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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주의) 제헌국회 총선거 남제주군 선거구 득표결과와 오용국앱에서 작성

샤이니_셰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11.11 07: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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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간: 1948년 5월
현황: 부분적으로 발견
선거결과: 오용국(16,540표, 당선)
               강성건(???표, 낙선)
유실사유 - 제주 4.3 사건

오용국(1904년 10월 28일 ~ 1968년 10월 11일)
사인 - 북한에 의한 처형
무덤 위치 알 수 없음.

“5・10선거에서 오용국은 강성건과 경쟁했다. 오용국은 서귀면장을 지냈고, 말을 잘해 인기가 있었다. 심금을 울리는 말을 잘했다. 강성건은 방위대장을 했는데 저승차사라 불렸다. 오용국은 얼굴도 미남이고 인품도 좋았다.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회계를 담당했다. 오용국의 큰아들 오○순은 교장으로 퇴임해 신효동에 살고 있다.”
- 신효동 주민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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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유적지 - 제헌국회 입법의원 오용국 추모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신효동 소재

나무위키에 오용국 의원의 사진이 올라가 있지만 북제주군 갑 홍순녕 의원도 같은 사진으로 올려져 있어서 추모비 사진으로 대체

발단 - 제주 삼일절 발포사건과 무장대의 봉기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만여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삼일절 기념행사를 열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이 사전에 섭외한 12000여명,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참가한 8000여명의 시위대는 기념행사를 마친 후 원정로, 즉 지금의 관덕로를 따라 행진하며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관덕정에서 북국민학교로 들어가는 골목길에서 어린아이가 경관이 모는 말에 치이고 말았다. 말에 치인 아이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아이를 친 경관이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가는 것에 군중들이 격분해 항의하자 경찰관들은 폭동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21살 젊은 엄마와 15살 국민학생을 포함 6명이 죽고 말았는데 이 사건을 '제주 삼일절 발포사건'이라 부른다.

※ 신구범 전 지사는 죽기 전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말에 치인 아이가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고 증언했다.

열흘 뒤 이 사건에대해 경찰의 사과와 배상을 바라는 항의성으로 박경훈 초대 제주지사가 지사직을 사임한 것을 시작하여 제주도 직장의 95%가 파업을 하게되었다. 경찰당국은 사과와 배상을 하는 대신 총파업 주동자를 체포하는 것으로 화답했고 수많은 파업참가자에 비해 경찰력이 부족해지자 제주경찰감찰청은 파업에 참가한 66명의 경관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를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으로 채워버린다.

특히 서북청년단은 북한의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인해 월남한 지주출신과 개신교인으로 구성된 단체로 사회주의라면 이를 갈고 탄압하였다. 이 들과 응원경찰들은 조천면에서 중학생 김용철, 대정면에서 27세 양은하 등 3명의 청년을 고문하여 사망케 이르렀다. 이 고문치사사건으로 민심이 술렁하자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진 남로당은 이것을 기회삼아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키니 이른바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었다.

전개 1 - 평화협상과 선거 보이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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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삼 - 본명은 이승진. 원래 김달삼이라는 이름은 장인 어른인 강문석이 사회주의 활동을 할때 쓰던 가명으로 김달삼에게 물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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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연대장 김익렬

이때까지만해도 제주도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9연대는 봉기진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않고 투항하면 김익렬 연대장의 비호아래 살려주겠다는 선무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진압에 들어가기 앞서 무장대와 교섭하라는 미국의 명령을 받은 김익렬은 수차례 교섭을 시도한 끝에 4월 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을 가질수 있었다. 평화협상 끝에 김익렬이 내린 결론은 72시간 이내로 양측의 전투행위 중지, 무장대의 무장해제,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자수는 무장대의 자율에 맡기고 무장대 수뇌부가 탈출할 수 있게 선박을 제공하고 대신 보증을 위해 자신의 가족들을 무장대의 인질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김달삼은 깜짝 놀라 연대장의 가족들은 자신이 지정하는 가옥에 머물되 군인들의 출입을 허용한다며 한 발 물러나 평화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제주도의 노동절(May Day in Korea:Cheju-Do)
약 11분 경, 불타는 오라리

노동절이자 평화협상으로부터 72시간이 지나지 않은 5월 1일, 청년단원의 가족이 무장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며 오라리 연미마을을 불태우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 무장대측이 격분해 협상을 파토내며 총선거를 보이콧하는 최악의 악수를 두고 말았다.

※ 방화사건의 무대인 연미마을은 사건이 수습된 후 재건되었다.

5월 5일 미군정 장관 딘과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도를 시찰하는 김에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연대장과 비밀리에 회의를 가졌는데 조병옥 경무부장은 방화사건이 빨갱이들의 소행이며 한시빨리 소탕해야 한다며 주장하고 반대로 김익렬 연대장은 이 사건은 복합적인 이유로 일어났으며 경찰에게도 일정지분의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작전을 통해 진압해야 한다며 반박했으나 실랑이로 번지고 말았다. 실랑이는 최한 경찰감찰청장에 의해 소강되었으나 김익렬이 김달삼과 일본군 학병 동기였다는 이유로 협상을 파토냈다며 다음 날 연대장 자리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공석인 연대장은 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 박진경으로 교체 되었다.

※ 일본군 학병은 전문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장교과정으로 말이 모병제였지 모병과정에서 강제성을 띈 사실상의 징병제였다. 즉, 자원해서 입대한 것이 아니라서 이 둘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들지 않았다.

한편 선거 보이콧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남제주군 선거구에서 오용국 후보가 강성건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을 뿐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서 과반수 이하의 투표율로 무효처리 되었으며 1년 후 다시 실시된 재선거에서 북제주군 갑에서 홍순녕 후보가, 을선거구에서 양병직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후 홍순녕 의원은 임기중 병사했으며 잔여 임기 1년 미만으로 재보궐선거는 치루지 않았다.

※ 제헌국회 한정으로 임기가 2년이었다.

전개 2 - 연대장의 교체와 계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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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우측이 박진경

전임인 김익렬과는 달리 박진경은 봉기 진압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과격파였다. 박진경이 체포했다는 포로만해도 6000여명에 달했고 이로 인해 대령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박진경이 무고한 제주도민을 탄압하였다고 생각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식날 밤 술에 떡이되어 잠이 든 박진경을 사살하였다.

※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불명예 전역과 동시에 총살되었다. 박진경에게 탄압받은 사람들은 이 둘을 의사로 추앙하고 있다고.

박진경의 후임으로 폴란드군 장교 출신이었던 김상겸 대령을 임명했으나 밍기적거리며 봉기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고 8일 만에 경질되었고 그의 부하였던 송요찬을 새 연대장으로 임명한다. 이후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일 먼저 제주도에 계엄령을 시행한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통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全島) 해안선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해안선 5km 이내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봉쇄하고 이를 위반할 시 이유불문하고 사살한다. 즉 '초토화 작전'이었다. 계엄령으로 한라산에 발이 묶이고 설상가상으로 인민대회에 참여한답시고 해주로 간후 돌아오지 않는 김달삼, 무능한 2대 사령관 이덕구로 인해 구심점을 잃어버려 폭주하기 시작한 무장대와 빨갱이 소탕한답시고 해안가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해안가로 이주하지 않았다고 마을을 불태우고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는 토벌대, 이 도저히 답이 없는 양측의 무의미한 분쟁으로 인해 합계 추산 약 3만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 답이 없는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도 전체가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 와중에 모종의 이유로 인해 남제주군 선거구의 득표결과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북제주군 선거구는 초토화 작전이 차츰 소강되고 나서 재선거를 치뤘기에 득표결과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 현재 약 1만 9천여명의 희생자가 제주도의 노력으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후에 6.25전쟁이 발발하고나서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약 3천여명이 행방불명 되었으나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8촌 이내로 4.3 희생자가 있다면 제주시 제주한라병원,  서귀포 열린병원에서 제주시: 평일 오후 1시 ~ 5시에 서귀포시: 평일 오전 9시 ~ 오후 5시까지 유족 채혈을 받고 있으니 협조 바란다.

결말 - 선거 이후 오용국 의원의 생애

오용국 의원은 당선 후 4.3사건이 일어난 자신의 고향 제주도에 위문품을 전달할 것을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임기가 끝난후 제2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강경옥 후보에 밀려 낙선되었다. 낙선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자 인민군에 의해 반동분자로 몰려 체포되어 납북되었다. 납북 직후 도자기 공장에 배치되었으나 생활총화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무식한 놈들이라고 비난하여 평북 철산의 탄광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 수용소의 노동반장은 유독 그에게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다고 욕을 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식량 배급이 700g에서 100g로 줄자 앙심을 품고 노동반장을 구타하여 살해하였다. 곧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그는 63세 생일을 17일 앞둔 1968년 10월 11일, 간수들과 수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소각되어진 후 인근 야산에 봉분을 만들지 못하고 암매장되어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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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로스트 미디어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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