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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의 히틀러..스테판 반데라와 볼히니아 학살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 1909년 12월 1일 ~ 1959년 10월 15일).오늘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크라이나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면모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민족주의가 가장 부정적으로 물들 경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1. 배경1-1. 중세로부터 20세기까지타타르의 멍에가 시작되고 키예프 공국은 몽골에 의해 무너졌습니다.루스인들은 몽골과 투르크계 타타르의 지배를 받게 되고, 상대적으로 영향이 덜한 서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적은 영향으로 문화 분리가 일어나게 됩니다.이때 갈리치아 공국과 볼히니아 공국은 지주들의 힘이 강하고 헝가리와 폴란드의 문화 영향을 받는 지역이었습니다.둘은 합쳐져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되었고 이후 루테니아 왕국이 되었습니다. (왼쪽 아래 우측의 국장은 키예프 공국의 국장을 계승했습니다.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하지만 루테니아 왕국의 쇠락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확장으로 결국 이 지역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이때부터 폴란드인 귀족들과 지주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루테니아 농민들을 지배하며 민족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러시아 제국의 지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대다수의 토지는 폴란드인 지주들의 것이었고 소작농들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두 민족 간 중재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맡았는데 잘 이뤄질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둘 모두에게 증오만 받고 끝나기도 했습니다.19세기부터 농민과 노동자 계층에게까지도 민족주의가 퍼지며 우크라이나 공동체의 주권 열망이 두드러지고,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혼란이 극에 치닫으며 1917년 러시아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케렌스키 정부에 연방 개편 요구의 동의를 얻게 됩니다.그리고 10월 혁명이 벌어졌습니다.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폐지하고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혼란과 봉기 속에서 동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빠르게 무너져갔습니다.당연히 이들은 동유럽 지역의 봉기와 독립시도를 인정할 수 없었고 현지인 볼셰비키로 이루어진 괴뢰 체제를 앞세워 진압을 시도했습니다.하지만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라다조차 제압에 실패하며 결국 전쟁 수행 의지를 잃고 독일 제국과의 조약을 통해 동유럽 민족들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습니다.이번에도 당연한 소리지만 독일이 무너진 뒤 조약은 파기됐고 소비에트는 모든 동유럽 신생 국가들을 향한 침공을 개시했으며 러시아가 동유럽의 독립을 인정할 뜻이 없음을 확인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침공중이던 소비에트군에 선제 공격을 가하면서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시작됐습니다.전쟁이 길어지며 양측 모두 경제적 피해가 극심해졌고 러시아 내부에서 무리한 전쟁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고조되자 끝내 1921년 리가 조약을 통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쪽 지역이 폴란드에 양도되는 조건으로 둘은 합의를 보았습니다.폴란드 제2공화국은 당장은 국가안전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폴란드만 믿고 있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인들은 졸지에 실향민이 되며 이를 배신으로 여겼습니다.다시 한번 국가를 잃어버린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 인사들은 이후 비참한 꼴로 전락했습니다.이것은 현재까지 이어질 우크라이나의 급진 민족주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배경은 이전부터 존재했다지만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모든 문제가 시작됐죠.(영화 증오, 2016 中.)1-2. 폴란드의 지배이 시점에서 폴란드인 지주들과 루테니아계 피지배민족의 갈등은 더욱 격화됩니다.단순한 지주 계급과 농민 계층의 갈등에서 정치, 문화, 민족적인 충돌로 이어졌죠.폴란드 제2공화국은 불안정한 신생국가였고 새로 편입된 영토의 다른 민족들을 빠르게 동화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정교회 성당은 철거되고 가톨릭 개종과 폴란드어 교육이 강요되며 루테니아계 민족들은 새로운 압제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폴란드-리투아니아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음에도 빌뉴스 사태로 리투아니아인들과도 척을 진 상태였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묘한 민족적 앙금으로 남아있습니다.)그리고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스테판 반데라입니다.2. 스테판 반데라의 초기 생애1909년 12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반데라는 폴란드의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 청년 단체에 가입하는 등 젊어서부터 민족주의적 사관을 갖고 있었고 1928년엔 민족주의 학생단체 '자유 우크라이나 조합(Union of Free Ukraine)', 1929년에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에 가입했으며 특유의 조직력으로 빠르게 조직 내 지지를 얻어 3년 뒤 폴란드 내 대표단 총 책임자 지위를 얻게 됩니다.이듬해 OUN의 폴란드 내 최고지도자가 되면서 그는 폴란드 정부를 향한 각종 저항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내무장관을 암살하고, 당국에 협조한 우크라이나인 동포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독립전쟁 때 우크라이나군을 지휘했던 민족영웅인 이반 바비를 고등학생의 OUN 가입을 막았다는 이유로 살해하기도 했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반데라가 어린나이에도 이렇게 빠르게 지도자가 될 수 있던 이유는 폴란드 당국의 계속된 탄압으로 구세대에 속한 노장층 OUN 지도자들이 계속 체포되어 심각한 지도부 공백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결국 1934년을 넘기지 못하고 당국에 체포된 반데라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구심점을 잃은 OUN도 약화되고 당장은 잠잠해진듯 보였습니다.나치가 오기 전까진 말이죠.3. 나치 독일과의 협력과 최후소련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해 분할하였고 폴란드에 점령당한 동쪽 지역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계 민족들은 다시 러시아인의 지배에 놓였습니다.반데라는 이러한 혼란 속에 석방되었고 크라쿠프에서 OUN과 다시 접선하였습니다.이때 OUN을 이끌던 인물은 온건파인 안드리 멜니크(Andriy Melnyk)로, 그는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반데라를 따르는 급진파는 더 적극적이고 극단적인 수를 써서라도 저항과 독립운동을 이어나가고자 했습니다.반데라 파는 '우크라이나 혁명 민족주의자 조직(OUNR, 통칭 OUN-B)' 라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분리되었습니다.그리고 소련 침공을 준비하던 나치 독일이 이들을 주목하게 되면서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우스타샤를 통해 현지 민족주의 단체의 포섭으로 재미를 본 독일은 이번에도 같은 수법을 쓰고자 했습니다.이들은 우크라이나 독립을 용인하는 조건으로 장비와 물자, 자금을 후원할 것을 약속했습니다.그리고 마침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됩니다.저 많은 환영인파가 보이십니까?서부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은 현지 주민들에게 열렬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왜일까요?폴란드의 지배에 있던 서부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소련에게 편입되었던 다른 우크라이나 지역은, 홀로도모르라는 끔찍한 경험을 겪었습니다.우크라이나 측의 주장과는 달리 고의적인 인종 청소 목적의 제노사이드였다는 주장은 아직 학계에서도 논쟁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확실합니다.스탈린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집산화 정책과 정치적 탄압은 인위적인 거대한 기아를 초래했습니다.평균 수명은 남아 7세, 여아 10세로 줄어들고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시체를 뜯어먹었으며 우크라이나 지역 전역에서 아이들이나 이방인을 죽여 살을 벗겨낸 뒤 이를 거래하는 인육 시장이 활발히 열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결과적으로 이는 수백만명의 아사자를 발생시켰습니다.참고로 가장 심각한게 우크라이나였으니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주로 주목받지만 실은 이때 소련의 농업정책은 너무나 처참했던 나머지 다른 지역에서도 끔찍한 기근이 초래됐습니다.북캅카스로부터 러시아 남부지역, 카자흐스탄, 타타르스탄, 여러 지역에서 천만 하고도 수백만이 또 굶어죽는 생지옥이 펼쳐졌죠.폴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서부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참극을 모두 전해듣고 있었습니다.그런 그들이 이제 소련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됐을때, 소련은 토지 개혁과 산업 국유화라는 명분으로 지역 사회 구조를 공산주의 이념 아래 파괴하고 강압적인 탄압과 지식인의 대규모 체포 및 처형을 자행했습니다.이 모든 일은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과 서부 벨라루스 지역이 독일군을 해방자로 받아들이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히틀러 만세! 반데라 만세! 우크라이나 독립국이여 영원하라!"반데라와 OUN-B는 이동 학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과 협조하여 대대적인 유대인 색출과 반유대인 선전에 적극 참여했습니다.그리고 키예프가 독일군에게 함락되자 반데라와 그의 세력은 독일 당국과의 사전 논의 없이 일방적인 우크라이나 독립 국가의 수립을 선포합니다.독일은 어쨌든 우크라이나인으로 이루어진 게릴라가 알아서 현지의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솎아내길 기대했긴 하지만, 이렇게 독단적인 행동은 심기를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독일이 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레벤스라움의 일부가 되기 위한 자원 공급지이지 독립열망에 불타는 신생 국가가 아니었습니다.1941년 7월 5일 게슈타포는 반데라를 체포해 가택 연금했고, 협력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자 9월 15일 반데라와 주요 간부들은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하지만 독일의 의도와는 달리 OUN-B 잔존세력은 미콜라 레베드(Микола Кирилович Лебедь, 1909. 1. 11. ~ 1998. 7. 18.)에 의해 새롭게 결집하여 우크라이나 반란군(Ukrainian Insurgent Army, UPA)으로 재조직됩니다.이들은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침략자로 규정하는 한편 극단주의로 물들어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감정을 부채질해 폴란드인 지주와 유대인들을 향한 증오를 폭발시켰습니다.잔혹한 학살이 곧 볼히니아와 동갈리치아를 뒤덮었습니다."폴란드인 없는 우크라이나" 라는 미명으로 수백년에 걸쳐 누적된 폴란드인을 향한 증오가 모든 일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폴란드인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태아를 꺼내 죽이는 등 잔혹함에 주저가 없었습니다.당연히 중간 계층이던 유대인 공동체도 척살 대상이었고 소수민족으로 섞여있던 아르메니아인들도 솎아내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처음에는 이들을 포섭하려고 했던 독일 역시 이러한 민족주의자들의 대두에 위기를 느끼고 탄압을 시작했지만 학살을 멈추려 한 건 아니라서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당연하지만 폴란드인들도 맞기만 한 건 아닙니다. 그들 역시 복수심에 저항과 보복을 이어나갔습니다.학자들은 대략 12만 명의 폴란드인이 학살당하고 이들의 보복 학살로도 훨씬 적긴 하지만 우크라이나인 2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합니다.소련군이 진군해오기 시작하자 이들은 소련군도 침략자로 간주하고 파르티잔 운동을 벌여 장성을 암살하는 등 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로 작용하였습니다.이때 즈음 독일은 불리해진 전황 탓에 이들을 회유하고자 반데라를 다시 석방하고 협상을 벌여 독립적인 민족위원회와 자치 군대 설립 약속을 받아내지만 뭐, 1944년 이후 독일이 어떻게 됐는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NKVD는 대대적인 수색과 진압 작전을 벌여 UPA 대원과 연루된 민간인들을 대거 처형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로 이송했습니다.정확한 수치는 불명이나 자료에 따라선 대략 수십만명이 휘말린 것으로도 나옵니다.전쟁이 끝나고도 UPA는 50년대까지 반소운동을 지속했지만 이런 압박과 지도부의 분열 속에 와해되어 갔습니다.반데라는 서독으로 망명해 반공 활동을 이어가다 1959년 10월 15일 아파트 앞에서 KGB 공작원에게 시안화칼륨 가스로 암살당하였습니다.4. 우크라이나의 재독립과 반데라주의의 대두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투표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재독립이 이뤄졌습니다.본래는 고르바초프의 연방 개혁에 발맞춰 개편된 연방 체제 내에서 주권 확보와 자치권 확대를 목표로 사회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8월 쿠데타를 거치며 소련 체제 자체가 더이상 존속이 불투명해지면서 우크라이나는 연방을 탈퇴했고 소련은 해체되었습니다.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악화(다들 잘 아시다시피 우크라이나는 부패율도 매우 높고 유럽 최빈국이기도 합니다.) 속에서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반데라가 다시 민족주의적 시선에 따라 우상화가 시작된 것은 거의 필연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2009년 여론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 OUN-B와 UPA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항상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지역별로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극심한 학살을 겪은 볼히니아와 갈리시아가 긍정 반응이 두드러지지만 같은 서부여도 부코비나와 트란스카르파티아에서는 긍정 견해가 큰 힘을 얻진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그 외 지역은 수도 키이우를 포함해 대부분이 부정적 의견이 압도적입니다.그러나 이런 기조는 러시아와의 충돌이 시작된 이후 변화했습니다.크림 병합과 돈바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피란길에 오르고 실향민이 되었습니다.(이 과정에서 마리우폴은 피난 온 돈바스 실향민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새로운 중심도시가 되었습니다.)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와의 대립과 국가 존망의 위기를 실감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인지, 2022년 4월 여론조사에서는 많은 변화가 나타납니다.소련에 대한 인식이 크게 부정적으로 변하고 소련적인 이라는 이미지는 러시아적인 이미지로 변화했으며 87%의 응답자가 소련을 더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답하였고 특히 OUN과 UPA에 대한 긍정 답변은 2015년 이후 두 배로 증가하여 81%에 달했습니다.스테판 반데라에 대한 답변이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데, 2012년엔 불과 22%만이 긍정 답변을 나타내던게 2022년 시점에서는 74%까지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흥미롭게도 기존의 22%는 원래부터 긍정 답변 대부분을 차지한 볼히니아와 갈리시아가 주를 이룬다는 걸 감안할 경우 나머지의 절대적 지분은 중부와 동남부에서 왔다는 소리인데, 전쟁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에 노출되고 민간인 피해가 잇다른 것이 영향을 줬을 거란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정말이건 아니건 이 영향으로 기존 친러 지역으로 흔히들 분류되던 하르키우와 드니프로에서는 도로명에 반데라를 붙이는 촌극도 벌어졌습니다.(민족 정체성 응답도 특이한데 2008년부터 꾸준히 안정적인 수치를 보였습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진 83%가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으로, 15%가 스스로를 러시아인으로 답변했으나 2014년 이후 러시아인 응답자는 11%로 감소했고 현재는 5%만이 남은 반면 우크라이나인으로 답변하는 응답자는 92%에 도달했습니다.)반데라 긍정 답변이 늘어나는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다행히도 우크라이나 내 다른 민족에 대한 답변도 긍정 비율이 우세하게 나타납니다.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13%만이 부정적이고 유대계와 헝가리계에게도 긍정적 답변이 우세합니다.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긍정 30% 부정 27% 중립 39%로 어느 의견도 뚜렷한 우세가 나타나지 않습니다.러시아와의 충돌이 본격화되면서 이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중부, 동남부 지역에서 반데라가 반러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고 이것이 반영된 결과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만 이러면 자칫 반데라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우려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아조프 부대에 입대해 참전한 21세 러시아인 아르티옴 쉬로보코프, 2015년. )우크라이나는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도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닙니다. 이런 경향은 긍정적으로 보기가 힘듭니다.러시아와 충돌이 시작된 이후 우크라이나의 정세 불안과 민족에 대한 혼란한 시각이 겹치면서 이러한 민족주의의 대두는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2022년 7월엔 주독 우크라이나 대사가 반데라를 영웅이라 칭했다가 해임되었으며, 우크라이나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발레리 잘루즈니가 직접적으로 반데라에 대한 지지와 옹호 발언을 이어나가기도 했습니다.잘루즈니는 현재도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지지를 받으며 차기 대권주자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 강경 보수파를 대표하는 인물로도 여겨지고 있습니다.유대계이자 러시아어 구사자이기도 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만, 전쟁 상황에서 반데라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은 요긴해보입니다.물론 긍정 시선만이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미사일 폭격에 직접 노출되어야 하는 동부 출신 피난민들이 반데라 기념행사에서 이런 게 러시아를 더 자극하고 자신들이 피해를 입어야하는데 안전한 서부에서 이런 일을 벌이냐고 항의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그렇지만 전체적 흐름은 여전히 우향우를 직행하고 있습니다.당연히 폴란드에선 강력 반발하고 있습니다.필요하기에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것이지만 역사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진 절대로 나토 가입에 동의해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하여 수차례 사죄를 요구하고 협의를 끌어내기도 했습니다.그렇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폴란드가 1939년 나치와 협력하여 동유럽에서 학살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하며 폴란드에 대한 역사왜곡과 나치 비하 발언을 이어나갔습니다우크라이나를 향한 나치즘의 부각과 탈나치화 명분 역시 반데라주의로 인한 것으로, 반데라가 나치와 협력하였던 극우 민족주의자이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를 청산하겠다는 명분입니다.러시아군의 네오나치 부대원이나, 세계 각지의 대안우파 성향 네오나치 단체가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지지와 동경을 표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을 함구하고 있습니다만.전쟁과 혼란한 현대사로 복합적인 시선을 받고 있는 인물이지만, 스테판 반데라를 향한 제 개인적 견해는 단순합니다.반데라는 절대로 영웅시되어선 안됩니다.그것은 학살에 대한 면죄부가 될 뿐이지, 결코 민족에 대한 긍정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출처-펨코
작성자 : 배터리형고정닉
영화 "왁타버스" 시나리오 떴냐?!?
"사이버 불링, 미성년자 착취, 저작권법 위반, 막말에 곡에서 이름 빼기...이야...너네 진짜 나쁜 놈들이다."진실을 쫓는 기자, 황정민"아빠! 나도 나중에 유튜버 되서 유명해질거야!"유튜버를 꿈꾸는 정민의 딸, 갈소원"너네가 보도 안한다 이거지? 오케이. 그거 우리가 물게."정민과 사연이 있어보이는 연예부 기자, 김혜수."여보, 겨우 인터넷 방송이잖아...응? 이제 그만 집에 돌아와..."정민을 걱정하는 아내, 라미란"뭐? 버튜버인지 벼락떨어진건지 나는 모르겠고! 니가 한다면 얼마든지 도와줄테니께!"정민의 고향친구이자 소꿉친구, 박철민"작업계 착취 있었습니다!!! 1년 작업에 2만원...읍읍...."무언가를 알고있는 듯한 전 작업계, 조우진"예, 그거 금마 곡 맞싑니더. 지가 다 봤다고예."한때 버듁수였으나, 지금은 탈덕한 로미갤러. 최귀화."명심해. 그것마저 파묘당하면 우린 끝장이야."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아메리카TV 대표, 김홍파"얘들아 형이 잊으라고 했잖아."전설의 1세대 인터넷 방송인, 이광수 (우억배드 역)"형, 이게 어떻게 된거야? 아 형만 믿으라며어!!!!!"인터넷 버츄얼 아이돌, 박연진 (흐르르 역)"진행시켜."고멤 이경영 (진행남 역)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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