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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X호랑이순애소설3

ㅇㅇ(1.227) 2025.03.11 20:18:03
조회 57 추천 1 댓글 0

[시리즈] 개X호랑이순애소설
· 개X호랑이순애소설1
· 개X호랑이순애소설2


2024년 4월

——————————


“으음, 잘 모르겠어. 사람이 기억난다는 느낌은.”


내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이미 어스름이 진 상태였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로 세상의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샤프를 돌리고 있었다.


“선생님도 기억나는 사람이 없어요?” 그녀가 아쉽다는 듯 샤프를 책상 위에 소리 없이 올려놓았다. 그제야 나는 애초부터 책상 위에 지우개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분명 있긴 한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율에 대한 기억만큼은—타인에게 드러낼 일이 있다면—고스란히 꺼내고 싶었다. 그 기억은 열매 속의 씨처럼 숨겨진, 하지만 무르고 연한 기억이었다. 나는 그 기억만큼은 일절 왜곡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 동그란 기억은 손으로 잘못 쥐는 순간 짓물러질 것이 분명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과육은 중력을 이기지 못한 채 손가락과 손가락의 틈 사이, 손등, 손목, 팔 그리고 팔꿈치를 타고 흘러내려 모두 짙은 그림자 속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손과 팔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미 액체가 되어 사라져가는 기억의 핵을 움켜쥐려 애쓰고 말 것이다.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수학보다 사람이 훨씬 어렵죠?”


“그렇게 얘기하면 보통 어이없어할걸.”


“근데 저 7시 30분에 약속 있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그녀는 질문 아닌 질문을 했다.


“뭐? 과외가 있는데 약속을 잡았어?”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30분 만에 끝나잖아요. 더 할 것도 없고.”


“그건 맞지만…”


시계는 6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차피 아빠는 집에 안 들어와요. 딱히 관심도 없고요. 선생님도 일찍 끝나면 좋잖아요. 같이 나가요. 아니면 먼저 나가셔도 되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잰걸음으로 방에 들어가버렸다.


오늘은 시은과 네 번째로 만나는 날이었다. 비록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멀쩡한 십 대와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을지언정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무의미한 시간을 더 지속할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과외를 일찍 끝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사람이 수학보다 어려운 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수학 문제는 비교적 단순하다. 문제를 읽고 미분이든 적분이든 배운 도구들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문제를 요모조모 뜯다 보면 결국 풀린다. 수식과 알파벳으로 하는 저작(咀嚼)운동은 오히려 머리를 말끔하게 만든다. 머리로 자일리톨을 씹고 있으면 불필요한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수학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 중에는 수학 문제를 풀며 괴로워하는 사람의 모습을 즐기는 사디스트가 우연히도 수학과 교육에 끝없는 재능을 보이는 바람에, 우리는 그 사디스트가 편찬한 교과서를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열변을 토해내는 이도 있었다.


‘나와 너, 그리고 모두는 다르다’, 당연히 참인 명제이다. 달리 생각할 명분도 없다. 하지만 그 명제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명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노력과 타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노력은 서로 다른 종류의 노력인 게 자명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흘러갔을 즈음 그녀가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흰색 치마에 흰색 셔츠, 그리고 그 위에 회색 니트를 덧입고 어깨에는 도톰한 검은색 에코 백을 메고 있었다.


“갈까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난 거 아니죠?” 그녀가 물었다.


“아냐, 그런 건 아닌데…”


“그럼 괜찮아요.”


그녀는 그대로 거실을 지나쳐 신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검은색 로퍼를 신고 뒤꿈치로 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그래, 가자.”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신발장으로 갔다.


우리는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강남역으로 향했다. 군데군데 심어진 가로수로는 가릴 수 없는 매캐한 공기를 맡으며 우리는 끝없는 인파 속을 헤쳐나갔다. 젊은 남녀가 떠드는 소리, 황망히 지나가는 버스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때때로 크래쉬 심벌같은 자동차의 경적 소리와 뭉툭한 진동을 타고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도 들려왔다.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그녀와 나뿐이었다. 그녀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그렇게 나는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 그녀와 서로 맞은 편 개찰구에 다다를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봐.”


“다음 주에 봐요.”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등을 돌려 플랫폼으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열차가 도착하여 많은 사람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리는 사람보다 두 배는 많은 사람이 스크린 도어 앞에 두 줄로 서 있었다. 일렬로 서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는지, 줄은 나비의 더듬이처럼 양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토요일 저녁 2호선 내선 순환 열차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은 차례차례 열차에 몸을 실어 자리를 꿰찼고 나도 그들과 다름없이 열차에 몸을 구겨 넣었다.


*


오후 8시가 넘어서야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캠퍼스 안 거리는 한산했지만 사람이 어디서 자꾸만 나타나는 것인지, 한두 명씩은 꼭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넓게 드리운 달빛이 만들어낸 그림자 위로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음영을 하늘하늘 비틀었다. 학생회관 앞에서는 나무 테이블 위에 잔뜩 녹색 유리병을 쌓아두고 술판을 벌이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나의 귀에는 그 소리가 뜻이 되어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보자 달의 아랫부분이 살짝 패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순수한 하늘이었다.


나는 모든 걸 뒤로 하고 기숙사에 들어가 계단을 오르고 204호실의 방문을 열었다. 방문이 열리자 오른쪽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던 곰 한 마리가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 오늘 과외하는 날 아니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
불꺼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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