한테 맘 떠난 남자 붙잡고 싶지 않다..." -수정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가 떠나려고 한다.
너무 괴로웠지만 그의 행복을 위해 보내주기로 결심한 수정이다. 그렇게 둘은 이제 완벽히 남남이 되었다.
얼마 후 거리를 지나다가 본 대서특필 된 신문에서 재욱은 신부에게 입맞추며 밝게 웃고 있었다.
'헌대전자 외동딸 박선영, 평범한 회사원과의 결혼 화제'라는 타이틀이었다.
신문 속 사진에서의 재욱은 환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수정은 재욱을 떠나보내면서 겪어야 하는 수많은 괴로움에 날마다 힘겨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순 없는 법...
재욱에게 한푼도 받지 않은 건 잘한 결정이라며 스스로 위안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녔고 엊그제 면접을 봤고 최종 합격을 했다.
대기업 까진 아니어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꽤 유명한 중소기업 비서로 근무하게 되었다.
직업이 비서인지라 맨날 정장을 입고 출근해야 하는 까닭에 비싼 메이커는 아닐지라도
저렴한 정장 대여섯벌을 구입해 최대한 단정히 하고 출근했다.
게다가 회사의 최고봉인 회장님의 비서인지라 책임감도 막중했고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근데 얼마전부터 수정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가 있었으니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회장의 아들 이병헌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수정에게 말을 걸어보는 병헌..
"뭐 좋은 일 있어요? 옷도 산뜻하니 이쁘고, 그 미소도...." -병헌
"아무일도 없습니다." -수정
"황비서, 여기서 근무한지 얼마 안되었죠?" -병헌
"네.. 입사한지 얼마 안되었어요." -수정
"요즘 젊은 아가씨답지 않게 참 단정하네요, 겉모양처럼 속도 그런지 모르지만.." -병헌
놀리는 것 같으면서도 웬지 말 속에 뼈가 있는 듯한 말을 내뱉고 유유히 사라지는 병헌..
병헌은 사실 수정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첫 눈에 반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싫었던 동욱이지만 갑자기 의욕적으로 일을 해보고픈 맘이 들 정도로..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사장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그리고 그렇게... 수정을 지켜보고 있던 병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수정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시간되요?" -병헌
"시간 없습니다." -수정
"내가 고민이 좀 있어서 그러는데.. 말할 상대도 없고.." -병헌
"제가 사장님 고민 들어줄 만큼의 자격은 없는것 같아요." -수정
"혹시 내가 지금 꼬신다고 생각해요? 그저 너무 외로워서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던 건데" -병헌
"저는 말주변도 없을 뿐더러 이사장님의 외로움을 보태 드릴거에요." -수정
수정은 조금씩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병헌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다음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 준비를 마친 수정은 우산을 쓰고 회사로 향했다.
일을 다 마치고 퇴근하려는데 이사장이 또 앞에서 얼쩡거린다.
"황비서, 밖에 비오는데 혹시 우산 있어요? 없음 내꺼 빌려주고.." -병헌
"우산 있어요." -수정
"황수정씨.. 여자란 참 알수없는 동물같군요, 잠시 놀아나볼까 하는 여자는 계란처럼 부드럽고,
진중하게 다가가고 싶은 여자는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고, 그게 뒤바뀌어야 하는데 말이지.." -병헌
자신에게 무안할 정도로 냉정한 수정에게 이렇게까지 계속 들이대는것도 남자로서 쉽지 않은일인데
병헌은 자존심 따위 같은 건 이미 잊은지 오래였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날도 병헌은 계속해서 수정에게 작업 멘트를 날렸다.
수정은 한도끝도없이 거절하는것도 예의는 아닌듯해 그의 저녁 제안을 받아들였다.
식사를 한 후 가볍게 와인 한잔씩 하던 두 사람... 병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그런 남자가 있어서 날 멀리하는건지 아니면 내가 소문이 안좋아서 상대 안해주는건지 그걸 알고픈데.." -병헌
"없습니다." -수정
"그런 말투 그만해요, 여긴 회사도 아닌데 듣기 좀 그렇군.. 그 미모에 한번도 없었다는건 아닐테고 지금 없다는 뜻이겠죠?" -병헌
"네.. 지금 없어요." -수정
"다행이군요, 여태 헛수고 한 건 아닌듯 해서..
내가 아무리 수정씨를 맘에 두고 있다고 해도 임자 있는 여자한테 들이댈 정도의 무뇌는 아니라는거요." -병헌
"...................................." -수정
조심스러우면서도 거침없이 수정에게 다가가는 병헌..
하지만 남자의 배신으로 인해 굳게 닫힌 수정의 맘은 그 누가 다가와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수정의 거절로 여러번 무안함을 겪은 벙헌이지만 참 끈질기리만치 다가가는 병헌이다.
퇴근 후 술 한잔 하자는 제안을 웬일로 허락한 수정, 병헌은 뛸 듯이 기뻤다.
수정은 맘이 공허해 안주도 먹지 않은채 계속 술을 들이켰다.
사실 오늘은 예전에 재욱과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던 날이다.
재욱에 관한 건 모두 떨쳐버리려 했지만 아무리 지워내려 해도 쉽사리 그럴 수가 없었다.
보다못한 병헌이 한마디 한다.
"이건 물이 아니니 천천히 마셔요." -병헌
"오늘은 많이 취하고픈 날이네요, 걍 냅두세요." -수정
"차분한 사람이 이렇게 용기 있어진다는 건 가슴이 몹시 허하단 뜻인데.." -병헌
"맘데로 생각하세요, 근데 왜 사장님은 술 안드세요?" -수정
"내가 취하면 황수정씨를 관찰할수가 없으니까." -병헌
평소 모습이랑은 많이 다른 수정을 유심히 지켜보며 관찰하는 병헌...
근데 갑자기 펑펑 우는 수정이다...
헤어진 재욱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수정...
그 속을 알 수 없는 병헌은 등을 토닥여주며 지켜보는 수 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꽤 깊은 상처가 있는 모양이군요, 수정씨 이렇게 아프게 하는 사람 도대체 누구죠? 어떤 사람인지 질투나네." -병헌
아무 말도 없이 울기만 하는 수정을 바라보는 병헌,
자신 앞에서 수정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한 구석이 벅 차 올랐다.
수정의 가슴 속 상처를 알게 된 병헌이 아침에 출근해 초콜릿을 주며 말했다.
"이미 떠난 남자는 잊어버리는게 좋아요, 달콤한 초콜릿은 기분을 업시켜 주는데 이거 먹고 좋은 하루 보내요." -병헌
"고마워요, 사장님." -수정
"사장님 소리는 하지말구.." -병헌
병헌은 차마 입밖으로 표현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외로워 하지 말았음 해요, 옆에 내가 있으니..' -병헌
수정의 마음과는 달리 많이 앞서가는 병헌, 그렇지만 병헌의 수정에 대한 맘은 진심이었다.
"난 그물에 걸린 것 같아요, 수정씨가 쳐 놓은 그물에.." -병헌
이렇게 오글거리는 멘트도 서슴없이 내뱉는 병헌이다.
아무리 닭살스런 멘트를 날려도 수정은 살며시 미소만 지을 뿐 답이 없었다.
그만큼 꽁꽁 얼어버린 맘을 녹이긴 힘든거겠지..
이런식으로 지내기보단 뭔가 확답을 받고 싶어 그녀와의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식사 승낙은 했으나 수정의 닫혀 있는 맘을 이미 알고 있는 병헌이다.
"오늘 수정씨한테 내 속내를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식사하자고 불러냈어요." -병헌
"....................." -수정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난 수정씨를 좋아해요, 사실상 좋아하는 맘 그 이상이지." -병헌
"....................." -수정
"근데 수정씬 도통 맘을 열지 않더군, 더이상 기다리는것도 솔직히 지치고..
이제 이렇게 방랑자처럼 자유롭게 사는거 못해먹겠어요, 누군가가 날 좀 잡아줬음 좋겠는데 그게 수정씨였음 해요." -병헌
"이젠 제 얘기를 해 볼까 하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수정
"얼마든지.." -병헌
"사실 전 처녀가 아니에요, 단순히 남자친구를 사귀고 헤어지고 잤고 안잤고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결혼식을 올리고 같이 살았었어요.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수정
"......................." -병헌
"실망하셨죠? 아마도 그러실 거에요, 과거가 이런 여자란건 상상조차 하지 못하셨을 테니까.." -수정
"내가 상관없다면? 그럼 받아 줄거요?" -병헌
"죄송하지만 그렇다 하셔도 제 맘은 변함 없어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수정
수정은 냉정히 딱 잘라 말한 뒤 일어나 레스토랑을 나왔다.
나오면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사랑해 주는 한 남자가 있다는 것에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사람 맘이란 건 본인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지라 시간이 어느정도 흘렀음에도 출세를 위해 떠난 재욱을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하지만 재욱에 대한 자신의 맘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담날 수정은 더이상은 이 회사에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사직서를 제출했다.
제출하고 나오는 길인데 병헌이 붙잡았다.
"혹시 나때문에 부담되서 그러는거라면 그만두지 않아도 되요." -병헌
"사장님 때문이 아니에요, 제 갠적인 일때문이에요." -수정
"거짓말 말아요,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이러는거 다 알고 있으니.." -병헌
"..............................." -수정
"그냥 있어요, 우리 친구처럼 지냅시다.
아니, 그것도 부담이 된다면 아예 수정씨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을테니 제발 그만두지만 말아줘요." -병헌
끝까지 남아달라 말하며 본인을 설득하는 병헌을 뿌리치고 수정은 그 곳을 나왔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배려하는 그 남자...
그럼에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현실이 서글펐다.
한편 재벌가의 딸 박선영과 결혼한 재욱은 한동안은 참 행복했었다.
가끔 떠오르는 수정과의 잔상들이 그를 괴롭혔지만 금새 잊고 하하호호 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생활들은 아주 럭셔리했고 회사에서도 승승장구해 대리에서 부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다.
언제까지나 행복에 겨운 삶을 누릴 줄 알았건만 그에게 예상치 못한 불행이 찾아왔다.
부인 선영이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난 것이다.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다른 남자와 호텔에 들어가는 걸 재욱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말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재욱은 당장 쫓아 들어가 자신의 아내와 놀아나고 있는 새끼를 반 죽여놨다.
그리고 선영의 뺨을 세게 후려치려 손을 높이 들었지만 결국 치지 못하고 멈칫하는 재욱이다.
술까지 잔뜩 취해 혀가 꼬일데로 꼬인 선영은 재욱을 쏘아보며 한마디 했다.
"때려보시지? 왜 못때리는데? 뭣땜에?" -선영
"........................" -재욱
"내가 맞춰볼까? 너의 풍족한 삶을 이대로 끝내기 싫어서 그런거잖아, 맞지? 비열한 자식." -선영
"누가 누구한테 퍼붓는거야? 잘못은 누가했는데!!!!!" -재욱
"내가 왜 이렇게 된건데? 다 너때문이야." -선영
"뭐라구?" -재욱
"나 정도의 사회적 위치면 너의 과거 따위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야.
그럼에도 왜 끝끝내 모른척 한줄 알아? 널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야." -선영
"내... 과거를 알고 있었다구?" -재욱
"그럼 결혼할 남자 뒷조사도 안해본 줄 알아? 네가 누구랑 결혼해서 얼마동안 같이 살았는지 다 알고 있다구,법적으로 혼인신고 안했다고 엄청 깨끗한 척 할때마다 아니꼬와서 참..." -선영
"그렇다면 왜 결혼까지 한거지?" -재욱
"아까도 말했잖아, 그만큼... 모든걸 다 덮을만큼 널 사랑했다고." -선영
"근데 왜 이제와서 트집 잡는거야?" -재욱
"항상 네 눈빛을 보면 공허함이 느껴졌어. 겉으론 웃고 있으면서도 진정 행복해 하지 않고, 뭔가 중요한.. 소중한 것을 두고 온 듯한...
나랑 관계를 맺으면서도 다 끝나고나면 뭐가 그리도 허탈한지 또 누굴 그리도 생각하는지... 그 표정은 잊혀지지가 않아" -선영
"미안해, 너랑 살아가면서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재욱
"나두 느낌이란게 있어. 넌 그여잘 아직까지도 못잊고 있어. 내 말이 맞지?" -선영
"..............................." -재욱
"하... 역시나... 예상은 했지만, 가식으로라도 아니라고 대답은 안하는구나." -선엿
"맘의 상처를 줬다면 미안하다, 뭐라 할말이 없다. 네가 하는말 다 사실이니까." -재욱
"나도 더이상은 빈껍데기 붙들고 살기 싫어. 그만 끝내자. 아빠가 사실을 아시면 넌 매장이지만 그렇게까진 하지 않을께" -선영
이렇게 재욱과 선영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여의 결혼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선영과 성격차이라는 이유로 이혼하면서 다니던 회사에도 사표를 내고 다시 혼자가 된 재욱...
수정이 생각이 났지만 차마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행동들이 생각나 먼저 연락할 순 없었다.
수정은 길을 가다가 신문을 보았다.
재욱과 선영이 성격차이의 이유로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단 기사였다.
자신을 버린 남자의 불행이 통쾌하게 다가오기보단 가슴 시린 씁쓸함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매몰차게 뒤도 안돌아보고 나 떠난거였음 보란 듯 잘 살지, 에휴..' -수정
재욱에 대한 미움보단 동정심과 안타까움이 앞서는 수정이다.
문득 그와 처음으로 만났던 곳을 가보고 픈 생각이 들었다.
옛 추억에 잠겨 캠퍼스로 간 수정...
벤츠에 앉아 지나가는 풋풋한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옅은 미소가 새어 나왔다.
'나도 한땐 저렇게 세상 모르고 즐거웠던 적이 있었지.' -수정
속으로 생각한 수정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근데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보니 재욱이 앉아 있는거다.
"재..욱..아?" -수정
"예나 지금이나 한번 생각에 잠기면 멍해서 옆에 사람 오는 것도 모르는건 여전하구나." -재욱
"여긴 어쩐일이야?" -수정
"그러는 넌?" -재욱
"난 뭐 지나가다가... 네 소식은 신문으로 봤어." -수정
"그랬겠지. 워낙에 거물급 집안으로 장가를 가서 내 일거수 일투족이 언론에 노출되는건 다반사였으니.." -재욱
"맘이 씁쓸하겠구나." -수정
"넌 내가 밉지도 않니? 우리.. 그런 위로 할 사이 아니잖아." -재욱
"미워하면 뭐하니. 다 부질 없는 것들이야." -수정
"ㅎㅎ 모든 걸 다 득도한 사람처럼 말한다." -재욱
"그런가?" -수정
"네 옆엔 좋은 남자가 있겠지?" -재욱
"아니.. 아직 혼자야." -수정
"뭐?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한테 애인이 없다구?" -재욱
"이렇게 매력적인 여잘.. 넌 왜 버렸니?" -수정
"미안하다. 내가 죽일놈이야. 진정한 행복이란 돈이나 명예가 아닌데 그걸 깨닫기 까지 오래 걸렸고
이렇게 네 곁에 다시 오기까지도 오래 걸렸다. 아직 내가 맘에 있다면 우리... 다시 결혼 할래?" -재욱
수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욱과 헤어지고 난 후 한번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그것도 한번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맘 속으론 다시 결혼하자고 질문하는 재욱의 질문에 YES라 대답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쉽게 또 다시 결혼하는 건 싫어. 그러기엔 우리.. 너무 멀리 왔잖아." -수정
"그래, 나같은 놈이 뭐가 좋겠냐, 염치도 없이 질문한 내가 바보다ㅎㅎ" -재위
재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정에게 악수를 청했다. 수정은 재욱의 악수를 받아주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둘은 헤어졌다.
재욱은 이젠 영영 수정과도 다시 엮이지 못하게 된 자신의 처지에 한탄했다.
하늘이 내린 천벌이란 생각도 들었다.
힘없이 집으로 투벅투벅 걸어오는데 문자가 왔다.
'재욱아 우리가 다시 결혼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다시 연애를 해 보는 건 어떨까? 정말 진지하게 제대로 된 연애 말야.
대학교 4학년때 만나 사귄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급하게 결혼을 했었는데
그렇게 번갯불에 콩볶아 먹듯 한 결혼이라 애정도 금방 식었던 것 같아.
이젠 우리.. 서로 인생의 쓴 맛도 보고 산전수전 다 겪어봤으니 한번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고, 그래도 둘의 맘이 변치 않고 여전히 사랑한다면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수정
재욱의 대답은 당연히 YES였다.
서로 철없을때 확 불타올라 했던 결혼..
세상 누구보다 뜨거운 사랑을 했으나 세상 누구보다 차갑게 식어버린 사랑도 경험했던 두 사람..
안재욱의 욕망이 화를 불러 두 사람을 잠시 헤어지게 했지만 결국 욕망보다 더 소중한 것은 진정한 사랑이란 걸 깨달은 한 남자...
부디 힘겹게 찾은 그 사랑, 다시는 변치 말고 영원하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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