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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소설인데 와 10년이나 됐네앱에서 작성

구르미엄마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03.03 0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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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아르의 월계수





젝티카의 월계수 롬페이는 모두에게 사랑 받고 종족의 미래를 책임질 거라는 기대를 받고 있던 젊은이였다. 아름답고 영롱한 푸른빛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젝티카라는 걸 증명해줬고 용모 또한 훌륭했으며 무엇보다 그 성품에 있어서는 결코 어떤 흠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선하고 완벽했다.


태초에 그는 젝티카의 월계수 페로티에로 태어났으며, 40년의 시간이 지나 1년간의 번데기를 거쳐서 젝티카의 월계수 앨람모이가 되었고, 다시 같은 과정을 거쳐서 젝티카의 월계수 롬페이가 되었다.


모두가 사랑했고 모두가 기대했기에 롬페이가 다시 번데기가 된 것은 모두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1년 동안 번데기는 그 어떤 젝티카의 번데기보다도 좋은 환경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자랐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다. 롬페이가 ‘실패’할 것이란 미래는. 왜냐하면 롬페이가 실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롬페이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확고했다.


롬페이가 고치를 벗고 우화할 날이 되자 일족의 어른들이 모두 모여서 롬페이의 우화를 지켜보게 되었다.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그 대상이 롬페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화는 고요하게 진행되었다. 고치의 한 부분에 균열이 생기고 그 사이로 롬페이를 지켜주던 액체가 흘러나왔다.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고치가 열리고 그 사이로 액체가 나오고 곧 이어 막 우화한 젝티카가 나온다. 단 하나의 잘못된 점은 고치에서 나온 액체가 붉은 색이었다는 것뿐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은 결국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작은 모두가 입을 다물었을 따름이요, 끝은 모두가 입을 다물 수 없었기 따름이라.


젝티카는 몇 번째 우화이던 간에 고치를 나온 직후에는 아기나 다름없었다.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찢어진 고치에서 기어 나온 작고 여린 붉은 색 아이는 눈도 뜨지 못한 채 떨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누군가 나서서 막 우화한 젝티카를 안고 달래줘야 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한 필수적인 절차였지만 아무도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름을 내려줘야 하는 장로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새롭게 우화한 롬페이는 젝티카의 월계수 아니아르라는 이름을 새로 받았다. 보통 젝티카가 우화를 하고 나서 며칠간은 도우미가 와서 우화한 젝티카를 도와주기 마련이었다. 며칠의 시간 동안 도우미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면 젝티카는 정상적으로 자라나 하나의 일족으로 다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아니아르에게는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우화를 거치면서 성별이 바뀌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젝티카는 성별에 크게 구애되지 않는 종족이지만 무언가 갑작스럽게 바뀌는 것은 혼란을 유발했고 성별이 바뀌었던 젝티카는 항상 고생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차별 받지 않았으며 젝티카로 인정받지 못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조금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화를 거치면서 색깔이 바뀌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푸른 빛깔의 아름다운 색채들은 젝티카의 상징이었으며 본질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그것이 바뀐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안타깝지만 젝티카에게 있어서 이것은 ‘틀린’ 것이었다.


도우미의 도움을 받지 못한 아니아르의 성장은 더뎠다. 젝티카는 보통 7일 정도의 시간을 거쳐서 성장을 한다. 그 동안 성장을 도와주는 도우미가 있는데 도우미가 없으면 젝티카의 성장은 매우 더디고 제대로 될 가능성도 높지 않았다. 도우미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처음부터 혼자 지내게 된 아니아르는 결국 14일의 시간이 걸려서야 성장을 끝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아니아르의 14일이나 걸린 성장은 제대로 되지 못했다. 도움을 받지 못한 아니아르는 결국 반쪽짜리 젝티카가 되고 말았다.


아니아르의 거울은 예전 롬페이의 모습이 전부 들어오는 거대한 거울이었다. 하지만 지금 거울에 비치는 아니아르의 모습은 거울의 반절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본디 제대로 성장했다면 예전과 비슷한 신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아르는 그 모습을 보고 절망했다. 혹시나 만약 푸른빛을 가진 채로 성별이 바뀌었을 뿐이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롬페이였으니까. 어쩌면 붉은 빛을 가졌더라도 남자였다면 도우미 정도는 받았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롬페이였으니까. 롬페이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를 가진 젝티카였다.


하지만 아니아르는 아니었다. 아니아르는 붉은 빛을 가졌고 성별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아니아르는 반쪽짜리이기까지 하다.


아니아르는 틀려버렸다, 완전히.


~


하지만 아니아르에게 가장 큰 절망을 안겨준 것은 따로 있었다. 14일 간의 성장이 끝나고 아니아르는 집을 나섰다. 성장이 끝났음을 알리고 자신이 할 일을 받기 위해서였다. 비록 반쪽짜리기에 제대로 된 일은 받을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닐지도 몰라.’


아니아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자신은 롬페이였고, 롬페이였다.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게 유일하게 아니아르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집 문을 열고 14일 만에 보는 햇빛을 마주하자 아니아르는 따사로움에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14일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햇빛을 못 받은 적은 번데기에 있었을 때 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분은 곧 곤두박질쳤다. 아니아르가 모두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아니아르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대부분 경악이었고 누군가는 경멸이었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공포를 담고 있기까지 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닐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아니아르는 애써 시선들을 무시하며 장로의 집으로 향했다. 작아진 신장으로 변한 눈높이는 어떻게든 적응했지만 작은 보폭과 느린 발걸음은 아직도 어색하기만 하다. 현저하게 걷는 속도가 줄어든 만큼 장로의 집까지 가는 길은 예전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는데 그만큼 시선에 노출되는 시간 또한 늘어났다. 아니아르에게 있어서 괴로운 시간이었다.


‘모두에게 시선을 끄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네.’


우습게도 그게 롬페이와 아니아르가 유일하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비록 그게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도 달랐지만.


~


아니아르는 일을 얻을 수 없었다. 장로는 지금은 맡길만한 일이 없다고 아니아르에게 말했지만 아니아르에게는 그 말이 ‘반쪽짜리인 붉은 색 젝티카’에게 맡길만한 일이 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나중에라도 적당한 일이 생긴다면 연락을 준다고 했지만 아니아르는 그 얘기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일이 없으면 식량을 얻을 수 없다.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이니 어느 정도는 배급해주겠지만 식량을 저장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고 혹시라도 마을에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위험해지는 건 아니아르가 될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작아져서 먹는 양이 줄었다는 게 다행인가.’


어쨌든 아니아르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먹는 양이 줄었으니 배당만으로도 배곯을 일은 없을 테고 일이 없으니 마음대로 시간 때우면서 놀 수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아르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아르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아니아르가 긍정적인 생각을 조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돌아가는 길에서 아니아르는 한 명의 젝티카 하나를 발견했다. 젝티카의 미루나무 그류페이였다. 그는 아직 아니아르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아르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처럼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류페이, 나야.”


그 말에 그류페이가 아니아르를 향해 돌아보았다. 약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채였지만 평소에도 무뚝뚝하던 그류페이니 만큼 아니아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 너도 들었을 거야. 나, 롬페이야. 지금은 아니아르지만... 하하, 많이 우습지. 붉은 빛이라니...”


“네, 들었습니다. 아니아르. 무언가 용건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아르는 당황했다. 그류페이가 무뚝뚝하긴 하지만 이렇게 다짜고짜 용건을 물을 정도는 아니었고 애초에 롬페이와 그류페이는 서로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


“어, 어? 그냥 집에 가는 중인데, 네가 보여서 인사라도 하려고... 갑자기 존댓말은 왜 해? 어색하다, 야.”


“그럼 용건은 이미 끝났군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류페이는 아니아르를 한번 훑어보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니아르는 알 수 있었다. 그류페이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동정이었으면, 경멸이었으면 참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눈빛에 담긴 의미는 너무나도 명백했기 때문에 아니아르는 참을 수 없었다.


그건 ‘무관심’이었다.


아니아르는 떠나는 그류페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류페이는 일반적인 속도로 걷고 있었지만 신장의 차이가 두 배나 나다보니 따라잡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아니아르는 숨을 헉헉대며 그류페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저, 저기 그류페이. 있잖아, 내, 내가 반쪽짜리라서 그런데, 혹시 오늘 우리 집에 와서 나 좀 진찰해 줄 수 있을까? 넌 의사잖아. 그, 내가 지금이래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 좀 그래서 그래. 도와줄 거지?”


그류페이는 무표정하게 아니아르를 바라보았다. 아니아르는 겁에 질려서 내뱉었다.


“우, 우리 친구잖아! 기억해, 나 롬페이야!”


그것은 마치 비명소리와도 같았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저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그류페이를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 적어도 희망이란 것을 가진 채로 자위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떨어트린 눈물은 다시 주을 수 없는 법.


“하지만, 당신은 아니아르죠.”


그것이 거절의 뜻을 담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해보였다. 차라리 그냥 거절할 뿐이었으면 그저 절망하기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류페이의 한마디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아르에게 너무나 큰 것을 앗아갔다. 아니아르는 롬페이가 아니다. 그냥 아니아르일 뿐이다.


아니아르는 절망했다. 그리고 롬페이를 잃었다.


~


아니아르는 그 뒤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밖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 콕 박혀있었다. 딱히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아직은 식량이 남아있다. 아니아르는 더 이상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해야 할 일 또한 없었다. 아니아르에게 더 이상 바깥에 나갈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 ‘롬페이’의 친구 몇 명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여줬다. 대부분은 위로를 하려고 시도했으며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젝티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 담긴 것은 대개 경멸과 동정, 둘 중 하나뿐이었다.


우습게도 아니아르는 그 눈빛에 대해서 크게 고통 받지 않았다.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어서 자잘한 상처에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아르는 집 안에 박혀있는 동안 책을 읽었다. 목적은 자신의 우화에 관해서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서적을 뒤져서 정보를 찾았지만 우화하면서 색깔이 바뀌었다는 사례나 정보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발견했다고 할 만한 정보는 아마도 몇 백 년을 넘지 않았을 최근 서적에서 본 ‘색깔이 없는 아이가 태어났다.’ 라는 글귀 한 줄 뿐이었다. ‘색깔이 없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써져있지 않았다.


아니아르는 지쳤다.


~


그 날 아니아르가 집을 나선 것은 단순한 변덕이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보고 싶다. 하지만 낮에 나가면 모두가 자신을 바라볼 것이다. 아니아르는 그게 싫어서, 어쩌면 두려워서 꿩 대신 닭이라고 달빛이라도 보려고 한 것이다. 밤이라고 다른 젝티카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낮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아니아르는 달이 뜨고 나서 얼마 후에 밖으로 나갔다.


“롬페이! 롬페이!”


갑작스레 들리는 자신의 전 이름에 아니아르는 크게 당황했다. 아니아르가 된 이후로 그 누구도 자신을 저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젝티카의 단풍나무 아람누리였다.


“어, 안녕. 아람누리.”


“아, 안녕, 롬페이! 어, 그, 그러니까 소식은 들었어! 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위, 위로해주고 싶은데... 말주변이 없어서 미안해.”


아니아르는 아까보다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아람누리는 자신과 같은 ‘반쪽짜리’인 여자아이이다. 그녀는 마을에서 차별을 당한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신체적인 차이 때문에 겉돌았던 아이였는데 아니아르가 롬페이일 시절에 그녀와 가끔 어울려주고 도와주곤 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람누리와 롬페이를 친구라고 할 정도로 친하게 한 것은 아니었기에 아니아르는 이렇게 아람누리가 자신을 찾아온 게 굉장히 의외였다.


“지금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야?”


“그, 그게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나 같은 애가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나오면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렸다고? 언제부터?”


“롬페이가 장로님 집에 간 다음 날부터 쭉...”


“밤에도 안돌아가고?!”


“아니, 밤에는 돌아갔어. 지금도 좀만 있다 돌아가려고 했는데 지금 롬페이가 나와서...”


“그래. 어, 고마워. 그냥 불렀으면 됐을 텐데.”


“아, 앞으로는 그렇게 할게.”


“응, 그래.”


“저기,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이만 돌아 가볼게. 호, 혹시 내일 또 와도 될까?”


“어, 물론이지.


당황해서인지 아니아르는 그녀의 눈빛에 담긴 기쁨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아니아르는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아람누리는 자신을 ‘롬페이’로 대해준 유일한 젝티카였다. 그렇게 대해준 젝티카는 가장 공정해야할 장로도, ‘롬페이’의 가장 친한 친구도 아니었다. 그건 그저 과거에 잠깐의 시간을 함께 해주었던 반쪽짜리였다.


오직 그녀 하나뿐이었다.


아니아르는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밝은 달빛이 아니아르의 눈물에 맺혔다.


~


아니아르와 아람누리의 첫 만남이 있은 뒤, 아람누리는 매일 아니아르의 집에 찾아왔다. 아니아르는 정말 아람누리가 와준 것에 대해 아람누리 앞에서 티를 내진 않았지만 굉장히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니아르는 페로티에부터 롬페이 때까지 살아온 대부분의 기간 동안 혼자 있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페로티에 시절에는 롬페이만큼 주목받지는 못했으나 선천적으로 선한 성품과 쾌활한 성격 때문에 인기가 많았고, 앨람모이였을 시절에는 뛰어난 능력으로 큰 신임을 받았다. 그렇기에 젝티카의 월계수가 외로움이라는 것을 느낀 것은 아니아르가 처음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스스로를 좀먹어가던 아니아르에게 아람누리의 등장은 구세주의 등장이나 다름없었다.


평소 아니아르는 서적들을 뒤지며 돌아갈 방법을 찾는 데에 한 숨도 자지 않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람누리가 올 때만큼은 조사를 그만두고 아람누리와 어울리곤 했다. 아람누리는 언제나 아니아르에게 호의를 갖고 대해주었으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친절함에 아니아르 또한 훌륭한 대접과 호의로 돌려주었다.


“늘 묻는 거지만, 알레이의 차 맛은 괜찮아?”


“늘 대답하는 거지만, 알레이의 차 맛은 훌륭해. 메이플의 시럽에 버금가지.”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다행이야. 메이플의 장인에게 부끄럽지 않은 차를 선보일 수 있어서.”


젝티카의 단풍나무는 언제나 누구보다 훌륭한 시럽을 만들어왔다. 그 시럽은 젝티카 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종족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반쪽짜리인 아람누리는 다른 젝티카들에게 이전의 뛰어난 맛을 재현할 수 있냐는 의문에 시달렸지만 훌륭하게 완벽한 메이플의 시럽을 만들어내면서 그 의문은 곧 사그라들었다.


알레이의 차는 과거 아니아르가 앨람모이였을 시절에 만들어낸 차로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독특하고 매혹적인 향으로 많은 젝티카에게 인기를 ‘끌었던’ 차이다.


“기쁘네, 이렇게 된 이후로는 아무도 알레이의 차를 먹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쓸쓸했는데.”


“응... 미안해.”


“아냐, 네가 미안해 할 게 뭐가 있어. 내 차 우리는 솜씨가 훌륭하지 못한 탓이지.”


물론 아니아르는 차 맛이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앨람모이나 롬페이일 시절에는 매일 알레이의 차를 마시러 수많은 젝티카가 방문했지만 아니아르가 된 이후에는 아무도 알레이의 차를 마시러 오지 않았다. 이전에 찾아온 몇몇의 젝티카들에게 대접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그들이 알레이의 차를 마시지 않은 것이 아니아르 때문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이야기였다.


“괜히 우울한 얘기를 꺼내서 미안해. 아무래도 이런 몸이 되다 보니까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드네.”


“아냐, 이해해. 그것보다 여기 선물을 가져왔어. 매일 차를 대접해주는 것에 대한 보답이야.”


아람누리가 아니아르에게 가져온 선물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메이플의 시럽이었다. 아니아르는 선물을 받고 아람누리에게 기쁘게 감사를 표했다.


“아, 고마워. 안 그래도 요즘 입이 심심했는데.”


“이번에 새로 개발한 거야. 맛을 보는 건 롬페이가 처음이야.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해.”


“새로 만들었다고? 굉장한데! 벌써 새로운 메이플의 시럽을 만들다니, 영광이야!”


오래 기다릴 것 없이 아니아르는 그 자리에서 손가락으로 시럽을 한 입 떠먹었다.


“굉장해, 역시 메이플의 장인! 네가 만들었던 시럽들을 폄하할 생각은 아니지만 이번 시럽은 예전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야!”


“정말? 다행이다. 나 말고 맛을 본 건 롬페이가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이건 정말 아껴먹어야겠는걸. 정말 고마워. 최고의 선물이야.”


“아냐, 마음껏 먹어도 돼! 롬페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만들어 줄 수 있어.”


아니아르와 아람누리는 알레이의 차와 메이플의 시럽이라는 호화로운 티타임을 즐기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마을의 상황이나 소문 같은 얘기들이 주를 이뤘고 시럽이나 차에 대한 얘기도 했다. 다만 아니아르와 관련된 소문들은 결코 이야기의 주제로 나오지 않았다.


두 젝티카의 티타임이 끝나고 창문을 보자 이미 해는 내리고 밤이 찾아왔다. 평소 아람누리는 밤이 노을이 질 쯤에 집에 돌아갔는데 오늘은 서로 얘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시간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오늘은 너무 늦었네, 이만 돌아갈게.”


이만 돌아가보겠다는 아람누리의 말에 아니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아람누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기, 늦었는데 자고 가는 건 어때? 네 집은 좀 거리가 있는 걸로 아는데.”


물론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람누리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아르는 알고 있지 않았다. 아니아르는 자신도 모르게 한 말에 당황했는데 애초에 아니아르의 집에 잠을 잘 곳은 며칠 동안 들어가지 않아 먼지가 쌓인 자신의 침실 밖에 없었기에 손님을 재우기는 무리가 있었다(심지어 아니아르의 침대는 1인용이라 두 명이 자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니아르는 아람누리가 거절해주길 빌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거절하지 않는다면 미안하지만 지금 손님을 대접하는 건 조금 무리인 것 같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람누리가 밝게 웃으면서 한 대답에 사라져버렸다.


“정말이야? 너무 좋다! 나 다른 젝티카의 집에서 자보는 건 처음이야!”


젝티카의 단풍나무 아람누리는 아직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우화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즉, 한 번도 반쪽짜리가 아니었던 시절이 없던 것이다. 아니아르는 아람누리에게 자신을 비춰보았다. 아람누리는 자신보다 오랫동안 혼자 있었을 것이다. 잠깐의 시간 동안 큰 상처를 받은 아니아르는 결코 아람누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아니아르가 되어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아람누리에게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뭐가 차별이 없다는 걸까, 뭐가 겉돌 뿐인 정도란 걸까.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여기에 명백한 차별이 있지 않은가, ‘무관심’이라는. 그것은 그류페이에게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아니아르는 취소의 말을 하지 않고 아람누리에게 그대로 미소를 돌려주었다.


~


아니아르는 아람누리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 하고 침실로 들어가서 청소를 시작했다. 아람누리는 도와준다고 했지만 손님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예의 없는 일인데다가 더욱이 침실에 먼지가 가득한 부끄러운 모습은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도와준다는 아람누리를 한사코 거절하고 집을 둘러봐도 좋다고 말한 뒤 아니아르는 침실로 들어가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는 한참이 지나서야 끝났다. 롬페이의 몸이었다면 금방 끝났을 청소를 아니아르의 몸으로 하니 과거의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거기에 더해 손님을 대접하는데 허술하게 할 수 없어 과거보다 더 신경 써서 하느라 그런 것도 있었다.


아니아르는 침실을 청소한 뒤 침대를 아람누리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평소대로 서재에서 서적들을 조사하던지 거실에서 적당히 눈을 붙이던지 할 생각이었다. 1인용 침대라는 걸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얘기였다. 그런데 청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침대는 아니아르와 아람누리 둘이서 같이 누워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컸다.


생각해보면 아람누리와 아니아르는 둘 다 반쪽짜리이니 평범한 젝티카의 침대가 큰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론 침대에 자리가 충분하다고 해서 아람누리와 같이 잠을 잘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비록 지금은 여자라 하나 한 때 남자였는데 원래부터 여자인 아람누리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큰 실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람누리, 청소가 끝났어... 어?”


아니아르는 거실로 나와서 아람누리를 불렀지만 아람누리의 대답을 들려오지 않았다. 집을 둘러보고 있나? 아니아르는 아람누리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퍽! 하고 책이 땅에 떨어지는 듯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은 서재였다. 서재에는 아람누리가 서있었는데 인상을 크게 찌푸리고 있었고 눈에는 분노가 담겨있었다. 처음 보는 아람누리의 과격한 모습에 아니아르는 조금 당황하며 아람누리를 불렀다.


“아, 아람누리? 무슨 일 있어?”


그 말에 아람누리는 흠칫 놀라더니 찌푸린 인상을 금방 피고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미안, 책을 보다가 조금 화가 나는 내용이 있어서. 서재를 어지럽혀서 미안해. 책은 내가 치울게.”


아니아르는 서재에 아람누리가 화낼만한 내용을 가진 책이 있나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큰 잘못도 아닌데다가 사과를 하는 손님에게 뭐라고 하는 것도 좀 그런지라 아니아르는 그냥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으, 응. 침실 청소는 끝났어. 지금 가서 바로 잘 수 있어.”


“응, 알았어. 나는 책을 좀 치우고 바로 갈 테니까 먼저 가있지 않을래? 도와주진 않아도 돼. 내가 어지럽힌 건 내가 치우고 싶어.”


“알았어.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빨리 와.”


“그래, 고마워.”


아니아르는 조금 걱정되었지만 강경한 아람누리의 태도에 그냥 침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뒤를 조용히 지켜보던 아람누리의 손에는 찢어진 종이 한 장이 쥐여있었는데, 관찰력이 좋은 평소의 아니아르라면 볼 수 있었겠지만 화를 냈다는 아람누리의 상태에 신경 쓰느라 보지 못했다. 아니아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람누리의 얼굴에서는 곧 표정이 사라져버렸다.


~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아람누리는 아니아르의 침실에 발을 들였다. 아람누리는 아까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침실을 둘러보고는 곧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침대가 하나뿐이네?”


“어, 미안. 원래 혼자 살던 집이라 침대가 하나 뿐이야.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나는 바깥의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


아니아르는 걱정말라는 듯이 아람누리에게 얘기했다. 하지만 아람누리는 오히려 더 당황한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아, 아냐! 내가 손님인데 어떻게 집 주인을 그렇게 내쫓겠어. 내가 소파에서 잘게.”


“무슨 소리야. 나한테 손님을 소파에서 재우라고 하는 얘기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편하게 침대에서 자.”


둘은 계속 누가 침대에서 자느냐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서로 주고받기만을 하니 끝나지 않는 실랑이였다. 결국 아람누리는 소파에서 자는 걸 포기하고 절충안을 내놓았다.


“침대에서 둘이 같이 자자고?”


“응. 어차피 침대도 충분히 커서 둘이 자도 문제는 없어 보이고.”


아니아르는 그 말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 그치만 나는 원래 남자였는데? 지금 내 몸이 여자라곤 하지만 같이 자는 건 좀 그런 거 아닐까 싶은데...”


“후훗, 무슨 소리야. 이제 여자인데 그런 건 별 상관없잖아. 게다가 우리 둘 다 반쪽짜리인데 뭘 그렇게 걱정해?”


“그건 그렇지만...”


얼마 안 가서 아니아르는 결국 아람누리의 제안에 따르게 되었다. 아람누리의 제안이 타당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계속 얘기하다가는 대화가 안 끝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아람누리와 아니아르는 침대에 같이 누웠다. 두 명이 누웠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의 자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둘의 작은 몸에 비해서 너무 큰 베게가 불편할 텐데도 아람누리는 계속해서 아니아르를 향해 웃어주었다. 아니아르는 처음 여자와 같이 자는 이런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붉어진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


아람누리는 그 후로도 가끔 아니아르의 집에서 잠을 자고 갔다. 처음에는 갑자기 잠을 자게 된 거라서 같은 베개를 썼지만 다음부터 아람누리는 자신의 베개와 자는데 필요한 도구들을 가져왔다.


원래 집에서만 틀어박혀있던 아니아르는 아람누리와 만난 후로는 종종 같이 외출을 하곤 했다. 물론 아니아르는 아직 다른 젝티카들의 시선을 받을 용기가 없었기에 외출을 하는 것은 달빛이 비치고 있을 때뿐이었다.


아니아르는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다. 아람누리와 만나서 하루를 보내고 가끔 밤에 외출을 하고 가끔 같이 잠에 드는 그런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단 1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생활이었다. 롬페이는 항상 외출을 했고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해주었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생활이라서 가끔은 과거에 자신이 그랬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기도 했다.


사실 자신은 지금까지 지독한 악몽을 꿨던 것이 아닐까.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의 얘기가 아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겼던, 즐겁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였다. 몹시도 행복한 꿈을 꾼 것 같았다. 그것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기에 그 꿈은 가장 끔찍한 악몽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됐다.


~


아니아르의 고정된 생활의 균열이 생긴 것은 아니아르가 아니아르가 된 지 2개월하고 반이 지났을 때였다. 평소처럼 아니아르의 집에 방문한 아람누리가 장로의 편지를 가져온 것이었다.


“어젯밤에... 갑자기 장로님이 찾아오셔서 부탁하고 가셨어. 그, 내가 롬페이의 집에 들른다는 걸 알았나 봐. 무리도 아니지. 그렇게 자주 왔다 갔다 했으니까.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응, 그래 고마워.”


아니아르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에는 간단한 용건만이 써져 있었다. 일이었다. 이전에 받지 못한 일을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써져 있지 않았고 다음 날 장로의 집으로 오면 알려주겠다고 써져있었다.


“다행이네, 롬페이. 드디어 일이 생겼네!”


“응, 그래 고마워.”


하지만 아니아르의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불길함이 가득했다. 과연 이런 몸에게 주는 일이 정상적인 일일까? 지나친 피해망상일지도 몰랐지만 아니아르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 상황이라면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겠지만, 일이 배정된 이후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주쳐야 할지도 모른다. 배정된 일을 하지 않으면 지금 받는 적은 양의 배급조차 받을 수 없다. 아니아르는 애써 웃으며 아람누리와 평소처럼 시간을 보냈지만 아람누리 역시 아니아르의 불안함을 깨달은 듯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롬페이. 별 일 없을 거야.


아니아르는 애써 지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 날 아람누리는 아니아르의 집에서 자지 못했다. 아니아르는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고 아람누리는 순순히 응했다. 그러나 아니아르는 밤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고 그렇다고 무언가 제대로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냥 자는 것도 깬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불안해했을 뿐이다.


다음 날, 날이 밝는 대로 아니아르는 준비를 끝내고 장로의 집으로 향했다. 아직 일과를 시작한 젝티카는 많지 않았기에 이전만큼 많은 시선을 받진 않았지만 밤만큼은 아니었기에 약간의 시선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아니아르는 그 약간의 시선에도 강한 불편함을 느꼈다.















정확히 10년 전에 쓴 소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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