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이전의 임천당
소인이 젤 좋아하는 임천당의 작품. 임천당과 사각형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슈퍼마리오 RPG 인데
스위치가 있다면 리마스터 작품을 꼭 한번 해보고 싶구나.
성공으로 끝나는 모든 영웅담과 같이, 임천당의 시작은 미약했노라. 1889년 9월 23일, 스스로를 야마우치 후사지로 (1859-1940) 라 칭한 젊은 장인이 교토의 오오하시 구역에 공방을 차렸으니, 그는 그곳에서 놀이용 카드를 제작했노라.
그는 분명, 1세기 반이 흐른 후의 임천당을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훗날 야마우치의 작은 기업, 임천당은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리더 중 하나가 되느니라. 일본의 다른 비디오 게임 산업의 거인들인, 세가, 남코, 또는 타이토와는 다르게 이 교토 출신의 기업은 20세기 말의 전자-민주주의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나니, 임천당은 그 시기보다 100년 이른 시점인, 메이지 시대 때 탄생했노라.
마리오와 푸키먼, 그리고 그 밖에 오늘날까지 이름을 떨친 수 많은 캐릭터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임천당은 온갖 종류의 카드, 흥미로운 도구, 장난감들을 만들어냈도다, 임천당이 선보인 제품들은 일본 사회에서 취미 생활이 어떻게 변해왔는지와, 때로는 임천당을 좌절케 했던 서양의 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노라.
왼쪽부터 읽으면 되는데, 위의 큰 글자는 카루타 제조원. 아래에는 야마우치 닌텐도라고 써 있음.
영어로 Maruhuku 라고 써 있는건, Maru 는 원, 동그라미를 의미, Huku는 복 (福)의 일본식 독음임.
야마우치가 화투 사업에 뛰어들 때, 그는 도박가의 열정과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었노라. 16세기, 일본을 방문한 포르투갈 해병들은 열도인들에게 "종이 놀이" (카루타, 포르투가어에서 카드를 의미하는 Carta 에서 유래) 라는 비의를 전해줬었고, 일본인들은 이 새로운 놀이에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 엄격한 전제 정부인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이들은 폐국령을 내세우며, 서구에서 유래된 모든 물건들을 추방시켰도다.
그렇게 이 놀이도 일본 열도에서 사라지게 되는 듯 하였지만, 카루타는 모습을 바꿔 오늘날까지 생존하는데 성공했노라. 도박에 주로 사용되던 카루타라는 놀이는 어떻게 금지령을 우회할 수 있었는가? 도박가들은 / 플레이어들은 서구에서 유래된 규칙을 수정함으로써 이 금지령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나니, 카드에 적혀있던 숫자들은 제거되고, 한 해의 달들을 표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노라.
하트, 스페이드, 클로버, 다이아몬드는 네 계절로 대체되었고, 카드의 사람들은 꽃이 대신하게 되었노라. 이 카드 패는 하나후다 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서구의 전사-전쟁적인 테마보다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에 더 잘 어울리는 시적인, 그리고 미학적인 놀이가 되었노라. (이 부분은 개지랄같은데?)
역주: 하나후다는 꽃 패, 또는 꽃 부적이라는 뜻을 가짐. 이 하나후다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고, "화찰" 이라는 한자는, 꽃 전쟁이라는 의미의 "화투"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막부는 (역주 : 에도 막부) 이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주지 않았으니, 하나후다는 여전히 금지품으로 취급되었노라. 그리고 마침내, 메이지 이신 시기인 1885년에 이러한 금지령이 폐지되었노라.
근데 나폴레옹이 왜 화투패 위에 잇지
교토와 오사카 사이에는 수십명의 하나후다 제작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노라. 그중 하나가 야마우치 후사지로로, 이 젊은 장인은 제품의 질에 집중해, 꾸지나무의 껍질과 종이 덤불 = 미츠마타를 (역주 : 미츠마타는 일본판 한지인 와지의 주요 재료) 통해 더 튼튼하고 신뢰성있는 제품을 생산했나니, 이러한 제품을 판매하는 작고 소박한 가게의 이름을 임천당으로 지었노라.
임천당은 세개의 한자로 구성되어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은 분분하구나. 야마우치의 상속자 중 한명은, "신께 우리의 운명을 맡기다" 라는 뜻이라고 주장했고, L'Histoire de Nintendo 의 저자인 Florent Gorges 는 또 다른 가설을 내놓았나니,
그는 "임천당의 '당' 은 사당 또는 성소로 번역될 수 있으며, '천(구)' 은 하나후다를 뜻하는 속어고, '임'은 "내버려 두다" 라는 의미로도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임천당은 "자유로운 하나후다 사당" 입니다! 임천당이 처음 기업활동을 시작했을 때 불었던 자유화의 바람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죠..."
(솔직히 개소리로 들리는데 ㅋㅋ)
닌텐도가 2차 대전 동안 제작했던 프로파간다 보드게임. 위에 유년 (어린이) 쌍륙이라고 써있는데,
쌍륙 (일본어 : 스고로쿠) 은 주사위를 굴려서, 맵을 한바퀴 돌리는데 성공하면 승리하는 게임임.
한가지 궁금증 : 임천당의 몇몇 제품에는, 나팔륜 황제의 초상화가 세겨져있는데, 아마 메이지 시대 당시의 유럽 문화에 대한 개방성 때문으로 추측하는 이들이 많노라.
이러한 개방성은 1902년, 또는 1907년에 재확인 되나니, 임천당이 일본 내, 최초의 서양 카드 생산자가 되어, 포커와 다른 카드 게임 가이드를 해당 제품에 끼어넣는등의 친 서구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느니라.
1904-1905 년 당시, 루스 차르국과의 일본 간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는데, 전쟁 세금의 일환으로 카드 생산자들은 큰 세금을 (본문 : Karuta Zei, 한국말로는 카루타 세) 내게 되지만, 임천당은 포커의 도입 등을 통한 다양성 확대로 이러한 위기를 넘기게 되누나.
닌텐도-디즈니의 이로하 카루타. 닌텐도는 디즈니의 힘을 빌어 오사카 증권 거래소에 상장하는데 성공한다.
1929년, 야마우치 후사지로의 사위인 카네다 세키료가 임천당의 사장이 되는데, 세키료는 임천당을 일본 최대의 카드 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성공하고, 태평양 전쟁 이후, 1945-1952년 간의 미 군정의 일본 통치 시기동안 닌텐도는 그 자리를 고수하노라.
그 당시, 일본 어린이들 사이에서 미합중국에서 온 만화들이 크게 히트했었는데, 새로 사장이 된, 야마우치 후사지로의 증손자 야마우치 히로시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설득해, 1950-1960 년대 동안 캐릭터 사용권을 위임받는데 성공하나니,
미키와 도널드 덕분에, 가족기업이였던 임천당은 오사카 증권 거래소에 상장하는데 성공 하누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장사하던 닌텐도는, 야스촌을 경영하기도 했음
하지만 1964년, 도쿄에서는 하계 올림픽 대회로 세계인들을 불러모으게 되고, 이에 임천당은 스포츠에 기반한 새로운 디즈니 카드를 세상에 내놓지만, 심각한 실패에 빠지고 마는구나.
카루타는 더 이상 매력적인 제품이 아님이 밝혀졌고, 임천당은 의심의 시기를 견디게 되나니, 이 시기 임천당은 모든 방향으로 사업 확장을 시도하는데, 명확한 전략이 존재하지 않았던 임천당은 택시 기업에 투자하기도 하고, 햇반을 상품화해서 출시하기도 했으며, 한시간, 또는 하룻밤 동안 야스할 방을 빌려주는 러브 호텔 사업에 뛰어들기도 하였노라.
야마우치는 이에, "제가 도전했던 모든것들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몇년동안 기나긴 터널 속에서 자본금을 탕진했어요. 저는 찾을 길 없는 탈출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라고 밝힌 바 있노라.
초기 임천당, 그리고 현대화를 열렬히 갈망하던 뚝딱이 아저씨
오늘날의 닌텐도를 있게한, 1등공신 요코이 군페이. 부하들 존나 잘 갈굴것 같이 생겼다.
1965년, 구원은 전자 분야에 젊은 엔지니어으로 찾아왔나니, 야마우치가 정비부 부장으로 고용한 요코이 군페이로, 현대화에 강한 열정을 가진 공작 애호가였노라.
군페이는 근무시간 중에 남몰래 나무조각들을 이어붙여, 손의 힘만으로도 펴지고, 접히는 도구를 만들면서 놀곤 하였노라.
요코이 군페이는 "그 때, 전 땡땡이치고 놀고 있었는데, 사장님 때문에 깜짝 놀랐었습니다. 사장님이 저를 사장실로 불렀을 때, 저는 좆됐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사장님은 저에게 "판매 가능한" 장난감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라고 "요코이 군페이, 닌텐도 장난감의 신의 삶과 철학" 이라는 자서전에서 당시를 회상한 바 있노라.
요코이 군페이의 첫 히트작인 Ultra Hand, 닌텐도에서 처음만듬
1967년, 이로써 Ultra Hand 라는 이름의 원격 팔이 탄생하게 되었고, 백만대가 팔리는 기염을 토하며, 베스트 셀러 1위에 올랐노라. 그 이후에도, Ultra Machine 과 같은, 야구공 발사기에서 영감을 얻은 (미군정 때 부터, 야구는 일본의 대표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요코이 군페이의 작품이 같은 해 차례로 발매되었고, 이윽고 전자 장난감을 발매하게 되노라.
1969년에 Love Tester를 발매하는데, 연인들의 친밀도를 확인하는 "전류"를 측정하는 기구였노라. 싱붕이들은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나 역자는 이에 슬픔의 눈물을 흘리노라. 측정을 위해서 두 "플레이어" 는 손을 잡고, 한명은 자석 구체를 들고 있어야하였노라.
뭔가 에로하게 생긴 러브 테스터. 중학생이 쫄아있던 이유를 알것같다
신체적 접촉이 잦지 않은 국가에서 이런 장난감의 출시는 대담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임천당은 이를 통해 제품의 주요 타겟을 어린이들 뿐만 청소년과, 나아가 성인들로 확대하려는 움직임이였노라.
이에 요코이 군페이 가로되, "당시에, 저희 제품을 판매하던 상인들이 저에게 말하길, 중학생 한명이 Love Tester 를 사기 위해 매장으로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근데 막 우물쭈물하던 게, 야한 잡지 사러온게 아닌가 싶었데요 !"
요코이 군페이가 내놓았던 Kosenju 장난감. 뭐 레이저같은걸 쏴서 맞으면 장난감이 소리를 내거나 하는, 그런 물건이였겠지?
R&D 부서의 총 책임자가 된 요코이 군페이가 창조한 제품들은 남녀노소 모두의 사랑을 받았노라. 1970년에는 일본의 전통 타악기에서 영감을 받은 리듬 박스인 Ele-Conga 가, 1971년에는 스트로보코픽 광선을 발사해, 플라스틱 과녁을 맞추는 Kosenju 가 발매되었노라. (역주: 코센쥬는 일본어로 광선총이란느 뜻)
하지만 요코이 군페이의 가장 커다란, 야심찬 (그리고 막대한 지출을 요구한) 프로젝트는 볼링장에서 사용 가능한 비둘기 사격 시뮬레이터였는데, 이는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로 회사를 골로 보낼뻔 하였느니라.
4비트 cpu // 65 비트 램 4개가 달린 1792 바이트 롬
지금보면 기가막힌 성능이지만, 당시에는 닌텐도에게 기가막히게 잘 팔렸던 기기다.
또 다시, 요코이 군페이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기업을 구하게 되나니, 신칸센에 탑승했을 때, 요코이 군페이는 샐러리맨이 액정 계산기를 두들기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걸 발견 했노라.
군페이는 당시 세계 계산기 시장의 선두주자인 Sharp 사에 (지금은 대만에 팔림) 연락하기로 다짐했는데, 이는 포켓 게임 (Jeux de poche) 을 만들기 위함이였으니, 게임 캐릭터나 배경이 차례대로 켜지고, 꺼지는 기술이 필요했음이니라. (의역)
이에, 새로운 기적이 일어났나니, 1980년에 시장에 등장한 Game & Watch 의 다섯 모델은 임천당의 수익을 4배나 상승시키는 성적을 거두노라. 저렴하고, 또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해당 전자 오락기는 1991년까지 생산됐는데, 오늘날에도 콜렉터들이 눈독들이는 제품이 되었노라.
Des gadgets pas toujours réussis
장난감으로는 항상 성공을 거둘수는 없는법
최강의 낙하산 인사, 미야모토 시게루. 가족인가가 꽂아줬던걸로 알고있는데,
닌까, 닌빠 거르고 미야모토 시게루의 게임 개발자로써의 역량은 세계 제일임. 이건 걍 팩트임
사업 다양화 전략을 취하던 임천당은, 라이벌이였던 타이토의 Space Invaders (1978) 의 성공을 보고서는, 아케이드 게임에 투자하기 시작했노라.
요코이 군페이는 젊은 게임 디자이너인 미야모토 시게루의 작업을 감독했었는데, 미야모토 시게루는 킹콩의 시나리오에 영감을 받아, 빨간 모자를 쓴 수염난 아저씨가 고릴라에게 잡힌 아가씨를 구하는 플랫폼 게임을 제작하였노라.
이 게임은 일본에서도, 그리고 미합중국에서도 커다란 흥행에 성공했는데, 이 동키 콩 (1981) 으로, 임천당은 세계구급 기업으로 거듭나게 되누나.
2년후, 임천당이 처음으로 발표한 카트리지 콘솔인 패미컴은 (패밀리 콤퓨타의 쥴임말, 유럽-미국 시장에서는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또는 Nes 로 알려짐) 또 다른 성공을 낳았고, 야마우치 히로시에게 엄청난 돈을 벌어다 주었으니, Forbes에서는 2008년에, 그가 일본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고 발표한 바 있느니라.
AVGN이 개쌍욕을 한 바 있는 버츄얼 보이. 빠르게 명멸하는 붉은색 게임 화면 때문에 게이머들은 구토감을 호소했었다고 한다.
주가 데이터를 찾아봤는데, 그렇게 큰 실패는 아니였던것 같음.
버츄얼보이는 95년 7월에 일본에 발매됐고, 8월에 북미에서 발매됐음.
처음에는 점프맨으로 이름붙여진, 동키맨의 작은 주인공은, 후에 마리오라는 이름을 달고 임천당의 앰블럼으로 자리잡게 된롸.
수 많은 승리가 그 뒤를 따랐으니, 1989년에 발매된, 요코이 군페이가 만든 휴대기기인 Game Boy, 2006년, 비디오 게임을 더 대중화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한 닌텐도 Wii가 그것이느니라.
하지만, 실패 역시 존재했나니, 1995년의 Virtual Boy 로, 일종의 비디오-헤드셋인데, 이를 사용한 거의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고통을 호소한 바 있노라. 이 기록적인 실패 이후, 1996년, 요코이 군페이는 임천당을 퇴사하게 되는데, 1년 후, 교통사고로 인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노라.
미야모토 시게루는 계속해서 잊을 수 없는 모험들과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데, 특히 그가 만든 젤다의 전설 : 시간의 오카리나 (1998) 는, 역대 최고의 비디오 게임으로 알려져 있노라.
게이머들은 임천당의 하나후다 카드부터 젤다에 이르기까지 지난 제품들을, 이번 10월, 교토에서 개장하는 임천당 인터렉티브 그랜드 뮤지엄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노라.
임천당의 거의 130년에 가까운 게임의, 놀이의 역사 속에서 거닐수 있으리라
최근에 임천당의 이러한 과거에 대한 경의는, 2023년에 개봉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에니메이션에서, 뉴욕 시에서 수염난 아저씨가 그의 아크-에너미인 쿠파와 대적하는 씬이 바로 그것이나니, "Hanfuda" 에비뉴와 "1889번지", 눈 깜짝할 새에 오래된 카드 공장에서, 꿈의 공장으로 변하는 씬이 바로 그것이느니라.
원문 : https://www.geo.fr/histoire/l-histoire-de-nintendo-avant-mario-22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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