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빛으로 환히 불타던 서쪽 하늘은 어느덧 청보랏빛으로 식어갔다. 머리에
흰 눈을 인 북쪽의 산맥들로부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진중의 깃발이 펄럭였다. 태양의 끄트머리가 마침내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무에진은 망루로 올라가 아잔을 낭송하였다. 오후의
따가운 햇살에 늘어져 잠들어있던 병사들은 털 사이로 부는 찬 바람과 아잔 소리에 힘입어 정신을 차리고 마그립 기도 준비를 하였다.
노예병 출신 호위대장 만수르의 품에 안겨 자던 잠쉬드 미르자 역시 아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윽고 한 줄기 바람이 홀연히 일어나 잠쉬드의 천막 입구를 가린 장미와 공작이 어지러이 수놓인 장막을 젖혔다. 잠쉬드의 촉촉한 코 위로 찬 바람이 스쳐가자 산 중턱의 건조한 암석지대에서 자라는 향나무와 갖은 향초들의
내음이 풍겼고, 천막의 지붕에 걸린 황동제 등이 흔들리자 사방에 흩뿌려져 있던 빛의 무늬들이 부산히
춤을 추었다. 잠시 춤추는 빛을 바라보던 잠쉬드는 곧 고개를 돌려 만수르를 바라보았으나 산맥 너머 한랭한
대초원이 고향인 늑대 만수르는 무에진의 아잔소리도, 저녁의 찬바람도 느끼지 못하였는지 그는 여전히
새근새근 고요히 숨을 쉬며 잠들어있었다. 잠쉬드는 만수르의 귀 뒤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도 사막의 더위를 견디기 위해 잠쉬드처럼 털을 짧게 정리하였지만, 그의
잿빛과 적갈색 털은 개들의 털보다 거칠었고, 뭔지 모를 다른 냄새가 났다. 사막의 개들에게서 나는 흙먼지와 양털, 커피와 민트 차의 냄새와는
다른.
만수르가 드디어 눈을 떴다. 그는 곧 몸을 일으켜 세우고 크게 하품을
하였다.
“흐흠. 일어나셨습니까?”
잠쉬드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무에진은 벌써
아잔을 낭송하고 산으로부터 찬 바람이 부는구나. 어서 준비하지 않으면 힌두교도들이 우리보다 먼저 전열을
갖추고 진영을 습격할 테지.”
“그렇게 되도록 할 수는 없지요. 우선
기도 전에 씻으실 물을 가져오라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만수르는 옆에 놓인 은주전자의 물을 몇 모금 들이키고는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뒤 남색 카프탄을 걸쳤다. 천막을 나서기 전 남쪽 바다 너머에서 온 상인들로부터 구한 유칼립투스 정유를
뿌려 한낮의 흔적을 지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영내의 병사와 장수들 중 둘간의 관계를 모르는
자가 누가 있으랴. 그저 체면치레상의 눈가림일 뿐이었다.
만수르가 나간 뒤에도 잠쉬드는 비단베개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낮잠을 자기 전의 기억을 곱씹었다. 잠에서 깬 후의 나른한 기분이 사라지자, 불편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단지 전투의 부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찍이 선지자
무함마드는 비역질의 죄를 저지른 자는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말하였다. 물론 샤의 아들에게 돌을 던질
자는 없겠지만, 경멸하지 않을 자 역시 없을 터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눈과 귀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젤랄라바드의 파누스 궁에서 벗어난 게 오랜만이긴 하였으나, 여기는 전장이었다. 전투를 앞두고도 정욕을 이기지 못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 모두 때늦은 후회였다.
잠쉬드는 어느새 만수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만수르를 생각할 때
마다 그는 복잡미묘한 느낌에 빠졌다. 물론 만수르는 매우 좋은 병사이자 시종이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주인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게 되면 주인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대다수의 늑대들과 달리, 만수르는 궁정에서던, 전장에서던,
자신이 어떠한 위기에 처해도 의지할 수 있었고, 잠쉬드는 그 충직함을 높이 샀다. 그의 외모 역시 빼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만수르는 무식하였다. 다른 노예병 출신들처럼 그는 오로지 사냥과
격구, 활쏘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와는 도저히
잘랄 웃딘이나 하이얌을 논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대부분의 다른 늑대들과 마찬가지로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였기에 그와는 하다못해 잘 그려진 세밀화나 뛰어난 공예품, 봄철 꽃이 흐드러진 정원의 아름다움조차
논하기 어려웠다. 허나…. 허나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단 둘이서 함께하는 시간은 오랜 사냥놀이 후 돌아가는 길에 따먹는 석류와 같이 감미로웠고, 더운 여름날
찬 호수에 뛰어들 때와 같은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결국 만수르는 그냥 잠자리 상대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하여야
했다. 그러할 수 밖에 없었다.
천막의 장막이 젖혀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잠쉬드는 곰곰히 쳐진 생각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수르는 어느새 두 가지 색의 사슬로 짜 무늬가 아롱진 자우샨과 진짜 거울같이 윤을 낸 차하르 아이네, 탁비르와 샤하다가 은으로 상감된 바주반드를 착용하고 있었고, 만수르와
대동한 두 명의 시종은 갑옷과 검, 물이 담긴 황동 주전자와 대야를 들고 있었다.
“물을 가져왔습니다.”
기도를 하고 전장에 나가볼 때였다.
빽빽한 장창과 미늘창의 숲에서 샤하다나 탁비르, 신의 아흔아홉 가지
이름이 적혀있거나 줄피카르나 초승달이 그려진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솟아올라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나부꼈다. 방진을 짠 창병들 앞에는 사슬로 연결한 수레가 일렬로 배치되었고, 황색과 청색 카프탄을 걸치고 화승총을 쥔 포수들이
수레 뒤에 두 열로 섰다. 양익에는 포병들이 대포와 대형 방패를 설치하느라 바빴고, 그 옆에는 기병들이 배치되었다. 몇몇 장수들이 잔다하르 군의 진법을
본받아 포병을 전방에 배치하기를 건의하였지만, 잠쉬드는 포수들이 잔다하르의 아스케르 자페르만큼 잘 훈련되지
않았기에 포성에 놀라 제 때 사격하지 못하거나, 잘못 사격해 아군 포병을 쏠까 걱정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평원 건너편의 이교도들 역시 비슷한 대형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중앙의
장창진 사이에 수많은 궁수들과 몇몇 포수들이 섰고 그 앞에는 날카롭게 다듬은 말뚝과 창으로 만든 목책이 세워져 있었다. 사흘전의 전투에서와 달리 코끼리는 많이 보이지 않았는데, 지난번의
전투에서 많이 잃어서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지난번의 일에서 교훈을 얻어 그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양익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기병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잠부락을 실은 낙타들도 보였지만 제대로 된 포는 볼 수
없었다.
이윽고 잠쉬드의 대포들이 불을 뿜었고, 멀리서도 포환이 탄착할 때
마다 흙먼지가 일어나고 부러진 창대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교도들은 잠부락으로
응사할 뿐 가만히 진열을 유지하였다. 지행성 다리구조로 걷거나 뛰는 것은 체력 소모가 심한 행동이었기에, 지형의 굴곡이 적은 평지에서는 어느 쪽이나 적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방어적인 진법과 전술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공격은 기병들이 전담하였지만 동방으로부터 화기가 전래된 이래로 섣불리 기병을 돌격시키는
것은 위험해졌다. 하지만 잠부락같은 소형포가 제대로 피해를 입히기에는 두 군대간의 간격이 너무 멀었다. 피해가 누적되면서 이교도들의 창병대가 동요하기 시작하자 결국 기병이 움직였다.
양익에서 전방으로 이동한 기병대는 나란히 횡대로 늘어서더니 같은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충분히 전진한 후, 기수들은 일제히 동개에서 활을 꺼내 들었고, 오른손에는 대여섯 개의 화살을 쥐었다. 화려한 줄무늬가 들어간 터번을
쓴 장교가 큰 소리로 짖는 것을 신호로 이교도 기병들은 돌격하며 손에 쥔 화살들을 일제히 차례대로 연달아 날리기 시작하였다. 수레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산에 우박이 내리는 듯 하였고 미쳐 수레나 방패 뒤로 피하지 못한 포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적에게 확실한 파멸을 선물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보다 접근할 필요가 있었고, 장교들이 포수들을 향해 방포금지라 반복하여 짖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맞추어 커져갔다. 이윽고 다가온 적 기병들이 창을 내밀어 겨누고 탤와르를 높이 치켜들었다. 충분한
거리였다.
“아테쉬!”
장교들의 방포명령에 두 열의 포수들이 차례에 맞춰 수레와 방패 위로 탄환을 발사하였고, 시야를 가린 매캐한 포연 너머로 인마의 비명이 들렸다. 바람이 연기를
걷어가자 수많은 말과 병사들이 피로 땅을 적시며 뒹굴고 있는 광경이 드러났고, 총탄에 맞지 않은 운 좋은 몇몇도 수레를
넘으려다 보병의 권총에 맞거나 미늘창에 찍혀 낙마하였다. 곧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기수를 돌려 도망하였다.
적의 기병이 와해되자 양익의 기병이 전진하여 적을 포위할 준비를 하였고, 장창병과
포수들 역시 북소리에 맞추어 수레를 지나 전진하였다. 포위될 조짐이 보이자 적들은 심하게 동요하였고, 보병대가 접근하여 다시 사격하자 제대로 응사하지 못하고 전열이 붕괴되었다. 포위전은
금시에 추격전이 되었다.
전장을 바라보던 잠쉬드는 흡족해하였다. 이런 기세로라면 내일이면 말리푸르, 앞으로 나흘이면 다울랏반다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울랏반다르의
붉은 성벽은 난공불락으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잔다하르에서 구입한 저 대포들만 있다면.... 아뿔싸.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만수르였다. 만수르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고서도 잠쉬드는 대략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추격에 정신이 팔려 포병대가 본대와 분리되었으니, 그 어떤 사단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과연 뒤돌아보니, 아마도 백향목 숲 속에 숨어있었던 듯한 핀다리들이 나타나 언덕 위에서 대포들을 수레에 싣던 좌익의 포병들을
공격하고 있었고, 포병들은 혼비백산하여 대포를 내팽개친 채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저 대포들은 결코 빼앗길 수 없었다. 디미트리예의 그 유명한 톱 하네에서
주조된 저 대포들은 젤랄라바드에서는 만들기 어려운 크기와 성능의 것들이었다. 저것들을 구하기 위해 잔다하르의
이브라힘 파샤에게 얼마나 많은 사탕발림을 해야 했는지 모른다.
“추격을 그만두고 기병들을 다시 불러모아라. 일부는 우익의 포병을 지키도록 보내고 나머지는 나와 함께 저 언덕을 공격한다.”
허나 때는 이미 늦었다. 만수르가 기병들을 대동하고 도착했을 즈음, 핀다리들은 이미 대포를 다 싣고 수레에 말까지 멘 상태였다. 돌격해보았자
숲 속으로 사라질 것이 분명했고 따라 들어간다면 매복에 걸려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 몰랐다.
“신께서 저주할!”
잠쉬드는 하마한 뒤 분에 차 땅을 찼다. 따라서 하마한 만수르와 장교들은
귀를 젖히고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잠쉬드는 그들이 지위만 높을 뿐, 남자에게 몸이나 대주는 나약하고 추한 것이라 속으로 비웃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오늘의 전투는 결코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추락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를 써서든 적에게 패배를 안겨주어야 했다. 대포를 다시 빼앗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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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에 목이 마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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