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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의 뮤즈, "럭키"에 대해 알아보자.araboza
오늘도 시발 향수 얘기보다 섹드립에 여념이 없는 우리 향붕이들이 모두 알고 있는 디올의 향수 럭키. 이 향수 이름은 실제 인물이자 디올 역사에 매우 중요했던 모델 루 시 다우파르를 뜻한다노. 루시 다우파르가 누구였으며 디올과 무엇을 하였기에 향수까지 나 왔을노?오늘은 루시 "럭키" 다우파르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아보자.araboza(루시 “럭키” 다우파르가 태어난 모르비앙 지역)독일이 1차대젖 배상금 못 내겠다고 배째라 선언을 한 1922년, 루시 다우파르는 모르비앙의 생모데 마을이라는 개깡촌에서 태어났다.루시 다우파르의 부모는 마을의 소작농이었다. 굶주림 때문에 루시를 버리고 파리 남쪽의 발 드 루아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세 살이었던 루시만 고향에 남아 다섯 살때부터 동네 빵집에서 잡일을 했다. 아기 때부터 이미 인생이 꼬여있었다.(싸튀충은 어디가고 여성들만 남았냐)루시는 열 살 때 홀로 기차를 타고 부모를 찾아갔다. 거기서 열여섯 살 때까지 부모와 함께 살았다.열여섯 살 때 동네 이상한 남자를 사귀었다. 남자는 애만 싸지르고 도망갔다.루시는 부모님 동네에서 멀지 않은 샤르트르의 카톨릭 기숙사에 강제로 보내졌다. 사회 밑바닥 여성들을 갱생시키는 시설이었다.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종종 매를 맞았다.(20세기 초, 여성시설의 재봉 수업)현대의 역사학자들은 20세기 초까지 있었던 카톨릭 여성 갱생시설을 아동노동, 강제노동, 노예노동의 한 형태로 보기도 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이곳에 입소한 여자들은 애미 없는 고아거나 창녀 출신이거나 최하층 빈곤여성이었다. 이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재봉틀을 돌렸다.하지만 이곳의 경험이 루시 다우파르의 훗날을 바꾸었다. 여기서 배운 재봉 기술을 통해 패션계와 가까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1940년, 독일군을 피해 탈출하는 파리지앵들)루시는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기숙시설을 탈출해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로 갔다. 거기서 용접공으로 일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같이 공장에서 일했다.남편은 루시와 결혼한지 반 년만에 실종됐다. 이번에는 자발적 싸튀충이 아니었다.루시는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았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재봉 알바를 했다.(메종 아녜스 드레콜의 이브닝 드레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루시는 재봉 알바를 계기로 아녜스 드레콜의 피팅 모델이 되었다. 전쟁 때문에 파리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모델이 될 수 있었다.당시 모델이 하는 일은 옷을 입고 서있는 게 전부였다. 루시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키가 크고 목이 길었다.아녜스 드레콜은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실 드레스를 만들던 대단한 회사였다. 나중에 2차 대전의 영향으로 망해 없어졌다.(디자이너 마기 루프)아녜스 드레콜 파리 지점을 경영하던 디자이너 마기 루프는 자신만의 컬렉션도 만들고 있었다. 엄청난 부자이자 거액 상속녀였던 그녀는 전쟁 중에도 패션 제품을 계속 생산했다.독일군의 파리 점령 중에도 고급 패션을 만들던 디자이너 하우스는 마기 루프, 에르메스, 로샤스, 니나 리치, 자크 파뜨 등 소수에 불과했다.루시는 마기 루프의 소개로 다른 디자이너들의 피팅 모델 알바도 했다. 그러다가 자크 파뜨와 독점 계약을 하고 정식 패션 모델이 되었다.(자크 파뜨의 드레스를 입은 루시 다우파르. 이래보여도 20대 때다.)자크 파뜨는 피에르 발망, 크리스찬 디올과 함께 전후 오뛰꾸뛰르 패션 삼대장으로 일컬어지지만, 생전에는 발망, 디올과 격이 다른 거물이었다.자크 파뜨는 온가족이 유명한 예술가나 작가인 집안 출신이라 예술계 핵인싸였고 대단히 부유했다.루시가 자크 파뜨의 모델이었던 당시, 자크 파뜨에서 일하던 견습 디자이너가 지방시, 발렌티노, 기 라로쉬 등이었다.같은 시기 피에르 발망은 로베르 피게의 조수였고 발망의 친구인 디올은 그냥 덤으로 딸려있는 두번째 조수에 불과했었다.(당시의 일반적인 패션 모델. 오른쪽이 자크 파뜨)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부유하고 우아한 사람들이 다시 파리에 돌아왔다. 젊고 예쁜 20대 초반 여성들이 오뛰꾸뛰르 모델 일을 차지했다.종전 후 루시는 몇 년간 극도의 빈곤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미 거의 퇴물이었다.원래부터 좆나 못생겼던 데다 어린 시절부터의 고생으로 폭삭 삭은 그녀는 일거리를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위 사진에서 자크 파뜨의 평범한 모델과 루시의 면상만 비교해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당시 루시에게는 아이가 벌써 넷이나 있었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다 달랐다. 남자들은 애만 싸지르고 도망가거나 실종되었으므로, 루시 혼자 아이 넷을 돌봐야 했다.(루시 다우파르와 크리스찬 디올)루시가 다시 찾은 일자리는 이제 갓 독립해 쥐좆만한 옷가게 하나 가지고 있던 하꼬 디자이너의 모델이었다.크리스찬 디올이라는 이름의 하꼬 디자이너는 미신을 믿는 또라이였다. 항상 부적을 지니고 다녔던 그는 점성술로 사람 만나는 날, 외출해도 되는 날, 집에만 있어야 하는 날을 정하는 사람이었다.디올은 전쟁 기간 유명 디자이너들의 모델이었던 루시가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를 “럭키"라고 불렀다.세 살 때 부모에게 버림 받았던 가난한 시골 계집이 루시 “럭키” 다우파르라는 레전드 모델이 된 순간이었다.루시의 인생 마지막 순간이자 그녀의 불꽃 같은 전성기가 시작된 순간이기도 했다.(1949년 루시 “럭키” 다우파르가 처음 등장한 디올 패션쇼)패션계 역사는 모델 루시 “럭키” 다우파르의 디올 시기 이전과 이후가 뚜렷하게 다르다. 사실상 루시로부터 “패션쇼” 가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그렇다.루시는 고급 드레스를 사러 온 부유층 고객들 앞에서 음악을 틀고 당당한 표정으로 걸었다. 사진 속 팔과 손의 독특한 포즈를 자세히 봐라. 루시 이전에는 패션계에서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루시가 없던 1948년의 디올 콜렉션 발표회)“패션쇼” 이전에는 디자이너가 새로 만든 콜렉션을 공개하는 발표회가 있었을 뿐이다.모델은 옷을 입고 고객들 앞에 멀뚱멀뚱 서있다가, 뒤로 돌아보세요 하면 뒤로 돌고, 그저 옷을 보여주었다.고객들은 옷만 보았다. 아무도 모델을 기억하지 않았다. 모델보다 옷이 돋보여야 했기 때문에, 모델은 기억에 남지 않아야 했다.(특이한 포즈를 취하는 루시 “럭키” 다우파르)그랬던 것을 루시는 당당하게 걷고, 워킹 사이에 특이하지만 인상에 남는 포즈를 취하고, 다시 걷고, 다시 포즈를 취하는 “쇼”로 만들었다.옷보다 모델이 돋보이긴 했지만, 루시의 디올 패션쇼는 여느 디자이너들의 발표회와 다른 것을 보여주었다.그저 옷을 보여주는 현장이 아니었다.루시의 디올 패션쇼는 전쟁이 끝난 세계의 아름다움과 약속된 미래의 풍요로움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좆밥 디자이너였던 디올의 이름도 루시와 함께 세계에 알려졌다.(디올 드레스를 입은 루시 “럭키” 다우파르. 뭔가 다른 아우라가 느껴진다.)루시가 서른 두 살이 되던 해인 1954년, 그녀는 세계 최초로 모델 노동조합을 설립했다.노동조합이지만 회사에 맞서 싸우는 일을 하는 데가 아니었다. 잘 나가는 모델 조합원들과 후원자들에게 걷은 돈으로 빈궁한 모델들을 돕는 일을 했다.빈궁했던 모델들이 잘 나가게 되면, 그녀들이 낸 돈으로 어려움을 겪는 다른 모델들을 다시 돕는 구조였다.갑자기 아프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모델들이 루시가 설립한 노조의 도움을 받았다.이러한 상호부조 형태의 사회제도가 현재는 연금이나 건강보험, 사회연대기금 등으로 정착되어 있다. 루시의 시대에는 법제도가 없거나 미비했기 때문에, 그녀는 뒤질 때까지 법률적인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디올 드레스를 입은 루시 “럭키” 다우파르)서른 여섯 살에 은퇴한 루시는 모델 학교를 설립했다. 모델처럼 걷는 법, 몸을 관리하는 법, 눈썹부터 손가락 끝까지 세세하게 포즈를 잡는 법을 가르쳤다.작게 시작했던 모델 학교는 이후 패션계의 유명한 모델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지금은 루시처럼 걷는 “워킹”이 패션 모델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그녀는 마흔한 살의 이른 나이에 암으로 죽었다.(디올 럭키)디올의 향수 “럭키”는 모델 루시 “럭키” 다우파르에게 헌정된 향수다. 그녀는 디올의 뮤즈이자 미신의 대상이었고, 디올 패션을 일으킨 장본인이다.향수 “럭키”는 생전에 은방울꽃을 부적으로 지니고 다녔던 크리스찬 디올의 미신에서 영감을 받았다. 은방울꽃을 메인으로 하는 가볍고 순결한 향기다.하지만 사회 최저층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던 루시의 생애나, 패션 모델로서 당당하고 특출났던 그녀의 이미지를 닮지는 않은 것 같다.모델들의 보돕보였으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사회적 리더로서의 모습도 담겨있지 않다.은은하고 깨끗하지만, 은은하고 깨끗하기만 한 이 향수는 프랑수아 드마쉬라는 거장 조향사의 작품임에도 다소 심심한 평작으로 평가된다.(디올 럭키 에스프리)럭키 에스프리는 드마쉬의 뒤를 이어 디올 조향사가 된 외노자 새끼가 만든 좆망작이다.외노자는 오리지널 럭키에 흙냄새와 인돌릭한 땀냄새 등을 더했지만, 이 향수에 어울리지 않는 인공적인 단내를 너무 두텁게 넣어버려서 개쳐망했다.애 딸린 못생긴 흙수저로 시작해, 세련된 패션의 미래를 보여준 레전드 모델이 된 럭키.진정으로 그녀를 닮은 향수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노? [시리즈] 향수의 역사 시리즈 · 남자향수의 럼향에 대해 araboji· 유명 조향사들의 헤어스타일을 알아보자.araboja· 사라져버린 전설의 레전드 향수 썰 푼다 (feat.난교)· 향수를 사랑했던 아르누보 예술가의 그림· 싱글벙글 끌로에 이야기· 망트 라 졸리의 슬픈 역사를 알아보자.araboza· 칼리스 베커와 향기의 민주주의 그리고 빨통· 칼 라거펠트 비하인드 스토리· 입생로랑 향수가 유명해진 계기· 후방) 우비강의 역사 ~귀족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 레뱅 게르부아에서 ㄹㅇ로 있었던 사건.true· 팬데믹 기간 중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향수· 향수산업이 이집트에 만들어준 수십만 일자리· 향긋향긋 향수 디스커버리 세트의 역사· 오우드와 장미 이거 정보· 오리엔탈 향수의 뜻과 초기 오리엔탈 향수· 미국 창녀는 어떤 향수를 뿌릴노?· 향수에 관한 넷플릭스 드라마· 좋 바바토.스 아티산의 짧은 역사· 향붕이 영화 추천한다 (feat.겔랑)· 향수업계 호구 남편 넘버원· 뚜왈렛이란 무엇일노· 2010년대 초반이 향수업계 정점이었던 이유.eu· 향긋향긋 버버리의 운지· 향수에 관한 각종 통계· 몽롱한 환각성 향기, 다투라 이야기· 최초의 부지향수· 아키갈라우드,,,, 헤응· 샤넬 19번· 싱글벙글 옛날 향붕이들이 쓰던 향수촌· 일제시대... 향수...
작성자 : 안태우고정닉
사회주의 밑바닥에서 자본주의 꼭대기까지
중국의 워렌 버핏 리 루 (Li Lu) 리루는 1966년 4월 중국 탕산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교육 받은 공학자, 어머니는 부유한 지주의 딸로 식물학자였음. 원래라면 부유한 집안의 귀한 자식으로 컸겠지만 태어난지 한달만에 그의 운명이 뒤바뀌게 됨. 문화대혁명이었음. 리 루의 부모는 부르주아 지식인이라 무산계급의 적으로 매도되어 먼저 아이를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머니가 노동수용소로, 이후에는 해외 라디오 채널을 듣던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려 "재교육"을 위해 탄광으로 보내짐. 다행히 부모님이 끌려가기 전 리 루의 양육자를 구할 돈을 친지에게 건낼 수 있었고 아버지의 친구인 다파라는 문맹의 광부가 리 루를 맡아줌. 다파는 리 루가 8살이 될 때 탄광사고로 사망함, 홀로 된 다파의 아내 다마가 6명의 아이들을 부양해야 했음. 15살이었던 광부의 어린 아들인 라오다가 아버지를 대신해 탄광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감. 리 루의 부모는 "재교육"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고 어색한 재회를 하게 됨. 탕산대지진 마오쩌둥(모택동)이 죽기 몇달 전의 새벽, 탕산에 진도 7.6의 대지진이 발생함. 사람들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줄 알았다고 함. 운 좋게도 리 루의 가족은 모두 살아남았지만 그를 맡아주었던 양어머니인 다마와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음. 리 루는 현장으로 달려감. 집은 무너져 있었고 여섯 아이들의 숨이 붙어있었지만 도움을 주지 못해 세상을 떠남. 오직 장남인 라오다만이 살아남았으나 하반신이 전부 뭉개졌음. 탕산 대지진은 역사상 세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됨. 라디오 선전으로 마오쩌둥 정권이 폐허가 된 마을을 돕고 있다 했으나 실제 군인과 당의 간부가 아니면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걸 보고 정부에 대한 혐오감이 생김. 리 루는 다시 혈육과 살면서 할머니의 지도를 받게 됨. 할머니는 그 도시에서 최초로 대학교육을 받은 여성들 중 하나로 그에게 정부를 이기고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많이 읽고 많이 배우는 것이라고 알려주었음. 천안문 항쟁을 주도하다 1985년 리 루는 난징대학에 입학해 반도체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함. 난징은 중국 동부 장쑤성의 성도로, 수도 베이징에서 1000km 떨어져 있음. 난징 대학에서 리 루는 사실 공산당원이었다고 함. 종교적 숭배는 싫었으나 세상을 바꾸려면 공산당에 들어가 내부에서 개혁을 해야한다고 여겼기 때문임. 곧 환멸을 느끼고 당을 탈퇴하게 되지만 개혁이 가능할지 여전히 궁금했음. 몇년 후인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호요방)이 사망함. 후야오방은 정치개혁을 주장하며 마오쩌둥, 덩샤오핑(등소평)과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을 함께한 사람이었음. 그의 죽음은 전국적으로 추모의 물결을 일으킴. 난징대학에는 후야오방 생전 업적을 찬양하는 대자보가 붙음. 그러다 다음 날부터 추모 구호와 대자보는 교육과 경제의 위기, 도덕성의 결여, 만연한 부패, 개혁에 반발하는 지도층, 덩샤오핑의 독재, 언론의 자유 억압 등 시국에 대한 비판으로 바뀌기 시작함. 천안문 광장은 수도 베이징에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시위 장소가 됨. 난징에 있던 리 루는 주머니에 속옷만 넣고 기차를 타서 4월 27일 베이징에 도착함. 공산당이 인민일보에 학생 운동을 반당, 반정부 반란으로 낙인 찍은 4월 26일 사설이 나온 지 하루 만이었음. 신분증도 없고 난징 출신이던 그는 다른 이들에게 프락치로 오해를 받았는데 다행히 천안문 시위의 정신적 지도자로 알려진 차이링이 리 루를 믿어주었고 옹호 해줌. 시위 도중 난징에서 올라온 여자 친구 자오밍을 천안문 광장에서 만나자 둘은 즉석으로 결혼을 결정함. 시위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음. 마침내 탱크가 천안문 광장을 습격함. 리 루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다 밀수꾼들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홍콩으로 밀항한 뒤 프랑스로 망명하였음. 홍콩에서 천안문 시위 참여 학생들을 국외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던 "옐로 버드 작전"의 도움을 받음. 이들은 총 400명이 넘는 반체제 인사들의 비자 신청을 대행하고 홍콩을 거쳐서 서방 국가로 밀입국 시킴. 원래는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하였지만 미국측에서 거절함. 그들을 받아준 유일한 나라는 프랑스 뿐이었음. 결국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고 운 좋게도 메리 데일리라는 사람을 만나 숙식할 곳을 구할 수 있었음. "내가 천안문 광장에서 탈출하자 모든 이가 나에게 '중국의 민주주의 전망은 어떻게 되는가'와 같은 심오한 질문을 던졌어. 메리는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게 머물곳은 있는지, 갈아입을 옷은 있는지 묻더라고. 당연히 'No'. 미국에서 처음 발을 디딘 6개월 동안 12명이 공유하는 타운하우스인 메리의 집 거실에서 신세를 졌어." 매일 밤 다른 사람들이 각자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실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고 함. 밤에 천장을 보며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이 낯선 땅에서 영어 한마디 못하는데 어떻게 살까 생각했음. 이전에 난징 대학에서 3년 반 정도를 공부했지만, 당연히 이전 성적표를 찾을 수 없었음. 다시 공부의 원점으로 돌아간 셈. 이제 그의 할아버지가 등장할 차례임. 그의 외할아버지 주치산 (Zhu Qi Xan)은 컬럼비아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음. 리 루가 한 살일 때 (문화대혁명 기간에) 감옥에서 돌아가셔서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출판하지 않은 많은 원고를 남겼고 그걸 보고 컸다고 함. 할아버지를 존경했던 리 루는 컬럼비아 대학의 어학 프로그램에 등록해 영어를 배움. 여름 동안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영어 수업을 듣고 가을이 되자 그는 일반 학부에 배정되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음. "뉴욕은 내게 완전히 낯선 곳이었어. 전에는 이런 경험을 한번도 못해봤지. 여긴 모든 종류의 자유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생기더라고. 처음 왔을 땐 영어를 모르니까 외로웠는데 운 좋게도 메리 데일리를 만나고, 메리를 통해 트루디 스타일러(배우, 가수 스팅의 아내)와도 만났어. 어느 날 트루디가 집에 찾아와 소개를 받았는데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몰랐지. 나중에 스팅(가수)을 만났는데 들어본 적도 없어. 그냥 둘 다 참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트루디 스타일러는 리 루와 만났을 때 스팅의 옷으로 가득 찬 가방을 선물하고, 리 루가 책을 쓰고 런던의 출판사를 방문하는 걸 도왔으며, 후에 리루의 책에 대한 영화 판권을 사서 <산을 옮기다 (Moving the Mountain)> 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등 그의 인생의 중요한 역할을 함. 리 루는 책의 인세와 강연료로 번 돈을 주식에 투자. 불장을 타고 생활비와 등록금에 필요한 12만 5000달러(약 1억 7000)를 마련할 수 있었음. 버핏과의 만남 "항상 마음 한구석에 여기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걱정 됐는데 당시에는 성공해야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저 먹고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했어. 난 공산주의 중국에서 자라서 내 이름으로 된 돈이 없는데 갑자기 거액의 학자금 대출이 생긴 거야.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두 푼이라도 벌어보려고 노력했어. 미국에 온 지 2년쯤 됐을 때, 사정을 아는 친구가 [진짜 돈 벌고 싶으면 이 사람이 돈 버는 법을 잘 아니까 가서 들어봐]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어. 그냥 '뷔페 (buffet)'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 그래서 공짜 점심과 함께 하는 일종의 강연이라고 생각했지! 점심도 공짜로 주는 돈 버는 강의라니 좋네 싶어서 갔죠. 그런데 점심은 없고 "버핏 (Buffett)"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만 있더라고." 공짜 뷔페가 없어서 실망했지만 가치투자라는 개념은 리 루한테 큰 충격을 주었는데 눈 앞에서 불이 번쩍 켜지는 것 같았다고 함. 열심히 읽고 계산해 잘 판단하면 틀렸다고 해도 크게 손해 보지 않으면서, 맞으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부분이 매력적이었다고. 버핏의 강의를 듣고 리 루는 학자금 대출을 활용해 주식에 투자해 1996년 졸업할 무렵에는 100만달러(약 13억 5000만원)를 손에 쥐게 됨. 그러면서 컬럼비아 대학 최초로 경제, 경영, 법학의 3개 학위를 한번에 취득하며 졸업함. 졸업한지 1년도 안되서 헤지펀드인 히말라야 캐피털을 설립하는데 1997년 설립 첫 해 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19% 손실을 입게 됨. 얼마 안 가 최대 출자자 중 한 명은 자금을 빼버림.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폭락한 한국과 일본의 회사에 투자를 해 손실을 회복했고, 2000년대 중반 운용자산 규모가 1억 달러(1400억원)가 됨. 리 루의 배경은 서구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큰 돈을 버는 중국의 반체제 인사라는 독특한 인물상을 만들어 냄. '자유의 투사'에서 '맨하튼의 여피족'이 된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음. 2003년 리 루는 인권활동을 통해 알게 된 여성의 초대를 받아 점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성의 남편이 버크셔 해서웨이의 이사였음. 거기서 버핏의 오른 팔 찰리 멍거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 마오타이주, BYD의 주가가 오르기 전 투자에 성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둠. (버핏에게 BYD 투자를 권유한 게 리 루) 지금은 19년동안 연간 평균 19%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180억 달러(약 25조)를 굴리는 회사의 수장임. 이제는 혁명가가 아닌 2002년 당시 리 루는 BYD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했어도 공장에 방문할 수가 없었음. 2008년 리 루는 중국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사의 지분을 친정부인사에게 팔아 넘기며 친정부 행보를 시작함. 그리고 2010년 천안문 사태와 관련된 지명 수배한 21명 중 재입국을 허용한 첫번째 인물이 됨. 이후에도 여러 번 중국에 방문해 베이징 대학교 같은 명문대에서 강의를 하고 기업탐방을 함. 2014년 웨이보에 중국의 전례 없는 경제 성장은 '비범한 재능과 실행력'을 갖춘 정부 덕이라고 찬양함. 그렇게 천안문 시위 주동자라는 경력에도 불구하고 리 루는 중국과 미국 두 나라 모두에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로 책을 내고 강연을 다니며 "셀러브리티"가 됨. 천안문 시위의 주역이자 그의 두번째 결혼식에 주례를 선 왕단은 그와 연락한지 오래 되었다며 리 루가 중국에 들어갈 수 있게된 뒤부터 중국 정부에 협조하기로 마음 먹었고 이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이라고 비난함. 또한 그가 이룬 부는 천안문 시위의 경력으로 얻은 것이고 중국 정부가 그를 천안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게 실수였다고 인정한다는 증거로 선전한다 말함. 이 취재에 응한 뒤 왕단은 성추행 미투 나와서 국립 타이완 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남. (본인은 부인) 리 루는 자서전에 혁명가 동지들과 천안문 50주년에 다시 그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썼음. 서로 손주들을 데려와 소개하고 그간 쓴 일기장도 돌려보자 약속했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L6kQmoAke2A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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