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추었다.
내가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작업에 들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로부터 나는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TV든 신문이든 언론매체에서 에이즈란 말만 나와도 신경질적으로 피해 다녔다.
곶감 빼먹듯 통장의 잔고가 줄어나가도 다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겠단 의욕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리고 내 앞에 사랑하는 조카들이 있었다.
4살과 6살.
만나면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고 포옹과 가벼운 입맞춤을 수시로 해주던 나였는데....
그들도 나를 삼촌 이상으로 잘 따르고 좋아 했었는데....
같이 밥을 먹어도 예전처럼 상위에 오른 고등어의 뼈를 발라 줄 수는 없었다.
목이 메어도 함께 먹는 찌개 냄비에 내 수저를 담글 수는 더더욱 없었다. 어린 조카들이 멋모르고 내 소지품에 손이라도 댈라치면 전에 없이 화를 냈다.
칫솔이나 면도기, 심지어 내가 쓰던 필기구에 손만 대어도 그들로부터 빼앗아왔다.
이 못난 삼촌을 이해해 달라고, 나중에 너희들이 크고 나면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속으로 울기만 했다.
아무래도 뭔가가 이상했던지, 형수님과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요즘 그렇게 신경이 예민해진 건지 알려달라고 했다.
난 그저 별거 아니니 너무 관심 두지 말라고 얼버무렸다.
나의 담당자는 식구들 중에 최소한 한 명 정도는 알고 있어야, 나중에 내게 병이 왔을 때 도움이 된다며, 믿을만한 누군가에게 내 병을 알려 두는게 좋다고 했지만....
내가 겪은 고통과 번민을 사랑스런 내 가족 중 그 누구에게라도 그대로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끝까지 내 병을 숨기는 것이 우리 식구들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서든 보건소에서든 혹시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감염자를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조용히 내 의사를 타진해 왔지만, 난 결코 그럴 맘이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명을 가진 것, 혹은 그렇지 못한 것의 이분법만 존재했고, 양성인가 음성인가 하는 희한한 분류만이 내 의식 속에 자리잡았다.
계절이 바뀌어도, 즐겁고 기쁜 일이 내 앞에 펼쳐져도 내 몸이 겪는 변화만을 의식할 뿐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최후는 어떤 모습일까.............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끝없는 회의만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의 성 정체성에 상당한 고민과 후회를 하기 시작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직 나만을 남겨둔 채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고, 약을 먹어도 그 부작용으로 고통스러울 때면 남몰래 그저 어서 끝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정확히 1년이 지나자 내 병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감염자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서 감염자의 모임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을 하고, 내 맘을 담아 글도 남겼다.
다행히 나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사는 감염자를 만나볼 기회가 생겼다.
40대 후반 정도의 남자 분으로서, 나처럼 감염된 지는 1년 정도 되신 분이셨다.
다행히 아내는 감염이 되지 않았지만 병을 알고는 거의 이혼 직전까지 가게 되었고, 현재는 별거중이라고 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직업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가끔씩 집에 남겨두고 온 자식들이 보고플 때면, 늦은 시각 먼발치에서라도 숨어서 보고 온다는 말에 가슴 뭉클한 아픔이 전해왔다.
이런 것이 우리가 안고 살아가야 할 또 하나의 아픔이요 짐이란 생각이 스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말 한마디라도 힘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 분을 만난 계기로 다른 감염자를 만나게 되는 기회도 늘어가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의식도 늘어갔다.
감염자도 문제이지만, 포비아라던가 말할 수 없는 심적인 고통을 가진 사람들도 꽤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같은 감염자가 아니면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편견으로 지냈지만, 건강한 일반인들 중에서도 나를 감싸 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음도 깨달았다.
처음의 혼란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아니 정상적으로 생활 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고, 내 스스로가 나름대로 충분히 사회에 봉사 할 수 있는 길이 있음도 배웠다.
사회복지학 분야에서 오래도록 상담도 하고 묵묵히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던 좋은 분들을 만나면서 나의 의식도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에이즈는 분명 무서운 질병이다.
그 작은 바이러스가 사람의 인체 내에서 저지르는 행위를 보면 누구라도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차기에 충분하다.
뇌를 공격하면 치매가 오고, 때론 안구로 침투해서 하루아침에 시력을 멀게도 만든다.
다리 쪽으로 가서 전혀 거동을 못하게 만들기도 하고 평범한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아직은 그 누구라도 이 무서운 병과 대적해서 승리를 거둔 사례는 없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겁먹은 채로 그저 쥐죽은듯이 당하기만 하던 시기는 지났다.
죽음을 초월해 태연할 수 있는 성인은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담담하게 내 마음을 비우는 지혜의 연습은 꾸준히 하고 싶다.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을 준다고 한다.
난 그 말이 틀렸다고, 적어도 에이즈는 결코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혼자서 되뇌었다. 겪어보기 전엔 이런 고통을 상상조차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 나를 변화시킨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조언은, 싸우고자 노력도 아니하고, 이겨내고자 애쓰지 아니한다면 탐스럽게 여문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고....
그렇게 지긋이 내 손을 잡아줄 때면 가슴속 저 밑에서 울컥 감동이 밀려왔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에이즈는 날로 증가추세에 있다.
나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내게 많은 도움을 주신 그분들을 본받고 싶다는 것이다.
좀더 체계적인 교육을 거쳐 감염자나 포비아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그리고 아직도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기도 하다.
"감염자와 악수 정도는 해도 괜찮답니다. 나중에 친해진다면 식사도 같이 하셔도 됩니다. 보십시오. 당신도 알고 있듯이 우린 이미 똑같은 사람이지 않습니까......눈에 보이는 편견으로 또 하나의 벽을 만들지는 말아주십시오....."
오늘 아침에 나는 여행용 짐을 꾸렸다.
세상의 변화가 전해주는 신비한 광경 속에 잠시 나를 풀어보고 싶어서이다.
지금처럼 계절이 바뀌는 시기가 오면, 난 앞으로 저런 계절의 변화를 몇 번이나 더 지켜볼 수 있을까란 생각을 했었다.
이제는 별로 상관이 없다.
봄이든 가을이든 그 계절이 전해주는 따스함만을 기억해 두고 싶다.
나를 죽음에서 이끌어냈던 할아버지의 그 말씀이 틀렸어도 좋다.
오래 살고 짧게 살고가 무슨 대수일까.....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알차고 보람되게 살수만 있다면, 우린 나중에는 아주 환하게 웃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를 지켜보는 다정한 사람들의 시선.
힘내라는 말과 결코 여기서 지면 안 된다는 성원의 눈빛. 지금은 이것이면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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