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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특검, 다음주 '공천개입 의혹' 이준석 소환, 공소시효 정지
뉴토라 링크생략- 단독] 민주당, ‘김건희 내란특검법’ 개정추진.수사중 도피시 공소시효정지https://n.news.naver.com/article/056/0012009115?sid=100 [단독] 민주당, ‘김건희·내란 특검법’ 개정 추진…“수사 중 도피하면 공소시효 정지”더불어민주당이 특검 수사 중 수사망을 피해 도망친 피의자에 대해 도피 기간만큼 공소시효를 정지시키는 내용의 특검법 개정을 추진합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이성윤 의원을 대표로 한 민주당 의원 12명은 오늘(14n.news.naver.com- [속보] 개혁신당 "김건희 특검의 이준석 소환은 가짜뉴스"
작성자 : 갓희대고정닉
패배자가 결국 승리할 때
패트릭 J. 뷰캐넌은 3번 출마해서 전부 낙선한 미국 정치인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은 결국 패배밖에 모르던 그가 바라는대로 되었다. https://youtu.be/eB6DCu4uLCo?si=RFdGsSHOz7DRavnj ... And The Sky Turned BlackProvided to YouTube by TuneCore... And The Sky Turned Black · Eldrvak... And The Sky Turned Black℗ 2022 EldrvakReleased on: 2022-09-10Auto-generated by YouTube.youtu.be [시리즈] 미니시리즈 [트럼프 이전에] · 미국의 양당제를 부술 뻔한 남자 · 패배자가 결국 승리할 때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다들 말하고는 한다. 승자는 역사를 쓰고, 패배자는 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져 서서히 잊혀질 뿐이다. 그러나 오래 이기는게 아니라 마지막에 이기는게 중요한 싸움도 있고, 어떤 승리는 오랜 인내 속에서 천천히 쌓여가는 법이다. 마치 이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패트릭 J.뷰캐넌은 1938년 펜실베이니아의 한 전직 남부군 출신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뷰캐넌은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조지타운 대학교에 진학해 영어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이후 캐나다와 쿠바의 무역 확대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세인트루이스의 한 저명한 보수 언론에 취직했다. 강성 보수 뷰캐넌은 1964년 강경 우파 성향 공화당 대선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열렬히 지지했고, 그러는 와중에 언론인으로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었다. 팻 뷰캐넌은 1966년 공화당의 대권주자였던 리처드 닉슨의 첫 번째 캠프 직원으로 고용되었다. 그의 주요 업무는 바로 상대 진영을 분석하고 닉슨의 연설을 쓰는 것이었다. 뷰캐넌은 언론인의 감각으로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며 닉슨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공화당이 보수적인 남부를 공략하자는 선거전략인 ‘남부 전략’ 수립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침묵하는 다수”라는 표현을 대중화시켰다. 1968년 닉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승리에 크게 기여한 뷰캐넌은 그의 특별 보좌관이 되어 백악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백악관에서도 정치 전략과 언론 대응 임무를 주로 맡은 팻은 닉슨의 국정과 재선을 도왔고, 닉슨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사임할때까지 충성스럽게 곁을 지켰다. 백악관을 나온 후의 뷰캐넌은 이후 10년간 다시 언론인 생활에 복귀했다. 그는 이번에는 신문사가 아니라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정치 프로그램에 출연해 보수 진영의 패널로서 크게 활약했고, 전국적 인지도와 유명세를 얻는데 성공했다. 그러다가 백악관에서 그를 다시 불렀다. 로널드 레이건 2기 행정부에서 공보국장으로 2년간 일한 뷰캐넌은 이 즈음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된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큰 정치적 공백은 바로 레이건의 오른쪽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미국 공화당은 심상치 않은 기류가 돌고 있었다. 레이건의 임기와 함께 20세기 후반을 상징하는 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맞선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빛나는 승리였지만, 승리의 기쁨은 곧 또다른 질문을 맞이하게 되었다. 냉전이 끝난 후 미국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당시 미국의 보수 진영에는 크게 두 가지 분파가 있었다. 더 세력이 강한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하나의 이념이라는 말에 동의해 이민과 자유무역을 긍정했고, 국제주의적 외교를 지향하며, 미국 민권 운동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겼다. 반대로 고보수주의자들은 20세기에 일어난 거의 모든 진보, 뉴딜부터 위대한 사회와 신좌파 운동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사회 운동을 반대했다. 신보수주의자들이 1950년대를 미국의 정점으로 여겼다면, 고보수주의자들의 이상향은 19세기에 가까웠다. 더 고립되고 더 기독교적이며 더 보수적이고 궁극적으로 더 하얀 미국 말이다. 1990년대 초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에서 한 저명한 극우 인사가 돌풍을 일으켰다. 데이비드 듀크는 전직 미국 나치당원에 모자라서 무려 그 악명 높은 쿠 클럭스 클랜(KKK)의 전직 수장, 즉 대마법사 출신으로 그에 걸맞는 인종주의 포퓰리즘 정치관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 하얀 두건을 뒤집어쓴 악령은 여러 미국 백인들에게 깔려있던 반-기득권 정서를 공략했고, 덕분에 잠시 동안 루이지애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화당 정치인이 되었다. 듀크의 반란은 당시 아직 매우 강했던 루이지애나 민주당의 당세와 그에 경악한 공화당 지도부에 의해 두 차례나 좌절되었다. 그는 이후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이런 이가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당대 미국 보수층에 만연했던 불만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그들에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줄 스타가 필요했다. 공보국장 직에서 사임한 후 티비쇼에 복귀한 뷰캐넌은 머지않아 그의 강성 시청자들로부터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달라는 무수한 요청을 받았다.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으나, 야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1991년 듀크가 루이지애나 주지사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을 때, 뷰캐넌은 듀크가 분명 능력주의와 민족주의, 포퓰리즘 정서를 이용해 인기를 끌고 있다며 공화당 역시 듀크의 주장 중 합리적인 것들은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2년 당시 재선을 노리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당 내 온건파이자 신보수주의자로 분류되었다. 1991년 초 그의 지지율은 걸프전에서 승전하며 89%까지 치솟았으나, 그해 말에는 40%대로 하락했다. 1990년에 금융 부문이 흔들리면서 짧은 경기 침체가 왔고, 그 극복 과정은 고용 없는 성장이었다. 부시가 자신의 약속을 깨고 세금을 올렸다는 점도 사람들에게 크게 다가왔다. 고보수주의자들은 부시가 미국의 미래를 맡길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마침내 토양이 갖춰졌고, 팻 뷰캐넌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패트릭 뷰캐넌은 감세 정책을 경제적 민족주의와 융합시켰다. 닉슨 시절부터 세금에 부정적이던 뷰캐넌은 부시가 약속과 달리 증세한 것을 비난하며 세금 감면을 통해 미국 기업과 혁신을 부활시키겠노라 공언했다. 그는 또한 세계화의 바람이 미국의 산업을 파괴하고 있는걸 포착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관세를 부과해 제조업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경제적 민족주의는 그의 상징이었다. 뷰캐넌은 대놓고 “미국 우선”을 외쳤다 - 이는 훗날의 불안한 복선이었다. 뷰캐넌의 사회문화관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논란이 많았다. 그는 미국이 본질적으로 백인 기독교 국가에 가깝다고 믿었고, 미국의 전통적 가치관을 수호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서 낙태, 대마, 포르노, 동성애, 페미니즘, 세속주의는 전부 미국적 삶을 파괴하려 드는 자유주의의 부산물이었다. 그는 또한 대량 이민과 다문화주의가 미국인들의 공통된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시적인 이민 중단책을 선포하고 강력한 이민 통제 정책을 부활시키며, 미국 남부 국경에 울타리를 치겠다고 약속했다. 뷰캐넌은 외교적으로도 고립주의라고 불릴만한 입장이었다. 그는 지독한 반공주의자였으나, 소련 없는 세상에선 공산주의도 없으니 미국이 다시 2차 세계대전 전처럼 고립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뷰캐넌은 냉전기 동맹국들인 일본, 독일, 한국, 그리고 종종 협력 관계였던 중국이 무임승차를 했다고 평했다. 팻은 심지어 미국 정계에서 금기인 영역까지 건드렸다. 그는 이스라엘이 로비를 통해서 자국의 전쟁에 미국을 끌어들인다며 매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경선에서 뷰캐넌의 최우선 공략 지역은 북동부의 뉴햄프셔 주였다. 1992년 맨 처음 경선을 치르게 된 이 주는 상징성이 컸다. 만약 뷰캐넌이 여기서 선전한다면, 판 자체가 흔들릴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지역의 상황도 뷰캐넌에게 유리했다. 북동부 지역은 경기 침체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지방이었고, 여기에 냉전의 종말과 세계화의 진전도 겹쳤다. 당시 뉴햄프셔는 부동산 거품이 터지고 은행들이 파산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직물 산업과 항공 산업, 조선업이 붕괴하는 중이었다. 부시의 인기는 바닥인 반면 뷰캐넌의 보호무역주의가 인기를 끌기 안성맞춤이었다. 부시 캠프는 그래도 뷰캐넌을 상대로 여유만만했다. 그는 현직 대통령이었고 현직이 경선에서 패배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뉴햄프셔 경선 당일날 부시의 등골은 서늘해졌다. 출구조사에서 뷰캐넌의 지지율은 부시와 거의 비슷하게 나왔고, 최종적으로도 출구조사보단 낮으나 여전히 높은 38%를 얻었다(부시는 53%를 득표했다). 분명 이긴건 부시였으나 모두가 뷰캐넌을 승자로 여겼다. 뷰캐넌은 연설에서 반란이 혁명으로 번졌다며 기세등등했고, 부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후에는 콜로라도와 메릴랜드, 조지아 주가 동시에 경선을 치르는 날이었다. 뷰캐넌은 기세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가장 공들인 곳은 바로 조지아 주로, 오늘날은 경합주로 전락했으나 당시만 해도 미국 남부 보수주의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지역이었다. 뷰캐넌은 조지아에 방문해 남부인들의 정서에 호소했고, 특히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남부연합군에서 복무한 이력을 강조했다. 경선 당일 그는 콜로라도와 메릴랜드에서 30%, 조지아에서는 36%를 받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신보수주의자들의 공격도 내내 이뤄졌다.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기성 정치인들은 뷰캐넌이 데이비드 듀크와 다름없는 위험 분자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저명한 보수 시사지 내셔널 리뷰의 창립자 윌리엄 버클리는 뷰캐넌의 이스라엘 비판을 두고 그가 반유대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신보수주의 성향 칼럼니스트 찰스 크라우트해머는 대놓고 그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뷰캐넌의 거품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상당한 저력을 보여주던 그의 캠페인은 슈퍼 화요일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텍사스와 플로리다를 비롯한 8개 주가 동시의 경선을 치룬 날, 그의 득표율은 평균적으로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뉴햄프셔와 조지아에서 일으킨 바람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뷰캐넌은 마지막으로 오대호 연안의 러스트 벨트 지역에 속하는 미시간과 일리노이 경선에 희망을 걸었다. 한 때 미국 산업의 상징이던 이 지역은 이미 제네럴 모터스가 일자리 1만개를 감축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쇠락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뷰캐넌은 일리노이의 우크라이나 문화 센터를 방문한 다음 나치 수용소 간수로 일한 혐의로 추방된 우크라이나 이민자가 억울하다고 주장해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미시간의 폐쇄 위기에 처한 공장에 방문했을때, 현지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그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경선 당일날 뷰캐넌은 이 주들에서 역시나 약 4분의 1을 얻었다. 그는 끝까지 완주했으나 이미 경선의 결과는 확정되어 있었고, 그의 운동은 기세를 잃었다. 결과적으로 패트릭 뷰캐넌은 2,899,488표, 전체의 23%를 득표했다. 현직 대통령에 도전한 사람 중에서는 높은 득표율이었으나, 그의 기대에는 훨씬 못 미쳤다. 그러나 부시는 뷰캐넌의 이 300만표를 위협적으로 느꼈고, 뷰캐넌의 지지자들을 달래고 통합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당대회의 하이라이트 시간대를 뷰캐넌에게 건넸다. 팻은 기꺼이 수락했고, 8월 17일 휴스턴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했다. 뷰캐넌은 그 자리에서 민주당의 대통령 & 영부인 후보 빌과 힐러리 클린턴을 동성애와 세속주의, 무제한 낙태와 래디컬 페미니즘의 부부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자신과 부시의 보수적 사회문화관을 공통점으로 내세우며 보수층의 단결을 강조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 나라의 영혼을 건, 냉전만큼 중요한 종교적 전쟁, 아니 문화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동료 공화당원들에게 빌과 힐러리에 맞서서 자신과 부시와 함께 이 나라를 되찾자고 호소했다. 이 문화 전쟁 연설은 도발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일부는 메세지가 지나치게 강경해 대선 본선에서 중도층의 이탈을 낳아 부시에게 해를 입혔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장의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뷰캐넌의 이 역사적인 ‘문화 전쟁 연설'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미국인들의 문화를 둔 정치적 갈등, 뷰캐넌이 언급한 바로 그 ‘문화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시는 결국 본선에서 패배했고, 뷰캐넌은 다시 언론인의 생활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한번 1996년 공화당 경선에 출마했다. 이번에는 4년 전보다 순조로운 듯 했다. 약 4명의 주요 후보와 겨루게 된 그는 알래스카에서 이뤄진 인기투표에서 승리했고, 루이지애나의 첫 정식 경선에서도 이기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의 캠페인은 뉴햄프셔에서 1% 차로 승리한 순간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남은 경선에서 그는 오직 미주리 주 한 곳에서만 승리했고, 공화당의 후보로는 중도파 밥 돌 상원 원내대표가 선정되었다. 뷰캐넌은 돌을 지지하길 거부했고, 그의 패배를 지켜봤다. 팻은 2000년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3번째 도전은 당 내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아이오와 주의 한 인기투표에서 고작 5등을 기록한 것이다. 부정적 현실에 고심하던 뷰캐넌은 제3당 출마로 선회했다. 그는 지지자들과 함께 공화당을 탈당해 당시 유명 정치인이던 로스 페로가 만든 제3당 개혁당에 입당한 다음 3지대 후보로 출마할 계획을 세웠다. 1992년과 1996년 두 번이나 무소속으로 출마해 파란을 일으켰던 페로는 뷰캐넌처럼 이민과 자유무역, 대외적 개입주의와 정치적 기득권에 반대해 공통점이 꽤 있었다. 이런 공통점을 바탕으로 개혁당 대선후보가 되고, 당이 받은 1,280만 달러의 선거지원금을 활용하며, TV 토론에 진출해 십몇년간의 방송패널 출연으로 갈고 닦인 언변을 뽐낸다면, 그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뷰캐넌 입장에선 해볼만한 도박이었다. 뷰캐넌이 개혁당에 입당한 직후, 1999년 WTO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글로벌리스트들을 대변하는 세계무역기구 WTO는 시애틀에서 국가 간의 무역 장벽을 더 무너뜨리기 위한 회의를 진행 중이었고, 밖에서는 이에 맞서는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노동조합들은 사라져가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모였고, 환경단체들은 자유무역과 규제완화가 초래할 환경 위기에 대해서 우려하며 운집했다. 원주민과 인권단체들도 기업의 탐욕이 일으킬 부작용을 거론하며 항의했다. 뷰캐넌은 이 진보좌파적 시위대와 전혀 다른 정치관을 가졌으나 자유무역에 반대한다는 점은 일치했고, 정치적 선전에 좋은 기회도 포착했다. 그는 시애틀에 도착해 자신들의 지지자들 역시 시위 현장에 모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숫자는 좌익 시위대에 비할 바가 못 되었고, 주목 받지 못했다. 시애틀의 WTO 회의는 아무런 합의도 도출하지 못한 채 끝났고, 그들은 이후로도 다시는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승리한 시위대는 환호했으나, 뷰캐넌은 패배한거나 다름없었다. 한 역사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결국 호텔 방에 머무르며 시위대가 그의 사람들이 아니라는걸 인정해야 했다. 시애틀에서 망신당한 뷰캐넌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혁당 후보직을 노렸다. 당시 개혁당에는 두 가지 파벌이 존재해 내부 갈등이 심했다. 페로는 대선 출마는 포기했으나 당의 운영에서 손을 때고 싶어하진 않았다. 그에 맞서는건 개혁당의 유일한 선출직 정치인, 미네소타 주지사 제시 벤투라였다. 그 역시 지지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는 고사했으나, 당권은 장악하고 싶어했다. 그는 당 의장직을 둔 페로와의 대리전에서 승리하며 우위를 점했다. 위기감을 느낀 페로 파벌은 대거 입당하던 뷰캐넌의 세력과 연합해 당권을 탈환할 음모를 꾸몄다. 벤투라 파벌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역시 외부 용병을 영입하여 뉴욕의 한 유명한 방송인 겸 사업가를 자기네 후보로 추대했다. 그는 경쟁자가 될 뷰캐넌을 인종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라고 상습적으로 비난하며 제3당의 경선을 순식간에 흥미진진한 TV 쇼로 만들었다. “그는 히틀러 사랑꾼이다. 나는 그가 반유대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흑인들을 싫어하고 동성애자도 싫어한다.” 이 사업가는 말하곤 했다. “그는 인종주의자로 보인다!” 개혁당의 권력다툼과 내부적 분란은 갈수록 심해졌다. 페로의 사람들은 벤투라 파벌의 당 의장을 강제로 끌어내렸고, 이 사건은 법정싸움으로 이어졌다. 혼란스러운 개혁당에는 뷰캐넌 말고도 온갖 인간 군상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었다. 스스로를 ‘흑인 민족주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규정한 사회주의자 레노라 풀라니는 권력을 위해서 정반대 스펙트럼의 뷰캐넌과 연합했다. KKK의 대마법사 데이비드 듀크도 돌연히 재등장해 뷰캐넌을 지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초월명상법을 정부에 도입하자는 단일 쟁점을 내세운 과학자 존 헤글린은 지지자들을 동원해 자신이 개혁당을 점령하겠다고 선언했다. 벤투라는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갈수록 괴상해지는 당의 상태에 분노했다. 그는 기어코 미네소타 주의 당 조직과 함께 탈당하고 말았다. 벤투라가 사라지자 그가 초청한 사업가 역시 막장으로 치닫는 당의 상황과 희박한 본선 승산을 거론하며 경선을 포기했다. 그는 사퇴 선언에서 “개혁당은 이제 KKK인 듀크 씨, 네오나치인 뷰캐넌 씨, 공산주의자인 풀라니 씨 같은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건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종류의 인간들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그의 이름은 도널드 트럼프였다. 트럼프와 벤투라는 사라졌지만, 초월명상 신봉자 존 헤글린이 또다른 변수로 떠올랐다. 뷰캐넌은 헤글린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쥐는데 성공했으나, 헤글린과 그의 지지자들을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경선 결과에 불복했다. 그 결과 전당대회 당일 뷰캐넌과 헤글린을 추대하는 전당대회가 두 블록 거리에서 동시에 열리는 초유 사태가 벌어졌다. 헤글린 세력은 이후 뷰캐넌을 고소했지만, 법원은 경선 결과에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다. 법정 싸움은 승리했지만, 이미 그 상처는 돌이킬 수 없었다. 헤글린과의 싸움 후에도 풀라니를 비롯한 당 내 좌파 분자들이 뷰캐넌의 지나친 보수적 캠페인에 실망하며 갈라섰다. 심지어 로스 페로마저 선거 직전 뷰캐넌 대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개혁당의 선거 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리멸렬한 내전의 연속이었다. 뷰캐넌은 그 해 초만 해도 가상대결에서 10% 가량의 지지율이 나왔지만, 결국 선거 당일 전국에서 약 45만표, 대중 득표의 0.4%를 얻는데 그쳤다. 처참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뷰캐넌은 이 와중에도 다시 한번 역사를 쓰게 되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최대 접전지는 플로리다였는데, 부시는 선거 당일 이 주에서 총 600만 표 중 겨우 537표 차로 승리했다. 문제는 플로리다의 투표지 모양이 해괴망측해 당시 민주당 후보 앨 고어의 지지자들 중 약 2천여명이 실수로 뷰캐넌을 뽑았다. 플로리다의 승패가 뒤바뀌었다면 앨 고어는 승리했을 것이다. 부시 측은 이를 두고 뷰캐넌의 득표율이 비정상적으로 높던 친-민주 지역 팜비치 카운티가 사실은 개혁당의 거점이라서 뷰캐넌의 지지세가 높게 나왔다는 궤변을 펼쳤다. 당시 이런 부시 측의 억지를 비판한 뷰캐넌은 훗날 이 사건을 두고 “주님이 개입했지”라며 긍정했다. 팻 뷰캐넌은 이후 정치에서 사실상 은퇴했고, 대신 본업인 언론인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MSNBC의 시사 토론 프로그램에 복귀했고, 2012년 인종주의 논란으로 해고될 때까지 다시 한번 맹활약했다. 한편 아메리칸 컨서버티브라는 보수 언론사를 창설하기도 했다. 뷰캐넌과 이 언론사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이후 오바마 정권의 이란 핵 합의를 호평하는 등 종종 보수 진영 역시 비판하며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다. 정치 참모와 언론인으로서의 뷰캐넌은 분명 성공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객관적으로 실패한 정치인이었다. 그의 첫 선거는 좋은 기세를 보여줬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고, 두 번째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선거에서는 너무 처참히 패배해 정계 은퇴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결국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패배자였다. 그러나 때로는 마지막에 승리하는 패배자도 있는 법이다. 팻 뷰캐넌이 마지막으로 낙선한지 25년째인 오늘날, 우리는 팻 뷰캐넌의 세상에 살고 있다. 오늘날 미국 정부는 대대적인 감세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자유무역 질서를 가차없이 파괴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라는 이름 하에 전세계를 대상으로 막대한 관세가 부과되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무역과 투자 협정이 타결되며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의 실질 관세율은 1930년대 이후 거의 백 년 만에 최고 수준이고, 25년 전 호텔에 갇혀있던 뷰캐넌의 후예들은 이젠 백악관에서 축배를 들고 있다. 오늘날 미국 정부는 각종 소수자 할당제를 폐지하면서 정치적 올바름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한 때 인종주의적이라고 여겨지던 발언들이 이제는 정부 고위직들에게서 직접적으로 나오고 있고, 불법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역대급 추방 작전이 벌어지고 있다. 여러 차원에서 문화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고, 연방대법원의 장악은 낙태를 둔 싸움에서 보수층이 법적 승리를 거두게 만들었다. 오늘날 미국 정부는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해체하면서 동맹국들의 ‘무임 승차’를 비난하고 있다. UN과 WTO를 비롯한 글로벌리스트 다자주의 기관들은 힘을 잃어가고 있고, 강대국들의 패권다툼이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섰다. 대외 개입은 축소될 조짐이 보이고 해외 원조는 대폭 삭감되었으며 동맹국들의 방위비 분담도 대거 증가했다. 심지어 금기였던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 감정마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 정부는 다름아닌 25년 전 뷰캐넌과 싸우던 바로 그 도널드 트럼프가 이끌고 있다. 한 때 뷰캐넌을 인종주의자이자 네오나치라고 비난하던 그의 전직 경쟁자는 오늘날 뷰캐넌의 길을 걸으며 그의 맞수들에게 똑같이 인종주의자이자 네오나치라는 비난을 듣고 있다. 적을 아군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보람찬 일이 있을까? 트럼프는 2010년 경 어느날 돌연히 뷰캐넌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신이 당시 그를 지나치게 비난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한다. 뷰캐넌은 그 사과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트럼프가 자신의 경쟁자에서 후계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뷰캐넌은 실패하고 트럼프는 성공했을까? 뷰캐넌 시대에는 없던 SNS와 인터넷의 발달은 트럼프의 메시지가 온 국민에게 더 효과적으로 퍼지게 했고 그의 지지자들을 조직시켰다. 하지만 시대상의 변화도 간과해선 안된다. 미국의 불법이민자는 당시 400만에서 오늘날 1200만명으로 불어났고, 세계화의 부정적인 효과가 갈수록 눈에 띄었다. 뷰캐넌은 이런 트럼프의 부상과 자신의 승리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는 놀랍게도 침착하고 냉철하게 상황을 바라보며 여전히 비관을 유지한다. 오늘날 진보주의는 이미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고, 이미 수많은 히스패닉 이민자들 - 불법 합법 모두 - 가 정착했다. 중동 전쟁으로 수 조 달러가, 자유무역 정책으로 6만 개의 공장과 500만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자신이 알던 미국은 더이상 없고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게 그의 암울한 전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뷰캐넌은 때때로 자신의 비관적인 예측이 빗나간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2016년 트럼프를 처음부터 열렬히 지지했으나 단 한 번도 그가 당선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 해 11월 모두의 예상을 비웃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뒀고, 뷰캐넌은 새벽 3시에 트럼프의 당선, 그리고 자신의 24년 늦은 승리를 자축하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진짜 어쩌면, 신이 아직은 미국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이다. 워싱턴 DC 교외의 어떤 박물관 같은 저택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다. 그는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바로 옆에서 직관했다. 그는 남부 전략과 침묵하는 다수라는 개념을 만드는데 일조해 미국 정치 지형을 바꿨다. 그는 닉슨과 함께 중국에 갔으며 워터게이트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정치 토론 프로그램의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레이건의 역사적인 레이캬비크 회담에 동석했다. 그는 조지 W 부시의 당선에 본의 아니게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도널드 트럼프에게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줬다. 그의 이름은 패트릭 조셉 뷰캐넌이다. 그는 패배했고 패배했고 패배했다. 그리고 그는 승리했다. 참고자료 The year the clock broke- 존 간즈 https://www.nixonlibrary.gov/finding-aids/patrick-j-buchanan-white-house-special-files-staff-member-and-office-files https://www.nbcnews.com/think/opinion/when-trump-ran-against-trump-ism-story-2000-election-ncna915651 https://www.politico.com/magazine/story/2017/04/22/pat-buchanan-trump-president-history-profile-215042/ https://www.politico.com/magazine/story/2016/09/donald-trump-pat-buchanan-republican-america-first-nativist-214221/ https://mondediplo.com/2025/05/01edito https://www.chron.com/politics/article/1992-rnc-houston-culture-war-17487677.php https://www.taxnotes.com/tax-history-project/pat-buchanan-was-trump-trump-and-master-antitax-politics/2025/05/23/7s7th https://www.theclanbuchanan.com/patbuchanan국제 관련 정성글들https://m.dcinside.com/board/newconservativeparty/725231
작성자 : 라파헤고정닉
제 귀에 도청장치가 있습니다 여러분
1988년 7월 18일 주부가요열창 녹화때 무대에 난입1988년 7월 30일 MBC 토토즐 무대에 난입해 소동1988년 8월 4일 제일 유명한 뉴스데스크 내 귀에 도청장치 소동 1989년 9월 27일 서울대 시위현장에 나타나 알몸으로 도청장치가 있다 소동1989년 11월 15일 국회 예산결산특위회 때도 난입했다 끌려나감 1989년 12월 2일 MBC 여론광장 생방송 현장에 난입1991년 3월 연세대 도서관 앞에서 도청장치가 있다며 알몸시위2000년대 후반 여러 방송에서 이후 행적을 찾았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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