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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융

ㅇㅇ(121.88) 2021.03.23 06:06:48
조회 114 추천 0 댓글 0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 인간 정신의 깊은 바다를 연 한 의사의 삶과 사상 ―


전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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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 융과의 만남

저 창 밖의 보름달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는 쌀쌀한 겨울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 서 그 겨울밤에 찬바람이 잔잔히 흐르는 들녘에 나와 저 달을 향해 힘껏 후- 하고 따스한 입김을 보내주 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미한 잔상으로 기억 언저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더 군다나 지금의 삶은 그 어린 시절의 따스한 세계를 훨씬 이탈해 버린 듯한 느낌이다. 세계에 대한 무조 건적인 친화력을 상실해 버린 느낌이다. 이제 나는 융을 만나려 한다. 융과 더불어 저 어두운 그늘에 고 여 있는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건져내는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그리하여 인간 정신의 깊은 의미를 헤아려 보고자 한다.

나는 1992년 대학 도서관에서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1]을 통하여 융을 처음 만났다. 이 책은 융의 방대한 저서와 깊은 사상을 독자들에게 쉽게 전하기 위하여 융과 제자들이 집필한 책이다. 지금 생각컨 데, 그 책에 대한 첫 인상은 여느 책과는 조금은 달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책은 다양한 장면을 담은 사진과 그림과 미술작품, 심지어는 만화책에 나올 법한 낙서들 덕분인지, 글자가 정갈하게 배열된 여느 책과는 달리 매우 현란한 잡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앞 페이지에 있는 융의 시선은 나를 뚜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어디에서부터 홀연히 다가왔는 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융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모든 만남은 이렇듯 우연한 만남일까. 그 때부터 지금 까지 융과의 만남은 나의 가슴을 잔잔한 감동과 여운으로 이끄는 소중한 만남이 되었다. 이제 융은 마음 의 고향이자 삶의 풍요로운 자양분이 되어주는 커다란 그루터기이다. 그리고 그는 안개와 같은 내면의 세 계를 향해 길을 조금씩 열어주는 영원한 유혹이다.

우리가 심리학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머리에서 기억해 낼 것이다. 융은 프로이트만큼의 대중적 지명도가 없지만 그 또한 깊은 세계를 갖고 있 다. 게다가 융은 프로이트가 가장 아끼는 동료이자 제자였다. 이후 프로이트와 융이 결별을 선언한 후 프 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새 지평을, 그리고 융은 <분석심리학>의 새 지평을 심리학 분야에서 개척하였 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는 프로이트이고 오히려 융은 많은 이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온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의 세계는 프로이트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갖 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융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융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오묘한 진실을 감상하 려 한다.

2. 칼 융의 삶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단히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우리가 기억의 그물로 건져낼 수 있는 최초의 경험들은 몇 살부터의 경험들인가? 융 은 놀랍게도! 자신이 유모차에 누워서 푸른 하늘과 황금의 햇빛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두 세살의 기억 을 떠올린다. 그것도 팔십 세가 넘은 나이에 말이다. 아무래도 그는 망각의 기능을 상실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었나보다. 그는 역마살과 같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유 때문에, 소년시절에 많은 발작증세를 앓 았다. 실로, 마음은 감수성의 크기만큼 세계에 민감하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느낌은 오히려 자기만의 내면의 세계로 발걸음을 인도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융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고독은 내면에 대한 탐구로 전이되었다.

융은 어느 날, 깊은 숲 속에 숨어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아버지는 아들 융 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많은 재산을 없앴고, 아들이 평생 돈을 벌 수 없게 된다면 슬픈 일이 될 것이 라고 친구에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아버지와 친구분의 대화를 엿들었지만,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현실(現實)에 대한 최초의 경험 이 되었다. 융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버지 서재로 달려가서 라틴어 문법책을 꺼내서 공부하기 시작했 다. 그 와중에 몇 번의 발작증세는 융에게 나타났고, 결국 융은 굽히지 않고 발작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이후 융은 발작증세가 사라졌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을 철저하게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후 융으로 하여금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칼 융의 사상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 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2]

융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자기>Self와 <자아>Ego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기>는 우리의 생각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놓여 있는 세계이다. 또 한 그 세계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자아>는 자기의 세계보다 훨씬 작은 세계이다. 그리고 의식과 분별의 세계이다.

자아는 자기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의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식으 로서의 자아는 무의식으로서의 자기를 지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꿈이다.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 우리의 인식 속에 지각되는 현상이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에게 꿈의 상징들을 통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전하려 고 한다. 이제 꿈은 자기와 자아가 만나는 접촉점이다. 나를 넘어선 세계와 나의 세계는 꿈을 통하여 이 어진다. 그래서 융은, 꿈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 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3] 그렇기 때문에 꿈의 언어를 잘 이해하는 길이 저 심연에서 고요히 놓여있는 자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자기와 자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 등산가가 융을 찾아왔다. 그 등 산가는 어느 날 밤 높은 산의 정상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자신의 꿈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융은 그 꿈을 다 듣고 등산가의 앞에 닥쳐올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융은 꿈이 주는 경고를 강조하여 그에게 스 스로 등산을 자제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등산 중에 발을 헛디 뎌 "허공으로" 낙하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아의 미래를 감지하고 그것은 꿈으로 전달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등산가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의식적인 이성이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 컴컴한 순간일 지라도, 인간의 무의식은 정확히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4]

융에게 있어서 <자기실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 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원형의 세계에서 뿜어내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그 것이 융이 말한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융에게 있어서 삶은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과 정은 바다 위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 천 해리 깊이를 가진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 는 여정이다.

하지만 중심으로 향해 가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특히 상징과 신화의 언어를 상실한 현대 일 수록 자아가 자기를 찾는 여정은 그만큼 힘겨워진다. 왜냐하면 분화된 의식으로서의 자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세계를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과 신화의 상실은 자기 상실이다. 이 러한 상실의 시대를 가로질러 어둠의 세계인 자기의 세계를 빛의 세계인 자아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과정 이 깨달음의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실로 그 깨달음의 과정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융은 더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 또한 기나긴 깨달음의 과정으로 본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인류를 한 개인으 로 볼 때, 우리는 인류가 무의식의 힘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과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5]

인간은 문명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들을 거쳐 서서히, 그리고 힘들여 의식 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가 온전히 완성되기에는 아직은 거리가 멀다. 저 안개와 같은 인간 본성의 허다한 부분이 아직 어둠에 쌓여 있다. 그 자아의 세계는 빛이 닿지 않는 무한한 자기의 세 계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세계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은 자연이 획득한 매우 새로운 것이어서 그것은 아직도 실험적 상태에 있다. 실로 의식은 불완전한 기능이다. 이렇듯 인류는 험난한 진화의 과정 을 통하여 자아의 세계를 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아는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인류는 무의식의 힘에 의해 이끌리고 있고 무의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원형Archetype,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 개성화Individuation, 그림자Shadow, 아니 마Anima, 아니무스Animus 등, 다양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개념을 사뭇 조심스럽게 선보인 다. 사실 융이 인류를 향해 새롭게 선보인 개념은 몇 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개념은 앞으로도 쉽사 리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왜냐하면 그의 개념은 이론가의 책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진지한 숙고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일생동안 수 만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융은 분석가나 이론가이기 이전에 '영혼의 의사'로서의 순결한 사명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삶 가운데서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서 삶의 목적은 "환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고 보존하여 환자가 그의 생애를 그 자신의 뜻의 따라서 살도록 하는 것"[6]이었기 때문이다. 환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은 "병든 의사만이 치료할 수 있다"는 융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융의 삶은 환자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삶이었고, 환자의 고통과 같이 하는 삶이었다.

한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에 대한 융의 사려깊고 진지한 노력은 그의 삶의 여러 곳에 스며있다. 특히 환자의 꿈에서 드러난 상징을 분석가(分析家)가 해석하는데 있어서, 환자의 <상징>과 분석가의 임상 결과 에서 일반화된 <의미>를 쉽게 대응시키지 말라고 융은 당부한다. 융은 상징을 연구하는 데 반 세기 이상 을 보내 온 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징과 그 상징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분 석가 개인의 일반화된 이론을 미련없이 버려야 함을 강조한다. 회색 이론은 삶을 찢는다. 오히려 "나는 환자의 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7]는 자세로 환자를 만나야만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상징은 환자 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환자의 삶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야만 그 상징의 의미가 올바로 드러난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융에게 있어서 꿈 해석의 보편적인 규칙은 없었다. 환자의 삶만이 유일한 해석의 경전이 되었던 것이 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환자는 자신의 이론의 적용대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의 대상이 되었 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만이 유일한 현실이다."[8] 이러한 융의 자세는 이후 프로이트와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꿈해석에 있어서 보편적인 이론을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융은 인간 그 자체에 관한 이해 위에서만 꿈의 해석이 가능 하다는 점에서 화해할 수 없는 견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4. 신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동시성 현상
융의 일생은 정신의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신의 불멸과 맞닿아 있는 '신의 문제'와 정신의 사멸과 맞닿아 있는 '죽음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1959년, 융은 영국 방송공사(BBC)의 죤 프리만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프리만은 융에게 신을 믿느 냐고 질문을 하였다. 영국의 수많은 시청자들은 융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며 긴장하였다. 융은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신을 압니다." 저 대답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우 리는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신의 세계까지도 접근해 들어간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 까. 마치 바울이 그러하였듯이(갈라디아서 2:20), 융은 자신으로부터 ?레야 떼어낼 수 없는, 마음 안에 내 재하는 신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융은 자신의 삶 가운데 죽음을 아주 가깝게 체험하곤 하였다. 실제로 융은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하였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융은 기이한 환상을 경험한다. 융은 밤중에 깨어 전날 장례를 치룬 친구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융은 죽은 친구가 방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친 구는 수 백미터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융을 데려갔다. 융은 그 친구를 따라갔다. 그리고 친구는 서재에서 적색 표지의 책 한 권을 가리켰다. 너무도 기이한 체험이어서 융은 다음날 아침 죽은 친구의 서재를 직 접 찾아가서, 환상에서 가리킨 적색 표지의 그 책의 제목을 확인해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死者의 유 산>이었다.
융은 실제로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說法>[9]을 마흔 한살이 되던 1941년에 개인적으로 내놓았다. 이 설법은 죽은 자들이 질문을 하고 융이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문헌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융은 죽은 자와의 대화를 하였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문헌은 융이 죽기 바로 전에 어렵게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결론부에 있는 글자 수수께끼인 아나그람마(Anagrama)는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암호의 열쇠를 공개하지 않고 융은 죽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 왔었다는 느낌, 혹은 현실에서의 이 순간은 언젠가 꿈에서 한 번 보았던 순간 같은 느낌을 자주 경험 한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이러한 기이한 느낌을 자주 체험하기 때문에 앞으로 그 체험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물론 본인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위와 같은 경험을 자주 듣곤 한다. 융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융의 삶의 대부분은 이러한 환상과 희귀한 체험으로 채색되 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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