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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폴란드가 독립 직후에 벌인 깽판들..jpg
1. 폴란드 - 우크라이나 전쟁 (1918)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갈리치아 지방에 서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선포되었는데신생 독립국 폴란드는 이러한 선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쳐들어가 우크라이나를 멸망시킴2. 폴란드 - 소비에트 전쟁 (1919-1921)당시 폴란드 지도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광을 재건하겠다는 '인터마리움' 구상을 기반으로, 소비에트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 독립세력들과 연합하여 전면전을 실시함.공격자가 폴란드인 만큼 초반에 러시아가 밀리다가 체급차이로 수도인 바르샤바 코앞까지 후퇴했으나, 기적적으로 소련군을 격퇴하며 리가 조약(1921)을 체결, 서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을 차지함. 당연히 우크라이나 독립 약속은 이뤄지지 않음.여담으로 이 과정에서 폴란드에서는 과도한 단일민족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는데, 협상 담당자가 '폴란드인이 많이 안 사는 쓰레기 똥땅은 우리 점령지라도 넘겨주겠다'는 소리를 해대서 많은 영토를 얻지 못하게 되자 유제프 피우스트스키가 의회민주주의에 의구심을 가지며 추후 독재자로 흑화하는 계기가 됨.3. 독일과의 국경 분쟁(1918-1921)1차대전에서 개발리고 독일제국이 해체된 뒤 태어난 신생 독일 공화국은 폴란드의 독립을 인정했으나 폴란드는 동부 독일에 대한 국경 분쟁을 계속해 나갔음.슐레지엔 봉기(1919-1921)를 지원하며 영토를 결국 확보했는데,정작 여기는 독일인이 폴란드인보다 더 많이 사는 땅이라 위에서 서술한 '다른 민족이 더 많이 사는 똥땅은 필요 없다'는 주장과 다르게,'아 그거 독일이 통계주작친거고 실레시엔은 교육받은 폴란드인이 많이 있으니까 우리 땅이 되어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를 펼치며 합병함..이러한 국경 분쟁은 20년대 내내 독일과의 관세 전쟁의 명분이 되었음.4.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1920)빌뉴스는 현재도, 그때에도, 과거에도 리투아니아의 역사적 수도였으나, 1920년에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폴란드의 일부였다는 개소리를 하면서 리투아니아를 침공함.국제 연맹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미개한 원시부족 리투아니아를 문명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무장하였으며 이후 합병됨. 당시 리투아니아의 GDP 50%가 빌뉴스가 몰려있었을 만큼 심각한 타격이었고, 1938년까지 두 나라 사이의 외교 관계는 완전히 단절됨.5. 체코 분할에 동참체코가 히틀러의 야욕에 집어삼켜지기 직전, 프랑스-소련-체코가 맺은 삼자간 다자 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소련군이 독일로부터 체코를 방어하기 위해 전개될 예정이었지만,위에서 20년대에 이미 소련(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을 두들겨 팬 전적이 있기에 떄린 놈이 성 낸다고 폴란드는 절대!! 소련군은 체코로 못 들어간다 게이야!!!!를 선언함.정작 히틀러가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를 꿀꺽하자 폴란드도 여기에 합세해서 히틀러와 손잡고 체코의 체신(자올지에)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함 ㄷㄷ이런 쓰레기 깡패짓을 하고 공공연히 유대인을 모조리 지워버리겠다는 등 사실상 유사 나치새끼들이었으나 히틀러한테 선빵맞았다도르 하나로 수십 년째 피해자 코스프레 중임 ㅋㅋ이런 나라랑 우리나라랑 역사 비슷하다고 언플하는게 참으로 수상함 ㄷㄷ폴란드는 히틀러의 요구를 거부했다-> 위를 보면 알겠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만 봐도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폴란드는 독일과 좋은 이웃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히틀러 등장 이전엔 아니었음폴란드는 뮌헨 협정에 참여 안 했다-> 그러니까 더 악질인 거임. 뮌헨 협정은 어쩄건 영국의 중재 아래에 이뤄진 국제법적 협정인데 반해 자올지에 지역은 폴란드가 일방적으로 무력점거했기 때문...그와중에 체신이라고 안 하고 트란스올자같은 개소리 씨부리는거 실화냐?(우크라이나 민족국가를 스스로 없애고 그 이후에 두번이나 통수를 치며)
작성자 : Mullvad고정닉
지상최고속도의 역사 1편
https://youtu.be/gWp3t9eINyc
말 없는 마차, 즉 초기 자동차는 부유한 사람들과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그리고 동시에 기괴하며, 미치광이의 소유물이기도 했다산업혁명의 중심인 영국과 독일은 이러한 인식 속에서 자동차를 받아드리지 못했다반면 프랑스는 새로운 기술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내연기관 자동차는 독일에서 시작되었지만,벤츠와 다임러를 향한 구애는 대부분 프랑스에서 출발한 것으로덕분에 자동차 문화는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꽃피울 수 있었다하지만 영국인들은 여전히 말과 철도에 깊이 매여 있었다18세기, 고속 마차 여행에 대해 존슨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마차로 한 시간에 20마일? 어떤 사람도 공기를 가르며 그렇게 빠르게 달릴 수는 없습니다!”물론, 이는 전적으로 말도 안 되는 비난이었다만약 20mph의 바람에 사람이 질식한다면,존슨 박사는 강풍이 몰아치는 해안 절벽에 있어서는 안됐다한 세기 후, 1854년에 영국의 한 기차는 웰링턴 뱅크에서 81.8mph에 도달했다속도의 짜릿함은 현대 기차 여행의 가장 명백한 매력이었다당시 증기엔진 마차가 20-30mph의 "극단적인 속도"에 도달하는 동안이미 기차는 직선구간에서 55-60mph의 속도로 순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자동차가 등장했다스포츠를 즐기는 두 명 이상의 운전자가 존재하는 한 경쟁은 필연적인 결과였다초기에는 어떤 자동차가 가장 가파른 언덕을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지를 두고 많은 내기가 오갔다1887-88년에는 파리에서 경주가 열렸고,1898년에는 보르도-비아리츠 시내 경주에서 승리한 볼레가 정지 시간을 포함해 평균 26.7mph를 기록했다이는 정지 시간을 제외한 자동차의 순항 속도가 약 35-40mph임을 나타냈다당시 공도 레이스는 중립구간에서 도로 법규를 준수해야했기 때문이다1898년 11월 27일, 언론인인 메이안과 그의 동료들은 샹텔루프에서 힐클라임 레이스를 진행했다코스는 약 1.8km 길이로 기울기가 1/12였지만, 54대의 자동차가 참가해 47대가 완주하는데 성공했다우승자는 벨기에의 붉은 악마 까미유 제나치로토목공학을 전공했으나 자동차에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스스로 전기차 제조사인 CITA를 설립했으며 홍보를 목적으로 이 레이스에 참가했다그의 전기차는 평균 18mph의 속도로 험난한 오르막길을 주파하여 우수성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다하지만 우승자를 향한 관심은 채 일주일도 가지 못했다메이안이 아셰르 공원의 2km 직선도로에서 속도 경주를 개최했기 때문이다첫 번째 1km는 정지 상태에서,두 번째는 플라잉 스타트로 최대 속도를 측정했다메이안의 귀족 친구 가스통 드 샤셀루프-로바 백작그의 전기차 제안도(Jeantaud)는단일 36hp 모터와 충전할 수 없는 풀멘(Fulmen) 배터리로 구동되었고제안도는 플라잉 스타트로 63.157km/h를 돌파해 최초의 지상 최고속도 기록을 세운 것으로 찬사를 받았다정지 상태에서는 약 57초 만에 1km를 주파했다그러나 대부분의 관중들은 기차로 더 빠르게 이동했으며,당시 자전거의 기록보다 1초 느렸다물론 이 불명예스런 기록은 오래가지 않았다제안도로 집중된 관심은 붉은 악마의 경쟁심을 자극했고제나치는 최고속도 기록을 두고 샤셀루프-로바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첫번째 대결은 1899년 1월 17일, 다시 아셰르 공원에서 펼쳐졌다제나치는 샹텔루프에서 우승했던 전기차, 일명 도그카트로 1km를 54초에 주파하며 공식적인 지상 최고속도 기록을 처음으로 깨뜨렸다백작은 51.2초로 응답했으나, 이 기록은 결승점 200미터 전에서 제안도의 모터가 고장 나는 결과를 초래했다10일 후 제나치는 다시 공원에 돌아와 44.8초, 49.92mph를 기록했고샤셀루프-로바는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하지만 3월 4일, 제안도는 아셰르 공원으로 돌아왔다새로운 차는 바람을 가르는 뾰족한 노즈와 공기 저항을 줄인 바닥, 뾰족한 꼬리를 가졌고샤셀루프는 제나치의 기록에서 6초를 단축한 38.8초, 57.6mph를 기록하는데 성공했다공기역학적 형상이 지상 최고속도 기록 경쟁에서 긍정적인 요소로 입증된 순간이었다제안도의 카운터는 붉은 악마의 자존심을 단단히 긁어버린 사건이었다이에 제나치는 양산차 생산을 중단하고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괴물'로 대답하기로 마음을 먹었고그는 자신의 신차에게 '라 자메 콩탕트' 즉 '결코 만족하지 않는'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마치 제나치 자신의 상태처럼 말이다반타원형 판 스프링에 앞뒤 차축이 장착된 간단한 섀시 프레임으로 구성되었고작은 직경의 나무 스포크 휠과 당시 미쉐린에서 제작한 가장 두꺼운 타이어를 장착하고 있었으며로스차일드사의 레옹 오셔가 디자인한 원통형 바디는 알루미늄, 텅스텐, 마그네슘의 합금인 경량 파르티늄으로 덮여 있었다안타깝게도 미사일스러운 디자인에서 얻을 수 있었던 공기역학적 이점은밖으로 드러나있는 섀시와 구동 장치,그리고 조종석 위로 튀어나와 있는 제나치로 인해 상쇄되었으나비주얼만큼은 당시 그 어떤 차보다 파격적이었다1899년 만우절에 진행된 아셰르에서의 첫 기록 시도는 이름 그대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결과였다시간 측정 기구가 아직 설치 중일 때 출발해 기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미 배터리를 소모해 다시 시도할 수 없었던 제나치는 허무하게 벨기에로 돌아가야 했다하지만 4월 29일에 돌아온 라 자메 콩탕트는 34초,105.904km/h로 100km/h 장벽을 처음으로 깨는데 성공했고샤슬로프 백작이 새로운 기록 시도를 포기하면서최고속도 경쟁의 승자는 제나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이렇게 지상 최고속도 기록은 불과 5개월 만에 5차례나 경신되었고 이는 모두 전기차가 세운 기록이었다전에 썼던 글 리마스터링
작성자 : 엪갤러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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