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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모아 버렸어.” 술에 취한 스티스니아가 소파에 축 늘어져 고백했다.
“응? 뭘 모아?” 술자리에서 처음으로 연 그녀에게 구레드가 기뻐하며 되물었다. 굳게 닫힌 그녀의 마음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구레드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털.”
“응?” 구레드는 방금까지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싸늘하게 얼어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음모 말이야. 여기에 있는 그 털.”
스티스니아가 자신과, 그리고 구레드의 사타구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 왜’라고 묻고 싶었지만 구레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구레드의 반응과 관계없이 스티스니아가 말을 이었다. 술에 취해 발음은 부정확하고 말끝은 늘어졌다.
“지금까지는 몰랐는데 말이야, 화장실이라는 데, 의외로 많이 있더라고. 그러니까 이것저것. 근데 털은 말이야, 보통 부끄럽게 생각하는 거잖아? 특히 여자의 경우는. 그런 건, 남에게 보이기 싫고 숨기기 마련인데 화장실에는 여기저기 많이 있더라고. 내가 어떻게 생각했을 거 같아?” 소파에 누운 채로 천장을 향해 팔을 뻗어 검지를 세웠다.
구레드는 침묵 대신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아, 이건 거리가 되겠구나. 협박 거리. 당신이 가지고 있는 나의 그것처럼 나도 이거로 다른 사람을 협박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나를 비난하는 건가? 구레드는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부끄럽잖아.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거잖아. 꼬부랑꼬부랑 해가지고 머리색 하고 같은 색을 가진 털이라니. 그래서 돈이나 권력이나 좀 있어 보이는 사람의 건 몰래 주머니에 챙겨놨었지.”
스티스니아의 소파 옆으로 누워있는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근데 집에 와서 내 주머니를 꺼내보니까 나는 그것들을 전부 버려버렸어. 너무 더러웠어. 그리고 너무 무서웠어. 어릴 때부터 귀족이 되고 싶어 왕정 연금술사가 된 이, 스티스니아님이 언제 화장실에서 남들 음모나 모으고 있는 신세가 되어버렸을까. 이렇게까지 추하게 타락해버린 내가 너무 무서웠어. 아, 내가 제 정신이 아니구나. 나는 미쳐버렸구나. 지금까지 남을 안 믿고 내 실력만 믿고 살아온 나인데, 내가 미쳐버렸구나. 그럼 이제 나는 살 수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웃기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나를 노예처럼 협박하는 당신 밖에 없다니.”
그녀의 마지막 말은 말보다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래도 이 일은 그만두지 않을 거야.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라잖아?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까지 왕정 연금술사로서 있을 거야.”
구레드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생각했다. 그까짓 왕정 연금술사가 뭐라고. 왕정 연금술사를 그만 둔 그녀를 자신이 거둬 자신의 동반자로 삼을 수만 있다면....... 구레드는 그녀가 가진 직책을 원망해보았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죽게 된다. 그녀의 몸이 무너지는 것보다 영혼이 황폐해져 죽을 것이다.
구레드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또 다시 겪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다행히도 던바튼 왕자인 그에게는 무엇을 할 충분한 힘이 있었다. 당장 해가 뜨면 행동하기로 구레드는 결심했다.
던바튼 왕자 구레드. 그가 생업으로서 하고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는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사치를 부리며 살 수 있는 선친 라인스릿터의 유산이 있었다. 그러나 던바튼의 유지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므로, 또한 구레드 스스로가 원했으므로 그는 자산을 투자하여 수익을 창출함은 물론이요, 던바튼 관청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거나 사회단체를 보조하고 공동체 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자리는 없지만 던바튼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구레드는 후원금과 지원금을 제공하는 추가적으로 대가로 스티스니아의 구명(求命)을 요구했다. 시장인 사쿠아, 또는 마더데몬에게는 직접 말했다가는 반발력으로 퇴짜를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먼저 관청의 관료들과 접촉했다. 일종의 뇌물을 받은 그들은 하나둘, 던바튼 시장이 스티스니아의 보직을 바꿀 환경을 조성하도록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레드가 직접 던바튼 시장과 이야기를 함으로써 스티스니아 위생 담당관은 끝이 나게 되었다. 마더데몬을 회유하는 데는 골드가, 사쿠아를 회유하는 데는 과자와 사탕이 큰 도움이 되었다.
스티스니아의 보직 해임이 결정된 날의 저녁, 구레드는 귀가한 스티스니아를 뒤로부터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대어 숨을 한껏 들이쉰 뒤 말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다른 향기가 나는 걸? 손이 많이 익으셨나보네요, 스티스니아 위생 담당관님?”
그녀는 잠깐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구레드의 품에서 빙그르 벗어났다.
“아니, 틀리셨네요. 나는 이제 위생 담당관이 아니랍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밝은 얼굴이었다.
“그럼 당신은 뭐죠?”
“발령 대기 스티스니아랍니다.”
“와우!”
구레드가 놀라는 연기를 하며 스티스니아에게 달라붙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쪼르르 빠른 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오늘 위생 담당관에서 해임된다는 사실은 이미 관청의 관료들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무슨 일이 있었어?” 구레드가 그녀를 뒤쫓으며 물었다.
“아니, 그런 거 없어. 애초에 이유 없이 임명 된 위생 담당관, 해임 될 때도 이유는 없는 거지. 그냥 변덕이야.”
“그럼 새로운 직위는 뭐로 정해진 거야?”
“몰라. 아직 미정이야. 그때까지는 휴가인 거지.”
“그래, 그럼 모처럼 예전의 우리로 돌아가 볼까.” 구레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구레드가 말하는 예전의 관계란 스티스니아가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고 있는 동안 그의 저택에서 무기력한 그녀를 일방적으로 안은 육체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의 관계는 징벌의 의미였다면 지금의 관계는 구애 행위였다.
구레드는 그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그녀에게 붙였다.
“싫어, 이러지 마!” 스티스니아는 달라붙은 구레드의 몸을 뿌리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여성 향한 남성의 힘을 감당해낼 수는 없었다.
구레드의 첫 거짓말에 스티스니아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고 있었다. 첫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것이 들통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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