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의 나는 싸우기 좋아하고 , 장난치기 좋아하고 , 여자 아이들과 놀기보단 남자 아이들과 노는걸 더 좋아하는 그런 평범한 남자 아이였다.
친구한테 맞는건 참을수가 없었고 아직 미성숙하고 어리숙한 나는 늘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문제아였다.
몇번이고 친구와 싸우고 친구의 안경 테를 부러트리고 , 어머니나 선생님에게 혼나기를 반복했을까. 나는 싸움을 그만두기 시작했다.
철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 싸우는게 싫고 무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책 읽기를 좋아하며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이때쯤 , 아니 이보다 훨씬 더 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느 한 '망상' 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망상 속의 나는 양 손에 클로 (장갑에 칼이 달린 무기의 일종. 울버린이 쓰는 발톱 같은걸 장갑으로 만든 형태) 를 끼고 누군지도 모를 악당들과 싸우는 젊고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여신의 모습을 다른 인간의 시점으로 바라봤던 것이 아니다. 망상 속에서의 나는 가녀리고 , 젊고 , 아름다운 여성의 몸을 가진 여신이었고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는... 뭐 그런 설정이었다.
그런 어린 아이같고 시시한 망상 속에서 나는 한 명의 동료를 갖고 있었다. 이름도 알지 못 하지만 , 툴툴대기 좋아하고 장난을 잘 치는 그런 성격에 장발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나는 망상 속에서 여신의 몸으로 그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평범한 일상 생활의 대화라기보단 내 망상과 설정 속에서의 업무나 뭐 그런 것에 대한 것으로 대화를 했던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걸 기피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여성으로써' , '여성을 동성 친구로' 받아들여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쌓는 과정을 반복했다.
순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크게 싸우셨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셨던게 먼저였는지 , 내가 싸움질을 했던게 먼저였는지 , 유치한 망상에 사로잡혔던게 먼저였는지.
그 어떤 것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 하나 중요한 일이 아닌게 없지만 , 너무나도 어린 내 머릿 속을 지금의 내가 읽어들이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대부분의 일상 생활들은 잊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기억이 난다는게 이 기억들이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단걸 반증하고 있는거라 생각한다.
내가 여성의 주체를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이 망상에서부터 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지만 그렇다 해서 후회하거나 그런 망상을 했던 어린 시절의 나 , 아니면 망상 속의 여신이었던 내 존재 , 혹은 그런 내 유일한 친구였던 그 여자도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나는 여성으로써의 주체성을 갖게 되어 앞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 행복이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망상 속에서 여신으로써 정체 모를 악당들을 무찌르고 여성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를 몇번이나 반복했을까 , 초등학생 5학년이 넘을 무렵엔 그 친구도 내 다른 자아도 완전히 잊혀졌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우리 집엔 개인용 컴퓨터가 설치되었고 , 게임을 좋아하는 나는 당연히 신나서 그 컴퓨터로 온라인 rpg를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네이버에 블로그를 시작했다.
11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꼬맹이었던 나의 몸 속엔 잊어버렸던 '여성으로써의 주체' 가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게임 내에서 '몇살이니 , 남자니 , 여자니' 같은 물음에 반사적으로 '12살의 여자 아이'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어째서였냐 물어보면 음...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라곤 생각하지만 당시 인터넷 환경은 어린 아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굉장히 심했다. 지금도 초글링이라던가 좆중딩 , 좆고딩 , 급식충이라는 단어로 개념없는 청소년 학생들을 낮춰 부르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념없는 청소년 학생' 에 한정된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게이머들의 인식은 '나이가 어릴수록 만만하고 개념이 없고 게임을 못한다' 였기 때문에 최대한 나이를 높여 부르고 싶었고 , 중학생 이상의 나이를 불렀다간 혹시라도 있을 중학생 수준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 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의 시선으로 봤을땐 교복이란 이름의 제복을 입고 있는 시점에서 중학생만 되도 초등학생과는 비교도 안되는 어른으로 보였던 것의 문제도 있었던거 같다.
여성이라 대답한건... 그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나를 여성으로써 받아들이고 , 날 여성으로써 대해주고 , 내가 여성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 어떨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이었기 때문이었던거 같다. 그리고 이건 내가 성 주체성을 확실히 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
몇일 뒤 나는 블로그와 게임 내에서의 '설정' 을 맞추기 위해 블로그 내에서도 '나는 12세의 여자 아이' 라는 소개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온라인에 접속할땐 완전히 '나' 의 존재를 지우고 다른 한명의 '나' 로 변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일.. 은 정말 그냥 즐거웠다고 밖엔 표현 할 수가 없다. 인터넷 세상 속에서의 나는 귀엽고 애교 많은 초등학생 여자 아이로써 다른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고 , 현실 세상 속에서의 나는 재치있고 싸움을 잘 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쉽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 성적도 좋은 그런 아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나는 양쪽 모두 모든걸 다 가진 사기캐였던거 같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 했던거 같다. 5학년에서 6학년이 되기 전에 나는 이사를 가게 되었고 이사를 간 곳에서 '현실의 나' 는 크게 흔들렸다.
어찌보면 나는 아무래도 인생을 즐기기보단 가면을 쓴 연극을 하고 있었던거 같다.
원래 살던 지역에서 아주 어린 시절 어린이집 , 유치원 , 초등학교 저학년과 고학년 과정을 거쳐가며 만들어진 '싸움도 공부도 잘 하고 누구와든 친해지는 나' 의 모습에 맞춰 , 그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던 뿐이었던 것이었다.
새로운 지역에서 누구도 나에 대한 인식이 없고 정확한 주체도 없었던 나는 큰 혼란에 빠진다. 어떻게 친구들을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 낯도 심하게 가려 도저히 친구를 사귀지를 못 했던 것이다.
당시 내 담임 선생님은 늘 혼자 다니는 나를 크게 걱정 하셨고 , 내 학교 생활은 금방 어머니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은 생각보다 심각했던건지 어머니는 외가의 할머니를 부르셨고 , 누나와 어머니와 할머니가 모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시더니 예전 내가 살던 지역에서 이쪽 지역 근처로 이사갔던 친구가 있는 학교로 다시 전학을 가자는 결론을 내셨다. 그 학교는 거리가 꽤 멀어서 도보 통학은 어렵고 버스를 타고 통학 해야하는데다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지 않을수도 있는데 그걸 다 감안해도 전학을 가는게 괜찮겠냐고 물으셨다.
나는 ,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일단 '나의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전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단 1개월 , 1주일도 쉬지 않고 계속 자아를 유지하고 있었던 '여자 아이로써의 나' 는 조금씩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남자 아이로써의 나' 의 마음과 주체를 빼앗기 시작한다.
다음 이야기는 반응 보고 좀 있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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