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 늦을 뻔했네. 아는 사람이 한 명이 없냐..'

내가 그날 조금만 게으르지 않았다면, 전날 술을 조금만 덜 먹었더라면

이런 강의는 신청조차 안했을텐데라며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물리학" 

정말 이야기만 들어도 하품이 나오는, 재미라고는 찾을 수 없겠지란 생각이 들게 하는 강의다.

애초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아는 사람도 없고 학생들도 몇 안되어보이는 강의장..

나는 시계만 보고 있다.

수업 시간이 5분정도 지났을 즈음 젊은 듯 아닌 듯 40대 혹은 50대 가량으로 보이는 남성이 교단에 섰다.

덥수룩한 머리, 두꺼운 안경렌즈, 거뭇한 수염자국, 체크셔츠 위로 불룩 나온 배...

'걍 계절학기나 들을까' 라고 생각하는 와중..교수가 입을 떼었다.

"강의 전에 한 가지만 먼저 묻겠습니다. 지금이 몇 시입니까?"

교수는 학생들에게 덤덤하게 물었다. 

'뭐야 저 사람..? 시계를 찼는데 왜 묻는거야..?' 누가봐도 가죽시계를 차고 있으면서 왜 묻나 생각한다.

"2시 5분이요!" "이제 2시 6분이요!" 

여기 저기서 조그맣게 대답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런가요?" 라고 조금은 퉁명스럽게 답하는 교수.. 이내 칠판에 무언가 적는다.

"빛의 속도, 다시말해 광속은 항상 일정합니다. 맞습니까?"

"태양. 다들 많이 보셨죠?"

"지금 우리가 보는 태양은 태양의 8분 전 모습입니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기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죠"

"그럼 우리보다 태양에서 1광년 더 멀리 있는 곳에서는 태양의 1년전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맞죠?"

"지구를 A, 1광년 떨어진 곳을 B라고 합시다"

"자, A와 B의 각각의 시계에 같은 시간으로 세팅하고, 정확히 2시 5분에 A와 B에서 태양을 본다면."

"그렇다면 두 곳은 2시 5분의 태양을 보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죠. 그럼 2시 5분이란 시간은 존재하는 게 맞습니까?" 

음, 생각해본다. 아리송하다. 교수의 말이 아리송하지만 이해해보려 노력한다.

학생들은 조용하다. 다들 멍하니 교수만 쳐다보고 있다.

"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지구의 질량보다 훨씬 큰 행성에서의 1시간과... 우리의 1시간은 같을까요?"

영화에서 본 것 같다.. 인터스텔라..

아마도 질량이 무거운 행성은 빛을 굴절시키는 각도가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질량이 가벼운 행성보다 시간이 더 느리게 간다고 알고 있다.

"아니요!" "아니요~"

웬일로 학생들의 답변이 들려온다. 아마 나와 같은 영화를 봤겠지 피식 웃으며 생각한다.

"그렇다면 시간은 존재합니까? 아니면 정해진 약속입니까?"

교수는 무엇인가 정리해야겠다는 느낌으로 날카로운 말투로 질문한다.

아마도 약속이겠지..라고 떠올리는 중에 교수는 이어서 말한다.

"이 우주에서 물리학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란 허상일 뿐, 지구에서의 약속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글쎄... 그럴 수가 있을까....생각한다. 시간이 없다니 무슨.. 그럼 과거 현재 미래는 뭔데라며 속으로 반박하고 있을 때

"10광년이 떨어진 곳에서 여러분을 볼 때. 그들은 여러분의 10년전 모습을 관측할 겁니다."

교수는 칠판에 '10광년'이라고 쓰며 행성과 행성이라고 그린 동그라미 사이를 실선으로 쭉 이어본다.

"그 말은 즉, 10광년이 떨어진 곳에 사는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여러분의 현재는 10년 후 미래가 되며, 다시말해 이미 결정된 미래를 보게 되는 거지요"

"미래는 어떤 관점에서는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에 존재하는 겁니다"

의아해하는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들려왔다. 아마도 헷갈리겠지 아마도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면 내가하는 모든 일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인가? 말도 안돼..라고 생각한다.

"흔히 운명이라고 하지요."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엔 원인과 결과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태어나면서 해왔던 크고 작은 원인들이 지금의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물론 모릅니다. 여러분의 무의식과 수많은 무의식이 모여 만들어낸 원인과 결과들을 예측하긴 어렵겠죠"

"우리는 무수히 많은 원인들에 의해 탄생한 결과이자 앞으로의 결과에 또하나의 원인이 될 겁니다"

아.. 그럼 내가 수강신청하던 그 날 퍼질러 자게 되었던 것도

그럼 내가 전 날 귀찮지만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려 만나러 나갔던 것도

유독 술을 많이 마셨던 것도

모든 게 벌어질 일들이었구나

"제 시계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과 여러분들이 이 과목을 수강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책의 32페이지 입니다"

'시발 계절강의나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