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천사님!
나, 강림!
귀여움, 확정!
1.
사이렌 소리 때문에 눈을 떴다. 휴대폰은 미친듯이 재난경보를 울려대고 있었다. 다급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출현. 시민 여러분께서는.......
무언가에 방해받은 듯 방송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실제 상황? 그러면 별 수 있나. 장애인인 나는 대피도 못하고 죽겠군.
냉소하면서 일어나는데 감각이 이상했다. 분명 존재하지 않아야 할 다리의 존재가 느껴졌다. 환상통? 많이 겪어봐서 아는데 그런 게 아니다.
이불을 팍 날리며 일어난다. 두 다리가 멀쩡하다. 그런데 몸의 다른 부분이 멀쩡하지 않다.
살짝 나온 가슴? 긴 은발?
그리고 아랫도리가 허전한데.......
나는 황급히 일어나 원룸 화장실로 향했다. 다행히 정전이나 단수는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어?
내 게임 캐릭터와 똑 닮은 소녀였다.
"뭐, 뭐야?"
은발 벽안.
사심이 잔뜩 담긴 '천사'의 외모.
프릴프릴한 흰 원피스(형상변환한 갑옷이다) 뒤로 순백의 날개가 펼쳐져 있다. 파닥거려 보면 원래 신체의 일부인 듯이 자연스럽다.
심지어 목에는 컨셉용 물고기 목걸이까지.
그게 무슨 컨셉이냐고? 이 캐릭터의 이름은 라파엘라. 그리고 라파엘라의 상징은 물고기.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나는 RP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왜 하필 라파엘라냐고? 그야 죽은 누나의 세례명이니까!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죽은 누나 세례명을 캐릭터명으로 지은덴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가톨릭 교리상으론 말도 안 되지만, 어릴 땐 착하게 살다 죽은 사람이 천사가 되는줄 알았다.
그래서, 어린이의 동심과 소망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누나가 하느님 곁에서 천사가 되어 살길 바라며.
지금은 냉담했지만.
"상태창...?"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상태창을 말해 본다. 진짜 될지 몰랐는데 눈 앞에 정보가 몇 개 떠오른다.
[상태창]
레벨 47 라파엘라
직업레벨 43(사제)
종족레벨 4(하프 셀레스티얼)
성향: 중립/선(42/100)
능력치
근력 277 내구 248 민첩 151
마력 5 신성 532 신비 224
...
이거 현실인가?
클리셰대로 볼을 쫙 잡아당겨 본다. 아픈진 모르겠는데 말랑하고 쫀득하다.
말랑말랑...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굉장히 귀엽다. 이게 지금 내 몸인 것만 빼면!
"어... 꿈은 아닌 거 같은데."
나는 가볍게 손을 내밀면서 주문을 외워 본다. 신성 주문 같은 것도 진짜 쓸 수 있나 궁금해서.
"빛이시여."
손 위에 진짜 치유의 빛이 생겨난다. 어떻게 했는지 자세힌 몰라도, 원래 알던 지식처럼 자연스럽게 주문이 시전된다.
...
이게 다 뭔 일이지.
나는 13년 된 노가다 망겜 RPG의 고인물.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게임 지옥에 갇힌 걸까?
아니, 현실 도피를 하면 안 된다.
뭔 일인지 몰라도 지금 상황은 확실하다.
(1) 대한민국엔 난리가 났다.
(2) 나는 어째선지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3) 그럼 이 상황에 해야 될 일은?
정답: 생존!
하지만 생존이 정답이라곤 해도, 나는 딱히 생존주의자 같은 건 아니고.
만약에 진짜 이 몸이 하프 셀레스티얼의 것이라면, 식량이나 식수도 딱히 필요하지 않다.
종족레벨 패널티를 감수하며 하프 셀레스티얼을 고른 보람이 있군. 직업레벨은 떨어져도 종특이 워낙 우월하니까.
허기, 갈증, 피로 없음. 질병과 독 면역.
높은 주문 저항과 각종 내성, 방어력 추가.
신성과 신비에 스탯 보너스.
암흑 시야와 투명한 적에 대한 명중 보정.
마자막으로 하루에 한 번 천사 소환권.
아니 잠깐!
종특 이전에 식량과 식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 사제였지.
"빛이시여, 저희에게 은혜로운 양식을 내려 주시고, 여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그러자 빛이 있었다.
빛은 은혜로운 양식이... 그러니까 물고기 모양 생크림 케이크와 흰우유가 되었다!
...인게임에서 내가 착용한 '물빵' 스킨. 설마 이런 것까지 적용되는 거야?
당황하며 생크림을 찍어먹어 본다. 식사가 필요없는 몸일 텐데도 달콤하고 맛있다.
"어... 어......."
이쯤되니 좀 무섭다. 이거 개꿀잼 몰카인가?
"빛의 이름으로 간구하오니, 미천한 종을 보다 거룩하게 하소서."
버프도 된다.
전투 중에 외우기엔 주문이 좀 길지만, 사제를 성기사급으로 싸우게 해주는 개사기 버프.
거룩한 힘.
"으... 아?"
이정도면 대충 마법만 써도 싸울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럼 생존 대신 사람들을 구하러 다녀야 하나?
라파엘라는 착한 천사니까!
귀여운 천사 라파엘라! 초절정 미소녀 라파엘라!
중립 선 RP! 중립 성향은 가끔 바뀌어도 선성향은 항상 100 고정이었다!
게임과 현실도 구분 못하냐 할 수 있겠지만, 분명.
누나라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내게 이 게임 캐릭터의 이름으로만 남은 누나.
*
"어......."
사람을 구할 생각으로 나왔는데, 바깥은 지독한 안개 속에 있다.
그 뭐야, 왠지 사이비 말을 잘 듣고 마트 안에 있어야 할 듯한 영화. 그런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
...원룸으로 돌아가야 하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군대가 와서 괴물을 와다닥?
하자만 여기는 대한민국! 미군이 아니라 국군이 온다구요.
장애인이었던 나는 군대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그리 믿음직한 집단은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주변을 살펴보는데 눈이 마주친다.
남자.
멀쩡하게 생긴, 키도 좀 큰, 그래서 왠지 짜증나는 남자.
나이는 스물둘? 스물넷? 잘 모르겠네. 이 원룸 이웃인 모양이지.
"저기요."
"네, 네?"
"무슨 상황인지 아세요?"
"아, 아뇨. 그나저나 한국어......."
"아 이거. 저 원래 한국인이고. 남자예요. 일어나 보니까 이렇게 돼 있던데요."
남자의 눈빛이 묘해졌다. 나는 귀엽고 깜찍한 라파엘라 모드로 인사했다!
"라파엘라예요!"
"그, 김민형입니다. 원래는 한국인이셨다고......."
"이제부턴 라파엘라니까요!"
"...어어, 세계 랭킹 2위?"
민형이란 남자의 눈빛이 더 묘해졌다. 게임 캐릭터가 되더니 괴몰입하는 폐인을 보는 눈빛?
사회적 생명이 경각에 달한 나는 초대형탈룰라를 시전했다! 참고로 기술명은 원래 붙여서 쓴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장애인이었어서요. 복지사 분 없이는 일상생활이 힘들다보니... 게임에 좀 과몰입하게 되더라고요."
라파엘라의 초대형탈룰라! 효과는 굉장했다!
민형(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역으로 본인의 사회적 라이프가 0이 될뻔한 민형이 뒷수습을 시도했다. 만화라면 삐질삐질이 효과음으로 붙지 않을까?
"그, 제가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이게 그런 의도가 아니라......."
"괜찮아요!"
"그래도 죄송......."
"라파엘라는 천사니까요!"
"...?"
아.
아아-
모두가 상처뿐인 세계의 완성인가.
게임 캐릭터에 과몰입하는 폐인과, 탈룰라 때문에 비난할 수 없는 정상인.
크흑.
나는 방금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학생이신 거예요?"
"예. 요 앞 대학교를 다닙니다. 그럼 라파엘라님은 직업이?"
"어느 쪽 직업이요? 제 직업은 사제인데."
"..."
우왓!
다시 나왔다! 게임폐인을 보는 정상인의 경멸 가득한 눈빛!
그렇지만 지금은 게임이 리얼라이프가 되어버렸다구!
"게임에서의 능력을 쓸 수 있는 모양이라. 이쪽 직업도 알아둘 필요가 있잖아요? 현생에서라면 소설가입니다."
"아, 소설가요."
뭐냐.
저 '이상한 사람이더니 역시 예술충이었어'와 '소설가라니 직업이 있을줄은 몰랐군'이 교차하는 눈빛은!
라파엘라는 귀엽잖아요? 좀 더 귀여워해줘야 한다구요.
나는 속으로만 투덜대며 민형에게 묻는다.
"참, 민형 씨도 게임 했어요?"
"네. 확인해봤는데 저도 상태창... 아니 이게 지금 왜 떠. 아무튼 보이더군요. 저는 투사입니다."
"...투사? 444요?"
참고로 444란 건 투사 캐릭터의 별명이다.
마력 4 신성 4 신비 4. 투사의 기본 스탯.
마력을 제외한 모든 스탯이 필요한 사제와 달리, 그야말로 근내민에 몰빵하는 근육덩어리!
근육뇌!
으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
민형은 대책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아니 이런 상황에 무슨... 에휴, 됐습니다. 겉모습이 멀쩡하시니까 더 황당하네요."
"멀쩡 정도가 아니라구요! 라파엘라는 천사니까! 초절정 미소녀! 동네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고고한 나르시시스트 미소녀!"
"..."
역시 외모가 좋긴 좋다.
지금의 천사 같은 외형이 아니었으면, 컨셉질 작작하라며 욕먹었겠지.
아니면 초대형탈룰라 덕에 억지로 배려 받거나.
지금은?
장난스러운 분위기긴 하지만 민형이 은근슬쩍 내 시선을 피한다. 아무래도 라파엘라는 초절정 미소녀니까.
파릇파릇한 남자애가 함부로 눈맞추긴 부담스럽겠지. 이 외모로 진짜 소녀인 척했으면... 으흐흐.
재밌을 거 같긴 한데 실행은 못할 거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현실감을 얻기 위해 라파엘라 RP라도 하는 중이라서.
민형은 대충 내 행동을 납득했는지 말한다.
"알겠습니다. 각자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른 거겠죠. 저랑은 달리 모습까지 변하신 모양이니."
"네. 아마 장애 때문 아닐까요? 장애가 있는 몸으론 싸울 수 없으니까. 사제의 주문은 24시간이 지난 상처에는 효과가 없잖아요?"
"음.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사실 지금도 뭐가 뭔지......."
"웹소설에 자주 나오는 상황 아니에요? 게이트! 아포칼립스! 게임 능력 각성!"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원룸 건물 내부를 살펴봤다. 그러고보니 내부가 죽은듯 고요했다.
나는 불안해져서 민형에게 말한다.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다니요."
"바깥에 나와본 사람이 저희뿐인 게. 그럼 다른 이웃 분들은......."
"설마?"
"확인해보죠."
나는 민형과 함께 원룸 건물로 들어가 101호의 문을 두드린다.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잠깐, 눈빛교환.
결단을 내린 민형이 힘으로 문짝을 뜯어낸다. 각성한 신체능력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모양이다.
뜯겨나간 문짝이 덜컹, 하고 떨어진다. 내부는 고요하고 싸늘하다.
죽음처럼.
2.
독거노인인 듯한 이웃이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귀를 심장에 대니 박동이 들리지 않았다.
"돌아가신... 건가요?"
민형이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라파엘라 컨셉질을 할 순 없다.
나는 노인의 피부를 짚으며 진지하게 답한다.
"의사가 아니니 정확힌 모르겠어요. 하지만 심장이 뛰지 않네요. 몸도 차갑고요. 고통의 흔적은 전혀 없으니, 꼭... 질소 중독 같아요."
"아......."
"이 안개의 구성성분이, 평범한 사람에겐 고농도의 질소처럼 작용할지도 모르겠어요. 저희는 각성자... 네, 각성자라 할게요. 각성자라 멀쩡하고요."
라파엘라가 했다기엔 너무 T스러운 대답이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공감능력을 발휘하기보단 움직여야 할 때다. 파릇파릇한 민형 씨는 솔직히 슬슬 한계인 듯하고.
대학생 남자애치곤 꽤나 현실적인 성격 아닌가 싶다. 보통 이런 상황에 특별한 힘이 생기면 좋아하지 않나?
아니, 내가 너무 게임 폐인 소설가 기준으로 생각하는 건가.
나는 조용하게 민형을 부른다.
"민형 씨."
"네."
"물은 아직 나오나요? 전기는 들어오는데요."
화장실로 향한 민형이 수도를 튼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나오면서 챙긴 스마트폰 화면을 본다. 역시 신호가 터지지 않는다. 그런데 배터리가 72퍼센트에서 멈춘 그대로였다.
단순히 자주 확인하지 않아서? 그건 아니다. 한동안 꽤 오래 뒤적였으니까 1퍼센트 정도는 닳았어야 한다.
이 공간자체가 이상하다. 상식적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단순히 단수, 정전이 없는 정도의 문제가 아닐 거다.
나는 민형을 다시 한 번 부른다.
"민형 씨."
"예."
"이 안개, 아무래도 이상하네요. 통신은 안 터지는데 수도랑 전기는 멀쩡하고. 아까부터 휴대폰 배터리가 전혀 닳지 않았어요. 지금부터는 상식을 좀 내려놓아야 할지도 몰라요."
"...알겠습니다."
"너무 긴장하진 마시구요. 아마 생존자... 그러니까 각성자는 저희뿐일 것 같고. 좀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일단 이웃 분들의 장례부터 치러 드리죠."
"그래도 될까요?"
"사실 확신은 없어요. 그렇지만 인간의 존엄이란 게 있으니까."
"..."
"안개 바깥도 불안정한 상황인 듯하니, 저희 선에서라도 이분들을 배웅해드려야 할 거 같아요."
민형은... 민형의 표정이 사뭇 굳는다. 좀 엉뚱하게도 나는 우스운 상상을 해버린다.
'이 인간 왜 은근 상식적이야' 같은 반응을 기대했는데. 고인을 앞에 두고 그걸 기대하는 시점에서 상식인은 아닌가?
아무튼 좋다. 나는 멀쩡한 척하는 법은 잘 알고 있다. 돌아가신 분의 시신 앞에 앉아 가볍게 기도한다. 그냥 알고 있는 기도 중 상황에 맞을 만한 것을 골라, 살짝 바꿔서.
"언제나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오늘 이 세상을 떠난 이웃을 기억하시어, 사탄의 손에 넘기지 마시고, 거룩한 천사들에게 고향 낙원으로 데려가게 하소서.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녀되어 살았사오니, 지옥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기도를 마친 나는 어두운 수건 한 장을 가져와 시신의 얼굴을 덮는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까. 민형을 살짝 돌아보니 그가 묻는다.
"크리스천이신가요?"
"글쎄요. 냉담 중이긴 한데, 표할줄 아는 예의가 이것뿐이라서요."
"..."
어쨌든, 외형만은 천사인 소녀가 시신앞에서 기도하는 것.
그럭저럭 거룩한 인상은 심어줬을 것이다. 아마 편안해질 법한 모습이기도 했겠지. 민형의 표정이 조금 풀린 걸 느낀다.
그가 내게 조심스레 묻는다.
"부모님이 걱정되진 않으십니까?"
"어... 저는 두 분 다 돌아가셔서."
...
잠깐, 침묵.
아니 저희 분위기 좋았잖아요!
이번 건 맹세코 내가 의도한 탈룰라가 아니다!
그러나 일단 탈룰라가 되어버린 이상 끝까지 말해야 한다! 괜히 애매한 함정 포인트를 남겨두긴 싫으니까!
"저... 사고였어요. 가족여행이었는데, 부모님이랑 누나가... 저는 장애를 얻은 몸이 됐구요."
...
분위기가 무슨 장례식장처럼 변했다. 민형은 아주 진지하면서도 곤란한 듯한 얼굴이다. 그걸 보니 더 말하기 두렵지만 그래도 끝은 내야지.
"오래 전 일이라 이젠 괜찮아요. 좋든 싫든... 그 사고가 저라는 사람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애증 같은 기억이죠."
민형은 뭔가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공감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려 애쓴다.
사실 별로 괜찮진 않다. 잘려나간 다리의 환상통은 계속 나를 괴롭혔고, 피투성이가 된 누나의 시체는 아직도 종종 악몽에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라파엘라니까.
어쩌면 대한민국의 희망일지도 모르는! 절세가련 미소녀 라파엘라!
최강 사제 라파엘라!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괜찮은 척을 해야만 했다.
민형을 위해서도.
*
시신들을 수습하고 매장하는 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그사이 나에 대한 민형의 인상이 많이 변한 모양이었다.
마이페이스 컨셉충에서, 진지할 때는 진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민형을 배려한 연기다. 나는 친사회적인 마이페이스 컨셉충이거든.
누나가 아닌 사람이 얼마나 죽든, 딱히 내 알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곁에 있는 산 자를 위해 고인에게 예의를 표한다.
오랫 동안,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라파엘라라는 캐릭터는, 뭐랄까.
그런 내가 만들어낸 이상이다.
정답지가 뭔지 고민하지 않아도, 항상 올바른 일을 해내는 고고하고 아름다운 영웅.
나처럼 사회성을 시뮬레이트할 필요가 없는 천사.
이제 그 안에 들어가버린 게 나였지만.
나는 상념을 끝내고 묻는다.
"민형 씨, 배고프죠?"
"괜찮... 아니, 좀 고프네요."
"그쵸. 라파엘라는 미소녀라 화장실도 안 가고 밥도 안 먹어도 되지만, 민형 씨는 아니니까요."
"..."
이정도 농담을 할 여력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내 판단이 잘못된 걸까? 민형은 좀 지친 듯한 눈빛을 한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나는 주문을 외운다. 라파엘라 특제 물빵을 만들어내는 주문.
"빛이시여, 저희에게 은혜로운 양식을 내려 주시고, 여기 모인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오늘 하루 종일 천주교식 기도를 하고, 바로 이교의 신에게 기도하니 좀 멋쩍긴 한데. 둘이 은근 비슷하니까. 주문 번역도 천주교 스타일로 됐고.
아무튼 물빵이 나온다. 상콤하고 귀여운 물고기 모양 케이크와 흰우유.
라파엘라랑 잘 어울리지 않나요? 그야 물고기니까!
물고기!
성 라파엘의 상징!
신성으로 된 1회용 접시와 포크까지 나오는 배려심 넘치는 주문!
물론 천사의 상징인 것과는 상관 없이, 인게임에서 피로 회복 효과가 있으니 민형에게 주는 거다.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라구.
상식적인 척을 잘하는 사람.
물빵을 받아든 민형이 잠깐 주저하다 먹었다. 디저트 취향이 아닌지 뭐랄까, 너무 달다는 표정이었지만.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상황이긴 하지. 나는 민형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묻는다.
"민형 씨?"
"예."
"같이 기도하실래요?"
"..."
우리는 원룸 바로 앞의 공터에 시신을 매장했다. 거기 너머는 안개가 너무 짙어 나가기가 망설여졌으니.
원래는 다른 건물이 있던 장소인데 우리 원룸을 빼면 싹 다 사라져 있더라.
조금 머뭇거리던 민형이 내 곁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둘이서 함께 만든 작은 공동묘지를 본다.
기껏해야, 시체를 파묻고 주문으로 만든 꽃 한송이를 두었을 뿐이지만. 신원은 모두 확인해뒀으니 사태가 진정된 다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민형에게 조심히 말한다.
"특정 종교에 거부감이 있으시다면, 굳이 안 하셔도 돼요."
"아뇨, 아닙니다. 그런 건 없어요. 다만 잘 모르다보니......."
"그러면... 이건 호칭기도라고 하는 거거든요. 원래부터 장례식 때 하는 건데, 뭔가 종교적인 의미라기보단 그냥 예의라 생각해주세요. 제가 아는 예의가 이것뿐이라."
"알겠습니다."
나는 민형에게 기도의 대략적인 형식을 알려준다. 그다음 민형의 스마트폰에 기도문 내용을 적어주고.
민형이 준비 됐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선창하고 민형의 답사가 이어진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모 마리아와 삼대 천사와 세례자 요한과 성 요셉... 열두 사도와 순교자와 성스러운 선조와 많은 성인들.......
그토록 많은 이들의 이름을 거쳐 기도의 끝에 도달한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기도를 마치고 나자 민형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다. 그는 멋쩍은지 갑작스런 말을 하며 분위기를 돌린다.
"이렇게 긴 기도를, 외우고 계시네요."
"아, 완전 외운 건 아니고. 빼먹은 성인도 많을 거예요. 원래는 꽤 독실한 집안이었다보니......."
가정사가 언급되자 민형은 정말로 눈물을 보인다. 당황스러운 반응이지만 그럴 법하다.
지금 내 모습은 정말로 사랑스러운 미소녀 라파엘라. 본모습이 어쨌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그냥 천사미소녀일 뿐이다.
그런 미소녀가 가족도 없이 살면서, 죽은 이웃을 위해 예를 다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좀 감동적으로 비치긴 하겠지.
아니면 거룩하거나.
나는 딱히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다 라파엘라의 외모빨이야.
암암.
거룩한 미소녀 라파엘라!
진짜 천사님! 옆집 천사님!
하지만 옆집 천사님처럼 내조타락시킬 능력은 없어! 장애인의 소수자성을 주장하겠다! 다리 없었음! 가사 능력 무!
불쌍한 미소녀 라파엘라!
불쌍한 천사미소녀는 집안일따윈 안 한다네!
*
그렇게 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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