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포켓몬스터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포켓몬스터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700편 달성 기념 영린이 탑텐 Searchers
- 유럽 기록적인 폭우, 최악의 홍수...지구의 분노? ㅇㅇ
- 치우고 있는데 담배꽁초 '툭'…대체 왜? "한국이라서요" 마스널
- 추석 스트레스 순위... 대망의 1위는? 마스널
- 활공폭탄에 시뻘건 불이 '활활', 우크라 주민들은 망연자실 ㅇㅇ
- "결혼할 때 집 사줬다고…시댁서 '종년' 취급" ㅇㅇ
- 싱글벙글 6.25 전쟁 당시 어느 미군이 절대 포기하지 못한 작전 수인갤러리
- 음식을 먹는 일상 만화.manwha 뇽댬굠
- 중국에서 개발작 일으킨 영화 속 장면..gif 이시라
- “한동훈, 1년만 늦게 나오지”…국힘 내 분출하는 의구심 ㅇㅇ
- 프로야구 KIA, 7년 만에 정규 시즌 우승 선동열투수+
- 전국민을 대상으로 가스라이팅한 사건 스다
- 월월뷰) 3번의 묵직함 월첩
- 시가 유격캠+수영+온천 이베르카나
- 싱글벙글 강아지와 함께 등교하는 초딩 최강한화이글스
곽튜브, '학폭 의혹' 이나은 옹호 논란…교육부도 선 긋기
- 관련게시물 : 곽튜브 커뮤니티 뜸.jpg교육부, 학폭 의혹 곽튜브의 이나은 옹호 영상 비공개• 학교 폭력 피해를 호소한 유튜버 곽튜브(곽준빈)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왕따 가해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그룹 에이프릴 출신 배우 이나은을 출연시켜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곽튜브는 이나은과 함께한 영상에서 "학교 폭력 이야기만 나오면 예민했다"며 "바로 (너를) 차단했었는데 아니라는 기사를 봤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내가 (학폭) 피해자로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오해 받는 사람에게 내가 피해를 주는 것 같아 그렇더라"며 이나은을 옹호하는 말을 언급했습니다.• 이에 교육부는 곽튜브가 출연한 학교폭력 방지 캠페인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했고, 곽튜브는 해당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게재했습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7/0001842167 곽튜브, '학폭 의혹' 이나은 옹호 논란…교육부도 선 긋기과거 학교폭력 피해를 고백해온 유튜버 곽튜브(곽준빈)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왕따 가해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그룹 에이프릴 출신 배우 이나은을 출연시켜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이에 교육부는 곽튜브가 출연한 학교폭력 방n.news.naver.com- 이나은 표정관리 실패...jpg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훌쩍훌쩍 곽튜브가 이성적 판단을 못한 이유 저러니 정신 못차리지 ㄹㅇ나였어도 장담못함
작성자 : ㅇㅇ고정닉
나스카의 리빙 레전드, "더 킹" 리처드 페티의 챔피언 카를 알아보자.
전미 스톡카 경주 협회, NASCAR(통칭 나스카)의 레전드 드라이버인 리처드 페티는 은퇴한 지금은 쌈빡한 카우보이 모자와 깔@롱진 패션으로 유명하지만, 꼬꼬마 시절 디즈니-픽사의 카를 보고 모터스포츠에 입문한 엪붕이들이라면 특유의 유선형 에어로패키징으로 유명한 1970년식 플리머스 슈퍼버드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페티의 아이콘 격 차량으로 여겨지는 이 1970년형 플리머스 슈퍼버드는 의외로 리처드 페티의 트로피 진열장에 1970년 나스카 챔피언 트로피를 추가해주지는 못한 차량이다. 그 해 리처드 페티는 40회 출발, 18회 우승, 5위권 27회, 10위권 31회, 폴 포지션 9회로 총 3447 포인트를 따냈지만 출발 횟수와 5, 10위권 진입 횟수에서 밀려 붉은 71번 닷지 차저를 탄 바비 아이작에게 그 해 우승을 넘겨줘야만 했다.그렇다면 페티의 챔피언 카에는 어떤 차량들이 있을까, 알아보기 전에 우선 리처드 페티의 탄생 배경부터 알아보도록 하자.(리처드 페티의 아버지, 리 페티. 그 역시 나스카의 선구자라는 이름으로 나스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다.)(리 페티의 42번 크라이슬러 300)리처드 페티는 1937년 7월 2일 노스캐롤라이나 레벨 크로스에서 초창기 나스카 드라이버인 리 페티의 아들로 태어났다.리 페티 역시 나스카에서 알아주던 실력파 드라이버였으며. 흰색으로 도장된 그의 42번 레이스 카는 1954, 1958, 1959년 챔피언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리처드 페티의 첫 나스카 차량, 1957년형 올즈모빌 컨버터블)리처드 페티 역시 아버지인 리 페티의 발자취를 따라 1958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짐 미데온 500 레이스에서 나스카에 데뷔했고, 이듬해인 1959년에는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며 승승장구하는 슈퍼루키로 자리잡는다.그리고 그의 7챔 전설은 1964년 나스카부터 시작된다.1. 전설의 시작, 1964년형 플리머스 벨베디어(1964년 챔피언)1964년은 리처드 페티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이 1964년형 플리머스 벨베디어는 데뷔 후 1960년부터 꾸준히 탑 3에 이름을 올리며 챔피언을 노리던 페티에게 날개를 달아줬고, 리처드 페티는 2위인 네드 자렛과 6000포인트에 가까운 큰 격차로 압승하며 1964년 나스카 그랜드 내셔널 챔피언을 차지하게 된다.최종 기록: 총 포인트 40252포인트, 9회 우승, 9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37회, 10위권 진입 43회2. 2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금 챔피언으로, 1967년형 플리머스 벨베디어(1967년 챔피언)1964년의 첫 나스카 그랜드 내셔널 챔피언 등극 이후, 리처드 페티는 1965년, 1966년 두 시즌을 각각 38위, 2위라는 아쉬운 결과로 마무리하게 된다.(1965년에는 플리머스 바라쿠다를, 1966년에는 플리머스 GTX를 사용했다.)그리고 페티는 이듬해인 1967년, 자신에게 첫 챔피언을 선사해준 64년형 벨베디어의 후속 모델인 67년형 벨베디어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아 2위인 제임스 힐튼과 6000포인트 가까운 격차를 보이며 27회라는 압도적인 우승 수를 기록. 42472포인트를 달성해 1967년 챔피언이 된다.최종 기록: 42472포인트, 27회 우승, 19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38회, 10위권 진입 40회3. 3년 만에 다시 정상에 오르다. 1971년형 플리머스 로드러너(1971년 챔피언)지난 해인 1970년도 우승하지 못했던 작년, 재작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닷지 차저 데이토나와 플리머스 슈퍼버드를 저격하는 규정으로 인해 힘든 싸움을 해야 했던 리처드 페티는 결국 1970년 시즌을 바비 아이작에게 넘겨주고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됨.하지만 이번 차량은 좀 달랐음, 플리머스 슈퍼버드가 기존 로드러너에 전면 카울과 큼지막한 리어 윙을 달아서 에어로다이나믹 효과를 본 타입이라면 이번의 신형 로드러너는 차체 형상에 곡면을 적용시킨 디자인으로 에어로다이나믹 효과를 봤고, 향상된 차량의 성능에 힘입어 리처드 페티는 3년 동안의 우승 공백을 깨고 1971년 챔피언이 됨.최종 결과: 4435포인트, 21회 우승, 9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38회, 10위권 진입 41회4. 2연속 우승은 STP, 닷지와 함께, 1972년형 플리머스 로드러너 & 1972년형 닷지 차저(새 스폰서인 stp의 도색을 적용한 로드러너, stp 도색은 은퇴할 때까지 함께한다.)1971년 우승에 힘입어 새로운 스폰서인 stp가 붙어 빨간 포인트가 적용된 플리머스 로드러너, 이 외에도 페티는 닷지 차저에도 탑승해 2연속 우승을 차지함. 의외인 점이 있다면 그동안의 우승 차량들은 플리머스 뿐이었지만 특이하게도 1972년에는 닷지 차저도 우승 차량 목록에 포함됨.(1972년 우승에 함께한 닷지 차저, 로드러너와 달리 전면이 분할된 디자인이 특징)1972년 시즌에선 페티는 2위인 바비 앨리슨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8701.40포인트로 8573.50포인트인 바비 앨리슨에 비해 130포인트가량 앞서며 챔피언에 등극함. 우승 횟수는 앨리슨 10회, 페티 8회로 앨리슨이 앞서지만 포인트로는 페티가 앞서 결과적으로는 1972년 챔피언도 페티가 차지하며 2연속 챔피언이라는 영예를 누림최종 결과: 8회 우승, 3회 폴 포지션, 5위권 진입 25회, 10위권 진입 28회5. 어게인 1972, 치열한 접전 끝에 5번째 트로피를 거머쥐다, 1974년형 닷지 차저(1974년 챔피언)1972년을 기점에서 차량을 플리머스제에서 닷지제로 갈아탄 리처드 페티는 1973년 시즌에서 최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21번 드라이버, 데이비드 피어슨과의 경쟁에서 아쉽게 패해 2등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음. (1973년 나스카 챔피언을 차지한 데이비드 피어슨과 그의 21번 머큐리 사이클론)이듬해인 1974년, 페티는 새로운 라이벌인 케일 야보로를 마주해야 했고 역시나 리처드 페티와 케일 야보로의 경쟁은 전년도의 페티 vs 피어슨같이 치열했음, 칼을 갈고 돌아온 리처드 페티와 새로운 라이벌 케일 야보로의 대결은 결국 리처드 페티의 승리로 끝남, 당시 우승 횟수는 동일했지만 폴 포지션(페티 7회, 야보로 3회) 5위권 진입 횟수(페티 22회, 야보로 21회), 10위권 진입 횟수(페티 23회, 야보로 21회)에서 결정적으로 승패가 갈렸고, 결과적으로는 피말리는 접전 끝에 리처드 페티는 자신이 나스카의 리빙 레전드임을 다시금 증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음.최종 결과: 10회 우승, 폴 포지션 7회, 5위권 진입 22회, 10위권 진입 23회6. 다시 한 번 압도적으로 2연속 챔피언이 되다, 1975년형 닷지 차저(1975년 챔피언)1971년~1972년의 2연속 챔피언 달성과 같이, 페티는 1974년의 우승에 가속을 받아서 압도적인 실력을 발휘, 그 결과 1975년에도 나스카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음, 당시 기록을 대조해 봐도 리처드 페티 이외에 10회 이상 우승을 달성한 드라이버는 없었고, 페티는 말 그대로 오벌 트랙을 휘젓고 다니며 2위인 데이브 마시스와 700포인트 이상 격차를 벌렸고, 결과적으로는 강력한 닷지 차저와 함께 2회나 2연속 나스카 챔피언을 달성하는 대과업을 이룸.최종 결과: 4783포인트, 13회 우승, 폴 포지션 3회, 5위권 진입 21회, 10위권 진입 24회7. 마지막 챔피언은 올즈모빌과 함께, 1979년형 올즈모빌 442(1979년 챔피언)1975년의 우승 이후, 리처드 페티는 꾸준히 상위권에 들며 챔피언 경쟁을 계속했지만, 아쉽게도 계속 우승에는 실패하며 1978년까지 우승 공백기를 지내야 했음, 특히 1978년에는 쉐보레 몬테카를로로 차량을 교체해서 챔피언쉽에 도전했지만 아쉽게도 0회 우승에 6위라는 결과를 내며 탑 10 진입에 만족해야만 했지만 페티는 포기하지 않았음, 새로운 차량인 올즈모빌 442를 탄 페티는 다시금 분골쇄신해 1979년 나스카 챔피언에 도전했고, 2위인 대럴 월트립과 치열하고 열띤 경쟁 끝에 마침내 4830포인트 대 4819포인트로 11포인트 차이로 격전 끝에 생애 마지막 나스카 챔피언을 달성하는 데 성공함, 이 때 페티는 우승 횟수에서 5회로(월트립은 7회), 폴 포지션에서는 1회로(월트립은 5회) 월트립에게 밀렸지만 5위권 진입 23회(월트립은 19회) 10위권 진입 27회(월트립은 22회)로 포인트 벌이에서 앞서는 전략적 승리로 노익장을 과시했음. 참고로 또 다른 나스카 레전드인 데일 언하트는 이 해 7위를 달성하며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함. 또한 아들인 카일 페티가 그 해 탈라데가 500에서 데뷔하며 리처드 페티가 아버지 리 페티와 함께 달렸듯이, 이번에는 리처드 페티가 아버지가 되어 아들 카일 페티와 함께 나스카에서 달리기 시작함.최종 결과: 4830포인트, 5회 우승, 폴 포지션 1회, 5위권 진입 23회,10위권 진입 27회번외. 길고 긴 커리어를 마치다. 1992년형 폰티악 그랑프리(은퇴)(리처드 페티의 마지막 경기를 함께한 차량, 1992년형 폰티악 그랑프리)(리처드 페티의 마지막 우승, 1984시즌 파이어크래커 400)1984년 데이토나에서 열린 파이어크래커 400에서의 마지막 우승을 마치고, 그 이후에도 페티는 꾸준히 나스카에 참가하며 비록 순위는 떨어졌을지언정, 꾸준히 중위권을 달성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음,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페티도 피해갈 수 없었고, 페티는 1992시즌 후터스 500을 끝으로 은퇴를 결정함.(리처드 페티의 은퇴 경기였던 후터스 500의 포스터, 우리가 아는 그 레스토랑 후터스 맞다)당시 페티의 은퇴 경기에는 16만 2천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객들이 몰렸고, 페티는 아들 카일 페티와 함께 생애 마지막 나스카 레이싱을 시작함.하지만 안타깝게도 95랩에서 45번 차량의 리치 버클이 페티의 43번 폰티악 그랑프리와 충돌했고, 페티는 생애 마지막 나스카 경기를 완주하지 못하고 리타이어하고 말았음. (리타이어한 리처드 페티, 리처드는 얼마나 슬펐을까?)(관중들에게 환호받는 페티)그렇지만 그가 최고의 나스카 레이서라는 건 변하지 않았고, 그날의 후터스 500 경기에서 수많은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그렇게 나스카의 리빙 레전드, "더 킹" 리처드 페티의 커리어는 화려하게 막을 내리게 되었음.오늘은 나스카의 레전드 리처드 페티가 탄 챔피언 카+번외를 알아보았다.이 정보가 유익했으면 하며, 나스카 팬도 많아지길 바람!틀린 정보 댓글로 달아주면 환영함
작성자 : dcroffj고정닉
미국 핵폭탄의 무기화와 안전-1편
핵무기의 작전 단순성, 나뭇조각과 같은 핵무기 초기의 핵무기는 유지관리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했으며, 정말 긴 사용준비 시간과 많은 작업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실제 전장에서 사용이 적합하지 않았다. 폭탄의"성게"(Urchin) 중성자 개시제는 폴로늄-210의 반감기 (방사성 물질이 자연적으로 반으로 줄어드는 시간, 138일)로 인해 몇 개월마다 주기적으로 교체해주어야 했다. 또한, 기폭 시스템에 전원을 공급하는 납-산 배터리는 36시간만 충전된 상태로 유지되었고, 그 후에는 재충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폭탄을 분해해야 했고, 재충전하는 데 72시간이 걸렸다. 어떤 경우든 9일 후에는 배터리를 제거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배터리는 부식되었다. 플루토늄 코어는 열이 고폭탄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핵무기를 조립한 채 방치할 수 없었다. 플루토늄 코어를 교체하려면 폭탄을 완전히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해야 했다. 여기에는 약 40~50명의 인력이 필요했고, 폭탄 조립 팀의 기술에 따라 56~72시간이 걸렸으며, 1948년 6월에는 육군 특수 무기 프로젝트 에 3개 팀만 있었다. 이러한 복잡성으로 인해서 1954 년 무기 설계자들은 작전 단순성을 제공하는 핵폭탄을 구상했다. 수년간의 보관에도 견딜 수 있고 군용으로 즉시 사용할 수 있는, 한 조각의 나무와 같이 적은 유지보수를 필요로 하는 핵폭탄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러한 작전 단순성을 제공하는 핵폭탄을 위해서 중성자 발생기에 들어가는 방사성 물질을 폴로늄-210에서 악티늄-227(반감기 21.8년)이나 폴로늄-208(반감기 2.898년)로 교체했다. 로스 알라모스의 과학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핵무기의 소형화를 위해 증폭핵분열탄을 개발한다. https://m.dcinside.com/board/war/3927130 (증폭핵분열탄에 대해 알려면 위 링크를 참조하라.) 하지만 더욱 소형화 하기 위해 기폭장치를 단순화할 필요가 생겼고, 위 사진과 같이 복잡한 32점 내파 방식에서 위와 같은 2점 내파 방식을 채택했다. 이러한 2점 내파방식은 기폭장치의 단순화로 소형화가 쉬워진다. 이후 중성자 발생기는 최종적으로 선형 입자가속기의 원리를 이용한 아래 사진과 같은 모양의 중성자 발생기로 진화한다. 이 선형 가속기의 원리는 아래의 사진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중수소 가스가 가득 들어있는 밀폐된 튜브 안에 전극이 있다. 이 전극에 강한 전기장을 걸어주어 중수소 입자를 가속한다. 가속된 중수소 입자는 티타튬 삼중수소화물 타겟에 충돌한다. 이 충돌은 중수소-삼중수소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 핵무기의 격발에 필수적인 고에너지 중성자를 생성한다. 삼중수소의 반감기는 약 12.3년이기 때문에 삼중수소 표적을 수년에 한번 갈아주면 그만이다. 또한, 충전과 보관이 까다롭고 오래 걸리는 납-산 배터리에서 열전지로 교체했다. 열전지는 평상시에는 전지로서 작동하지 않다가, 열전지 내부의 화약이 터져 내부의 전해질이 녹아 액체가 되면 그때서야 전지의 역할을 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평상시에 열전지는 방전이 되지 않는다. 이 점으로 인해 장기간 보관해야 하는 무기의 특성에 딱 맞았다. 이후 더욱더 높은 작전 단순성을 제공하기 위하여 로스 알라모스의 과학자들은 핵분열성 물질과 기폭용 고폭탄을 통합해 핵무기를 언제나 사용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Sealed pit 방식의 핵무기를 개발, 배치한다. PAL(Permissive Action Link)-핵무기 사용통제 초기 핵무기 사용통제에 대한 한가지 섬뜩하지만 웃긴 일화가 있다. 1960년, 의회 대표단이 서유럽의 군사 기지를 방문하여 미국의 핵무기와 관련된 보관 및 안전 문제를 평가하고 있었다. 대표단에는 해롤드 에그뉴(Harold Agnew)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그저 의회 직원이 아니었다. 애그뉴는 세계 최초의 원자로 건설을 도왔고,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임무에서 공식 과학 관찰관으로 활동했으며, 당시 나토의 군사 수장인 유럽 최고 연합군 사령관의 과학 고문으로 활동했던 로스 앨러모스의 과학자였다. 해롤드 에그뉴는 비행장을 방문하여 독일 비행기에 실린 미군 핵무기를 독일 조종사들과 미국 보초 한 명과 함께 관찰했다. 그 당시에는 핵무기의 안전장치란 없었다. 그냥 조종사가 막무가내로 핵무기를 탑재하고 이륙해 투하할 경우 핵폭발이 일어났다. 만약 조종사가 핵전쟁에 미쳐있어서 무단으로 핵무기를 사용할경우 소련과의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에그뉴는 보초에게 만약 조종사가 허가 없이 이륙을 시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보초는 조종사를 쏘겠다고 대답했지만, 에그뉴는 대신 폭탄을 쏘라고 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폭탄을 쏘는 것뿐입니다." 에그뉴가 그에게 말하며, 그는 총알이 무기를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을 쏘고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대화를 나눈 일화가 있다. 보초가 폭탄을 쏘고 총알이 핵무기를 무력화시켰을 거라고 기도해야 할 정도로 NATO 핵공유 초기의 핵무기 보안은 최악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보안 취약점을 인지했고, 이러한 보안 취약점은 핵무기 사용 통제 안전장치인 PAL(직역하면 허용 조치 링크, Permissive Action Link)을 개발하는 원동력이 된다. 1961년 4월까지, 사용 통제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세 개의 국방부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국방 원자력 지원국(DASA) 산하 특수 탄두 장착 통제 위원회(SWAC), 국방부 연구 및 공학 부차장실의 마빈 스턴 박사가 이끄는 안전 관리 그룹(스턴 위원회), 합동 참모본부(JCS) 산하 합동 지휘 및 통제 연구 그룹 프로젝트 106(j). 8월까지 이 모든 그룹은 제어된 숫자 코드 없이는 핵무기 사용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허가 링크 개념에 집중했다. 같은 시기, 국방부 군사 응용국 국장은 샌디아에게 코드로 제어되는 특수 탄두 장착 장치의 가용성에 대한 연구를 요청했다. 이 연구 결과, 1961년 8월 국방부 장관은 공식적으로 원자력 위원회(AEC)에게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배치된 핵무기에 대한 허가 링크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다. 1961년 9월, 군사 응용국 국장은 샌디아 국립 연구소에 PAL을 계속 개발하고 이 장치로 NATO 무기를 개조하는 계획을 보고할 것을 요청했다. 이 보고서는 1962년 1월에 제출되었다. PAL은 제어된 숫자 코드 없이는 핵탄두에서 핵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이는 장치와 하위 시스템의 집합이다. 이를 통해 무단 핵폭발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1962년 3월, JCAE(Joint Committee on Atomic Energy)는 기존 무기 관리 체제의 적절성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이들은 PAL기술 개발의 긴급한 필요성을 보고했다. 5월, 대통령은 과학 고문 제롬 와이즈너 주도로 NATO 무기에 PAL을 포함하는 계획을 보고할 연구 그룹을 소집했다. 와이즈너의 보고서를 받은 후,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6월 6일 국가 안보 행동 각서(NSAM) 160을 발행했다. 이 명령은 모든 미국 무기가 NATO에 배치될 때 허가 링크를 장착하도록 지시했다. 처음에 PAL은 NATO 동맹국과 공유하는 핵무기에만 사용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PAL 개념은 나머지 핵보유고에도 적용되었다. 1972년 2월, JCAE 위원들이 태평양 지역을 방문한 후, 국방부 장관은 서태평양 지역 외국에 배치된 무기에도 PAL 통제를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NSAM 160호는 또한 더 발전된 PAL 장치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 프로그램의 설립을 지시했으며, 이는 현대 무기 시스템에도 계속되는 PAL 하드웨어의 연구, 개발 및 구현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했다. NSAM 160에 응답하여, 국방부는 모든 기존 NATO 기반 시스템에 새로운 지휘 및 통제 하드웨어를 통합했다. 단거리 전술 시스템은 5자리 기계식 콤비네이션 잠금 장치가 장착되었다. Mk31 나이키 허큘리스와 어니스트 존 미사일, Mk45 및 Mk54 원자력 해체 탄약(ADMs), Mk54 데이비 크로켓 탄환, Mk33 및 Mk48 포발사 원자력 탄약(AFAPs)이 이러한 잠금 장치가 장착된 핵무기들이다. NSAM 160호 발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자-기계식 4자리 코드 스위치(MC1541)와 그 관련 제어 장비의 개발을 완료하기 위한 긴급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MC1541, 카테고리 A (CAT A) PAL로 알려진 전자 기계식 잠금장치는, 기존의 장거리 시스템을 개조해 탑재되었다. 여기에는 Mk49 주피터 IRBM, Mk7 및 Mk28 항공기투하 전술핵폭탄, Mk28 메이스, Mk50 퍼싱, Mk52 서전 전술 미사일이 포함된다. 초기의 핵무기 사용통제 장비인 MC1541은 일종의 전기-기계적 잠금장치로, 컴비네이션 자물쇠에 스위치와 모터를 달아둔 버전이었다. 컴비네이션 자물쇠를 손가락으로 돌리는 대신 모터를 이용해 잠금장치의 다이얼을 돌려 핵무기의 전자/기계적 잠금을 해제하여 회로를 연결해 전류가 흐르게 하는 장치이다. MC-1541은 다음 움짤과 같이 작동된다. 올바른 코드를 입력하면 모터가 코드에 맞게 자물쇠를 돌리고, 자물쇠가 올바르게 정렬되면 지렛대가 내려가 스위치를 닫는(회로를 연결한)다. 그러면 핵무기는 활성화되고 격발될 준비를 마친다. 폭격기에도 역시 PAL이 설치되었다. 1967년 국방부 고위급 검토를 거쳐 SAC는 폭격기에 코드 활성화 스위치를 장착하도록 지시받았다. 코드 활성화 스위치는 폭격기 승무원이 승인받지 않은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다. 코드 활성화 스위치는 폭격기가 비행 중에 승무원이 도달하기 매우 어려운 위치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폭격기 시스템 깊숙한 곳에 묻혀져 있고, 이 코드 활성화 스위치 CES 는 그저 항공기에 위치해 무기의 중요한 전원 공급회로를 끊는 다른 버전의 PAL이었다. 1970년 폭격기 코드 활성화 스위치는 전략공군사령부의 B-52에 탑재되었다. 2인 규칙 2인 규칙이란 한 개인에 의한 우발적이거나 악의적인 핵무기 발사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규칙이다. 2인 규칙이란 반드시 핵무기 사용에 있어서 반드시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2인 규칙의 예로 미국의 ICBM인 미니트맨 미사일의 발사 절차를 들 수 있겠다. 미니트맨의 발사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미국 대통령이 핵미사일 발사 명령을 내린다. 2. 미사일 발사 통제 센터(Launch Control Center, LCC)의 미사일 장교들이 경보를 듣고, 발사명령을 알리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듣는다. 미사일 장교들은 메시지가 진짜인지 확인한 다음, 부사령관 패널 위에 있는 작은 빨간색 강철 "Emergency War Order" 금고를 연다. 이 금고는 2개의 자물쇠로 봉인되어 있으며 미사일 발사 통제 센터 내의 미사일 장교 2명이 각각 서로 다른 자물쇠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두 미사일 장교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금고를 열면, 그 안에는 발사 키가 2개가 있고 이 발사 키를 서로 나눠 가진다. 3. 미사일 장교 두명은 핵공격을 대비해 의자에 있는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발사 키를 각자의 콘솔에 꽂고, 두 명의 미사일 장교가 동시에 발사 키를 돌린다. 이때 각자의 콘솔에 꽃는 키는 한사람이 독단적으로 키를 돌리지 못하도록 발사 키 간 거리는 약 3.66m 떨어져 있다. 4. 미사일 격납고의 문이 열리고 미사일이 발사된다. 물론 세세한 부분은 생략되었지만 핵무기는 대략 이렇게 사용된다. 절대로 독단적으로 핵무기가 사용될 수 없도록 하는것이 바로 2인 규칙이다. 미니트맨의 2인 규칙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https://m.dcinside.com/board/war/3221565 위 글을 참조하면 된다. 제한된 재시도/비폭력적 불능화 제한된 재시도/비폭력적 불능화란 적군의 핵무기 탈취나, 테러조직의 핵무기 저장시설 점거, 핵무기의 악의적 사용을 대비하여 만든 기능이다. 1) 자동 운영 시스템이 핵무기에 침입하는 것을 감지하거나, 2)틀린 핵무기 무장 신호가 여러번 입력되거나, 3)핵무기의 pre-filght controller의 다이얼을 DI(비활성화)로 설정을 한 후 pre-flight controller에 달린 T자형 손잡이를 당긴 상황이라면 자동으로 핵무기의 주요 전자회로만 전기로 싹 튀겨버려서 핵무기가 고장나 절대로 기폭되지 않도록 만든 기능이다. 이렇게 주요 전자회로가 박살난 핵무기는 재생을 위해 핵무기 생산 공장으로 보내 전자회로를 대대적으로 교체해야 한다. 핵무기 안전장치, PAL의 의미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체계 아래에서 문민통제란 시민이 핵무기 사용을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시민을 대표하는 대통령만이 핵무기의 사용을 통제해야만 문민 통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PAL이 한 것은 무기의 보유와 핵무기의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분리한 것이다. 무기를 보유할 순 있지만 PAL 코드를 받기 전까지는 핵무기를 기폭시킬 수 없다. (2편에서 계속) - dc official App
작성자 : Anthrax836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