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로그라이크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추가한 갤러리가 없습니다.
0/0
타 갤러리 로그라이크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오사카 여행겸 밍지순례 후기(장문 매우 주의) 시요밍성공해라
- 음습한상가에 여자애랑 둘만 갇힌만화(2) 카갤러
- 히로시마 소소한 팁 산자부로
- 싱글벙글 발해 멸망 이후에 탄생한 국가.jpg ㅇㅇ
- 응가쿠키맛 오레오렌즈는 '후지'다 설치는설치류
- 추억의 80년대 아카데미 뿌라모델.JPG.GIF ㄹㄹ
- 현대차, 폭스바겐 제치고 영업이익 세계 2위 JPG ㅇㅇ
- 중국 출산율)"매년 죽는 노인 숫자가 신생아의 6배 될것" ㅇㅇ
- 싱글벙글 한국주식은 대기업도 사면 안되는 이유 아기멀록
- 싱글벙글 처녀와 순결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행적 ㅇㅇ
- 당진 출사, 여러 필름, 콘탁스 645. ND4
- 미국 2조 8천억 복권 당첨자 근황...jpg Desir
- 군하하하 최근 해군에서 사라진 군복을 알아보자 코드치기귀찮아
- 소개팅 끝나고 한 카톡 [ 돌려서 거절하는 거다 VS 다음에도 만나자는 긷갤러
- 미국성님들 한남상황 이해 못해 답답했는데 ㅇㅇ
한국에서 대마초가 금지된 이유
트럼프의 당선으로 미국은 대마초의 연방 합법화 수순을 밟게 되었는데 다른 마약들은 사형까지 거론하면서도 대마초는 허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외국에서 대마초의 인식이 술 담배 같은 기호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카멀라 해리스, 일론 머스크 같은 정재계 거물들도 대마초를 즐겨 피운다고 한다. 위 그래프를 보면 대마초의 중독성 유독성 모두 합법 마약인 알코올 니코틴 보다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아편전쟁을 겪은 중국도 마약은 선처없이 사형이지만 대마흡연은 최대 2000위안(30만원)의 과태료나 열흘 정도의 구류만 부과한다 게다가 중국은 전세계 합법화 바람에 대마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한국에선 엄청난 규제 때문에 산업 경쟁력에서 뒤쳐지고 있는 실정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zNT8Zo_sfwo 보다시피 지체장애인이 대마초를 피우면 정상으로 돌아온다. 이러면 제약회사들이 비싼 약을 팔 수 없기에 의사협회와 약사협회에서 로비를 해서 불법화했다는 설 대마나무 줄기로 만드는 삼베의 천연섬유가 듀퐁사가 개발한 합성섬유 나일론과 레이온의 시장 진출을 가로막아 로비를 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공식적으로 밝혀진 일은 없다. 미국에선 청탁이 합법이기에 충분한 재력만 있다면 가능한 일..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선 범죄가 아니었는데 담배가 부족할 경우 대마잎으로 흡연을 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 들어와서 해외여행 및 장발 미니스커트와 함께 금지되었다. 사유는 외국의 불량한 히피문화가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기 위해서였다는데 당시 셈법으로는 산업화를 위해 노동시장에 인력을 갈아넣어야하는데 대마초 피우고 늘어져서 일을 안하면 안되니까... 근데 이런 논리면 술도 팔면 안되지 않나? 애초에 일하면서 술을 마실 수가 없는데... 흡연하는 방식때메 담배와 혼동하는 건 같은데, 담배 흡연은 에너지드링크 마시는 것과 비슷하고 대마 흡연은 술을 마시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믿기 힘들겠지만 한국에서 일반인의 해외여행이 가능해진건 80년대 이후부터다... 이후 출국 두발 치마 규제는 풀렸지만.. 대마초는 아무도 총대매는 정치인이 없어 정계에선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럴만도 한게, 한국에선 외국인들처럼 대마초 합법화 요구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외국인들이 대마초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이유는, 우울한 마음을 기쁘게 바꿔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정에 따르면 의료용 마리화나 합법화는 20~29세 남성의 자살률이 9.2~10.8% 감소하고, 30~39세 남성의 자살률이 9.4~13.7%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료용 마리화나는 우울증 치료제로 한국의 의료용 대마초 헴프와 다른데, 한국에선 THC성분은 의료용으로도 불법이라 CBD만 의료용으로 사용한다. 약 이름은 '에피디올렉스' 뇌전증(간질) 발작 억제용으로만 쓰인다. 정리하자면 한국 의료용 대마초 : CBD 간질 만 치료 외국 의료용 대마초 : THC 치매 암 우울증 등 치료 즉, 한국에서는 사실상 의료용으로도 대마초는 전면 금지된 상태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대마초는 행복감을 고취시켜 우울증을 낫게하고 자살율을 줄인다 경제성장 시기에는 노동력 향상을 위해 각성제인 담배는 권하고 진정제인 대마는 금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어떤가? 전세계 실업율 자살율 1위다. 이런 나라가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나? 이를 바꿔 말하면, 일을 해서 경제를 성장시켜야 할 청년들이 일도 안하고 자살을 하여 국가의 노동력을 손실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는 대마 금지가 국가를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젠 대마가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은 쇄국정책 당시의 조선과 같다. [시리즈] 대마초 합법화 · 마약마약 대마초의 효능과 선진국에서 합법화 시키는 이유 · 싱글벙글 대마초 합법화 시 세금수익을 계산해보자
작성자 : 테이리고정닉
(스압 주의) 제헌국회 총선거 남제주군 선거구 득표결과와 오용국
제작기간: 1948년 5월 현황: 부분적으로 발견 선거결과: 오용국(16,540표, 당선) 강성건(???표, 낙선) 유실사유 - 제주 4.3 사건 오용국(1904년 10월 28일 ~ 1968년 10월 11일) 사인 - 북한에 의한 처형 무덤 위치 알 수 없음. “5・10선거에서 오용국은 강성건과 경쟁했다. 오용국은 서귀면장을 지냈고, 말을 잘해 인기가 있었다. 심금을 울리는 말을 잘했다. 강성건은 방위대장을 했는데 저승차사라 불렸다. 오용국은 얼굴도 미남이고 인품도 좋았다. 일본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회계를 담당했다. 오용국의 큰아들 오○순은 교장으로 퇴임해 신효동에 살고 있다.” - 신효동 주민의 증언 4.3 유적지 - 제헌국회 입법의원 오용국 추모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신효동 소재 나무위키에 오용국 의원의 사진이 올라가 있지만 북제주군 갑 홍순녕 의원도 같은 사진으로 올려져 있어서 추모비 사진으로 대체 발단 - 제주 삼일절 발포사건과 무장대의 봉기 https://www.youtube.com/watch?v=kyVZLlYgUww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만여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삼일절 기념행사를 열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이 사전에 섭외한 12000여명,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참가한 8000여명의 시위대는 기념행사를 마친 후 원정로, 즉 지금의 관덕로를 따라 행진하며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관덕정에서 북국민학교로 들어가는 골목길에서 어린아이가 경관이 모는 말에 치이고 말았다. 말에 치인 아이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 아이를 친 경관이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가는 것에 군중들이 격분해 항의하자 경찰관들은 폭동으로 번질 것을 두려워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21살 젊은 엄마와 15살 국민학생을 포함 6명이 죽고 말았는데 이 사건을 '제주 삼일절 발포사건'이라 부른다. ※ 신구범 전 지사는 죽기 전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말에 치인 아이가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고 증언했다. 열흘 뒤 이 사건에대해 경찰의 사과와 배상을 바라는 항의성으로 박경훈 초대 제주지사가 지사직을 사임한 것을 시작하여 제주도 직장의 95%가 파업을 하게되었다. 경찰당국은 사과와 배상을 하는 대신 총파업 주동자를 체포하는 것으로 화답했고 수많은 파업참가자에 비해 경찰력이 부족해지자 제주경찰감찰청은 파업에 참가한 66명의 경관들을 해임하고 그 자리를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으로 채워버린다. 특히 서북청년단은 북한의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인해 월남한 지주출신과 개신교인으로 구성된 단체로 사회주의라면 이를 갈고 탄압하였다. 이 들과 응원경찰들은 조천면에서 중학생 김용철, 대정면에서 27세 양은하 등 3명의 청년을 고문하여 사망케 이르렀다. 이 고문치사사건으로 민심이 술렁하자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진 남로당은 이것을 기회삼아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키니 이른바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었다. 전개 1 - 평화협상과 선거 보이콧 김달삼 - 본명은 이승진. 원래 김달삼이라는 이름은 장인 어른인 강문석이 사회주의 활동을 할때 쓰던 가명으로 김달삼에게 물려준 것이다. 9연대장 김익렬 이때까지만해도 제주도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9연대는 봉기진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않고 투항하면 김익렬 연대장의 비호아래 살려주겠다는 선무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VoU1pJXFR4 본격적으로 진압에 들어가기 앞서 무장대와 교섭하라는 미국의 명령을 받은 김익렬은 수차례 교섭을 시도한 끝에 4월 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을 가질수 있었다. 평화협상 끝에 김익렬이 내린 결론은 72시간 이내로 양측의 전투행위 중지, 무장대의 무장해제,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자수는 무장대의 자율에 맡기고 무장대 수뇌부가 탈출할 수 있게 선박을 제공하고 대신 보증을 위해 자신의 가족들을 무장대의 인질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김달삼은 깜짝 놀라 연대장의 가족들은 자신이 지정하는 가옥에 머물되 군인들의 출입을 허용한다며 한 발 물러나 평화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https://www.youtube.com/watch?v=WSyxkoffmkA 제주도의 노동절(May Day in Korea:Cheju-Do) 약 11분 경, 불타는 오라리 노동절이자 평화협상으로부터 72시간이 지나지 않은 5월 1일, 청년단원의 가족이 무장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며 오라리 연미마을을 불태우는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나 무장대측이 격분해 협상을 파토내며 총선거를 보이콧하는 최악의 악수를 두고 말았다. ※ 방화사건의 무대인 연미마을은 사건이 수습된 후 재건되었다. 5월 5일 미군정 장관 딘과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도를 시찰하는 김에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연대장과 비밀리에 회의를 가졌는데 조병옥 경무부장은 방화사건이 빨갱이들의 소행이며 한시빨리 소탕해야 한다며 주장하고 반대로 김익렬 연대장은 이 사건은 복합적인 이유로 일어났으며 경찰에게도 일정지분의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작전을 통해 진압해야 한다며 반박했으나 실랑이로 번지고 말았다. 실랑이는 최한 경찰감찰청장에 의해 소강되었으나 김익렬이 김달삼과 일본군 학병 동기였다는 이유로 협상을 파토냈다며 다음 날 연대장 자리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공석인 연대장은 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 박진경으로 교체 되었다. ※ 일본군 학병은 전문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장교과정으로 말이 모병제였지 모병과정에서 강제성을 띈 사실상의 징병제였다. 즉, 자원해서 입대한 것이 아니라서 이 둘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들지 않았다. 한편 선거 보이콧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남제주군 선거구에서 오용국 후보가 강성건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을 뿐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서 과반수 이하의 투표율로 무효처리 되었으며 1년 후 다시 실시된 재선거에서 북제주군 갑에서 홍순녕 후보가, 을선거구에서 양병직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후 홍순녕 의원은 임기중 병사했으며 잔여 임기 1년 미만으로 재보궐선거는 치루지 않았다. ※ 제헌국회 한정으로 임기가 2년이었다. 전개 2 - 연대장의 교체와 계엄령 맨 우측이 박진경 전임인 김익렬과는 달리 박진경은 봉기 진압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과격파였다. 박진경이 체포했다는 포로만해도 6000여명에 달했고 이로 인해 대령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박진경이 무고한 제주도민을 탄압하였다고 생각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6월 18일 대령 진급 축하식날 밤 술에 떡이되어 잠이 든 박진경을 사살하였다. ※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불명예 전역과 동시에 총살되었다. 박진경에게 탄압받은 사람들은 이 둘을 의사로 추앙하고 있다고. 박진경의 후임으로 폴란드군 장교 출신이었던 김상겸 대령을 임명했으나 밍기적거리며 봉기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고 8일 만에 경질되었고 그의 부하였던 송요찬을 새 연대장으로 임명한다. 이후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일 먼저 제주도에 계엄령을 시행한다. ※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통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全島) 해안선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해안선 5km 이내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봉쇄하고 이를 위반할 시 이유불문하고 사살한다. 즉 '초토화 작전'이었다. 계엄령으로 한라산에 발이 묶이고 설상가상으로 인민대회에 참여한답시고 해주로 간후 돌아오지 않는 김달삼, 무능한 2대 사령관 이덕구로 인해 구심점을 잃어버려 폭주하기 시작한 무장대와 빨갱이 소탕한답시고 해안가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해안가로 이주하지 않았다고 마을을 불태우고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는 토벌대, 이 도저히 답이 없는 양측의 무의미한 분쟁으로 인해 합계 추산 약 3만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 답이 없는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도 전체가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 와중에 모종의 이유로 인해 남제주군 선거구의 득표결과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북제주군 선거구는 초토화 작전이 차츰 소강되고 나서 재선거를 치뤘기에 득표결과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 현재 약 1만 9천여명의 희생자가 제주도의 노력으로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후에 6.25전쟁이 발발하고나서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약 3천여명이 행방불명 되었으나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8촌 이내로 4.3 희생자가 있다면 제주시 제주한라병원, 서귀포 열린병원에서 제주시: 평일 오후 1시 ~ 5시에 서귀포시: 평일 오전 9시 ~ 오후 5시까지 유족 채혈을 받고 있으니 협조 바란다. 결말 - 선거 이후 오용국 의원의 생애 오용국 의원은 당선 후 4.3사건이 일어난 자신의 고향 제주도에 위문품을 전달할 것을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임기가 끝난후 제2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강경옥 후보에 밀려 낙선되었다. 낙선된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자 인민군에 의해 반동분자로 몰려 체포되어 납북되었다. 납북 직후 도자기 공장에 배치되었으나 생활총화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무식한 놈들이라고 비난하여 평북 철산의 탄광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 수용소의 노동반장은 유독 그에게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다고 욕을 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식량 배급이 700g에서 100g로 줄자 앙심을 품고 노동반장을 구타하여 살해하였다. 곧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그는 63세 생일을 17일 앞둔 1968년 10월 11일, 간수들과 수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소각되어진 후 인근 야산에 봉분을 만들지 못하고 암매장되어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샤이니_셰피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