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카제 특공에 사용될 기체는 250kg 폭탄을 고정장착했으나 장착한 채 폭발을 위하여 신관장치를 개조했다.
폭탄엔 낙하중의 풍압(風壓)으로 해제되는 풍차식 신관이 달려있었지만 특공기체엔 이를 떼어냈다.
<<가미카제가 등장하게 된 대표적인 3가지 원인>>
[첫번째]
42~43년 사이 신형 함재기 헬캣,콜세어에 의한 미군의 제공권 장악 그리고
보포스 40mm 대공포의 실전배치로 인해 제로기들의 통상적인 공격으론 미함선에 타격과 생환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42년 11월 과달카날 해전 이후로 일본 항공전력은 무려 2년가까이 미해군 구축함조차 침몰시키지 못하게 된다.
특히 44년 6월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으로 알려진 필리핀해 해전과 10월 12~16일 사이에 벌어진 포모사 전투에서 일본의 항공전력은 괴멸 상태로 이어진다.
(2번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항공기 약 1000대가 격추 당하지만 미해군의 피해는 전함 1척 '손상' 순양함,구축함 4척 '손상'이 전부였다.)
[두번째]
자원과 산업능력의 감소로인해 실전에 투입할 조종사를 양성하는 시스템이 붕괴
[세번째]
베테랑 조종사는 대부분 죽고 생환조차 힘든 속성교육으로 양성된 초보 조종사들이 당장 할수 있는건 특공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최초의 가미카제》》
1944년 10월 25일, 각각 250kg 폭탄을 탑재한 5대의 A6M2, Model 21로 구성된 세키 유키오 중위의 시키시마 편대가 출격한다.
그들의 목표는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중장의 특무부대 "Taffy 3"이었다.
이 공격으로
호위항공모함 1척 침몰,3척 손상,사망자 약150명이 발생한다.
통계상 지난 2년간 미해군이 받았던 공격 모두를 합친것보다 큰 피해였다.
이에 일본군은 대대적으로 가미카제 부대를 운용하기 시작한다.
《《가미카제와 통상적인 공격의 다른점》》
<<1945년 2월 미해군에서 방송한 교육용 자료이다>>
1.기존 공격은 폭탄 투하 후 왕복비행을 해야했지만
가미카제는 그럴 필요없이 충돌하면 끝이라 공격 범위가 확장되었다.
2.가미카제는 접촉 지점까지 조준할 수 있기 때문에 명중률이 훨씬 높다.
3. 죽음을 각오한 특공 조종사는 더 단호하고 대담하며 실제적 또는 심리적 장애물에 의해 저지되지 않는다.
4.충돌시 가솔린을 채운 기체는 폭발과 함께 엄청난 화염을 동반하게 된다.
가미카제에 맞아 함선이 침몰하지 않더라도 많은 경우 인명피해,함선의 귀환 또는 해군 야적장의 필요성으로 인해 그에 따른 작전 손실은 심각했다.
《《미해군의 대응 방식》》
미 해군에서 표적에 대한 화력 할당은 단일 공격기에 대한 모든 함선의 집중 사격이 아니라.
개별 함대와 함선의 집중사격이 강조된다.
각 선박과 함대는 자체 특성에 따라 시스템을 구축하고 요격하도록 지시받아야한다.
127mm 주포로는 다양한 고도,각도로 움직이는 특공기들을 조준하기 어려우므로
적항공기 근처에서 알아서 터지는 VT 신관을 활용한다. 조준시간과 장전시간 단축시키는 훈련 필수.
추가적으로 오리콘 20mm 포와 보포스 40mm 포로 여러 차례 공격해도 단거리에서 고속으로 달리는 일본의 가미카제 항공기를 격추하는 데는 종종 실패했다. 이런 무기를 대체하기 위해 3인치/50구경 포가 더욱 강력한 무기로 채택되었다.
《《몇가지 오해와 진실》》
특공기의 연료를 절반만 채운다?
적기의 반격이나 레이더 타겟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고도 비행, 우회침투, 목표물 변경 등의 변수 때문에 충분한 연료의 탑재는 필수적이었고
이미 특공이 나올 시점엔 조종사 대부분이 초보들이라 항법을 오인한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도 있었다.
유독 한국에서만 떠도는 괴소문, 출격할때 마약을 먹이고? 출입구 용접같은건 하지않는다. 할 이유가 없다.
《《최후의 전투》》
1945년 4월 6일부터 6월 22일까지 오키나와 전투에서 실행된 기쿠스이 작전 (대규모 가미카제)으로
미해군은 태평양 전쟁 사상 (단일전역)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약 5천명의 해군이 사망했고 4900명 부상,
에식스 항공모함 8척 대파 및 손상, 전함 10척을 포함한 함선 220척 가량이 침몰 및 대파 당했다. 항공모함에 있던 약 760기의 전투기도 함께 파괴당했다.
미국내에선 오키나와 전투에서 발생한 엄청난 인명피해로 인해 본토 상륙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강해졌다.
(미드웨이 해전,필리핀해 해전,오키나와 전투를 지휘한 해군대장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의 특공에 대한 의견)
-요약-
미해군 전투력,생산력이 급상승 그결과 일본군 조종사들이 갈려나간다. 42년 11월 과달카날 해전을 끝으로 일본군은 통상적인 공격으론 2년가까이 구축함조차 침몰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초보 조종사들 주력으로 치룬 44년 6월,10월 두차례 전투에서 미해군 함선,일본 전투기 교환비 1000:0 대참사 발생.
결국 44년 10월 25일부터 결사항전 본토방어를 위한 최초의 가미카제 전술이 등장해서 다시 미해군 함선 및 인명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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