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제의식은 이렇다.
이것은 하나의 메타포이다. 그러니까 요는 이렇다. 나를 포함해 나의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뭉치가 길을 걷고 있다.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는 자연스럽고 어쩔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다(다시말해 피투적이다). 문제는 어디로 걸어가야하느냐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자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틀렸다. 나는 그 주장에서 힘의 논리, 위반과 에로티즘의 원리를 읽는다. 나는 ‘천국의 문’으로 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좋은 것이니까.) 그런데 내가 보기에 무리가 향하는 방향은 천국의 문과 어긋난 방향이다. 내가 이쪽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제각기 떠들며 깔깔거리거나 유튜브 보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길을 안다고 자처하는(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몇명이 앞장서서 무리를 이끈다. 그런데 저들끼리도 지시하는 방향이 다르다. 심지어 더 나쁜 것은, 이 무리의 움직임은 저들의 지시를 듣기보다도(영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자체의 관성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때로 덩어리 내부에서 사람들 간 충돌 사고가 있는데, 그 충격이 일파만파 퍼져 무리의 거시적인 움직임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나는 지금 무리가 향하는 방향은 천국의 문이 아닌 죽음의 골짜기이며, 종말이 도사리는 길임을 알고 있다(즉 그렇다고 믿고 있다). 나는 그들의 경로를 틀어 천국의 문으로 향하도록 해야하는데, 나는 목소리가 작기에, 그리고 내 입은 하나기에 저들 하나하나에게 내가 말하는 방향으로 가자고 설득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내 말솜씨를 갈고닦아 유창한 언변을 터득해 그들이 내 말을 따르도록 달콤한 목소리로 유혹하거나, 저들 앞에서 재롱을 피우고 광대짓을 하고 아름다움을 꾸며내서 그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시선을 사로잡아 내가 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그게 정답으로 보이도록 꾸며내는 일뿐이다. (그런데 내 방향이 정답이라는 건 절대적 근거가 없으며 내 관점이요 믿음일 뿐이다. 우리한텐 지도가 주어져있지 않다.) 이것은 정의라는 유령의 부름이다.
여기서 선택의 문제가 나온다. 저 무리를 버리고 떨어져 나와 나 홀로 천국의 문으로 향할 것인가?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 아니, 그래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질문을 바꾸자. 그러는 것이 의미가 있나? 천국의 문은 나 혼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무리에서 떨어져나옴과 동시에 천국의 문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함께이기에 들어갈 수 있는 문 아닌가? (물론 나는 천국의 문에 이르지 못했으니 이 질문의 답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건 비판이 아닌 순수한 의문이다. 심지어 나는 천국의 문의 존재 유무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믿고 있을 뿐이다)
혹은 나 혼자라도 천국의 문 앞까지 도달해서, 거기까지 가는 경로를 계산하고, 지도를 만들어서, 다시 무리로 돌아와 이들을 거기로 가도록 설득하거나 유혹해야하는가?
예수는 없으니 나는 대심문관이라도 되어야하지 않겠나? 사실 예수 그 자신도 일종의 대심문관 아니겠는가? 그는 무리가 조금이나마 천국의 문과 가까워지도록 무리를 움직인 것일지도 모른다.
무리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눈먼 사공에게, 지도가 없는 사공에게, 멍청한 사공에게 조타를 맡길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람들의 몸에 가려 바깥이 보이지 않으니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게으름과 불성실에 대한 변명은 아닌가? 사람들을 헤집고 나오기 싫어(한편으론 사람들을 밀쳐내는 실례를 저지르기 싫다는 이유로, 한편으론 자기가 속한 무리의 온기와 젖어있는 환상에서 빠져나오기 싫다는 이유로) 길을 찾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것 아닌가? 도파민 샤워 속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죽음의 골짜기에 도달하기 전에 개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해 무리에서 이탈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둥의 태도 아닌가?(그게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천국의 문에 도달해야만 하지 않겠나? 그것이 좋은 일이니까. 나에게든, 우리에게든. (당연히 도파민보다도 좋은 것이다. 천국의 문은 순수히 좋은 것이나, 도파민은 좋은 것이라고 정의하기엔 의문이 있다)
내게 문제는 첫째로 천국의 문은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천국의 문에 이를 수 있는가이며. 둘째로 어떻게 이 무리를 천국의 문으로 이끌 수 있느냐다. 우리 레밍쥐들의 길 모르는 앞잡이들과 관성과 무관심에 맞서서 말이다.
이 큰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무리에서 좀 떨어져있는 이탈자들의 문제나 헛소리를 떠들어대는 앞잡이들을 칼로 찔러버려도 될지에 관해서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앞잡이들 또한 자기가 정의의 대변인이요,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라고 믿는다. (사실 내 지위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내 외침이 정의 그 자체가 아닌 유령의 목소리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너 자신을 알라’의 상태에 있는 이가 그러지 못한 이보다 신뢰할 만한 것 아니겠는가?
아마 내 말에 무리의 방향을 바꿀 힘을,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 일, 혹은 그들이 혹할만한 이야기를 연출하는 수사를 갈고닦는 일, 혹은 무리 자체에 대한, 이 현대라는 시대에 대한 세밀한 형상과 내부 장기들을 파악하여 작동 원리를 통찰하고 이를 내 말에 반영하는 일일 것이다.
폭력의 문제도 대두된다. 받아들이는 자의 기준에서 폭력인가? 그러나 집단에 파묻혀 있으려는 존재는 아이에 불과한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화를 내는 어른을 보자. 아이의 의지에 반해서 어른이 아이를 가로막는 행위는 아이의 눈에서 폭력이다. 그러나 어른이 아이에게 가하는 건 폭력으로 보일지라도 때로는 폭력을 넘어선 훈육이고 사랑이다. 그러니까 힘을 가하는 행동의 근본적 원리가 증오가 아니라 사랑에 기반한다면 힘을 가하는 행동은 정당화될만한 것 아닌가?
물론 ‘잘못’은 ‘어른’을 자처하는 자의 눈에서 잘못이며 이는 은밀히 일방적으로 권력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논리를 정당화하는 엘리트주의적인 발상이기도 하다. 당연히 ‘훈육’에 선행되어야하는 것은 ‘아이’와의 대화일 것이다. (또한 그것이 사랑이다.) 의지를 묵살하는 폭력은 최후의 순번으로 밀어놓아야 한다. 다만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힘을 행사하는 것 자체는 필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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