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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과 한국 문화
한국 가톨릭과 한국 문화https://cbck.or.kr/Documents/Samok?no=50최석우 안드레아 (몬시뇰, 서울 대교구)Ⅰ「한국 서지」(韓國書誌)의 저자로 유명한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유교(儒敎)에 언급하여 “우리는 유교에 이르러 한국 사상(韓國思想)의 핵심을 건드리게 된다. 사회 제도와 행정 체제, 철학 사상, 역사와 문학의 개념, 이 모든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유교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사변(思辨), 관찰과 비판, 열광, 상식, 호기심 따위가 모두 유교에 귀일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구태여 쿠랑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韓國)의 문화가, 구체적으로는 천주교(天主敎)가 전래(傳來)한 조선조(朝鮮朝) 후기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유교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문화였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종교(宗敎)와 문화(文化)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음은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종교의 진보는 바로 문화의 진보를 의미하고 문화의 진보는 곧 종교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바로 조선조의 문화가 그러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유교적(儒敎的)인 문화는 일반적으로 현세적(現世的)이고 인간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가톨릭은 모든 문화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위하고 하느님을 향해 창조되어야 하고 또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상 이러한 문화를 창조할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었다고 주장한다. 한국 가톨릭이 현세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문화를 피안적(彼岸的)이고 신 중심적(神中心的) 문화로 끌어올리고 승화하는 데 과연 기여했을까. 이것이 첫째로 고찰해야 할 문제의 소재일 것이다.천주학(天主學)과 함께 들어온 서양의 문물(文物)은 이 나라 문화에 개화(開化) 바람을 일으키고 근대화(近代化)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근대화는 우선 전근대적(前近代的)이고 봉건적(封建的)인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복지 국가(福祉國家)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복지 사회 건설의 의욕은 인권(人權)을 침해할 위험성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이미 속화(俗化)된 서구(西歐)의 근대화 사상이 한국으로 하여금 복지와 인간의 기본 자유가 조화를 이룩한 가운데 진정한 진보를 달성하도록 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까가 또한 문제의 소재이다.외세(外勢)의 끊임없는 침략의 위험은 조선이 근대화하는 데 있어서 대내적(對內的) 봉건적(封建的) 요소에 못지않게 큰 장애가 되었다. 외세의 침략 위험성이 높아지고 이웃 열강(列强)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해 갈수록 반침략주의(反侵略主義)는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더욱 긴박한 과제가 되었다.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서 종교의 근대화와 반침략주의를 내걸고 동학(東學)이란 이름 밑에 새로운 민족적(民族的) 종교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동학이 참으로 근대적이고 반침략적인 종교였는가는 불문에 부치더라도 여하간 이러한 종교의 창도(唱導)를 보게 한 데에는 … 천주교로 하여금 왜 이러한 종교가 새삼스럽게 창설되어야 하는가를 마땅히 자문(自問)토록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보편성과 특수성, 인간성과 한국적 인간성의 조화는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보편성의 지나친 강조는 외래적(外來的)인 것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키우고 반대로 특수성의 지나친 강조는 국수주의(國粹主義)로 떨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이 어려운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 보편성 강조에 치우친 적은 없지 않았던가. …. 이것 또한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들이다.Ⅱ천주교(天主教)는 직접 서양으로부터가 아니고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이렇게 중국화(中國化)된 천주교, 다시 말해서 한문(漢文)으로 쓰여진 서학(西學) 서적을 통해서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다.한문 서학서(漢文西學書)의 대표적인 것은 역시 마테오 리치(利瑪寅)의 「천주실의」(天主實義)일 것이다. 천주실의의 기본 자세가 비록 '영유’(迎儒)일지라도 우리는 특히 리치가 주자(朱子)와 공자(孔子)를 구별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공자적(孔子的) 고전적(古典的) 유교는 천주교와 부합되는 점이 적지 않으나 주자학적(朱子學的) 유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서양의 과학 정신의 영향으로 이미 청조(淸朝)에서는 고증학(考證學)이란 새로운 학풍(學風)이 일어나 주자학(朱子學)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었다. 뒤늦게나마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性理學)을 비판하는 학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것이 실학자(實學者)로 불리는 실학파(實學派)였다.서학서(西學書)가 우선 이러한 실학자들에게 환영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웃나라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실학자들도 서학서를 통해 현실을 외면한 공리론적(空理論的) 성리학의 관념론(觀念論)을 극복하고 현실 문제의 해답을 얻고자 노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실학자들에게 있어서 우선 ‘상제’와 동일시된 천주(天主)의 개념이 후기 실학자들에게 이르러서는 별개시(別個視)되게 되었다. 그들은 천주의 인격성(人格性)을 부인하고 따라서 인간과 천주와의 상봉의 가능성도 부인하였다. 즉 그들은 “천(天)과 제(帝)는 보는 견지에 따라 다른 것이요 본디 천(天) 이외에 제(帝)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천제(天帝)라 하는 것이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조천(造天)의 인격적인 제(帝)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죄(罪)를 하늘에 얻으면 빌 곳이 없다’는 등의 경서(經書)의 구절을 끌어내어 마치 유학(儒學)이 천주학(天主學)에 불과(不過)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지없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상제(上帝)가 결코 천주(天主)가 될 수 없음을 논박했다.또한 사천(事天)으로 말하더라도 사단(四端)과 오륜(五倫)을 지키는 것 외에 다른 길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했으며 더 나아가서 천주교(天主教)의 천당설(天堂說)에도 언급하여 말하기를, 사후(死後) 천상(天上)의 복(福)를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사리(私利)를 추구하는 것이므로 군자(君子)의 학(學)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의 화복(禍福)이란 이치(理致)에 매였을 뿐이고 따로 인격신(人格神)이 존재하여 이를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아니라고 상선벌악(賞善罰惡)을 주재하는 신(神)마저 거부하기에 이르렀다.이와 같이 유학(儒學)과 서학(西學)은 종교의 중심 사상인 신(神)과 사후(死後) 상선벌악에 관하여 근본적인 대립을 나타냈다. 천주교가 인격적(人格的)이고 유일(唯一)한 절대신(絕對神)을 내세운 반면에 유학은 상제의 인격성과 우주 창조(宇宙創造)를 거부하고 경신(敬神)으로서 다만 인륜(人倫)의 준수를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황사영(黄嗣永)은 그가 지은 「백서」(帛書)를 통해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혼동하여 순 종교적인 것에 간섭하는 정부의 처사에 용감히 도전하였다. 신교(信敎)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 권리에 속하고 또한 그것은 국민 각자의 사사(私事)요 국사(國事)가 될 수 없으므로 신교(信敎)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천주교인을 박해하는 정부는 문책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이상 우리나라 실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서구의 과학기술에는 전적으로 긍정한 반면에 서구 종교에 대해서는 겨우 부분적인 긍정을 보였거나 아니면 전적인 부정(否定)을 나타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한 실학자들은 순 종교 분야에 골몰한 반면에 서구의 과학 기술을 적용시켜 현실 사회를 개선하고 타개하려는 소위 현실 참여 문제는 등한시하였다. 그러므로 서학의 근대화 이론은 결국 이론에 그치고 말았다.물론 천주교 초창기의 교우(教友)들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억압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음을 고려한다면 현실 도피적(現實逃避的)이고 염세적(厭世的)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황사영의 백서에서 이미 엿보이기 시작한 일부 천주교인들의 지나친 국제주의적인 경향은 민족적 감정을 자극시킴으로써 민족적 자주 의식을 각성시키고 양이(據夷) 사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후 거듭된 프랑스 함선(法艦)의 내한(來韓)으로 민족적 감정은 일로 격화되어 갔다.프랑스(法國)는 한국이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재한(在韓) 프랑스인 선교사 3명을 학살한 사실을 문책한다는 명목으로 1846년부터 군함을 한국 해안에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병인년(丙寅年)에 이르러 군사적(軍事的)인 충돌마저 일으켰다.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搖)이다. 동학(東學)이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Ⅲ….서학(西學)으로부터의 영향은 무엇보다도 ‘천주’란 신의 호칭(呼稱)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그러나 동학의 천주는 ‘상제’(上帝), ‘한울님’, ‘옥황상제’(玉皇上帝) 등이 복합(複合)되어 있는 개념으로서 천주교에서 뜻하는 천주란 개념과는 실로 거리가 먼 것이었다.동학의 천주는 ‘오심즉여심’(吾心即汝心) 또는 ‘천심즉인심’(天心即人心)이라고 한 최제우(崔濟愚)의 소위 종교적 체험으로 미루어 보아 범신론적(汎神論的) 입장임이 명백하다. 인격신(人格神)은 아니지만 유일신(唯一神)이요 초월적 존재가 아니고 인간에게 내재(內在)하는 신(神)이다. 그러므로 최제우는 ‘시천주’(侍天主)란 표현을 사용했다. 인간이 천주를 자기 마음 속에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위에서 이미 유교와 천주교의 사천(事天)의 태도가 서로 판이(判異)함을 지적하였다. 즉 천주교에서 인격신을 받들어 공경하는 반면에 유교에서는 인륜을 지키는 것이 다름 아닌 경천(敬天)의 길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동학에서도 경천이 인격신을 따로 모시고 공경하는 것이 아니요 ‘시천주’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하는 것이 곧 경천의 길이라고 하였다.….동학이 주장한 이른바 후천 개벽설(後天開關說)은 천주교의 구세관(救世觀)을 현세화한 지상 천국론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가 상고적(尙古的)이었다면 동학은 철저하게 현실적이었고 천주교와 불교(佛教)가 내세적(來世的)이고 영적(靈的)인데 반하여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바로 동학(東學)의 처세관(處世觀)이었다.….그러나 베이징(北京) 함락의 소식이 조선(朝鮮) 정부와 국민에게 이루 표현키 어려운 공포심을 일으키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대관(大官)들까지도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을 얻으려 애썼고 천주교인에게 신변의 보호를 의뢰하였다. 반대로 한국의 선교사들은 종교 자유의 날이 박두했다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한때의 공포요 한때의 기대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침략의 위험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한때 교회에 접근했던 사람들이 거의 교회에서 물러갔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소식이 결과적으로 한국에 변화를 초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그때 동학은 동학 자체에 대한 자각감(自角感)을 갖고 서학의 위력(威力)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검토하고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풍문(風聞)에 대하여 최제우는 “서양 사람들이 도(道)와 덕(德)을 잘 체득(體得)하여 그들이 조화(造化)를 부릴 때는 무슨 일이건 못하는 것이 없다. 그들이 공격하고 싸우는 무기(武器) 앞에서는 맞설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中國)이 망해 버리면 우리나라도 같은 화(禍)를 입을 것이 걱정스럽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이 떠도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즉 이 사람들이 그 도(道)를 서도(西道)라 하고 그 학(學)을 천주학(天主學)이라 하며 그 교(教)를 성교(聖敎)라고 하는데 아마도 그들이 천주(天主)를 알고 천명(天命)을 받은 것으로 의심하는 때문일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최제우는 이러한 서학(西學)의 위력이 마치 무기에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것은 기술과 종교의 혼동이요 문화와 종교의 혼동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종교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혼동할 위험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동은 이미 실학자들에게도 발견되었고 정부에게도 있었으며, 천주교 측에도 있었다. 아마 이것은 정교일치(政敎ᅳ致) 사상이 체질화(體質化)된 한국 민족에게 숙명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한국 사람은 현실의 부정(不正)을 극복하는 것이 곧 천계(天界)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 성격으로 인하여 사회와 천계의 동질성(同質性)을 가상(假想)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종교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현실 참여에 민감하였다. 뿐더러 그것은 국가의 권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호국 신앙(護國信仰)으로까지 발전되어 나갔다. 종교(宗敎)나 국권(國權)이 모두 정교일치 사상에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특히 동학의 경우는 인내천(人乃天)의 현실주의로 말미암아 동학인(東學人)들의 이상론(理想論)은 항시 현세에 영향을 미쳐야 하고 또한 현실의 영향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종교보다도 현실 참여의 기회가 많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정치의 혼동은 서양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것이었다. 특히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때가 그러했다. 식민지 건설과 포교(布敎)가 혼동됨에 따라 포교가 식민지화(植民地化) 정책에 이용될 때가 있었다. 그 결과 선교사(宣敎師)들은 때로는 그들을 군함이 뒤따르고 있다는 비난마저 들어야 했던 것이다.이러한 소위 식민지 건설에 대비한 서구 일부 국가의 그릇된 선교 정책이 재한(在韓) 선교사들에게까지 미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난(東學亂) 중 동학군은 새로 등장한 무기가 서양에서 온 것이라 하여 한국의 양인(洋人) 선교사와 그들의 교(敎)를 신봉(信奉)하는 천주교인(天主敎人)이 다 동학군의 원수가 된다는 망녕된 결론을 내리고 선교사의 재산을 약탈하고 천주교인(天主教人)을 박해하게 되었다.….Ⅳ이상으로 우리는 한국 가톨릭과 한국 문화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개관(概觀)했다. 결론적으로 한국 가톨릭이 한국 문화에 끼친 영향과 한국 문화에 대한 한국 가톨릭의 적응(適應) 여부를 간추려 보자.서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문화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그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무릇 모든 문화는 궁극적으로 신(神)을 지향(指向)해야 한다는 것이 가톨릭의 문화관(文化觀)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한국 가톨릭이 유교를 바탕으로 한 세속적(世俗的)인 한국 문화로 하여금 신을 지향케 하는 데 기여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진정한 문화(文化)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복지(社會福祉)와 아울러 인간의 자유가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톨릭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한국 가톨릭은 정권(政權)의 안전을 기하고자 충효(忠孝)란 유교적 도덕을 절대적 국민 도덕으로 내세우는 조선조 후기 정치 체제(政治體制)에 도전하고 충효나 군부(君父)의 의사(意思)가 결코 기본 인권(基本人權)을 우선할 수 없다는 입장을 죽음을 무릅쓰고 고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거듭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韓國) 가톨릭은 이 나라 민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민족(民族)을 위한 종교(宗敎)로서 민족 문화(民族文化) 창조에도 기여할 수 있었던가. 이 질문에 긍정적(肯定的)으로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근대화(近代化)가 바로 서구화(西歐化)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 전통적 고유 문화에 대해선 열등감을 느끼고 외래적 구미 문화(歐美文化)는 우월하다는 서구 선망(西歐羡望)의 사고방식이 일찍이 지양(止揚)됨으로써 한국 문화에 대한 민족적 자주성을 지녔어야 되었을 것이다. ….
작성자 : 가갤러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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