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요즘 애들은 386 운동권이 뭔지나 아는지 참..앱에서 작성

ㅇㅇ(175.223) 2018.01.03 05:24:44
조회 764 추천 22 댓글 5


지금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386 민주화세력이

뭔지 알기나 하고 빨아대는지..

볼셰비키 혁명 하려던 놈들이 부르주아 자유주의 혁명 민주화 투사로 변신해 있으니

민주화의 공은 인정한다만 사실 그런 운동이 목적이 아니었자너?

뿌리까지 부정하는거 보면 레알 토나온다


82들의 혁명놀음 / 우태영 지음 / 2005


1. 프롤로그
386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NL과 PD는 모두 1980년대 중반에 서울대의 지하운동권에서 나온 것들이다.

시간적으로 먼저 출현한 PD는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을 뜻한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통해 기득권 세력을 타파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PD이론이 대학가를 석권해 나갈 때에 NL이론이 등장했다.
NL은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을 의미하는 NLPDR을 줄인 것이다.
NL은 한국 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한다.
식민지 사회인 만큼 당장 필요한 일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축출하는 것이다.
먼저 반미투쟁에 힘을 모아 미국을 축출한 다음에 북한과 연대해 민족통일을 이루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1985년 말에 서울대 지하운동권에서 출발한 NL은 PD를 압도하고 순식간에 전 대학으로 확산됐다.
이후 현재까지 한국 사회의 운동권의 방향은 반미와 북한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통일운동으로 가닥을 잡게 됐다.
그런데 NL이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북한의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에는 북한의 남한 적화 전략인 김일성의 남조선 혁명론도 들어 있다.

1980년대에 386세대는 대학을 다니며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에 대해 치열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운동권 학생들만이 아니라 이른바 면학에 열중하는 학생들도 전두환 대통령은 손바닥에 피를 묻힌 독재자라고 생각했다.
캠퍼스 안에서 반정부 데모나 집회가 벌어지면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위나 집회가 면학에 지장을 준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하는 학생도 찾기 어려웠다.

저항의 대열에 뛰어드는 학생들이 급증하면서
지하운동권에서는 학생들을 조직화하고 저항을 지속시켜 일거에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념이 필요했다.
그래서 동원된 것이 사회주의 혁명이념이었다.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이념을 비롯, 제국주의론 종속이론 등
지구 상에 출몰했던 모든 사회주의 이념이 서울대 지하운동권에서 습득되고 경쟁을 벌였다.

이 즈음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자괴감으로 독재에 저항하며 몸을 던지는 학생들 앞에서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니지 못했다.
적지 않은 교수들은 제자들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붙잡혀 징역을 살든가, 구류를 살든가 하는 데에 매우 미안해하는 분위기였다.
지식인으로서 자신들이 할 일을 다 하지 못해 제자들이 고생한다는 생각이었다.

반면에 학생들은 독재에 저항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탈선과 위법을 정당화했다.

민주화만 되면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우려하는,
시위 현장에서 나타나는 일부 학생들의 좌경화나 폭력 성향 등의 문제는 일거에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많은 시민들도 학생들의 시위로 거리에 최루탄이 터지는 데 대해 학생들보다는 정부에 책임을 물었다.

386세대가 정치를 주도하면서 민주주의를 낙관하던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졌다.
민주주의에 기대했던 화합보다는 분열과 갈등이 우리의 정치문화를 압도한다는 우려가 일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이러한 걱정은 386세대가 모든 분야에서 이전까지 보편적인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는 다른 정책을 추구한다는 평가에서 나온다.

북한을 대하는 자세는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386'들은 북한 주민의 인권문제는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북한 김정일 체제의 유지가 중요하다며 대북지원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미국과의 군사동맹보다는 북한과의 민족공조를 통해 통일로 다가가려는 생각이 깔려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86'들은 국내적으로는 과거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등의 정통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김일성의 독립운동은 인정하면서, 박정희에 대해서는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인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언행을 서슴지 않으면서, 이제 더 이상 사상과 이념은 중요하지 않다며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 한다.
경제적으로는 한국의 성장잠재력이 떨어진다는 경고가 나올 정도로 분배 중시의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당시 NL 이념을 전파한 중심부에는 '강철'이라는 필명의 서울대 법대생 김영환이 있었다.
김영환이 NL이라는 포장을 씌워 도입한 주체사상은 서울대 운동권에서 둥지를 튼 데 이어
서울대 울타리를 넘어 같은 시기에 한국 사회의 혁명을 꿈꾸었던 모든 젊은이들과 재야의 정치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주체사상은 서울대 운동권을 석권한 20여년이 지난 요즘 21세기에 들어서서도
대학을 포함한 이른바 한국 사회 변혁 운동권 전반의 지도이념으로서 여전한 권위를 누리고 있다.


1. 지향

민주주의

중고교 시절부터 김영환은 신문을 열심히 읽었다.
이른바 기사의 행간에서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을 감지할 능력이 있었다.

경상도 출신이라고 해서 경상도 출신 대통령을 무작정 지지한다는 요즘 말하는 'TK 정서'라는 것도 없었다.

영리한 아이들은 보통 중학교에 들어가면 정치가 무엇인지 알기 시작한다.

고전연구회

서울대 법대는 서울대 내에서도 입학 커트라인이 가장 높다.
그만큼 학생들의 자부심도 강하다.
또 그런 만큼 학생들의 사명감도 크고 자신에게 대해서도 엄한 경우가 많다.

캠퍼스나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독재자 박정희나 전두환의 축출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시위를 이끄는 소수의 대학생들에게는 한국 사회의 문제는 독재자들을 축출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근본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이를 떠받드는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였다.

1980년부터 1982년 김영환이 서울 법대에 입학하기 이전까지 서울대에서는 무림과 학림이라는 두 차례의 심상치 않은 대학생 조직 사건이 있었다.

1980년 초반까지 서울대의 운동권은 5개 정도의 전통 있는 지하서클들이 주도했다.
이들 서클의 대표들은 고학년이 되면 후배들 가운데 한 서클당 2명 정도의 대표자들을 뽑아 서로 연결해주었다.
그리고 이들 10여명 가운데 1명을 지도자로 임명했다.
이 지도자를 나중에는 '포스트post' 혹은 '포po'라고 불렀다.
후임 포스트는 반드시 선임 포스트가 지정했다.
이처럼 포 아래에서 형성된 10명가량의 지하서클 대표들이 시위도 기획하고, 문건이나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
그러나 행동은 서클 단위로 이루어졌다.
학생들의 반체제활동을 지도하기는 했지만 중앙위원회와 같은 통일된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직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나중에 경찰에서 이들을 검거해 발표할 때 안개 같은 조직이라는 의미로 '무림'이라고 했다는 설명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이 군부의 탄압으로 참담하게 끝나자 서울대 지하서클들 사이에서는 내분이 일기 시작했다.
다수의 견해는 일단 엄혹한 군사독재의 탄압을 피해 조직 역량을 보호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앞으로는 학생들만이 아닌 노동자들과 연계한 투쟁이 중요하다며 조직을 확대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즉각적인 저항을 주장하던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광주사태의 유혈진압에 분개한 사람들이 주로 이러한 주장을 했다.
서클 지도부 내에서도 즉각적인 저항을 주장하던 인물들은 조직 보존론을 패배주의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당장 투쟁을 해야 하며 그러다가 조직이 파괴되면 후배들이 다시 새로운 조직을 일구어 투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서클 지도부는 이처럼 다수와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소수의 주전파들을 지도부에서 축출했다.
그러나 주전파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몇몇 후배들을 모아 한밤에 서울대 건물들 벽에 '전두환 물러가라'고 페인트로 써 놓았다.
이에 조직 보호를 주장하던 다수파들 사이에서도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온 유인물이 바로 1980년 12월 11일의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이었다.
그러나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은 이전까지 학생들 사이에서 나왔던 반정부 주장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미국에 반대하고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 지식인까지 조직화하여 통일을 쟁취한다는 주장은
1979년 검거된 남민전, 그 이전의 통혁당 등 남한 내 공산주의 운동조직들의 통일전선전술과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공안당국은 이 유인물 수사를 벌여 9명을 구속하고 90여명을 군대에 보냈다. 이른바 무림사건이었다.

서울대 지하운동권의 주류에서 밀려난 소수 주전파들은 밖으로 뛰쳐나가
다른 대학 학생들과 접촉해서 1981년 2월 말에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을 결성했다.
때문에 이 조직은 서울대생들이 주류가 아니었다.
최고 책임자이던 이태복도 국민대 출신이고 나중에는 성균관대학 운동권이 조직의 중추가 된다.
이 조직은 최고 의사결정기관으로 중앙위원회를 두고 산하에 대학별로, 지역별로 지부를 두었다.
물론 모두 비밀조직이었다. 그럴싸한 틀을 갖춘 반정부 비합법 지하조직인 셈이었다.
전민학련의 특징은 "사회주의적인 주장을 하지만 북한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점"이었다고 당시에 활동했던 사람들은 말했다.
북한을 정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민학련은 1981년 봄부터 서울대, 성균관대, 부산대 등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6월 들어서면서 총책임자 격인 이태복이 검거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전민학련은 특이하게 최고 지도자가 검거되면서 하부조직이 붕괴됐다.
30여명이 구속된 이 사건을 경찰은 무림과 대비해 학림이라고 이름 붙였다.

무림이든 학림이든 모두 사회주의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신시대까지의 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특히 서울대 지하서클의 주류를 이루었던 무림의 주장은
통혁당, 남민전 등 이전에 적발된 남한 내 공산혁명전위조직이나 나아가서는 북한의 남한 혁명론과 일맥 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 일반인들의 눈에는 이러한 점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반정부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은 침묵하는 사회에서 그나마 용기 있는 소수였기 때문이었다.

1981년에 대학가의 시위가 이미 좌경화 경향을 강하게 띠자 학교당국에서는
신입생들을 상대로 입학 전에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하면서 지하서클에 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전두환 정권은 대학생 입학정원을 크게 늘인 데 이어 졸업정원제를 실시한다는 이유로 정원 30%를 추가로 뽑았다.
앞으로 반정부 학생운동은 소수 엘리트의 운동이 아닌 대중운동이 될 것이었다.

김영환이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에도 서울대에서 시위를 주도하는 등의 반정부활동의 핵은
이른바 5대 가문(패밀리라고도 불렸음), 8대 가문 등으로 불리는 '중심서클'로 지하서클들이었다.
대표적인 것들로는 사회과학연구회(사과, 애플), 대학문화연구회(대문, 게이트), 흥사단아카데미, 후진국경제연구회(후경), 농법연구회 등이었다.

처음에는 조직의 이름은 이야기하지 않고 "공부하는 모임이 있는데 같이 해보자"고 권유한다.
그리고 1학년 말이나 2학년 초에 서클의 이름을 알려준다.
점조직이기 때문에 멤버들 상호 간에도 잘 모른다.
3학년 전까지는 팀별로만 안다. 전체 조직에 대해서는 모른다.
지도부는 주로 '5학년'들이 맡는다. 5학년이란 시위로 인한 구속 등 처벌을 받아 학적이 변동된 사람들이다.

고전연구회는 1970년대 중반 서울대가 관악산으로 이전하면서 생긴 본부 연합 서클이었다.
고전연구회도 처음에는 말 그대로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터텔레스 같은 사상가들의 저작이나 고전을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그런데 유신 말기부터는 반정부운동에 참여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 이형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박현재의 '민족경제론', 강만길의 '한국현대사'

해전사

'해전사'는 8 15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다.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자주적이 못 되는 민족은 반드시 사대주의자들의 득세를 가져와 민족윤리와 민족양심을 타락시키고
민족 내분을 격화시키고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며 부패와 독재를 자행하여 민중을 고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마련이다.
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러한 여건 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 조야에 호소하는 외교나 벌인 인물이며,
상해의 임시정부란 망명객들의 자치클럽에 지나지 않았다.
국내 지하에서 활동하던 박헌영의 토착 공산주의 세력은 해방 직전에는 '서클 운동 정도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다만 좌파의 여운형만이 해방을 준비한 지도자였다.
미군정의 개입이 없었다면 여운형이 지도하는 좌경화된 인민공화국이 건설되는 것이 대세였으며
이에 대해 우파는 승산이 없어서 외세에 기댄 것이었다.

송건호(한겨레신문 초대사장)에 따르면 미국도 더 이상 한국을 해방시키고 공산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준 고마운 우방국이 아니다.
미군정은 점령군으로서 일본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국 민중에 적대적으로 행정을 집행했다.
미군정은 국내의 지지를 받던 여운형의 인민공화국과 상해의 임시정부도 부정했다.
그리고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등용해 이 땅의 민족정신을 타락시키고,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미군정은 또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친일파에 특혜를 부여해 경제윤리를 파탄시키고 부패를 만연시켰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특히 용렬한 인물로 매도됐다.
이승만이 개화파에 가담한 것도 과거제도가 폐지된 것 때문이었으며,
겉으로 도덕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도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폭력과 모함 등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사람일 뿐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미군정, 악덕 친일파 모리배들과 손잡아 시대적 요구인 각종 개혁을 좌절시킨 역사적인 죄인일 뿐이었다.

송건호는 미군정이 지배하는 당시 상황에서는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세를 장악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시인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족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친일파 등이 공산주의로부터 민족을 보호하는 민족주의 담당세력처럼 됐다고 아쉬워한다.

송건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대립했던 김구나 김규식에 대해서는
정서적으로 동정하지만 정치적인 노선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구는 국제형세 오판으로, 김규식은 비민중적인 성격으로 인해 이 땅의 민족자주세력을 좌절시켰다고 가혹하게 비판한다.

송건호의 논문을 보면 해방 후 한국 역사는 자랑스러울 것이 전혀 없는 좌절과 왜곡의 연속이며
지도자들도 또한 모두 반민중적이며 반민족적인 실패한 인물들이다.
'해전사'에 실린 글들은 송건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본 학자가 쓴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자구발)은 공산주의 이론을 쉽게 풀이해 쓴 입문서였다.

민족주의와 가톨릭

'해전사' 등으로 시작한 세미나는 여름방학을 전후해서는 모리스 돕과 폴 스위지가 쓴 '자본주의 이행논쟁',
코모부치 마사키가 쓴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 등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게 된다.
이러한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신입생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혁명가로 변신하게 된다.

사회주의자가 되는 일은 한 개인의 신상에서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의 학생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별 부담 없이 사회주의자로 변신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가난은 점진적으로는 극복될 수 없었다.
기득권층이 내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힘으로 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2005년 현재에 봐서는 교조적인 이론이지만 당시에는 고교시절까지 배운 반공 교육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이론이었다.

당시 김영환 또래의 한국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배우기로는 이 세계에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협하는 공산주의 간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대결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윤리적인 대결이기도 했다.
둘 사이의 타협은 곧 부도덕한 일로 여겨졌다.
한국은 민주진영에 속한 나라였으며 미국은 민주진영의 수호자였다.
반면 공산주의 북한은 민주국가인 한국을 위협하는 집단이다.
북한이라고 하지 않고 소련의 괴뢰, 꼭두각시라는 의미에서 북괴로 불렀다.
중국도 당시에는 중국공산당이라는 의미의 중공으로 표기했다.

1979년 2월 이란혁명을 통해 탄생한 이슬람 정권은 공산주의도 아니면서 미국에 반대했다.

1978년부터 공산 베트남정권은 자국 내에서 경제적인 실권을 확보하고 있는 중국 교포들인 화교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이로 인해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1978년 말부터 국경지대인 윈난 성과 광시성 등지에서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그러다가 1979년 2월 17일 중공은 베트남을 전면침공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베트남군이 매우 잘 싸웠다. 중공은 다음 달에 전쟁 종료를 선언하고 병력을 철수했다.
베트남도 휴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중공은 4만 병력을 잃었다.

이란혁명과 중국-베트남 전쟁을 통해 김영환은 민족주의가
미국의 민주주의나 소련의 공산주의보다 위대한 이념이요 자산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포이어바하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자본론' 전 3권을 잘 소화한 강의도 포이어바흐에 대하여 정통하는 것만큼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입장을 잘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의 문턱에서 고민하던 김영환으로서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일거에 무력화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책(기독교의 본질)을 고른 것이었다.
마르크스보다 더 마르크스주의적인 책을 읽고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성주의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건

김영환이 신입생이 되던 1982년 3월 1980년대 운동권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터졌다.
바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사건)이었다.
광주항쟁이 진행되는 동안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연합사 소속 병력의 광주시위 진압에 동의하고
전두환의 집권을 지원하고 인정했다며 부산의 대학생들이 부산에 있는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그리고 1982년에는 전국적으로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태에 대한 항의가 일었다.

만약 처음부터 신입생들을 반정부시위에 동원해 그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빈발했더라면 많은 신입생들은 운동권을 외면했을 것이다.
그래서 1학기 동안에는 의식화 교육에 중점을 두고 운동권의 양적 확대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다가 2학기가 되자 운동권에서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라는 모든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잡아 시위를 벌여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구류

한 개인이 기성의 시스템에 들어가면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생각

김일성

서클의 커리큘럼을 따라가든, 본인의 경험과 사색의 결과이든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수는 없다.
당시의 전두환 체제는 너무나도 강했다.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십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판단했다.

학생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북한과 연계되거나 북한을 찬양하는 것으로 걸리는 것이었다.
당시는 정부의 공식 표현도 북한이 아니라 북괴였다.

김영환은 하느님도 자신의 이성으로 옳다고 판단한 연후에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이였다.
정부가 아무런 자료제시 없이 북한을 비난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2. 갈등

대중화

'문제를 느낄 줄 아는 학생'이 '문제 학생'으로 되어 버린 오늘, 국민의 신성한 병역의무를 학생처벌에 도용한 '지도휴학'

서울대는 우리 땅

수세식 변기의 사용법을 모르는 학생들이 많아 학교당국이 화장실에 수세식 변기 사용법을 써 붙이던 때였다.

1970년대 대학생들은 학교 배지를 가슴에 붙이고 다녔다.
자랑이기도 했고 프라이드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신 말기부터는 배지를 다는 행위가 사라졌다.
가장 큰 이유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잦아지다 보니 경찰이 배지를 달고 다니는 학생들을 검문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거리에서 대학생처럼 보이기만 해도 경찰들은 검문을 하고 가방을 뒤졌다.

축제 때에는 학교에 짭새가 더 많이 들어올 뿐이었다.
평소에는 구호 소리만 나도 전경이 타격하지만 축제 때만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돌아도 전경이 즉각 타격하지는 않았다.

대중이 혁명에 나서는 것은 소수의 혁명가들이 제시하는 사상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즉 혁명가의 무기는 사상이다.

특별히 지하서클 멤버가 아니더라도 학생들 대부분의 의식은 운동권이나 다름없었다.

한미일 삼각 안보체제

1983년 5월 김영삼 씨가 단식했다.
김영삼은 전두환 정권의 출범 이후 줄곧 가택연금 상태였다.
그런데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5월 18일부터 2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김영삼의 단식 이전까지 많은 학생들은 광주문제에 대해 잘 몰랐다.

당시에 운동권이 김영삼의 단식에 즉각적인 동조를 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당시의 운동권에서는 이미 김영삼은 보수정치인이라는 인식이 심어져 있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운동권이 거물 보수정치인과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나서기는 껄끄러운 일이었다.

김영삼은 1979년 부마사태 등을 촉발시켰었다.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소속 KAL007기가 부주의로 소련의 영공을 비행하다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이 사고로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소련은 순수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만든 나라이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선진국인 소련이 어떻게 민간항공기를 격추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가.
대다수의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의 수행원들이 국부인 아웅산 장군의 묘역을 참배하는 동안
천장에 설치된 원격조종 폭탄이 터져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 17명의 고위인사가 사망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행사장에 늦게 도착해 화를 면했다.
미얀마 당국의 조사결과 이 사건은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1965년 6월의 한일협정 조인은 한미 상호방위조약(1953), 미일 안보조약(1960)과 함께 한미일 관계를 구체적인 삼각관계로 진행한 계기가 된다.
그리고 미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안보가 취약한 한국의 방어를 일본에 분담케 하면서 일본의 재무장을 용인했다는 논리다.

남민전

남민전이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약자이다.
남민전은 남한의 공산혁명 지하조직이다.
1979년 10 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직전에 적발됐다.
당시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발생한 반정부시위사태인 이른바 '부마사태' 등으로 시국이 혼란스러워
이 또한 민주화운동에 대한 용공조작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남한 내 전위당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이다.
북한은 한민전이 남한에서 활동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없다.
그러나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한민전이 실제로 있다고 믿기도 한다.

북한은 "북조선을 혁명기지로 인정하고 그것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끊임없이 강화하는 것과 함께
남조선 인민들의 혁명투쟁을 지원하여 남조선혁명을 완수하고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며
전국적으로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원칙적 입장"을 강조했다.

남민전이 유럽에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수배됐던 인물이 바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 유명한 홍세화였다.

경찰은 남민전이 한국 사회를 특권층(장성 고급공무원), 재벌, 자본가, 중산층(의사, 변호사, 교수, 자유업, 건축설계사, 세무사, 계리사, 약사),
서민층(상인, 영세기업인, 노동자, 외판원, 수금원, 교사, 사무원, 일용근로자), 농민, 실업자 등 7개 층으로 구분했다고 발표했다.
당면 투쟁 계획으로 중산층까지를 부르주아 계급으로 규정 짓고 이들을 제거함으로써 계급혁명을 성취시키려 했다고 발표했다.

현재 고위 공직에 있는 82학번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한다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생경한 이념이나 용어에 매몰돼 치열한 토론만 벌이는 데에 심각한 반성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새삼 중요하게 떠오른 혁명운동의 사례가 바로 남민전이었다.
과거의 프로 혁명가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4학년 초가 되면 웬만한 운동권 학생들은 남민전 공소장을 달달 외우는 정도가 됐다."

이처럼 1980년대 초반부터 서울대 운동권 내부에서 친북의 토양은 이미 마련돼 있었다.

MC와 MT

시위의 결행여부는 지하서클들의 연합체로 형성된 지도부를 이끄는 '포'가 최종 결정한다.
앞서 무림사건 때에 설명했듯이 이 '포' 시스템은 서울대 지하서클 운영의 전통이었다.

기능적 운동관이란 4.19, 5.18 등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맞추어 스케줄에 따라 시위를 계획하고 징역 가고 하는 것만 반복하는 것이었다.

MC는 주류를 뜻하는 Main Current의 약자로 그동안 서울대 운동권의 주류를 이끌어온 그룹이다.
이 그룹은 전통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MT는 민투의 약자를 영어로 쓴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역시 주류를 뜻하는 Main Trend의 두문자라는 설도 있다.
MT는 레닌주의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MC는 포 시스템 등 전통방식을 따랐다.
반면 MT는 뭔가 새로운 단일 조직을 만들어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자는 것이었다.
MT는 레닌주의에 입각한 강화된 혁명운동을 추구했다.
MT는 보다 급진적이었다.
MC는 학원자율화만 주장하자고 햇고, MT는 군사독재타도를 앞세우자고 했다.

MT의 대두는 MC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MT의 지적은 운동권 학생이 수천명을 헤아리는 상황에서
MC가 고집하는 이러한 포의 독재체제가 과연 다수의 뜻을 담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4.19때처럼 기념일마다 데모를 해서 정권에 학생들이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만족했다면
이제는 거대한 운동권을 가지고 뭔가 더 큰 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게 MT의 시각이었다.

황정하 군 사망사건은 서울대 운동권에서 MT가 우세를 차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MC, MT 간의 분파 갈등은 점차 심화됐다.
사상적인 비판을 넘어서서 정보도 공유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시위도 따로 했다.
심지어 상대진영의 조직원 명단을 경찰에 넘겼다는 주장도 나왔다.
학생운동권 하부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분파주의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구로동

서울대 운동권의 각 서클은 2학년 말이면 자리배치를 한다.
운동권에서 인정을 받으면 단대나 과의 시스템(체계)에서 일하게 된다.
지하서클 멤버들을 중심으로 선배들이 언더책임자와 오픈 영역에서의 학생회장 등을 정해준다.
언더는 단대 책임자와 서클 책임자 등으로 갈리는데 단대 책임자들이 체계를 만든다.
대체로 과책임자는 3학년, 단대 책임자는 4학년이 한다.
운동권 학새들이 어린이회장이라고 부르는 총학생회장 등 오픈 영역은 별 볼일 없는 직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대체로 합법, 반합법, 비합법의 세 가지 차원에서 전개된다.
이를 서울대에 적용하면 합법조직은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총학생회이다.
반합법조직은 총학생회에 속해 있으면서 위법적인 투쟁을 지도하는 각종 투쟁위원회이다.
비합법조직은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고 공개조직인 학생회를 배후 조종하는 지하의 실세들이다.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하의 비합법 조직이다.
총학생회장이 반정부시위를 이끌다 구속되면 다시 지명하면 된다.
그러나 지하지도부가 무너지면 공개조직인 총학생회의 활동노선을 정해줄 수 없고 대다수 학생들을 반체제 투쟁 전선에 세울 수 없다.
사회주의 혁명이론에 정통한 이론가나 조직가, 학생활동을 전반적으로 조종하는 전략전술에 능한 인물들은 철저하게 지하에 숨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원칙은 반정부 투쟁이나 사회주의 운동에는 유용할지는 몰라도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능멸하는 행위엿다.

한국의 대학생운동에서 야학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학생들이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야학은 처음에는 노동자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검정고시 야학이었다.
그러나 공장의 어린 근로자들을 대학생들이 가르쳐 봐야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그럴 경우 야학이란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한 근로자들을 공부시킨다고 고생만 시키는 꼴이 됐다.
그래서 야학들이 많이 시도한 것이 생활야학이었다.
입시공부를 가르치지 않고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입시를 준비하는 검정고시야학에서는 국정교과서가 교재로 쓰이지만
생활야학에서는 야학교사들이 만든 역사에 대한 것들이 쓰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이나 노동운동 방법을 가르치는 '노동야학'으로 변화발전했다.
교재도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운동의 방법에 대한 것들이 동원됐다.

대학자율화

1984년 정부의 대학자율화 조치는 서울대 학생운동권에 근본적인 변화를 촉진했다.
물론 집회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비난하는 구호가 나오거나 반정부시위로 발전하면 문밖에 대기하던 전투경찰이 진입했다.
하지만 학내에서 경찰에 쫓기고 잡혀가며 시위를 벌이던 시절과는 달랐다.

1주일간 합숙하면서 하루에 3시간도 안 자고 공부에 토론을 거듭했다.
하루에 12시간 책 읽고, 세미나 준비하고, 식사하고, 바로 세미나 토론하는 게 일과였다.
원래는 밤 12시에 자고 아침 6시에 일어나는 것이었지만 대개는 새벽 3시까지 토론이었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는 공장 취직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농담으로 "농활 6학점, 공활 6학점을 따야 졸업시킨다"는 말을 하곤 했다.
6학점이란 한 과목이 대개는 3학점이니까 최소한 두 번씩은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깃발

대학자율화조치로 인해 서울대 운동권에 초래된 가장 중요한 점은
대학에 경찰이 들어오지 못하므로 더 이상 지하서클처럼 비밀스러운 조직활동은 점차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서클은 이제 서서히 무너지고 과와 단과대학으로 학생운동의 중심이 바뀌어가게 된 것이다.

대학자율화 조치로 인해 학생들의 시위나 집회가 활발해지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었지만
자칫하면 뚜렷한 목표를 찾지 못하고 무력하게 시들고 말 수도 있다.

김영삼, 김대중 씨 등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하면서 전두환 정권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반정부의 핵은 그동안의 학생들로부터 양 김씨를 축으로 하는 정치인들로 옮겨가고 있었다.

학생들은 깃발을 영어로 플래그라고 불렀다.
깃발에 반대되는 이론을 가진 그룹을 안티플래그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안티플라그 치약 광고에 나온 여배우가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이를 가는 장면이 있었다.
이를 본떠 깃발에 반대하는 그룹을 '뽀드득'이라고 불렀다.
깃발은 영어 flag가 개구리의 frog와 비슷하기 때문에 '개구리'로 불렸다.
당시 서울대운동권은 깃발의 '개구리'와 이에 반대하는 '뽀드득'으로 갈렸던 셈이다.

라디오 방송

마르크스나 레닌 노선에 따른 운동은 국제적인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빈민을 위한 노력을 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근본적으로 서울대의 정통사회주의 운동권에서는 북한이 과연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1984년만 해도 북한에서는 한국이 수재를 당하자 상당량의 쌀을 보내주었다.

소련과 중국은 같은 공산주의 국가이면서도 오히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보다 더 심하게 상호 간에 비난전을 벌이고 있엇다.

당시 서울대 운동권에서는 볼셰비키혁명이 한국 사회주의 혁명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혁명으로 세워진 소련과 문화혁명 등으로 미화된 중국공산당 간의 중단 없는 비난전을 듣게 되자
소련식, 중국식 공산혁명에 대한 김영환의 열정은 차갑게 식어들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사상이나 이론 그리고 혁명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3. 혁신

예속과 함성

단재 신채호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독립운동가로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기도 했다.
그는 1925년부터는 무정부주의 투쟁을 벌이다 붙잡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운동권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분석을 둘러싼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이 크게 일었다.
이 중 가장 크게 대립한 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주변부자본주의론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란 정통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여 자본을 관리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요모순은 국내독점자본(=파시즘)과 민중 간의 모순이다.
노동자가 임금인상이나 노동조합결성 등에 전력을 기울이는 경제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이는 광주항쟁에 대한 책임을 미국에 일정하게 물으려 하는 운동권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였다.
이에 대해 종속이론에 기초하여 한국 경제를 주변부자본주의로 보는 이론이 나왔다.
이는 한국이 일제시대의 반봉건사회에서 주변부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이론은 종속의 원인을 자본에서 찾지 않고 국제적 교환관계에서 찾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즉 정치 경제 군사적 범주로 총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국제독점자본주의, 즉 제국주의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이론을 종합해 나온 것이 예속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다.
그러면 한국 민중은 국내적으로는 파시즘과,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와 투쟁해야 한다.
'깃발'은 이러한 시각에서 제작된 문건이었다.

학생들에게는 누구를 상대로 싸우느냐 하는 점이 중요하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보면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해야 한다.
예속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보면 국내적으로는 전두환 정권과,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일본을 동시에 겨냥해야 한다.
보통의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게 그거 아니냐"는 투의 냉소적인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사실 이들 이론들이 학문적인 설득력은 거의 없다.
과학적인 사회주의를 한다는 학자들이나 운동권 학생들이 쓴 논문들이지만 엄밀한 데이터나 자료를 구사하는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단지 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미국,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기 위해 쓴 선전문건의 성격이 강했다.
운동권의 주적이 누구냐, 전두환 정권이냐 미일제국주의냐를 놓고 난삽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던져진 것이 '예속과 함성'이었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 미군정의 역할에 대해서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이미 부정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렇더라도 역사를 잘못 이끌어간 주범은 신생독립국인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 등 정치지도자였다.
미국은 다만 이승만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친일파들에게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속과 함성'은 모든 문제의 원인은 미국이라고 치고 나왔다.
1백30여쪽이나 되는 이 긴 문건은 머리말에서부터 미국을 적으로 규정했다.

1985년 9월 정부는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을 발표했을 때 미국 유학생 출신의 간첩 김성만이 '예속과 함성'을 썼다고 발표했다.

민추위

서울대에서 '깃발'을 제작한 그룹들은 혁명운동을 이끌어갈 비합법 전위조직으로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를 결성했다.

민추위의 활동과 무관하게 1985년 벽두부터는 국내에서 정치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전두환 정권은 그동안 정치활동을 금지했던 정치인 대부분을 해금했다.
이로 인해 김대중, 김영삼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야당인사들이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특히 기존의 민한당과는 달리 양 김씨의 직계부대를 모아 선명한 야당을 결성하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강경한 투쟁을 벌여나갔다.

미문화원점거

각종 시위나 점거 농성 등에 82학번들은 떼로 몰려다녔다.
해서 운동권에서는 82학번들을 두고 '똥파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1985년 5월 23일 낮 12시. 서울시내 한복판인 을지로에 있던 미국문화원에 73명의 학생들이 진입, 순식간에 문화원을 점거햇다.
이들은 '광주학살을 지원한 미국은 사죄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농성에 들어갓다.
이 사건은 대학생들의 투쟁조직인 삼민투쟁위원회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사실 대학생들이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이 알기는 하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신문의 주요 지면을 장식하며 보도된 사건도 없었다.

민족, 민주, 민중이 중심이 된다는 3민이념을 내세운 투쟁조직인 삼민투는 일반인의 뇌리에 매우 강력한 조직으로 각인됐다.
그러나 삼민투라는 것은 실체도 이념도 없는 이름뿐인 조직이었다.

그런데 운동권 학생들이 미문화원점거농성 사건을 바라보고 우려한 것은 학생들이 농성을 끝내면서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점이었다.
반미가 아니라면 미 문화원을 점거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사이에서 '반미=좌경'으로 인식되는 것을 우려해 스스로 반미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반미를 포기한 것은 반제국주의 투쟁을 혁명이론의 한 축으로 삼는 운동권에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투쟁위원장인 함운경의 설명은 다르다.
"우리는 점거를 하자마자 금방 끌려 나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점거를 하자 미국 측은 대화를 시도했다.
바로 경찰에 끌려 나가지를 않고 미 대사관 참사관이나 미 8군 고문 등과 대화를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미국인을 앞에 놓고 대화하면서 제국주의라고 비난하기가 껄끄럽게 됐다.

민추위 산하의 민투 조직책 박종운을 체포하기 위해 박종운의 후배인 박종철을 붙잡아 물고문을 하다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국민의 분노를 사 결국 전두환 정권의 몰락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킬링 필드

80년대 운동권이 과격해지는 것도 문혁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 김영환의 평가이다.

북한 원전

사람이 사대주의를 하면 머저리가 되고 민족이 사대주의를 하면 나라가 망하며 당이 사대주의를 하면 혁명과 건설을 망쳐 먹는다.

수배

반제직투론

4학년 말이 되면 운동권 학생들은 각자 신상을 정리해야 한다.
운동을 포기하는 학생들은 군대에 간다.

이론의 정점에서 실천이 나온다.

서클 해체

소수의 지하서클 멤버들은 자신들은 '인자(因者)'라고 부르고 다른 학생들은 '매스(mass)'라고 부른다.

NL

NL이론은 한국 사회의 기본 모순이 한국 민중과 미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이므로
당장 해야 할 일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공산혁명운동이 아닌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민족해방투쟁을 주장했다.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의 경우 마르크스나 레닌의 원전을 충실히 학습한 정통 사회주의 이론가라는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에
북한의 대남 적화전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미투쟁을 생경하게 앞세우는 데에는 일정한 거부감이 있었다.

NL에 대한 서울대 운동권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당시 학생들은 전했다.
이전까지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며 레닌.모택동의 이론을 달달 외우던 일은 급진주의의 과오였다.
골치 아프게 마르크스.레닌 원전을 볼 필요도 없고,
한국 사회에 대한 사회구성체 논쟁을 이해하려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다.
미국만 몰아내면 소련, 중국, 북한의 도움으로 사회주의 낙원인 인민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사실은 김일성이 1964년에 내놓은 남조선혁명론과 내용상 같은 것이었다.

공산혁명을 이끌겠다는 핵심 지도부의 학생들이야 사생결단으로 공부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회주의 이론과 독재타도에 대한 열망만을 가지고 있는 대중이었다.
이러한 학생대중은 지도부의 학생들처럼 사회주의 혁명이론에 대해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학번제 철폐한 구학련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은 1986년 3월 29일 서울대 자연대 건물 22동 404호에서 1백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해 결성됐다.
이는 김일성의 대남적화전략이 전두환 대통령을 압도한 순간이며,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한국 정부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체제 경쟁에서 첫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이후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학생운동이나 재야 운동은 주체사상에 기반해 북한을 추종하는 자세로 일관하게 된다.

과거 서울대 지하서클에서 활동하던 엘리트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전파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은 너무 어려웠다.
반면 NL, 즉 북한은 민주화됐으니 남한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통일하면 된다는 이론은 간명했다.
게다가 한국의 대학생들은 식민지 경험이 있어서 민족주의 의식이 아주 강하다.
당시까지의 학생운동은 민족이나 통일문제에 대한 제시가 없었다.

강철 시리즈

김영환은 강철이란 필명으로 1986년 2건의 강철서신, 4~5월에는 강철 시리즈 3건을 냈다.

북한이 1970년대부터 주체사상을 선전하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논리나 체계를 담은 문건은 없었다.

강철 시리즈는 북한 사람보다 더 친북한적인 내용으로 일관하면서 노골적으로 북한의 대남 전략을 전파했다.

주체사상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자주성을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역사로 본다.

분신

4월 28일 구학련 중앙위원회는 서울 의대를 점거해 전방입소를 거부하는 대규모 반미 농성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유출되자 중앙위원회는 신림사거리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변경했다.
문제는 가두시위를 벌일 경우 경찰의 진압으로 금방 해산된다는 점이었다.
시위를 지속시키려면 주동자들이 구호를 외칠 수 있도록 얼마 정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래서 이 시위를 주도하기로 돼 있던 자민투 조직원 이재호, 김세진 군이 계획한 방법은
몸에 신나를 뿌리고 경찰이 다가오지 못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시위가 벌어지자 두 학생은 신림사거리에 있는 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구호를 외쳤다.
경찰이 다가오자 두 학생은 몸에 신나를 뿌리고 라이터를 켰다.
그런데 잠시 후 두 학생의 몸에 불이 붙었다.
두 학생은 약 1주일 뒤에 사망했다.

입대를 앞둔 운동권 학생들은 손가락 발가락을 잘라서라도 미제의 용병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반미 투쟁을 벌여야 했다.

주사의 확산

김영환은 길가에서 시위가 벌어지는 것을 구경만 할 뿐 시위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지하에서 모든 지시를 하며 사실상 조직을 움직이는 최고 책임자는 혁명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최후까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면서 이론적인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복잡한 논리보다는 반미라는 것이 정서적으로 강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북한과 연합하는 연북이나 친북의 자세는 맞지만
북한의 지시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종북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당시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학생들의 생각이었다.

5.3인천사태를 계기로 대학생들은 NL로 사상 전향을 마쳤다.
그러나 당시 일반인들의 눈에는 전두환 독재정권을 타도하자는 주장, 직선제 개헌을 이루자는 주장만 보였다.

체포

김영환은 고문하는 사람들이 때리는 이유가 고통을 주어서 실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차츰 깨달았다.
이들의 속셈은 바로 김영환의 저항의지를 무력화하려는 것 같았다.

심문은 고문조와 회유조의 2개조가 각각 3명씩 교대로 한다.

안기부 최고의 그림은 북한-남파간첩-배후인물-조직-김영환(-김대중과의 연계) 등이었을 것으로 김영환은 판단했다.

종북

데모 전문가가 볼 때는 데모의 성패는 당초 시위에 참가하기로 한 사람들의 수보다는
추가로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나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 중요하다.

김영환이 볼 때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철학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만 이해하면 되지만 주체사상은 추상적인 논리 위주라서 구체성이 떨어졌다.
때문에 정확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이론이었다.
그러나 운동권에서는 주체사상을 창조적으로 연구해서 구체화시키는 분위기는 전무했다.

어머니 민가협

김영환이 11월에 구속되자 어머니는 반체제활동을 벌이다 구속된 가족들로 구성된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민가협) 활동을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87년 4월 어머닌 민가협 회장이 됐고, 10월 2일에 민가협회장을 그만두었다.


4. 환멸

반제청년동맹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던 지하조직들은 대부분 소련의 멸망과 함께 할 일이 없어져 공개적인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조직들은 소련의 멸망 후에도 할 일이 남아 있어 이전과 같은 지하 혁명 운동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혁명운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과의 호흡이다.
대중의 정서에 반하는 전술은 오히려 급진주의로 빠질 위험성이 있다.

북한 공작원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폐기된 다음에도 한국 사회에서 북한의 남조선 혁명론과 주체사상에 기반한 NL이론이
여전히 386의 이념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이처럼 분단을 해소하려는 대중의 열망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년기를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빠졌던 이념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민족민주혁명당

북한

주체사상은 수령의 무오류성을 전제로 한다.

환멸


5. 귀환

결심
결심
중국 문화혁명의 오류는 모택동을 견제할 장치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혁명놀음

엄밀하게 말해 우리나라가 미국의 식민지는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부등가 교환을 한다든지, 무역의존도가 심하다든지, 자본의 직간접 투자가 많다든지 하는 것들은
현대적인 국제관계 발전 양식의 하나로 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학생운동을 할 때, 마르크스와 벅정희 사이에 매우 중요한 유사점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을 사회발전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보았던 점이다.
마르크스나 박정희는 모두 전 인구의 80% 혹은 그 이상이 절대적인 빈곤 상태에 있었을 때 살았던 사람들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그 경제적 상태를 개선해 주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것들이 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95%는 처벌하지 않고 단지 저항 세력 탄압용으로만 쓰기 때문에 일반 대중이 이 때문에 불편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해 정치적 제약이 대중에게 절실한 문제로 다가오던 시절은 지났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적 권리가 더 신장되면 좋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대중 생활에 큰 차이를 가져오지도 않고
대중도 중요한 요구로 제기할 가능성도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더 이상 대중의 중요한 요구가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이념대립이라는 것이 인정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공산주의 운동을 벌이던 학생이나 지식인들을 처벌하려 들면 다 배우는 학생이요,
약자를 동정하는 지식인이라는 동정론이 고개를 든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몰인정하다든지 잔인하다는 비난을 듣기 십상이다.
이래서 죽기 살기로 싸우던 혁명투쟁이 몰락에 즈음해서는 치기 어린 혁명놀음으로 용서받고는 한다.

1997년 7월, 서울 종로의 한 레스토랑에서 민혁당 중앙위원회는 해체를 결의했다.

수령론 비판

그는 자신이 북한에 대해 갖고 있던 호감이 변하게 된 이유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남한의 진보운동권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북한의 태도와 정책에서 느끼는 배신감이 쌓여왔다.
둘째, 90년대 초부터 탈북자들의 증언을 비롯한 북한과 관련된 생생한 정보들이 많이 쏟아지게 됐고
이러한 생생한 정보를 기초로 북한의 실상을 보다 정확히 알게 된 때문이다.
셋째, 주체사상과 북한의 실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북한이 주체 사상의 기본원리를 전혀 지키지 않고 단지 독재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탈북자들의 정보를 기초로 다음과 같이 북한 사회를 소개했다.
첫째, 북한에선 기본적 인권이 전혀 보장되고 있지 않다.
둘째, 관료주의가 극심하다.
셋째, 부정부재가 극심하다.
넷째, 무능과 비능률로 가득 차 있다.

김영환의 북한 비판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른바 송두율식의 내재적 접근론에 의해서 북한을 바라보자는 것이었다.

김영환은 논리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최후까지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졌던 인물이다.
마지막에 북한에 가서 김일성까지 만나고 나서야 모든 기대가 무너졌다.
그러나 김영환만큼 사상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지도 않고
북한 사회에 대해 막연하게 환상을 가진 한국 사회의 주체사상 운동권은 아직도 김영환이 지적한 대로 북한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공소보류

국정원 발표에 따르면 한국에 잠입했던 간첩 진운방은 하영옥을 만난 뒤
1998년 12월 17일 남해안 충무 부근에서 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출발했다.
이 잠수정은 우리 해군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고, 진운방은 사망했다.
인양된 잠수정에서 각종 자료가 나왔다.

증인출두

북한민주화운동

김영환은 두 가지 기구를 통해 북한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하나는 북한민주화 네트워크, 다른 하나는 '시대정신'이다.

6. 에필로그

정치인과 그 측근이 아무리 새롭게 변한다 해도 지지기반을 이루는 절대 다수의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운신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노무현 후보도 '386'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결국은 지지기반의 뜻에 따른 정책을 펴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일이다.

아직도 상당수 '386'들은 대학생 때 가졌던 문제의식을 그대로 갖고 있는 듯하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파쇼정부이며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라는 인식,
모든 부는 부패나 특권과 연결된 것이며 빈부 격차는 사회주의적인 분배정책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생각 등은 지워지지 않은 상태이다

추천 비추천

22

고정닉 1

2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기 세보여도 실제로는 멘탈 약할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11/04 - -
이슈 [디시人터뷰] 라이징 스타로 인정받은 걸그룹, ‘리센느(RESCENE)’ 운영자 24/11/08 - -
AD [삼성선물]제로데이 거래후기ep2 - 장마감 5분전 승률 운영자 24/10/21 - -
AD 상금 4,000만원 상금 4,000만원 상금 4,000만원 운영자 24/07/01 - -
1829015 부동산 까페 개설하고 빨리 붇까페에서 영업해라 [1] ㅇㅇ(175.223) 18.04.24 152 0
1829014 역사를 공부하여야 조직을 지킬수있지요 ㅇㅇ(27.100) 18.04.24 41 0
1829013 붇옹산 카페 반란이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이유.txt [3] ㅇㅇ(103.10) 18.04.24 347 2
1829012 붓옹산 붖옹산 붗옹산 붘옹산 붙옹산 붚옹산 붛옹산 다 만들자 ㅇㅇ(175.223) 18.04.24 80 1
1829011 잘들 지내시는지요??? 요즘엔 마립니닼ㅋㅋㅋ [2] 駱駝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8.04.24 180 2
1829010 붇옹산 독점구도 깨지누 ㅠㅠ [1] ㅇㅇ(182.229) 18.04.24 288 2
1829009 탈붇민들 난리났네 ㅋㅋㅋ 자유주의 진형으로 ㄱ ㄱ [1] ㅇㅇ(223.38) 18.04.24 175 1
1829008 부갤병신들은 어디 가입하냐 ㅋㅋㅋ잠실깔려면 ㅇㅇ(223.38) 18.04.24 62 0
1829007 토지공개념 개헌 무산됐는데 여기 왜 이렇게 조용??? [12] ㅇㅇ(112.184) 18.04.24 1388 76
1829006 땅사서 상가건물 건축하면 돈되는거 맞냐 ?? [1] ㅇㅇ(119.192) 18.04.24 186 0
1829005 붇까페 갈기갈기 찢어지는 상황 개웃기네 [1] ㅇㅇ(175.223) 18.04.24 147 1
1829004 테리테리 ㅇㅇ(39.7) 18.04.24 87 0
1829003 요즘 공립초 수준이 연2천만원 사립초수준이랑 비슷함 ㅇㅇ(223.62) 18.04.24 96 0
1829002 직관주의자 vs 붓옹산 ㅋㅋㅋㅋㅋ [1] ㅇㅇ(223.38) 18.04.24 1613 1
1829000 붓옹산 까패는 뭐냐 ㅋㅋㅋ 시발ㅋㅋㅋㅋㅋㅋ [2] ㅇㅇ(223.38) 18.04.24 323 0
1828999 붇옹산 가지말고 빠숑 블로그나 들어가라 ㅅㅅ(218.48) 18.04.24 190 0
1828998 서울은 이제 거품이 너무 꼈지 [4] ㅇㅇ(223.33) 18.04.24 287 0
1828997 직관주의자 회원 만명만 찍으면 그때부터 날라간다 ㅇㅇ(223.38) 18.04.24 221 2
1828996 붇카페 지금 엑소더스던데.... [1] 개떵이(218.153) 18.04.24 219 2
1828994 돈없으면 사람 성격이 좆같아 집니다만 포청천(175.223) 18.04.24 179 1
1828993 수도권 저평가지역 [3] ㅇㅇ(211.36) 18.04.24 270 0
1828992 송파에 남은 재건축 얼마나 되냐 [7] ㅇㅇ(175.223) 18.04.24 329 1
1828990 부갤 찌끄레기들이 좋아하는 컨텐츠 올린다 (서울대 수석 60명 현직추적) ㅇㅇ(61.41) 18.04.24 1504 1
1828989 이해진이가 무리수를 둔거여 ㅋㅋㅋㅋㅋㅋㅋ dd(121.140) 18.04.24 216 8
1828988 # 트렌드를 선점해라 [4] ㅇㅇ(218.39) 18.04.24 148 1
1828987 배현진은 국문학과 나온거네 [4] ㅇㅇ(61.41) 18.04.24 294 0
1828986 교장이 게이인가? 88(59.5) 18.04.24 81 0
1828985 솔까 내가 카페 만들면 부갤러 3천명은 가입하겠지? 개떵이(218.153) 18.04.24 56 0
1828984 배우 손지창 오연수 부부의 빌딩 성공투자 사례 [5] 와따시와(211.118) 18.04.24 562 1
1828983 썸남에게 내머리스탈이상하냐니까 웃으며 응 이러던데 장난이죠?무슨맘이죠 ㄴㅇ(175.223) 18.04.24 49 0
1828982 잠주5 빨리 재건축해라 ㅈㅈ(223.62) 18.04.24 175 1
1828981 직관주의자 존나 빠르게 가입ㅋㅋㅋㅋㅋ [3] ㅇㅇ(182.229) 18.04.24 336 7
1828980 잠실5단지가 진짜 미래도시 축소판이랜다 [7] ㅇㅇ(223.38) 18.04.24 716 8
1828979 빠른 손절매 [4] ㅇㅇ(112.154) 18.04.24 369 9
1828978 대ㅎㅎㄱ ㅈㅎㅁ 도 남자 연예인 읍읍 있을까? [2] ㅇㅇ(218.50) 18.04.24 171 0
1828977 부갤만 봐도 부모탓 맞는데 88(59.5) 18.04.24 88 0
1828976 나중에 아들래미에게 큰절은 받으셔야죠 어르신들 개떵이(218.153) 18.04.24 87 0
1828975 잠실5단지 국제공모 아시아선수촌 설계한사람 [2] ㅇㅇ(223.38) 18.04.24 292 0
1828974 조현아랑 사는 설대의사는 안쳐맞나? 개도 금수저던데 [3] ㅇㅇ(223.62) 18.04.24 381 1
1828973 부동산 카페 홍보 (222.109) 18.04.24 111 2
1828972 젊음과 낭만이 숨쉬는 아파트 [1] ㅁㅁ(223.62) 18.04.24 260 1
1828971 대한항공 부조종사면 연봉 1옥 넘나 [1] ㄱㄱ(222.120) 18.04.24 368 0
1828970 엑스파일보면 쪼인썽이가 아모레퍼시픽사모님 읍읍나오는데 [1] ㅇㅇ(218.50) 18.04.24 384 0
1828969 대한항공 사태를 보면 민중봉기가 일어나도 놀랍지않다 [4] ㅇㅇ(210.91) 18.04.24 135 0
1828968 달빛기사단도 매크로사용 여론조작 [1] ㅇㅇ(112.154) 18.04.24 177 12
1828967 떡감용 여자 말고, 진지하게 만나는 여자한테 꼭 체크해야 될점. [2] ㅇㅇ(122.254) 18.04.24 318 5
1828966 마잭은 생각보다 메가 히트곡은 없더라구 [1] ㅇㅇ(103.10) 18.04.24 59 0
1828965 개떵이 이새끼 주사파냐? [4] ㅇㅇ(175.223) 18.04.24 167 9
1828964 '직관주의자' 자유주의 부동산 까페떴다 ㄹㄹㄹㄹ(223.62) 18.04.24 1909 5
1828961 결혼 전에 미혼 여자가 어디서 저렇게 꾸미고, 관리비용이 나오나 ㅇㅇ(1.233) 18.04.24 140 1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