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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년의 시간을 품은 론진 회중시계, 그리고 어느 독일인의 이야기
1. 도쿄에서 만난 낡은 회중시계며칠 전 일본 도쿄의 나카노 브로드웨이에서 빈티지 시계의 성지라 불리는 잭로드(Jackroad)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우연히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시계 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단정한 흰 다이얼의 오래된, 하지만 깔끔한 론진(Longines)의 회중시계였다.나는 매장 직원에게 이 시계를 자세히 보여주기를 요청했고, 그는 나에게 영어가 가능한 다른 직원을 데려오겠다고 잠시 양해를 구했고 몇 분 후 그의 도움을 받아 이 시계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직원은 이 시계의 정확한 생산·판매연도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대략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 연식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시계 판매 카드에는 아래와 같이 씌어있었다.LONGINES ポケットウォッチ 手巻き Cal.- VINTAGE 稼働はしますが精度保証はございません ※ノンメンテナンス 現状でのお渡しになりますので、ブレスレット調整は行いません。あらかじめご了承の程、お願い申し上げます。こちらの商品は保証適応外となります (작동은 하지만 정확도를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 정비하지 않은 현 상태 그대로 인도하므로 줄 조정은 하지 않음을 양해 바랍니다. 본 상품은 보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시계 전면부 덮개 외부는 임금 왕(王)자와 대문자 G가 합쳐진 듯한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그 덮개를 열면 내가 쇼윈도에서 가장 먼저 보았던 깔끔한 흰색 애나멜 다이얼에 고전적인 아라빅 넘버 인덱스, 6시 방향의 스몰세컨핸즈와 Longines가 선명하게 새겨진 단정한 다이얼을 볼 수 있었다.그러나 진짜 이야기는 케이스 안쪽에 숨어 있었다. 전면부 덮개 안쪽을 둘러싼 원형의 문구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Gutehoffnungshütte Aktienverein für Bergbau und Hüttenbetrieb Oberhausen(오버하우젠의 구테오프눙스휘테 광업 및 제련 주식회사)그리고 중앙부에는 아래와 같이 씌어져 있었다. Herrn Johann Jansen – In dankbarer Anerkennung für 25 jährige treue Dienste(요한 얀센씨에게, 25년간의 헌신적인 근속에 대한 감사를 표합니다)이 짧은 문구만으로도 시계의 정체가 명확해진다. 이 시계는 독일의 대표 공업지역인 루르지방 오버하우젠에 위치한 구테스오프눙스휘테라는 광업 및 제련회사가 요한 얀센이라는 노동자에게 25년 근속을 기념하여 수여한 상품이었다. 후면부 덮개를 열면 에른스트 프란칠론(Ernest Francillon)이 1866년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든 회사명 EF & Co.과 함께 이미 브랜드로 쓰이던 Longines가 병기돼 있다. 론진의 창업자는 오귀스타 아가시(Auguste Agassiz)이지만, 그의 조카인 에른스트가 회사를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하였으며 당시 새로 지은 공장이 위치한 지역인 Les Longines의 이름을 따 Longines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심지어 세세한 모양의 변경은 있었지만 날개 모양의 로고도 한 세기를 훌쩍 넘어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이 시계가 80% 함량의 은으로 만들어졌음을 뜻하는 0.800과, 이 시계의 고유 일련번호(Serial Number)인 2412842가 새겨져있다. 무브먼트를 덮고 있는 덮개를 열면 이 회사가 파리에서 2회, 밀라노와 브뤼셀에서 각각 1회씩 4관왕 그랑프리를 수상했음을 선전하고 있다. 정확히 무슨 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오늘날 워치스 앤 원더스(Watches & Wonders)나 혹은 엑스포와 같은 국제박람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LONGINES4 GRANDS PRIXPARIS - PARIS, MILAN, BRUXELLES 나는 준비해간 루페를 이용하여 무브먼트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내부는 놀랄만큼 깨끗했다. 매장 직원은 내부 부품 모두 (적어도 자신들 매장에서는) 교체를 한 적이 없으며, 자신들이 인지하는 한에서는 순정 부품 그대로라고 설명했다. 도금된 황동으로 추정되는 기본판 위에 내부 덮개에서 확인한 것와 정확히 일치하는 시리얼넘버가와 회사명이 각인돼있었다. 또한 시계의 진동 속도를 조절하는 레귤레이터의 AVANCE(빠르게) – RETARD(느리게) 조절방향 표시까지 또렷하게 잘 보존돼 있었다. 나는 직원의 양해를 얻어 태엽을 감아보았고, 잠시후 우렁찬 째깍 소리와 함께 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니지만 왜인지 나는 이 순간 아주 잠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과 놀라움 사이의 묘한 감정을 느꼈다. 유한한 수명을 가진 대신 자가운동이 가능한 생명체로서, 그 반대로 자가 운동은 불가하지만 외부 동력이 주어지는 한 세기를 넘어서도 무한히 작동 가능한 기계에 대해 갖는 상반된 입장의 경이로움 비슷한 무언가였을 것 같다.일단 시계가 작동하는 것은 확인했으니, 간단한 타임그래퍼 측정도 해보았다. 결과는 일오차 +55초, 비트에러 9.9ms, 진동각 224도였다. 비트에러가 다소 큰 편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오차가 1분 이내로서 당시 기준에서는 실사용으로도 큰 무리가 없는 수준이다. 진동각도 시계의 연식을 고려하면 준수하다. 나는 몇 가지 사항을 추가로 확인한 뒤 이 시계를 구매하였다.2. 시계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다만, 상점 밖을 나서면서도 여전히 이 시계에 남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당시 회사가 직원에게 근속 25주년이라는 뜻깊은 연도를 기념하여 그의 이름까지 각인해서 선물을 주었다면, 그 해가 몇년이었는지도 함께 새겨주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았을까. 물론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그 연도를 인지하고 살아간 얀센씨는 정작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이 시계의 정확한 족보를 갖고싶은 나로서는 여전히 풀지 않은 수학문제를 남겨둔 채 책을 덮은 심정이었다. 우선 나는 이 시계에서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 특히 가장 중요한 시리얼넘버 2412842를 통해 그 단서를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미국의 유명한 중고시계 판매 플랫폼 Bob's Watches의 칼럼에서 론진 시계의 일련번호에 따른 생산연도를 확인하는 칼럼을 발견했다. (Longines Serial Number Lookup: Your Complete Guide: https://www.bobswatches.com/longines/longines-serial-number-lookup)론진은 창업 초기 1870년부터 꾸준히 각 시계 한점한점마다 일련번호를 부여해왔으며, 내 시계 2,412,842는 1910년에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최소한 잭로드 매장 점원의 추정이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은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더 정확한 혹은 교차 검증 가능한 정보를 원했다. 다양한 경로로 검색한 결과, 론진은 자체 웹사이트를 통해 시계의 내외관 근접사진을 첨부하여 양식에 맞추어 요청할 경우 자신의 아카이브 내 판매 장부 기록을 회신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얼마의 비용을 청구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아래 양식을 채워 요청은 해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기록이 남아 있을까 하는 기대였다. 놀랍게도 단 3일 만에 이메일 답장이 왔다.This pocket watch was invoiced in 1911 to our former subsidiary in Berlin.(이 회중시계는 1911년 베를린 소재 당사의 과거 자회사를 통해 판매되었습니다.)론진의 판매기록 장부를 확인한 결과 이 시계는 1911년 베를린 자회사를 통해 판매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무려 114년 전의 판매 기록이 지금도 남아있는 것이 우선 놀라웠다. 앞서 밥스워치가 정리해둔 일련 번호를 통해 추정된 1910년 생산연도, 론진의 아카이브 장부를 통해 확인한 1911년 판매시점, 그리고 지리적으로도 독일 어느 회사의 장기 근속자에게 주어지기 위해 베를린 매장을 통해 판매된 사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어긋남 없이 맞아떨어졌다. 기왕 알아본 김에 이 회사에 대한 정보도 찾아보았다. 전면부 덮개 내부에 씌어있던 회사명 Gutehoffnungshütte을 검색해보았다. 우선 구글 화면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20세기 초 당시 이 회사의 낯익은 로고였다. 앞서 임금 왕(王)자와 대문자 G가 합쳐진 듯한 문양은 G.H.H를 합성한 표식이었다. GHH는 1782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광업 및 제련회사였다. 지난 100여년간 수많은 인수·합병·분할을 거치며 그 명칭은 사라졌지만, 일부 사업부는 오늘날 대형 트럭으로 유명한 MAN의 일부에 해당하며, 결국 MAN이 폭스바겐 산하 기업이니 여전히 폭스바겐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3. 마음대로 그려보는 시계와 얀센씨의 여정 루르 지방은 당시 독일 산업혁명의 심장부였다. GHH가 영위하던 광업과 제철은 산업시대 가장 중요한 업종이다. 얀센씨가 이 시계를 받은 1911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보다 시기적으로 조금 앞서지만, 이미 독일은 군비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루르 지방의 제철소들은 쉴 틈 없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만큼 이 기업도 호황을 맞고 있었기에 당시 기준으로 결코 저렴하지 않은 론진 은제 회중시계를 직원들에게 선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당시 론진은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과 같은 최고급 시계 혹은 오메가와 같은 럭셔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다음 티어로서 정밀한 무브먼트와 세련된 디자인으로 엘리트와 고소득 중산층에게 널리 사랑받은 브랜드였다. 몇 몇 통계와 추정치를 찾아본 결과 이런 은제 회중시계는 당시 고소득 기술직 근로자 임금 기준 한 달치 월급 정도에 맞먹는, 결코 저렴하지 않은 시계였다. 2020년대 대한민국 중위 월소득이 300만원 내외이며, 아마도 얀센씨를 비롯한 산업화시대 기술직의 급여는 중위·내지 평균보다 높았을 것이므로 그들의 추정 월급으로 환산하면 오늘날 기준으로도 400-500만원대의 고가 시계임을 알 수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직원들에게 장기근속 포상으로서 수백만원대의 상품을 지급하는 곳은 대기업 중에서도 사실상 없다.이 시계는 탄생한지 100년이 넘는 동안 누구의 손을 어떻게 거쳐서 도쿄 나카노의 상점 쇼윈도에 오르게 된 것일까.증거는 언제나 빈 칸을 남기고, 인간은 늘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하여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야기로 채우고 싶은 욕구가 있나보다.전후의 혼란 때문일까. 얀센씨는 1911년 근속 기념으로 이 시계를 받은 지 불과 3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했고, 독일은 1918년 패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하게 되었다. 당시 정부는 마르크화를 무분별하게 찍어내어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많은 독일인들이 그랬듯 화폐가 아닌 이 시계와 같은 실물을 팔아 생활비를 충당했을 수도 있다. 심지어 노년에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중공업 기업들이 밀집한 루르지방은 연합군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얀센씨 혹은 그의 후손, 아니 어쩌면 그로부터 시계를 사간 다른 누군가는 이 폭격의 혼란 속에 이 시계를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당시 그 시계의 주인이 독일군 포로였을 수도 있으며. 어느 이름없는 미군 병사가 이 시계를 습득하여 전후 일본으로 흘러간 것일지도 모른다. 시계의 역사를 중심으로 좀 더 잔잔한 스토리로 갈 수도 있다. 1900년대 초반까지 개인용 시계는 이같은 회중시계가 기본이었으며, 손목시계는 주로 여성용으로서 브레이슬릿(팔찌)에 시계를 단 정도의 개념 뿐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적 손목시계는 1904년 루이 까르띠에(Louis Cartier, 우리가 아는 그 까르띠에 맞다)가 자신의 친구인 브라질 출신 비행사 아우베르투 산투스 뒤몽(Alberto Santos Dumont)에게 선물한 산토스가 그 시초이다. 그나마도 손목시계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참호전이 한창이던 1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가슴에 손을 넣기조차 위험했던 상황 하에 신속하게 시간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즉, 1910년대 중반 이후 조금씩 회중시계의 시대는 저물고 손목시계의 시대가 도래한것이다.어쩌면 20세기 중반-후반 손목시계의 시대를 살던 얀센씨의 어느 후손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 회중시계를 어느 딜러에게 판매했을 수도 있다. 이후 1980년대 일본은 그 유명한 버블경제 하에 넘치는 부를 바탕으로 전 세계의 럭셔리·앤티크 수집 열풍이 한창이었으며, 이 와중에 유럽산 골동품 시계 또한 주요 타겟이 되었다. 어쩌면 이 시계도 이런 경로로 대륙 반대편으로 건너왔을 지도 모른다.마지막으로, 그냥 아무 재미도 없는 버전으로서, 단순히 옛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취향에 따라 일본의 중고시계상이 여러 경로를 통해 유럽 시계를 매입하여 마진을 붙여 나에게 판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잭로드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글로벌 중고시계 유통상이다.이런 거시적 시대의 흐름에서 줌을 확대하여 인간 얀센씨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1911년 근속 25년을 맞았다면 그는 1886년 그 회사에 입사했을 것이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중간에 이직을 했지는 않겠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취직을 했다는 가정 하에 그는 1866년-1870생 내외로 추정된다. 프로이센 제국 시절 이미 유럽 최대 광업·중공업 지역인 루르지방에서 태어나 여느 독일인처럼 근면 성실하게 일했을 것이다. 이 시계를 25년 근속상으로 받은 1911년에 40대 중반이었다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당시에는 이미 50세에 가까운 장년이었으니, 전쟁에 직접 참전했을 가능성은 낮고 군수산업 숙련 노동자 및 감독·지휘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흔히 장수(長壽)는 축복이라 하지만, 그의 세대에서는 차라리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적절한 시기에 세상을 뜨는 것이 가장 행복한 말년을 보낸 것일 수도 있다. 전후 많은 독일인들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이를 잘 넘겼다 하더라도 그가 70대까지 살아있었다면 2차 세계대전을 겪었을 것이며, 특히 루르 지방에 계속 머물렀다면 연합군의 폭격으로 거동조차 불편한 노년에 직접적인 목숨의 위험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정말 뜬금없이 새로운 정보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가운데 무엇을 진실로 믿는지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다. 이런 (침해받지 않는) 시나리오의 재량권이 골동품의 매력 아닐까. 특히 시계란 물건은 여러 골동품들 중에서도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자적 동력 없이 "움직인다"는 그 사실로 인해 생명력까지 더해져 독특한 매력을 준다. 21세기의 시계는 더이상 시간을 확인하는 도구가 아니다. 시간이야 지금 당장 주머니에 손만 넣으면 초단위까지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첨단 현대 문명의 도구가 있다. (재미있게도 현대인들이 시간을 확인하는 도구를 주머니 속에 넣고 있다는 점에서 20세기 초에 손목시계에 자리를 내주었던 회중시계가 또 다른 형태로 정확히 100년 만에 반격을 하는 중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핸드폰은 시간을 보기 위해, 시계는 시계를 보기 위해(?) 찬다.특히 이 낡은 회중시계는 시간을 확인하는 도구가 아니라, 어느 근면 성실한 독일인의 인생, 어느 중공업 기업의 역사, 20세기 초중반 독일과 유럽의 파란만장한 전쟁사, 그리고 일본 버블시대의 수집가들까지 이어지는 115년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오브제이다. 끝.
작성자 : 아크바블랙티고정닉
주의) 오싹오싹 미국 최악의 흑역사 - 인민사원 사건
짐 존스라는 1931년에 태어난 남자가 있었음그는 젊은시절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되어 이를 바탕으로 민간단체를 설립함해당 민간단체는 인종갈등이 만연하였던 60~70년대의 미국의 불안정한 사회정세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종의 사람들을 차별없이 받아주고 다같이 기도를 하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선한 단체로 보였음그렇게 인디애나주의 작은 교회에서 시작한 민간단체는 얼마안가 LA로 이사가 여러개의 지부들을 만드는등 서서히 그 규모를 늘리기 시작함그러나 그 과정에서 언론에 의해 이 민간단체의 실상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특히나 교주인 짐 존스의 평소 도덕적 행실에 대해 여러 문제점들이 지적받기 시작하며 심지어는 정부의 개입까지 들어갈 조짐이 보였음그러자 짐 존스는 한가지 수를 두는데, 바로 타국으로 단체의 거점을 옮기는 거였음. 여러곳이 후보지로 지정된 가운데 남미에 있지만 영어를 써서 소통이 간편하며, 상대적으로 땅값이 쌌던 나라 가이아나에 지부를 건설하기로 결정함가이아나 정부는 당시 베네수엘라와의 국경 갈등으로 인해 문제를 빚고 있었는데, 여기에 갑자기 외교적으로 천룡인 취급 받는 미국인들이 제발로 자기네들 땅으로 들어오겠다고 하니 정부는 두팔 벌려 환영해줌이쯤에서 단체는 이름을 바꿔 거의 종교로 탈바꿈함. 일명 The People's Temple. 즉 인민사원이라는 뜻임. 그리고 가이아나의 해당 지부는 존스타운이라고 명명됨존스타운은 “겉보기에는” 아주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듯 했음기자들 몇명이 파견나가 교민들한테 여기 살기 어떠냐고 물어보니 거의 단체로 최면에라도 걸린듯 모두 “살기좋다”는 답변을 반복했음. 이들이 떠나고 싶어도 삼엄한 경비들에 의해 불가능하다는 소문이 돈다고 묻자 교민들은 모두 루머라고 부정했고, “자신들이 원할때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답변을 남김.그러나 실제로 교민들은 경비들에 의해 이곳에 사실상 감금된것이 맞았음. 대부분의 교민들이 더이상 짐 존스의 정신나간 교리와 행적에 동의하지 않기 시작하자, 존스는 경비들을 늘려 아예 이곳을 못빠져나가게 만듬. 사실상 하나의 폐쇠적인 국가를 만들어버린셈임한편 존스의 기행은 계속되었음. 한번은 교민들 모두에게 음료수인 쿨에이드를 독약이라 말하고 강제로 마시게 만들었는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건 모두 자신의 은혜덕이라는등 이상한 말을 했다고함.그렇게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져가던 존스타운을 미국땅에서 눈여겨보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민주당 상원의원인 레오 라이언이었음. 그는 존스타운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겼고 이에 약간의 파견단을 꾸려 가이아나로 떠나 그곳의 실체를 파해치기로 함.사원 내부로 들어간 그는 역시나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했는데, 설상가상으로 한 교민이 그에게 제발 살려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전달해버림. 결국 모든것을 깨달은 라이언 의원은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 실상을 까발리기로 결정함그리고 여기서 최악의 참사가 벌어지고 마는데...당시 존스 또한 라이언이 자신의 정체를 까발리러 떠나려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상태였고, 이에 경비들을 불러 그들을 사살하라는 결정을 내림. 비행기에 막 올라타려던 라이언 의원은 결국 경비들에게 총으로 살해당하고 맒자국의 상원의원이 타국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얼마안가 전해지자 당연히 미국 정부는 개빡쳤고 얼마안가 존스타운을 습격할 작전을 내림.궁지에 몰린 짐 존스는 결국 최악중에서도 최악의 수를 내버리고 맒.그는 얼마안가 존스타운의 교민들을 모두 불러들여 그들을 천국으로 보내줄테니 자신이 주는 음료수를 마시라고 지시함. 이걸 마시면 자신과 함께 천국으로 따라갈거라는 말을 했음그 음료수는 바로 청산가리가 든 독약이었고 당연히 경악한 교민들은 마시기를 거부함. 그러나 경비들의 강요에 의해 대다수의 교민들이 어쩔 수 없이 이를 마시었고 결과는 결국 예상가능하다시피, 수백명의 죽음이었음.이런 개미친 학살극을 벌인 직후 존스 또한 권총으로 자x함.뒤늦게 도착한 미정부는 말그대로 살육의 현장에 그야말로 경악하고 말았음.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고, 그것도 수많은 아이들의 사체 또한 예외가 아니었음.일부 사건이 일어나기전 숨거나 도주한 생존자들을 제외하면, 당시 존스타운에 있던 모든 교민들, 무려 918명이 전멸하여 버림.비록 타국땅인 가이아나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상술했듯 인민사원의 교민들은 모두 미국인들이었기에, 이 사건은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많은 미국인들이 한번에 목숨을 잃은 사건으로 남게됨.현재 가이아나 존스타운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작은 추모비 하나만이 설립되어 있다고 전해짐.
작성자 : Schizo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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