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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날 피부포기하고 찍고왔으니까 한번봐주세요
이날의 동선 대경생활과학고등학교-응봉근린공원-매봉산-한남대교 대경생활과학고등학교에서시작하는데 뭐이렇게 높지 학교에서 응봉근린공원가서 남산타워찍고 서울방송고를지나 매봉산공원 팔각정가서 롯데타워찍고 한남더힐쪽으로나갔음 입구와 거대한블로워 입구에서 조금걸으면나오는 전망대 오른쪽으로는 낙산-창신동이보임 팔각정뷰 이걸 내려오면서 멀리서 찍어야하는데 나무에가려서못찍으니까 다리에서라도 찍었음 한남대교건너기 이노을을 찍어야했는데 배고파서우동을선택했음 선크림써도 오래있어서그런가 피부가붉어지고 가려운데 존버하다가 피부과감 피부과가서약바르는데도 금방안낫네
작성자 : 않이웨앉뒌데고정닉
노로시의 고로시 회피기동
노~루!여러분의 영원한 귀염둥이 마스코트 노루시 등장!Neon Noroshi 인디게임 갤러리 담당 노로시 인사드립니다!8월도 금방 끝나가요! 의미있는 한 달을 보내셨나요?안 보냈어도 상관없어요! 저도 그렇거든요!https://youtu.be/dXoi_Qs9oSE오늘의 게임!도심에서 누명을 쓴 도망자가 되어 생존하는 게임Re:VER PROJECT -TOKYO- 를 소개해요!Re:VER PROJECT -TOKYO-는 일본 인디 개발사 Nestopi와 토에이 애니메이션이공동으로 선보이는 픽셀 아트 서스펜스 어드벤처 게임이에요!배경은 지금 현실의 도쿄로, 흔히 생존 게임에서 그려지는 황폐한 세계가 아니라 번화한 거리와 빌딩 숲, 주택가 골목까지 그대로 담겨 있답니다!이야기는 매니저로 살아가던 주인공 유키노리가 정치인의 추도식에서 벌어진 빵야빵야 사건으로 졸지에 누명을 쓰고자신이 담당하던 고교생 아이돌 히나기와 함께 도망치는 것에서 시작돼요.히나기는 사건 충격으로 쓰러져 열병을 앓게 되고, 유키노리는 그녀의 생명을 지키면서 동시에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도쿄 전역을 떠돌아야 하지요.경찰의 추적과 시민들의 시선을 피해 은신처를 전전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 도시 속 생존이라는 독창적인 테마를 제시한답니다.특히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참여한 만큼, 픽셀 그래픽임에도 캐릭터와 세계가 살아 움직이는 연출력이 돋보이고게임을 통한 새로운 IP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어 단순한 인디 타이틀을 넘어선 시도라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어요!이 게임은 생존을 아주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어요!보통은 상점이나 보급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배고픔과 갈증을, 여기서는 길거리에서 주운 음식이나 쓰레기통 속 물건으로 해결해야만 하지요.즉, 플레이어는 도시 속에서 자원을 스스로 찾아내고 활용하지 않으면 캐릭터의 체력이 금세 위험해진답니다.화면에는 허기와 갈증, 건강 상태가 수치로 표시되는데, 이를 유지하지 못하면 주인공뿐 아니라 히나기까지 쓰러져 게임 오버가 되기도 해요!또 주인공은 고장난 기기를 고치거나 재료를 모아 새로운 도구를 만드는 능력이 있어서, 단순히 아이템을 줍는 것을 넘어 직접 생활을 꾸려가는 느낌을 주지요.버려진 전자기기를 다시 쓸 수 있게 만들거나, 모은 재료를 섞어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현실적인 생존의 손맛을 담아내고 있어요.이런 시스템은 플레이어가 한정된 자원으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그리고 히나기를 지켜낼 수 있는지 끊임없이 시험하게 만든답니다!이 게임만의 특별한 요소는 바로 '시민들의 시선'이에요!일반적인 잠입 게임처럼 적 병사나 카메라를 피해 다니는 게 아니라, 거리의 평범한 행인들이 바로 위험 요소로 작동하지요.유키노리가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수상한 행동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곧장 수상하게 여기고 경찰에 신고해요.그러면 화면에 표시된 수배 게이지가 올라가면서 경찰의 수사가 진전되고, 결국 체포될 위험이 높아지게 된답니다.이렇게 시민 한 명 한 명이 위험 요소로 작동하는 구조 덕분에, 플레이어는 항상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긴장하면서 행동하게 돼요.단순히 은신만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시간대에 움직일지, 어떤 장소에서 물자를 확보할지, 어떻게 눈을 피할지 세심하게 신경 쓰게 만드는 구조랄까요!이 시스템은 현대 사회에서 늘 의식하게 되는 타인의 시선을 게임으로 옮겨온 것이라서평범한 도심이 순식간에 생존을 위협하는 공간으로 변하는 경험을 선사한답니다!게임의 탐험은 단순히 배경을 구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결백을 입증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어져요!도쿄 곳곳의 명소, 시부야나 신주쿠 같은 번화가부터 전통적인 골목길까지 직접 돌아다니며 증거를 모으고 단서를 찾아야 한답니다.이런 탐험은 곧바로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동력이 되고, 특정 의뢰를 받아 약을 구하거나 은신처를 확보하는 등 목표가 뚜렷하게 제시돼요.특히 히나기를 지켜야 하는 설정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그녀의 안전이 곧 플레이 성패와 직결되기에 모든 행동이 무게를 가지게 만들어요.플레이어는 은신처를 오가며 생존을 관리하고, 동시에 살인 사건의 진범을 밝혀내야 하니단순히 며칠을 버티는 게 목표가 아니라 끝까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체험을 하게 되죠!그래서 이 게임은 생존 장르의 긴장감과 스토리 중심 어드벤처의 몰입감을 함께 담아내며픽셀 그래픽의 한계를 뛰어넘는 서사적 힘을 전달한답니다!Re:VER PROJECT -TOKYO-은 게임 발표 후 게임 매체 등에서 관련 소식을 활발하게 다루고 있으며공식 사이트에서도 세계관 소개와 최신 소식 역시 다루고 있답니다!토에이가 함께 참여한 만큼 크게 기대할 만한 게임이니찜하기 및 팔로우 해두시는 건 어떠실까요?노루시를 봐서요~감사합니다! Neon Noroshi입니다!
작성자 : NeonNoroshi고정닉
일본의 전자정부화는 왜 늦어졌는가? (下)
[시리즈] 일본이 왜 아날로그 왕국이라고? · 일본의 전자정부화는 왜 늦어졌는가? (上) · 일본의 전자정부화는 왜 늦어졌는가? (下) 지난 화를 정리해보자.무라야마 정권은 일본의 전자화를 구상했으며 기초적인 조직을 마련하고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내각이 단명함에 따라 무언가 제대로 추진되는 일은 없었다.그 뒤를 이어 탄생한 하시모토 정권은 일본의 전자화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여러 성청들을 통폐합하는 등 행정 개혁에는 신경을 기울였지만 전자화가 곧 행정 효율화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없었다.하시모토가 물러간 다음 탄생한 오부치 정권도 크게 낫지는 않았다. 정권 초입에는 당장 발등이 활활 타는 상황 -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의 여파를 수습해야 했으며, 상황이 조금 안정되어 관심이 일본의 전자화로 옮겨갈 무렵엔 총리 그 자신이 사망. 정권이 붕괴했다.그렇게 6년이 지지부진하게 흘렀다. 때는 2000년. 전자정부는 어느새 그다지 새롭지 않은 아젠다가 되어있었으니 - 최선두 주자 미국은 전자정부의 완성을 선언했으며, 1994년 일본의 전자정부화를 선언할 때 멀뚱멀뚱 보고 있던 나라들도 적잖이 전자정부화에 매진했다.그리고 모리 요시로가 일본의 총리가 된다.모리 요시로는 하시모토 류타로나 오부치 게이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총리였다. 그의 흔들리고 있는 일본에 대한 처방이라고는 오부치 시대의 채권 찍어 공공 인프라 만들기 요법을 반복하는 것이 전부. 대단한 리더쉽도, 비전도 없었다. 구태여 차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하시모토처럼 잘생기지 않았고, 오부치처럼 중도에 죽어 '살아남았다면' 따위의 아쉬움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막말과 망언에 능했다는 것 정도.이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모리 요시로 역시 일본의 전자정부화에 큰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전자정부라는 구호는 존재했으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그러나, 모리 2차 내각이 조각되자 상황은 급변한다. 나카가와 히데나오가 입각한 것이다.이 덩치빨 좋아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먼저 설명해보자면, 게이오대 법학대를 졸업해 사토 히데나오로서 기자생활을 하다, 성인 나카가와와 지역구인 히로시마를 장인에게서 물려받아서 세습 정치인이 된다. 정계 입문은 신자유클럽에서 했지만, 신자유클럽이 침몰해가자 자민당에 입당. 청화회 계파 소속 정치인으로서 고속출세를 해나간다. 자민당 상공부 회장으로서 소비세 도입에 앞장서기도 하고, 자사사 연립 내각이 출범하자 무라야마 총리의 보좌를 맡았고, 하시모토 내각에서는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냈다. 이후 잠깐 내각 밖을 돌다, 자신이 섬기는 모리가 총리가 되자 자민당 간사장 대리에 취임. 이 단락에서 다룰 모리 2차 내각에서는 관방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겸 IT 담당 대신이 된다. 여기까지 약력을 보면 그냥 참 일본정계스럽게 출세가도를 밟아온 무색무취 중진 1로 보이겠으나, 나카가와에게는 한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전자정부화가 급진전된 미국을 보고 충격을 먹었다는 것. 이제까지로 OK, 라는 타성에 젖어있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보스인 모리에게 전자정부화를 적극 권유했다. 그리고 모리는 관방장관과 IT 담당 대신을 겸하게 해주어, 일본 IT화의 지휘봉을 내주는 것으로 답했다. 고도정보통신사회추진본부를 발전적으로 개편하여 내각총리대신인 본인을 본부장으로 하고 국무위원들로 구성된 정보통신기술전략본부를 내각 직속으로 창설하며 그 휘하 조직으로는 민간 전문위원들이 배속된 IT 전략 회의를 설치, 나키가와를 지원한다.사실상 전권을 받은 나키가와는 잘 하는 것 같았다.IT 혁명이 주 화두로 '글로벌 정보사회에 관한 오키나와 헌장'(IT 헌장)이 채택되었던 규슈-오키나와 G8 회담을 성공시킨 다음, 그는 총리인 모리를 대신해 의욕적으로 정보통신기술전략본부/IT 전략 회의의 공동 회의를 주재했다.그는 '왜 굳이 내각에 이런 기구를 만드는가'라는 공세가 퍼부어진 IT 전략 본부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왔으며, 전자상거래를 촉진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자 했다. 이는 아예 하나의 패키지 법안으로 묶여 'IT 일괄법'으로 불리게 된다.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IT화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법적으로 정의할 'IT기본법'을 입안했다.지난화에서 성공적인 전자정부화라는 결말을 맞이한 한국/미국이 법제 정비를 통해 전자화를 정의하고 실현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는 일본이 6년간 갈팡질팡 전자화를 이어간 끝에 마침내 도달한 시작점이었다.총리의 신뢰를 받는 제법 유능한 장관이 톱다운 형식으로 추친하는 개혁.막을 것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았는데...있었다. 어느 주간지에서 나키가와에 대한 폭로가 터져나왔다. 우익 단체 회원과 만났다, 불륜을 하고 있다, (여기까진 일본 정치인 종특이니 OK) 내연녀가 각성제에 손을 댄 뽕쟁이다, 내연녀에게 돈을 줘 낙태를 하도록 했다.심지어는 뭐, 정부 요인으로서 북한에 가는 그 당일에도 내연녀를 만나느라 아침 7시에 이뤄진 호텔 집합에 늦었다지를 않나.한마디로 추잡한 스캔들이 쏟아졌다. 2000년 여름, 막 세 장관직을 연임했을 즈음엔 중의원에서 자신만만하게 IT 혁명을 외치던 나키가와. 가을이 되어서는 야당 의원들의 스캔 관련 질의에 절절 매는 신세가 되었다. 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내각관방장관과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직은 후쿠다 야스오가 이어받고 IT 담당 대신은 사카이야 다이치가 이어받는 형식으로 나키가와는 잠깐 물러난다.물론 무슨 군소파벌도 아니고 청화회의 중진이니만큼 얼마 안가 복귀하게 되어 고이즈미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맡고, 이후 아베 내각의 탄생에도 일조하게 되며, 이후 선거구를 이어받은 아들놈은 애비처럼 내연녀 스캔들로 잡음을 낸다지만. 그리고 이 나키가와 스캔들 등으로 정부 지지율이 내리막길을 걷는 것을 빌미로 자민 내부에서 모리를 끌어내리기 위한 '가토의 난'이 발생한다지만.이는 이 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추진되는 톱다운형 개혁의 단점이라고 한다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필두는 역시 '모가지가 날아가면 모든 것이 허사'겠지.IT화가 일본 경제의 가미카제라고 주접을 떨던 모리 요시로 치하의 IT 개혁은 여기서 삐딱선을 타게 된다. 먼저 일본 IT화를 규정할 IT 기본법은, 가을까지 통과시키려던 나키가와의 바램과 달리 겨울이 되어서야 통과되게 되었다. 또한 각계의 압력을 받아 흐물흐물해졌다. 이를테면, '모든 서류는 전자화, 중복되는 서류는 폐기'를 방침으로 세운 한국과 미국의 IT화 법안들과는 달리, 전자화된 문서 Ok, 기존 문서도 Ok. 전자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화를 하나의 선택지로 열어둘 뿐인 애매하기 그지없는 법안이 되었다.둘째로 IT 전략 본부의 방향이다. 2001년 1월, 나키가와의 낙마 이후 창설된 IT전략본부(풀 네임 : 고도정보통신네트워크사회추진전략본부)는 전신, '고도~본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IT 전략 본부가 결정하는 전략, 기본 방침 등은 어디까지나 제언으로서 다루어질 뿐 구체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각 성청이다.그래도 이 전략 본부를 내각관방이자 정권 실세가 장기간 이끌어나가면 문제가 없겠지만, 나키가와 이후 IT 담당 대신은 2~3개월마다 교체되게 된다.(그중엔 이분도 계신다)전임자와 달리 IT화에 열의도 없고, 관방장관직을 겸임한다거나 총리의 신임을 받는다거나 하여 강력한 권한도 없고. 그저 일본 정치의 관행대로 몇달 거쳐갈 뿐인 장관직을 역임하며, 겸임직인 경제기획청 장관직에 열심이었던 이 후임자들은 그 어떤 리더쉽도 발휘하지 않았다.IT 전략 본부와 IT 전략 회의는 그 어떤 결론도 내지 못했다. IT 기본법과 IT 일괄법의 후속 법안은 입안되지 않았다.전자화는 하나의 방안으로서 권장되나 강제되지는 않고. 몇몇 구시대적 규제는 철폐되었으나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고. 5년 이내에 미국을 뛰어넘겠다, 라는 거창한 목표를 가진 e-Japan 전략이 수립되기는 했고, 민간 인프라에 있어서는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되나 정부 전자화에 있어서는 글쎄. 애당초 내세운 구호부터 '고속 인터넷 3,000만 가구, 초고속 인터넷 1,000만 가구가 이용 가능한 환경 정비' 였더랬다.그런고로, 모리 시대의 전자화는 이렇게 애매한 결론을 맞이했다.고이즈미의 시대가 도래한다.90년대 초를 개혁, 개혁, 개혁으로 시작하여 90년대 거의 대부분을 불황에 시달린 일본은 2000년대 초도 개혁, 개혁, 개혁을 입에 달고 있었다.그런 와중 취임한 고이즈미의 캐치프라이즈는 '성역없는 구조개혁'. '관에서 민으로'라는 구호 아래 비대한 공공영역을 컷하고, 각종 구태들을 청산하여 새 시대에 걸맞는 일본을 열어가고자한 고이즈미는, 마찬가지로 IT, 전자화에도 손을 댔다.https://m.etnews.com/200109040103?obj=Tzo4OiJzdGRDbGFzcyI6Mjp7czo3OiJyZWZlcmVyIjtOO3M6NzoiZm9yd2FyZCI7czoxMzoid2ViIHRvIG1vYmlsZSI7fQ%3D%3D 日, 통신인프라 `빗장` 푼다日, 통신인프라 `빗장` 푼다m.etnews.com그는 IT 분야에 대대적인 투자를 약속한 다음, 마치 JA 쌀숭이들을 척결하는 아들놈처럼 전자숭이 NTT의 통신 인프라 독점을 깨버렸다. 경쟁이 촉진되었고, 일본의 통신 산업은 재도약을 시작. 고이즈미 임기 말이 되면 일본 전역에 광대역망이 깔리게 된다.덕분에 일본 민간 사회의 전자화는 더더욱 촉진되었다. 1999년 말 일본의 인터넷 보급률은 21.4%에 불과했지만 2006년에는 68.5%에 달하게 되었으며, 기업은 2005년 기준 97.6%. 사실상 모두가 인터넷을 도입하게 되었다.그러나 일본 정부의 전자화는 여전히 미묘했다. 일본의 고질병이었던 성청할거주의는 고이즈미 시대에도 악명을 떨쳐, 각 부처가 제각각 본인 확인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시스템들을 포괄하는 정부 통합 시스템을 만든다... 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이외에 전자화에 참가한 업체들이 초기에는 적자를 보고 계약한 다음, 자사에 유리한 시스템을 구축해 해당 부처의 전자화를 독점하고 본격적으로 이익을 올리는 일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일본 국세청의 전자신고/납세 시스템은 NTT 데이터가 독점했는데, 1차 계약에서는 5억 5천만엔에 계약했고, 2차 계약에서는 9억 8천만에 계약. 3차에서는 경쟁상대가 나타나지 않자 본격적으로 폭리를 취해 61억엔어치의 수의계약을 맺었다.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가운데, 2003년 고이즈미 내각은 전자정부 실현을 위한 행동 계획인 '전자정부 구축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뒤이어 2004년 경에는 정부 전자화의 발목을 계속 잡고 있는 할거주의를 청산하기 위해 정보통신성 논의가 등장했다.발단은 이렇다. 2004년 제 1차 경제 자문 회의에서 고이즈미 왈,「구 통상산업성과 구 우정성 시절부터 구 통산성의 산업·경제, 구 우정성의 텔레콤 산업이 부처별로 나뉘어 있어 경제계도 곤란했을 것」「어떻게 안 되냐고 해도 도저히 수직적 분할(칸막이 행정)로는 안 된다」「연계를 강화하면 중복이 줄어드니, 경제재정자문회의를 잘 활용해서 융합시켜야 한다」크게는 두개의 성 - 총무성과 경산성으로 나뉘어 있는 정보통신 부문을 합쳐서 새로운 부처를 만들어 좀 효율적으로 정부를 굴려보자, 이것이며,https://www.rieti.go.jp/users/it/column/column040121.html RIETI - no.41: 「情報通信省」はよみがえるかRIETI - no.41: 「情報通信省」はよみがえるかwww.rieti.go.jp언론도 이런 기사들을 쓰며 고이즈미가 내비친 의견을 사실상 공식화해나갔다.문제는 경산성의 입장이다. 총무성의 IT 관계 부서는 2국 29과 609명. 경산성의 IT 관계 부서 1국 4과 85명으로는 영락없이 흡수당할 수 밖에 없지 않나. 당연히 이쪽에서 볼맨 소리가 터져나왔다.결국 고이즈미의 정보통신성 구상은 무산. 대신 IT 관계 성청 연락 회의 정도나 설치되는 정도로 마무리된다. 팽배한 할거주의는 끝없는 비효율을 낳았다. 더불어 IT 기본법의 이도저도 아닌 전자화 규정 때문에 상당수의 서류는 전자화되지 않은채로 남았다.그 결과를 요약하자면, 2005년을 기준으로,신청·신고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율 - 96.2%(13,719건)신청·신고 이외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율 - 65.0%(10,695건)[독립행정법인이 취급하는 행정 절차의 경우]신청·신고 관련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율 - 12.0%(175건)신청·신고 이외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율 - 7.0%(159건)그리고 전반적인 온라인화율은 10%대를 맴돌았다. 때문에 일본 정부는 2006년도 16%, 2007년도 21%, 2008년도 28% 순으로 차근차근 온라인화율을 올려 최종적으로는 50%에 달하겠다는 「온라인 이용 촉진을 위한 행동 계획」을 세우게 된다. 덩달아 e-Japan을 살짝 틀어 u-Japan, 유비쿼터스화 계획도 세운다. 허나 이듬해 고이즈미가 사임하며, 고이즈미 시대는 종료.인프라는 깔았으나, 이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서비스의 발전은 지지부진. 라이브도어 쇼크 같은 거나 터진다. 더불어 정부의 전자화는 기존 IT 기본법의 한계와 성청 할거주의에 의해 지연된다는 지대한 한계를 가진다.고이즈미 시대 개혁이 거진 다 그렇듯, 시작은 거창했고 나름 의미가 없는건 않지만 그렇다고 홍보한 것 처럼 경천동지할만큼 대단하지도, 갈수록 뒤쳐지는 일본을 구원할 정도로 훌륭하지도 않았던 것이다.다음? 정권 교대 총선으로 이어지는 캐삽질의 연속들. 총리부터가 순식간에 갈리고 덩달 담당 대신들도 휙휙 갈리는 상황. IT화 정책이 안정화된다거나, 성청간의 기싸움이 중재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곤...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엄밀히 말하면 이른바 '하라구치 계획'이라고 나름의 IT-전자화 계획이 있기는 했는데, 관료들이랑 기싸움 하기 바쁜 정권에서 무슨 대단한걸 해낼 수 있을까.게다가 얼마 뒤엔 3.11,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다. 11년을 기점으로 확 꺾이는 예산 그래프를 보라. 불황에 이어 대지진까지 맞게 된 일본 정부는 IT/전자화를 미뤄야 했다.원래도 미뤄온거 아니냐고?그러게.그리고 일본 민주당 정권의 폐허 위에서 마침내 아베가 재등장한다. 아베 정권은 이번이 몇번인지 감도 안잡히는 IT 국가 선언을 했다. 그리고 뒤이어 「내각법 등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 이른바 정부 CIO법을 통과시키고 내각관방에 내각정보통신정책감(정부 CIO) 직책을 설치한다. 이 직책의 목적은 부서간 할거주의를 타파하고 정부 전체를 아우르는 전자화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일본의 전자정부화를 막 시작하던 고도~본부때부터 지적되던 약점을 고칠 직책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경직될대로 경직된 일본 정부는 아베 2기 집권기에서도 IT화가 지지부진했다.결국 코로나가 빵 터져서 내각 총리부터 국민 개개인까지 모두 지금까지의 시스템이 낡아빠졌고 그다지 기능하지도 못함을 알아차리고 나서야 일본 정부의 전자화는 급진전될 수 있었다.개혁이라는게 참 쉬이 되는 일이 아니다. 기존의 관성이라는 것은 막강하기 그지없어, 이웃들이 욱일승천하는 것을 보고도 '이대로도 Ok!'라는 타성에 젖게 만든다.한국처럼 기존 인프라가 미비하다면 그 관성에 덜 얽매일 수 있었겠지만, 일본은 오히려 기존 인프라의 강자라 무리.클린턴이나 김대중-노무현처럼 해당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일관성을 가지고 추진한다면 관성을 깰 수 있었겠지만, 일본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존재할 수 없는 정치 환경이었다. 그리고 90년대와 00년대 일본 정치의 혼란상은 '일관성' 이라는 단어를 정계에서 축출해냈고.게다가 중요한 대목에서 등장한 지도자들은 해당 분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결국 한참 늦어져서 문제가 문을 두드리다 못해 부술 정도는 되어서야 일이 이루어졌다.비단 일본뿐일까. 20년대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초대형 청구서를 받아들고 나서야 뉴딜의 길을 걸었다. 프로이센에서 진정 국가 대개조급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예나 전역에서 나폴레옹에게 처참하게 깨지고 국가가 찢겨진 다음이었다.거 개혁해먹기 참 어렵다.출처일본의 e-Japan전략과 정보화 성과, 전창수/현창회전자정부 구축에 대한 국가간 비교연구, 김윤호/이명무일본의 정보화 : e-Japan과 u-Japan 전략을 중심으로, 전황수/허필선전자지방정부구축에 의한 한・일 행정개혁연구, 허훈e-Japan 전략과 일본형 IT 입국 방향성, 하원규日本における電子政府の現状と課題, 谷口洋志/高鶴日本の電子政府政策に見る「電子政府」の変遷, 本田正美日本における電子政府化政策のポリティクス・イン・タイム, 河昇彬日本における情報政策の展開, 神足 祐太郎日米両国の業務改革(BPR)への取組比較研究 , 奥村裕一 デジタル改革における政治的リーダーシップの把握に向けた試論, 庄司 昌彦https://www.komazawa-u.ac.jp/~kobamasa/reference/it_act/ITact001.htm
작성자 : Ashige_good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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