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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헬벨의 캐논을 듣고 감동한 중국 황제
https://youtu.be/icE4i7iwCJg10:57초쯤연희 공량에 나오는 청나라 황제 건륭제다물론 드라마라 건륭제가 캐논을 들었 다는건 허구임하지만 견륭제의 할아버지인 강희제는 서양악기를 들이고 음악 선생님까지 초빙해 아들들 까지 음악 강의를 듣게한건 역사적 사실임서양 음악과 서양 악기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명나라 말기다. 예수교 소속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가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코드를 명나라 만력제에게 선물했다. 리치 신부와 함께 온 판토자 신부는 궁중 환관들에게 서양 악보를 읽고 서양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가르쳤다. 예수교 신부들은 중국에 올 때 악기를 휴대하고 왔으며, 이들이 중국에 지은 성당과 궁중에서 서양 음악이 연주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초석을 닦은 이후, 청나라에서도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역법을 편찬하는 청나라 천문기관인 흠천감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했다. 청나라 강희제(1654~1722)는 서양 학문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서양 음악을 좋아해서 서양 악기를 수집하고, 서양 음악 이론을 연구한 끝에 직접 작곡까지 했다 한다. 벨기에 출신의 베르디난트 페르비스트(1623~1688) 신부는 흠천감에서 일하며 강희제에게 신임을 얻었다. 그는 강희제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포르투갈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하고 있는 토마스 페레이라 신부가 음악의 천재라고 추천했다. 강희제는 즉시 페레이라 신부를 중국에 초청했다. 토마스 페레이라 신부의 중국명은 徐日昇. 드라마 ‘연희공략’에서 언급한 ‘토마스’는 아마도 이 인물인 듯하다. 사격하는 건륭제캬 이게 대국이구나
작성자 : ㅇㅇ고정닉
으악으악 과거 사람들이 치아를 치료한 방법
기원전 7000년경 그냥 활비비로 뚫어서 썩은 치아 긁어냄 물론, 마취는 없음 불피우는 그거랑 똑같이 생겼네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게 맞음ㅇㅇ 진짜 활비비라 그걸로 불도 피웠음 고대 이집트 현대 치의학의 근간이 되는 치료들을 시험적으로 행하긴 했지만 치통 및 충치에 관해서는 아주 단순하게 치료함 바로 작은 쥐를 반으로 갈라 사체가 식기 전에 입안으로 쑤셔 넣는 것. 쥐가 충치의 부정한 기운을 흡수할 거라 믿었기 때문 당연히 효과는 없고 드러운 쥐만 입에 넣고 치통은 그대로 남음 참고로 고대 이집트의 치아 교정술이라고 돌아다니는 이런 사진은 실제로 산 사람에게 행한 것이 아닌, 죽은 사람에게만 행했다고 함 고대 마야문명 기원전 시술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마취 없이 활비비로 치료함 다만, 개별 치아를 집중적으로 치료하고 다른 치아를 손상시키거나 감염을 퍼뜨리지 않고 충치를 치료할 수 있었음 수술 후 환자들은 식염수로 정기적으로 입을 헹구라는 권고를 받았는데, 이는 오늘날 치과 의사들이 하는 조언과 거의 같음 하지만 마야에선 딱히 치료하는 것보단 사진처럼 이빨에 빠꾸없이 구멍을 뚫어서 보석을 박아 넣거나 치아를 붉은색, 검은색으로 염색하는 미용 목적이 강했음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에서는 설탕이나 가공식품을 많이 섭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치가 그렇게 널리 퍼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칫솔로, 소변을 구강 세정제로 사용했던 점을 고려하면 충치는 여전히 발생했다고 함 하지만 다른 점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이를 잃는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는 거임 그래서 대충 충치 치료는 하긴 했지만, 절대 발치만은 하지 않음 기원전 450년에 작성된 로마 12표법의 한 조항에 "자유민의 이를 뽑게 하는 자는 300AS(당시 귀족도 내기 부담스러운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한다"라고 쓰여있음 중세 유럽 그냥 뽑음 발치하면 잠깐만 아프고 더는 안 아프기 때문임 신기한 점은 당시 치과의사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수도사가 출장 다니며 치료했는데, 12세기에 교황청에서 수도사의 치과 치료를 금지하자, 그 자리를 이발사가 대체하게 됨 1400년대까지 이발사들은 치과 시술 외에도 사혈, 농양 절개, 심지어 조잡한 톱을 사용한 절단 수술 등 여러 가지 외과 수술도 함께 시행했음 다만, 당연히 전문지식이 있던 게 아니라 대부분은 마취제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펜치를 사용하여 썩은 이를 뽑았음 우리가 보는 이발소의 기둥이 빨간색과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도 거기서 유래함 빨간색은 발치 과정에서 손실된 피를, 흰색은 수술 과정에서 생긴 뼈와 피를 상징함 빅토리아 시대 영국 마취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하고, 관련 치의학도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지만 정작 의료 환경 자체는 중세와 별반 다를 게 없음 간단히 말해, 만약 불운하게도 충치에 걸려 통증이 극심해지면, 결국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즉 치아를 발치해야 했음 런던의 가장 좋은 지역에서도 지역 이발사나 대장장이가 치아 발치를 실시했는데, 치아 발치를 위한 도구는 대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독 따윈 없는 수백, 수천 명의 DNA가 담긴 더러운 기구들이었음 그리고 당시 치과 의사라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대장장이 작업장을 포함한 더러운 작업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위생적인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함 당연히 감염이 흔한 정도가 아니라 운이 좋아야 감염을 면하는 수준 1837~1901년까지 런던에서만 썩은 치아 때문에 치료를 받다가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됨 - dc official App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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