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WCW를 본 갤럼이라면 이 선수를 기억할 것이다.

키스 데몬, 전설적인 락밴드 키스와의 계약으로 탄생한 일종의 콜라보 레슬러이다.

스팅이나, 뱀피로, ICP 등 독특한 분장으로 이목을 끄는 레슬러가 많던 세기말 WCW에서,

데몬은 꿀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데몬은 챔피언은커녕 잡질이나 하는 등 실패해버렸다.

키스라는 거물과의 계약으로 탄생한 기믹이 왜 망한 것일까?

키스 데몬으로 활동한 데일 토버그는 본래 야구선수였다.

양키스에서 야구 코치를 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야구의 길로 들어선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안면 강습 타구에 부상을 입고 기량이 저하되어 빅리그 입성에 실패한다.

마이너를 머물던 그는 우연찮게 비행기에서 헐크호건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똑같이 야구 선수였다가 프로레슬러가 된 랜디 세비지 얘기를 듣고는,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하고자 마음을 먹는다.

그는 곧바로 하트 파운데이션의 멤버였던, 짐 나이드하트의 제자로 들어가 혹독한 훈련을 받고 프로레슬러가 된다.

데일 토버그는 AWF라는 인디 단체에서 MVP라는 야구선수 기믹으로 활동한다.

훗날 같은 링네임을 썼던 WWE 마봉팔이 생각날 지 모르지만,

가장 잔인한 선수(Most Violent Player)라는 뜻이다.

얼마안가 메이저 단체인 WCW에 입성한 데일은 MVP 기믹으로 데뷔 시켜준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왠지 MVP가 아닌 본명으로 소개된다.

심지어 철자도 틀렸다. (본명은 Torberg가 아닌 Torborg임)

이렇듯 그의 WCW 생활은 꼬이면서 시작된다.

얼마되지 않아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위에서 언급된 계약, WCW와 밴드 키스의 협업이 체결된 것이다.

계약의 내용은 WCW가 키스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하는 대신,

WCW 나이트로에서 키스가 라이브 공연을 하고,

키스 데몬이라는 레슬러를 데뷔시켜 PPV 메인이벤트에 뛰게 하는 것이었다.

키스 데몬은 키스의 분신과도 같은 기믹으로 이번 협업의 핵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키스의 팬이었던 데일은 키스의 퍼포먼스를 흡사하게 묘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한다.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하여, 키스의 공동 리더인 진 시몬스가 직접 데일을 적임자로 지목하기도 한다.

진 시몬스의 의견에 따라 데일이 키스 데몬 역할을 맡기로 결정된다.

이로써 데일 토버그는 MVP(혹은 데일 토버그 씨)라는 꾸진 기믹을 벗고, 성공이 보장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렇게 협업 당일이 되었다.

키스는 에릭 비숍과 멋들어지게 사진도 찍고,

WCW 나이트로에서 멋들어지게 공연도 한다.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때,

그를 대신하여 WCW 링을 달굴 키스 데몬이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브라이언 애덤스였다. (전 데몰리션 크러쉬이자, 훗날 크로닉의 일원)

어마어마한 돈과 광고를 퍼부은 프로젝트를 신인급인 데일에게 맡길 수 없다는 수뇌부의 결정이었다.

심지어 당일에 통보도 없이 결정된 거라, 데일은 준비하다가 말 그대로 날벼락을 맞았다.

훗날 회고하기를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터졌다.

WCW와 키스의 협업이 완전히 망해버린 것이다.

키스의 공연과 데몬의 데뷔는 나이트로 역사상 최저의 시청률을 찍고 만다.

WWF와의 경쟁에서 차츰 밀리던 WCW는 이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시청률은 바닥을 찍었으니...

설상가상으로 키스 데몬로 번 돈은 모두 키스에게로 들어가도록 계약을 맺어,

WCW 입장에선 키스 데몬은 암세포와 다름 없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결국 이 계약의 실패가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에릭 비숍은 해고된다.

베테랑 답게 좆됨을 감지한 브라이언 애덤스는 곧장 키스 데몬 캐릭터를 데일에게 짬처리한다.

그렇게 어찌저찌 키스 데몬은 데일에게로 돌아온다.

키스와의 계약을 잊고 싶었는지 링네임도 더 데몬으로 바뀌어서 말이다.

나름 세기말 감성으로 무장하여 링 무대에 데뷔한 더 데몬은...

데뷔전부터 테리 펑크한테 쳐발리고,

더 월한테 개같이 쳐맞는다.

더 월과의 경기가 더 가관이었던 건, 키스와의 계약의 내용,

'키스 데몬을 PPV 메인이벤트에 뛰게 한다.'를 이행한 경기였는데,

매치 이름을 '스페셜 메인이벤트'라고 짓고 PPV 중간 쯤에 배치했다.

이 시절 WCW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데몬은 WCW가 멸망할 때까지 자버와 미드카더의 경계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WCW가 망할 때, 데몬은 WWF와 계약하지 못했다.

이에 그는 아버지가 있는 야구계로 돌아간다.

데일은 여러 야구팀을 돌며 트레이닝 코치 역할을 한다.

코치 일을 하면서 간간히 프로레슬링 경기도 뛰는데,

05년 경에는 TNA에 본명으로 등장해 메이저리그 출신은 AJ 피어진스키와 합을 맞추기도 했다.

작년인 23년에도 트나에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비록 키스 데몬이 보여준 건 크게 많지 않지만,

왜 세기말 WCW가 인외마경이었는지 알 수 있는 산증인으로서 가치가 있다.

그의 레슬링 인생을 꼬이게 만든 WCW는 망해버려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프로레슬러 데몬은 여전히 살아남아 링 위에서 간간히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살아남은 그가 승리자일지 모른다.

며칠 전에 썼던 글인데, 묻혀버려서 아쉬운 마음에 내용을 조금 보강하여 다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