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배재대학부 영문과 1회 졸업생, 최초 대한민국 1호 박사 학위 취득

ㅇㅇ(122.44) 2018.10.14 14:02:37
조회 236 추천 0 댓글 4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839dbe552d423b2d858328fb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 국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 위를 받을 때의 모습.[ 유 영익 지음 『이승만의 삶 과 꿈』에서]


한국인 첫 박사학위 100돌, 다시 보는 ‘청년 이승만’


오늘 14일은(2010.06.14) 한국인 최초의 박사학위 소유자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학위의 주인공은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 국제법과 외교사를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이 1910년 6월 14일 미국 프린스턴대 이사회를 통과했다. 그 해 7월 18일 졸업식에서 나중에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이 되는 윌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 증서를 받았다.


이승만의 나이 35세 때 일이다. 당시로 보면 매우 늦은 나이였다. 미국 유학 전 그는 20대 중·후반 시절을 한성감옥에서 보냈다. 29세 때 출옥 직후 도미, 5년 만에 조지워싱턴대 학사-하버드대 석사-프린스턴대 박사 학위를 모두 따내는 기적 같은 일을 해낸다. 이후는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이 같은 그의 청년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게 늘 따라다니는 ‘독재자 이승만’이란 꼬리표에 그밖의 모든 일은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4·19혁명으로 하야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1970∼80년대 그에 대한 평가는 주로 불명예 부분에 초점이 맞춰졌다. 90년대 후반부터 ‘이승만 다시보기’가 전개됐다. 대한민국 뿌리 찾기의 일환이었다. 그를 통해 건국 대통령으로서 그의 업적은 상당부분 재조명됐다. 요즘은 청년시절과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로 관심이 확장되고 있다.


‘박사학위 취득 100주년’을 맞아 잊혀진 그의 청년시절을 ▶감옥 ▶영어 공부 ▶유학 ▶독립외교 등 4개의 키워드로 되돌아 봤다. 그가 미국에서 단기간에 학사-석사-박사를 마친 배경에 초점을 맞췄다. ‘이승만 재조명 운동’을 주도해 온 유영익 한동대 T H Elema 석좌교수(전 연세대 석좌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 감옥


이승만은 24세 때인 1899년 1월부터 1904년 8월까지 만 5년 7개월을 한성감옥에서 보냈다.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투옥됐다. 당초 사형이 예고됐으나 결국 종신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감옥에서 사형을 예감하면서였다.


감옥은 그에게 하나의 대학이었다. 그가 5년 만에 미국에서 학사-석사-박사를 마칠 수 있었던 배경엔 감옥에서의 공부가 있었다. 『만국공법』(원제 『Handbook of International Law』, 중국어 번역본 『만국공법 요약)』), 『청일 전기(戰紀)』(중국어 원제 『청일전쟁 본말』) 두 권을 번역했다. 또 『Corea: the Hermit Nation』이란 영어 원서를 바탕으로 해서 『독립정신』이란 책을 저술했다.


모두 국제법과 외교사 관련 책들이다. 어려서 한학을 익힌데다 탁월한 영어 실력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미국 선교사들이 감옥에 넣어준 책을 가지고 공부하며 이미 상당 수준의 학식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영어 서적·잡지를 통해 얻은 새로운 정보를 ‘제국신문’ 등에 기고하기도 했다. 미국의 교육과정을 개괄 소개한 논문 ‘미국의 교육제도’(중국어 번역본) 같은 경우 붓글씨로 일일이 필사하기도 했다.


#영어 공부


이승만은 배재학당 영어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은사 서재필을 통해 서양 문명을 접했다. 배재학당에서 1학기를 마친 후엔 ‘영어 조교’로 특채됐다. 영어를 가르치며 배운 셈이다. 그만큼 습득이 빨랐다.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 연설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감옥에서도 영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한 사전’을 만들 정도였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년 말, 민영환·한규설이 그를 밀사로 발탁, 미국에 보낸 배경에는 무엇보다 탁월한 영어 실력과 감옥에서 익힌 국제정치 지식이 있었다.


그의 하버드대 시절 노트가 전해진다. 이를 유영익 교수가 하버드대 교수에게 보여주자 “동양인이 잘 틀리는 정관사, 부정관사 등도 대부분 맞는, 거의 완벽한 영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 유학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d2c8b9562bdf4cba17d2908f


하버드대 석사과정 재학 시절의 이승만(뒷줄 맨왼쪽)과 그의 급우들. 가운데 앉은 인물은 브라운대에서 초빙된 국제법 담당 객원교수 윌슨(M M Wilson). [유영익 지음『이승만의 삶과 꿈』에서]


1904년 말 이승만은 밀사로 미국을 방문한다. 한반도에선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의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과 별도로 태프트-카스라 밀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를 허용했다.


밀사 사행이 실패한 후 그는 귀국을 포기하고 유학을 택한다. 아버지의 유학 권유도 있었다. 그 역시 만일을 대비해 한국을 떠날 때 미국 선교사들이 써준 19통의 추천장을 가지고 갔다. 미국의 어느 대학이 좋은 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조지워싱턴대를 3학년에 편입한 것은 ‘배재대학’ 2년 학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하버드대 석사 1년, 프린스턴대 박사 2년 과정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프린스턴대에서 그가 주로 수강한 과목은 국제법·외교학·철학사 등이었다. 5년간 장학금으로 다녔다.


이승만의 박사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심사위원 3명으로부터 높은 평점을 받았고, 졸업 후 1912년 1월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책으로 출간됐다. 미국의 대학출판부에서 책이 나온다는 것은 논문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유 교수는 “그의 논문은 전시에 중립국 선박이 전쟁 지역에 드나들며 통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를 국제법상으로 보장하는 데 있어 미국이 끼친 영향에 관한 것”이라며 “미국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이승만이 신생 공화국 미국이 국제법 발달에 기여한 점을 살펴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 독립외교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d79dba572e2a7aca5d35cec2


헤이그 특사 이상설이 1908년 8월 초에 뉴욕을 떠나기에 앞서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외교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그의 독립외교 노선은 어떤 성과가 있었는가. 이 부분도 지금까지 저평가돼 왔다. 중국의 임시정부와 만주의 무장투쟁이 주로 평가 받았다. 의혈활동과 무장투쟁이 있었기에 외교노선도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외교가 없이 한국의 독립이 가능했을까. 요즘 새롭게 주목 받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특히 1943년의 ‘카이로 선언’이 그러하다. 미국·영국·중국의 수뇌가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공약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특별히 명시해 놓은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가 한 둘이 아닌데 왜 유독 한국만 명시했는가. 그동안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주창해서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올해 3월 출간된 『카이로 선언:대한민국 독립의 문』의 저자 정일화 박사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주창했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의 심복이었던 홉킨스가 카이로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고, 이를 루스벨트와 처칠이 약간의 수정을 한 후 완성됐다는 것이다.


유영익 교수는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그들이 알아서 한국 독립 조항을 특별히 넣었을 리는 없다.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는 상태다. 카이로 선언과 이승만의 독립외교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 앞으로의 연구 과제”라고 말했다.


[출처]

유영익 지음 『이승만의 삶과 꿈』에서

http://news.joins.com/_include/xxjava-script/set_article_section_link.js

배영대 기자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영문과 1회 졸업생 그리고 최초 대한민국 1호 박사 학위 취득 이승만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8d9ceb027c00dfb124182c3d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3611fc9a39f634ee707e2c82cbbc6c781b168910e1af88ba0a1b66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86ccbe567eda1c88041a0190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d2cce9577b66367e22485258

대한제국 시절 우남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일찌감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졸업했다.


대한제국 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공약한 1943. 11. 27. 카이로 선언의 배경에는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이었다.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초등학교 의무교육 도입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낮춘 점.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 실시.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움.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짐.


지주가 독식하고 있었던 서민은 소작농에 불과했던 한국의 토지개혁.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전쟁 초반의 패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


이승만은 재임기간 12년동안 미국으로부터 일본과 수교를 맺으라는 수 많은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일본과의 수교조건으로 대마도 반환,  식민지보상 36억불 청구 등 사실상 일본이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함으로써 그는 끝끝내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UTC+9'를 표준시로 삼은 건 1912년 1월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해방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 청산을 명분으로 동경 127도30분으로 바꿨다. 그러나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제관례를 이유로 시간대를 돌이켰다. 실제 6·25 전쟁 직후 이승만 정부에선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썼다. 동경 127도 30분 표준자오선에 따른 결정으로, 현재 북한의 것과 같다.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을 기준으로 볼 때 경도는 동경 `126도 5분~127도 5분` 사이에 위치하는데 중간값 127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도 1도당 4분 정도의 시차가 있으므로 토쿄 시간과는 약 32분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1961년 박정희가 다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는 법안을 만들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왜 일본 식민 사상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건가? 말로는 친일청산 이라고 할뿐. 생활과 표준은 일본 기준에 맞춰 살고 있는것인가.


이승만 정부의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한편 6년 의무교육제 도입과 더불어 각 급 학교를 증설하는 것과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를 부활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국민 학교 의무 교육제도를 실시하였고, 전쟁으로 잠깐 계획에 차질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만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배재대학교 등 많은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특히 1956년부터 시행된 미네소타 계획은 서울대학교의 많은 교수들에게 미국 유학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끌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1948년에 문맹률은 80%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1949년에 모든 어린이가 6년제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받도록 하는 의무교육제를 도입했다. 결과 문맹자 수는 1959년에 와서 22.1%로 낮아졌다. 


1952년 1월 18일 독도를 포함한 '이승만 라인' 설치하였다. 1954년 1월18일 이승만은 독도 한국령 표지석을 건립 하었다. 1954년 8월10일 무인도 독도에 등대불이 켜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8월10일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미리 독도에 등대를 세워놓고 미국 방문 일정에 맞춰 전세계를 향해 등대 점등식을 열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국토의 동쪽 끝 땅임을 알리는 독도 등대불! 일본에 남의 땅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 등불이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한국의 MIT’를 목표로 '인하공과대학' 설립. 

이승만은 미국의 MIT를 모방한 최고수준의 공과대학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문과를 강조해오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6 · 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하와이 교민들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 돈의 일부를 이승만에게 보내왔다. 그 학교는 독립운동 시기에 이승만이 세운 것이었다. 학교 이름을 인하(仁荷)로 한 것은 1903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인천과 그들이 정착해서 돈을 보낸 하와이에서 한 글자씩 고른 것이었다.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로 진출할 국제관계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정부 보조로 외국어대학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실업가 김흥배에 의해 한국외국어대학이 설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백두진 총리와 영어학자인 박술음 사회부장관을 통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지시했다.


......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후 행적은 논란이 될만한 건 부정할수 없지만, 대한제국 시절의 행위는 이게 팩트이다. 이승만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를 닮은 거인으로 비쳐지고 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로 추앙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지나친 친미, 종미주의 경향과 한번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당하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지난 1987년 2월 당시 배재대 졸업 동문들이 기증해 세웠다. 많은 철거 논란이 있었지만 배재대학교 측은 대학총동창회, 총학생회와 함께 지난 2008년 6월 5일 우남관 앞에 다시 동상을 세웠다.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d09ab7517c3a692ac4cfefab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84ccee552e2f2570bc4e1433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8d9cea027bee5cb292fbdf19


viewimage.php?id=25bcde31edd33da769b3d3a629df212a&no=24b0d769e1d32ca73fef8efa11d02831ff8a84a4b499fa798f2a7c827b19751e9230220136dba238e3c82a991f7c1dd77344aafc3cf433e1757f40879ceb067ef19fa75afbb2c7


.배재대학부→배재고등학당→배재중학교→배재고등학교→배재대학교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 배재고등학당 → 배재중학교 → 배재고등학교 → 배재대학교(Pai Chai University)

.흔하디 흔한 133년 전통과 역사에 빛나는 배재학당이 경영하는 배재대학교 품위.

.최고(最古) 대학에서 최고(最高) 대학으로


배재는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줄임말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배재대는 설립 당시부터 대학(PAI CHAI COLLEGE)으로 출발했다. 설립 초기부터 개방화된 전통을 이어받아 배재대는 40개 나라의 243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고 활발하게 교류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현재 74개 나라에서 유학 온 726명의 외국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1885년 8월 3일,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 영문학과 1회 졸업생이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영어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고, 은사 서재필을 통해 서양 문명을 접했다. 배재학당에서 1학기를 마친 후엔 ‘영어 조교’로 특채됐다. 1885년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을 모체로 하여 1895년 배재대학부(Pai Chai College)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영문과 106명, 국한문과 60명, 신학과 6명의 입학으로 정규 대학과정이 시작되었다.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3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주위의 유혹에 쉽게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10/21 - -
1893244 신인급들만 경기하는팀 ㅂㅅ ㅇㅇ(1.243) 19.05.03 7 0
1893243 어제 플라잉니킥만 안맞았어도 ㅠㅠ ㅇㅇ(121.159) 19.05.03 5 0
1893242 장내아나운서 발음 교정 좀 해라 ㅇㅇ(110.70) 19.05.03 27 0
1893240 아시123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후라이도 못치냐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ㅇ(211.176) 19.05.03 8 0
1893241 어린애들이 좋긴한듯 ㅇㅇ(175.223) 19.05.03 5 0
1893239 진짜 개시발이다 ㅋㅋㅋㅋㅋㅋ ㅇㅇ(118.42) 19.05.03 5 0
1893238 응 다음 창렬-민하 ㅇㅇ(112.171) 19.05.03 7 0
1893237 야채훈 슬슬 엄살1툴시절로 돌아가네 ㅇㅇ(124.53) 19.05.03 7 0
1893236 변우혁뺀시발새끼대가리박어라진짜 홍민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03 9 0
1893235 지성준은 어디잇는가ㅋㅋ ㅇㅇ(110.70) 19.05.03 7 0
1893234 아 저거 어제 오선진 타구랑 똑같네 ㅇㅇ(211.199) 19.05.03 6 0
1893233 와 ㅅㅂ ㅡㅡ ㅇㅇ(117.111) 19.05.03 4 0
1893232 왜 희플을 못치냐.. 가브(211.184) 19.05.03 7 0
1893231 야채훈은 이제 끝났다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03 42 1
1893230 아 시발 개야채 ㅡㅡ 발발이(110.70) 19.05.03 4 0
1893229 갓투 안나오냐...ㅆㅂ ㅇㅇ(118.44) 19.05.03 4 0
1893228 역시 좆병신팀 클라스 ㅋㅋㅋㅋ ㅇㅇ(58.122) 19.05.03 5 0
1893227 야채훈 시발 타격 ㅇㅇ(183.109) 19.05.03 7 0
1893226 훈놈훈놈 ㅅㅂ ㅇㅇ(58.148) 19.05.03 5 0
1893225 에휴 지성준이 났다 DJ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03 6 0
1893224 아.. ㅇㅇ(14.32) 19.05.03 7 0
1893223 아아앙 훈님ㅜㅜ 힘 떨어졋네 ㅇㅇ(211.214) 19.05.03 5 0
1893222 답없다 ㅂㅅ 새끼들 ㅇㅇ(1.243) 19.05.03 6 0
1893221 좆재훈 ㅅㅂ Oo(223.39) 19.05.03 6 0
1893220 와 시...하... ㅇㅇ(124.54) 19.05.03 5 0
1893219 아 시발 또 무득이네 ㅋㅋㅋ 초롱글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03 8 0
1893218 씨발 이걸 점수못내냐고 ㅇㅇ(117.111) 19.05.03 5 0
1893217 왜쳐ㅠㅠ ㅇㅇ(175.223) 19.05.03 5 0
1893216 .... ㅇㅇ(222.108) 19.05.03 5 0
1893215 최재훈 war은 전부 시즌 초반에 쌓아둔거 ㅇㅇ(116.33) 19.05.03 13 0
1893214 아흐 시벌 ㅇㅇ(49.161) 19.05.03 8 0
1893213 야채훈 제발 빼고 지성준 하루 써라 그냥 ㅇㅇ(1.241) 19.05.03 7 0
1893212 아시발 포-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03 5 0
1893211 응 잔루3루 ㅇㅇ(1.245) 19.05.03 5 0
189321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ㅇ(118.216) 19.05.03 7 0
1893209 야채훈 씨발아 ㅡㅡ ㅇㅇ(175.223) 19.05.03 5 0
1893208 씹야채 ㅅㅅㅅㅅㅅㅅㅅㅅ ㅇㅇ(182.225) 19.05.03 6 0
1893207 졌티끄 시발 ㅇㅇ(119.203) 19.05.03 9 0
1893206 에라이 장원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03 8 0
1893205 아시발 ㅇㅇ(211.219) 19.05.03 4 0
1893204 ㅋㅋㅋㅋ ㅇㅇ(1.243) 19.05.03 4 0
1893203 아 씨발 미친ㅋㅋㅋㅋ ㅇㅇ(117.111) 19.05.03 6 0
1893202 ㅡㅡ Jaiksudir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03 5 0
1893200 여기서 점수 못내면 오늘 진다 ㅇㅇ(121.173) 19.05.03 6 0
1893199 조타 ㅇㅇ(222.108) 19.05.03 7 0
1893198 긍정적으로 생각해라 미래는 밝다 ㅇㅇ(211.214) 19.05.03 5 0
1893197 재훈이 꼬추크네 [1] ㅇㅇ(175.223) 19.05.03 37 1
1893196 후니후니가 할땐 해주자너 믿자 ㅇㅇ(58.148) 19.05.03 6 0
1893195 강제 리빌딩중이네.신입들이 더 잘하노 ㅇㅇ(61.81) 19.05.03 10 0
1893194 믿기지 않는 이번주 선발 현황.txt [5] 로리콘콜라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9.05.03 122 11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