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편 [요동] 다롄에서 투먼(도문)까지 -3- 백두산 천지와 금강협곡
쑹강허에서 백두산 천지를 오르는데 성공하고 여차저차 돌려차해서 87호 중조국경지역, 도문 통상구에 도착했습니다. 이틀 묵어갈 도문 동관 호텔. 도문에서 외국인 주숙등기가 가능한 2개 호텔 중 하나인데 여기서 약간 이슈가 있었습니다. 북중(중조) 육로 국경 출입을 담당하는 도문해관 투먼(도문)은 북중러 국경이 만나는 훈춘의 팡촨(방천)을 제외하면 가장 동쪽의 북중국경이며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과 도문대교로 이어져 바로 건너편의 남양로동자구에 거주하는 북한 노동자와 중국의 물자가 도보와 차량으로 오고가는 국경대교입니다. 이곳의 두망강변은 강폭이 지안의 압록강변보다 좁고, 겨울엔 수위가 매우 낮아지며, 혹한의 삭풍이 몰아치면 단단하게 얼기 때문에 탈북자 감시가 강한 지역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북중 육로접경지 중 강폭이 가장 좁고, 수위가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강변의 철조망도 무척 견고합니다. 강점기 때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넘어 만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도문북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한참 걷고 해서 도착한 곳은 도문에서 외국인 주숙등기가 가능한 2개 숙소 중 하나인 동관호텔인데 여기 저기 색동저고리 등등으로 꾸며져 있지만 주인 부부가 조선말을 하지 못 합니다. 여권을 주고 체크인을 시작했을 때 한국여권을 주자 낯선 것 같이 당황하여 아주머니께서 컴퓨터 사용이 익숙치가 않으신가? 했지만 한참을 지켜보니 뭔가 공안 주숙등기 입력 중에 계속 오류가 나는 것 같습니다. 한자 이름을 달라, 중국 전화번호를 달라 하더니 아저씨까지 오셔서 머리를 싸매며 1시간을 끙끙대셨지만 결국 주숙등기에 실패하고 짐만 먼저 방에 놓아두고 서둘러 도문대교로 달려갑니다.
도문도 20대의 기억에서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꽤 기억의 파편들을 끄집어낼만한 모습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처음 하얼빈-치치하얼을 거쳐 2006년즈음 도착했을 땐 한국인도 도문해관 직원과 동행하여 도문대교 중앙의 노란색 국경선까지, 일과를 마치고 남양로동자구로 돌아가는 북한 노동자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간 남북관계에 뭔가 적신호가 들어올 때는 아예 입구까지 접근이 금지되고 해제되는 반복을 거치다가 팬데믹을 거친 지금은 다시 접근이 원천 봉쇄되어 관람료를 낸 중국인에 한해서 대교 진입이 가능하게 바뀌어있었습니다.
도문해관 옆, 도문대교를 통제하고 있는 변방출입검사장, 굳게 닫혀있었습니다만 도문대교를 통해 온성군으로 넘어가려는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주차장에서 보따리를 한아름 내려서 건물로 들어가는걸 봐서는 해지기 전까지 입,출경 업무가 이루어지고 있는걸로 추측은 됩니다.두만강변에서 성업중인 한복 대여소 아이시떼루 도문, 뒤로 보이는 옥색의 북측 건물들 도문 두만강 통상구는 북중 육로접경지 중 강폭이 가장 좁고, 수위가 낮습니다. 그래서 강변의 철조망도 무척 견고합니다. 주차장에서 보따리짐을 내려 온성군으로 걸어 출경하는 사람들, 한땐 저 중간까지는 해관 직원의 동행으로 걸어 가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철조망은 견고하지만, 바로 철조망 앞까지 산책로가 뻗어있습니다. 87호 중조 국경비석 두만강 나루터. 건너편에 보이는 북측 건물들 북측 도로를 달리는 뜨락또르 도문대교 코앞 변강호텔, 외국인 주숙등기 가능한 2개 숙소 중 하나인데 몇가지 조건이 맞지 않아 피했고, 후회했습니다 ㅡ,.ㅡ;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강 수위가 낮아지면서 이런 대형 유람선은 운행하지 않고 소형 유람선이 사람들을 태우고 두만강을 오고갑니다. 강폭이 좁고, 수위가 낮아지는 겨울의 두만강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걸어서 넘을 수 있기에 중국측 두만강변은 매우 견고한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그래도 그 철조망 코앞까지는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어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풍경입니다. 바로 이 풍경을 앞에 두고 도문에서 외국인 주숙등기가 가능한 2개 숙소 중 나머지 하나인 변강호텔이 있습니다. 이곳은 시에서 운영하는 국영 초대소라 값이 조금 비싸고, 주변에 음식점 등등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라 선택하지 않았는데 후술할 이슈 등등 고려하면 그냥 여기가 답이었구나 싶기도 합니다.
조금 걷고 하다 보니 귀에 익은 조선말이 들려 귀를 기울입니다. 60대 정도의 어머니 두 분이 산책을 나오셔서 대화를 하시다 저와 눈이 몇 번 마주칩니다. 먼저 '안녕하세요?' 하니 '조선사람이예요?' 하시고 다른 분이 '조선사람이 아니라 한국사람이겠죠' 하십니다.
'한국에서 왔어요? 어디서 왔어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거봐, 내가 옷차림이 한족이랑 다르다고 했잖아'
'서울사람이 여기까지 무슨일이래요?' '신기하네 여기 뭐 볼게 있다고?'
'도문대교 보러 오는 한국 사람들이 좀 있지 않나요?' 여쭤보니 없답니다. 하긴 많진 않을 거라 생각은 되네요. 같이 두만강변을 걸으며 이것 저것 여쭤보았습니다.
'제가 지린성을 거진 20년만에 왔고, 단둥-지안-퉁화-쑹강허-뚠화거쳐왔는데 조선말도 이젠 잘 들리지 않고, 죄다 한족인 것 같아 궁금합니다.' 여쭈니 '이제 조선족은 자치구에서도 옌지(연길)이나 가야 많이 있지 이젠 이런 소도시의 조선족은 전부 내륙 큰 도시로 돈 벌러 갔어요.' 하십니다. 다른 어머니께서 '우리 아들도 일자리 찾아 심양으로 가서 살아요. 돈벌이가 없으니 이런 곳엔 젊은 조선 사람이 없어요. 우리 같은 노인들이나 남아있지.' 하시네요.
말씀 들어보니 두 분 중 한 분은 조선족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시다 정년퇴임하셨고, 한 분은 심양으로 가서 일하고 있다는 아들이 이 선생님의 중학교 제자였답니다.
'일자리가 많이 없나요?' 하니 '없지요. 우리야 여기서 나고 자라면서 먹고 살았지만 애들은 살 수가 없지요' 하십니다. '장백산 거쳐 왔다고요?' '네, 올해의 백두산 천지 첫 눈을 보고 왔습니다. 안가보셨나요?' '요즘은 사람들 관광도 다니고 하지만 우리 나이 사람 대부분은 도문을 벗어날 일이 거의 없어요. 가면 옌벤이나 장춘 정도 다녀올까.' '좋은 시대에요. 젊을 때 많이 다녀요.'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 다시 조선말 이야기가 나와서 들어보니 이렇습니다. '이제 조선족학교에서도 조선말 교과서가 없습니다. 다들 한족어로 된 교과서로 한족말을 배우죠.' '아, 조선족 학교에... 조선말 교과서가 없나요?' '이젠 없어요. 시대가 그렇게 된거지 뭐.'. '내 제자들 중에 옌벤에 남아있는 아들이 얼마나 될까요. 전부 나가서 살지요. 그러니 그렇게 되는거지요.'
음, 이제 좀 궁금증이 해소되는 느낌입니다. 결국 호구에 등록된 조선족의 숫자가 감소하는건 결국 일자리 때문이었군요. 그 빈자리를 한족들이 채운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어쩌면 점점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조선족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본 조선족상점의 사람들이 그저 조선말을 할 줄 모르는 조선족이었던건가...? 화제를 돌려서...
'도문대교를 사람들이 꾸준히 이용하네요?' 여쭈니 '왔다 갔다 하지요. 다 조선사람은 아니고 조선족하고 한족들도 있어요' '아? 지금 조선족이나 한족도 입출경이 가능한가요?' '여기 도문에 호구 있는 사람들은 도문대교 타고 조선 넘어가서 하루 관광하고 물건 같은거 사서 들어올 수는 있는데 우리가 굳이 남양을 갈 일이 없지.' 우리 여기서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다녀와보지 않았어요.' 하십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어머님들이 찍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선 남양
아, 됐구요.
영어 문구가 뭔가 이상하지만 넘어갑시다.
도문대교 산책로 한쪽에 마련된 대교 입장로. 내국인에 한 해 유료로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님들 인사드리고 헤어져 도문시장에서 저녁 먹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살짝 문을 열어보니 젊은 공안이 문 앞 서 있습니다. 아뿔싸. 숙소에 뭔가 문제가 있구나. 혹시 주숙등기가 만료된걸 숨기고 영업하고 있었나? 짧은 순간 다양한 생각이 들었는데 이 공안 생각보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친절합니다.
제가 중국에서 다양한 공안을 겪어봤는데 내 방에 '들어가도 될까요?' 라고 물어보며 허락을 구하는 공안은 이 사람이 처음이었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고 먼저 여권을 건넨 후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부분은 대화가 아닌 질문입니다.
'도문에는 무슨 일로 왔습니까?' '국경절이라 시간이 남아서 관광하러왔습니다'
'도문에 무엇을 보러 왔습니까?' '도문대교하고 두만강을 보러왔습니다.'
'중국에는 무슨 일로 체류하고 있습니까?' '중국회사에 잠깐 임대온 외노자입니다.'
'소속된 중국회사는 어디에 거점을 두고 있습니까?' '소속된건 아니고 회사 거점은 텐진입니다.'
'중국회사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여기 명함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도문 바로 전에는 어디에 있었고 어떻게 도착했습니까?' '다롄-단둥-통화-지안-통화-쑹강허-창바이산-뚠화-투먼'으로 이동했습니다.
'무엇으로 이동했습니까? 이동수단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전부 열차로 이동했고, 여기 E티켓들 있습니다.'
'지난 체류지에서 숙박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제 여권번호로 주숙등기를 열람하면 되지 않나요? 숙소 목록도 여기 있습니다.'
'도문에서 언제, 어디로 떠날 예정입니까?' '이틀 머물 것이고, 떠나는 시간은 모릅니다. 다음 목적지는 옌지입니다. 그리고 텐진으로 돌아가겠죠?'
'그렇다면 이후 텐진에서 계속 머물게 됩니까?' '그건 모릅니다. 저는 외노자라서 중국 내에서도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옵니다.
녹음과 메모가 끝나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통화 후 제 명함, 중국 현지 회사 명함, 여권과 비자를 찍어 보냅니다. 그 후로도 한참을 휴대폰으로 뭔가 조작하더니 여권 명함들을 돌려주고 '선생님의 주숙등기는 제가 방금 온라인으로 처리했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하고 떠나갑니다.
뭔가 멍... 합니다. 멍.... 함의 상당부분은 너무나 친절하고 인텔리한 공안을 겪었기 때문인가...? 아! 이래서 아까 주인 부부가 주숙등기를 처리 못 했던 거구나?
퍼뜩 생각이 나서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이런 일이 있었는데 제수씨한데 좀 물어봐 달라고 했습니다. 제수씨가 학위 논문 현지 답사할 때 지린성, 흑룡강성 곳곳에 있었으니 뭔가 알지 않을까 해서였는데 돌아온 답변은 '그때 ㅇㅇ이도 도문에서 똑같은 일이 있었대. 너 옛날엔 안그랬냐는데?' 랍니다. 뭔가 이슈가 있어서 주숙등기가 막힌게 아니라 도문은 두만강지역이고 외국인이 드물다보니 그냥 외국인은 전부 이렇게 대면검사를 하는게 원래 방식인 것 같습니다. 옛날엔 주숙등기도 수기이고 하다보니 제가 그때는 그냥 넘어갔던 케이스였을 수도 있겠네요.
하여튼 영어도 잘 하시고 높은 친절함을 탑재한 공안이 찾아오셔서 좋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양탕에 흰쌀밥. 양탕 너무 좋아 짱짱맨!
이젠 중국도 곳곳에 개신교회가 있습니다. 교파는 없고 대부분 기독교삼자애국협회 소속입니다.
일광산 일대 두만강변 도문 통상구 열차 선로. 단둥 통상구는 사람과 차량, 열차가 조중우의교로 건너지만 도문은 열차 통행구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아침을 먹고 두만강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일광산을 향해갑니다. 일광산에는 두만강 조각공원과 수월스님의 수월정사를 (잇는다 주장하는) 화엄사가 있습니다. 수월스님은 성원스님(경허대사의 형님)에게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시작하였고 1912년 동,포들을 따라 헤이룽장(흑룡강) 수분하의 관음사라는 작은 사찰에서 만주로 피신한 독립군과 동,포들을 살피며 지내시다 1921년 이곳 일광산의 화엄사에 머물며 항일투쟁을 하는 독립군들과 만주로 도피하는 실향민들에게 밤이면 짚신을 엮어 내어주고, 주먹밥을 지어 먹이며, 병자를 돌보다 1928년에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현재 일광산의 화엄사는 엄연히 말하면 수월스님의 화엄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이평림이라는 조선족 사업가가 가산을 내어 수월정사를 잇는 마음으로 지은 절이라고 합니다. 저는 가톨릭인이라 이쪽 사찰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이 화엄사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에 가까운 이야기가 많아서 이런 배경이 있더라는 말씀만 드립니다 :)
사람들이 택시를 타고 올라가는데 산 입구에서 화창한 날씨를 고려하니 걸어서 가도 괜찮을 것 같아 40여분 걸어 올라가니 두만강 조각공원이 나옵니다. 기억에 노천 전망대가 있던 곳인데 이젠 근사한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안내를 읽어보니 2013년에 도문시인구계획국에서 조성한 공원으로 한국의 다양한 조각가들도 함께 참여하여 조각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다양한 각도의 두만강 일대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두만공원에서 부채춤을 추며 옛 가락을 부르는 조선족 어르신들을 보며 끈질기게 남아있는 한민족 문화의 흔적을 봅니다.
가을의 두만강 일대도 너무 좋네요
그런데 1시간이 2시간이 되고
3시간 걷다보니 길을 잘못들었다는게 확실하여
다행히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고 일광산 입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아름다워서 조각공원 둘러보고 일광산을 아예 한바퀴 돌아야겠다 생각하고 걷기 시작했는데 9시에 시작한 산행이 1시간, 2시간, 3시간 정오가 넘어서까지 산길을 걸으니 인도는 사라지고 어느새 차도로 걷게됩니다. 사람은 당연히 없고 지나다니는 차도 없어서 살짝 불안한데 가을산의 야생벌까지 꼬이기 시작해서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차가 아주 가끔 있어서 손을 흔들어 히치 하이킹을 몇 번 시도 했고 다행히 젊은 커플이 차를 세워주어 일광산 입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ㅠ 늦은 점심으로 랭면을 한그릇 후딱 하고 도문 일대를 돌다 기차를 타고 옌지(연길)로 향합니다.
3시간 넘게 걷다 먹으니 와 진짜 훌훌 넘어감...
연길족이라...
정처없이 떠돌다 저녁을 먹었는데 맛있었습니다. 역시 한국인은 탕이야!
연길로 와서는 연변대학교 한국민속문화공원에서 가까운 숙소에서 묵었는데 친절하고 교통 편리하고 무척 좋았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서 이곳 저곳 다니다 북한산 송이거리가 엄청나게 크게 있어서 물어보니 이미 대부분은 한국이나 일본으로 보내고 올해 장사 자체를 거의 마무리하는 분위기였는데 구매하면 한국으로 보내주냐니 개별구매는 못 보낸다고 하네요. 아마 식물, 식품 검역때문이 아닌가 하는데 값은 그렇게 싸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북한의 삼림상태를 생각하면 북한산 송이라는건 환상종에 가깝고 북한산 송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만주 삼림의 중국산 송이가 아닐까... 생각.
저녁은 어디인지 모르겠는데 후미진 골목 가운데 사람이 꽤 많은 조선음식점이 있어서 들어가 순대하고 이것 저것 주문해 먹었는데 괜찮았습니다. 확실히 이쪽으로 오니까 음식풍하고 간하고 향 등등이 한국사람 입맛에 가까워지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연길 공항에서 톈진으로 돌아가는 남방항공 비행기를 타며 이번 요동 일주는 끝났습니다.
공항보다는 기차역 느낌의 연길공항
잘 둘러보고 갑니다.
재미없는 장황한 글 읽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늘 각자의 일상에서 건승을 바랍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