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좀 인기 많은 책인데 걍 볼만은 한듯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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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던 책이지만, 또 그냥 좋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책이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일단은 확실히 학술적으로 진지한 책이다. 인터넷 밈 및 인터넷 환경을 다루는 연구는 꽤나 뻔하고 피상적이거나, 단순한 민족지학에 가까운 듯한 것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인터넷에 대한 연구가 그리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지도 않되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골치 아픈 구설수만 늘어날 주제가 한가득이면서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탓이 클 테다. (예를 들어, Loss 밈의 은밀한 내부자 유머는 단순히 밈 이미지나 텍스트만 봐서는 이해하기 힘들 수준에 그 해석에 있어서도 곁가지만 살짝 건드리며 정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구체적인 밈의 분석보다는, 좀 더 큰 틀에서 이런 밈의 발생 및 수용이 매체 이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만한지를 다양하게 제시하는 쪽을 택했다.
그 방향성이 좋은 이유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뻔하지 않으면서 일반인들도 흥미롭게 접할 수 있는 요소 위주로 인터넷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인터넷 골수 유저가 아니더라도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웃긴짤모음.jpg나 릴스/숏츠 등은 한두 번쯤 눌러보는 시대에 이 밈들은 이따금 시대를 막론하고 수면 위로 부상하곤 한다. 20년 전에 유행했던 인터넷 밈(개죽이, 심영 등)이 너무나 멀어 오히려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환경이며, 글 짤림 방지->짤방->짤이라는 흐름이나 합성필수요소의-샘플링의 '죽은 목소리 부두술'을 연상시키는-기이함을 모르는 이들이라도 인터넷이라는 신매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통해 그 편린을 살짝 엿볼 수 있게 해주니 말이다. 구술문화의 결여로 비어 있는 맥락을 보충하기 위해 텍스트를 이미지에 추가하는 '짤'의 포맷을 논한다거나, 엽기와 병맛이라는 다소 괴상했던 인터넷 문화가 어떻게 '온전하게' 수용되었는지를 설명한다거나, 흥미로운 주제가 상당히 많다.
반면 그럼에도 시시한 부분들이 꽤나 있다. 짤과 움짤이 어떤 뚜렷한 원작자 없이 밈으로 고정되며 인터넷 환경의 새로운 언어 역할을 하는 것-이를테면, 일종의 이모티콘처럼-을 논하는 것은 좋지만, 이를 위해 베르그송 식의 일종의 사유화된 시간, 기존 맥락으로부터 낚아챈 상황주의적 뉘앙스를 덧붙이는 것은 대중서를 위한 이론적 억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싱하형"의 말을 실제 이소룡이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애초에 그 이미지가 이소룡의 이미지라는 것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이는 그보다는 조금 더 정치적이고 소위 '혐오적' 밈, 노무현, 박원순 등의 사례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라는 식의 메타적인 빨간약 드립이야말로 그 낚아챔의 정치성, 그리고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재미를 위한 초연함을 드러내는 좋은 예시일 테니.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주의자가 한국-홍콩 합작 영화를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로 탈바꿈해 한국에서 원작자를 처벌한 이야기와 개구리 페페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울리는 감이 있다)
또한 개인적인 이유를 짚고 가자면, 한국 인터넷 밈의 지형도에서 너무 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가 있다는 것이 다소 아쉽다. 한국 인터넷 밈은 사실 영미권 인터넷 밈보다는 일본 인터넷 밈과 좀 더 유사한 감이 있으며(이미지+텍스트라는 영미 밈의 일상적인 형태는 10년대 초반 이후 모습을 감췄다), 보다 피상적이고 일반적인 밈만을 다루고 저 심층에서 그 밈이 '퇴물'이 되기 전에 밈의 몸체를 만들어냈던 엔진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다른 어느 나라의 인터넷 환경보다도 역동적이고 깊고 특이한 한국 인터넷 밈의 현장을 직시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영역을 '혐오'와 '비하'로부터 표백시키는 방식으로는 더더욱.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현대 인터넷 남초 밈에 대한 분석이 외려 4챈 같은 미국 인터넷을 다루는 앤절라 네이글 著 <인싸를 죽여라> 인용보다 얕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자로서 하는 말에 가깝고, 사실 이 영역을 보다 더 넓은 영역의 인터넷 밈을 다루는 대중서에서 굳이 더 깊게 들어가기보다는 일반적인 '일베'론 등에 적당히 편승하는 편이 좋았으리라 생각하긴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든 생각은, 아무래도 낡은 매체 철학은 인터넷이라는 최신 매체를 다루기에는 너무 낡았다는 것이리라.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여러 인쇄매체 및 영화 관련 이론은 현대 한국 인터넷 환경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 한국 인터넷이 미국 인터넷보다 '좀 더' 나아갔기 때문이리라 생각하는데, 아마 한국의 집단주의적인 성향과 유서 깊은 인터넷/PC 보급률이 서로 합쳐지며 빚어진 기이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영미권에서 이제야 막 유행이 되기 시작한 shitposting/뻘글론은 한국 인터넷에서는 한참 전에 지나간 담론이며, 이미지+텍스트 포맷은 주작용이 아니라면 오히려 유치하게 보이는 판국에, 최근 들어 대두되는 저능아 밈에 대응될 만한 것은 동북아권 밖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언젠가 좀 더 성숙한 인터넷 원주민 이론가들이 나와 아이러니에서 시작해 아이러니로 끝나는, 무한한 카니발이 이어지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 세상, 한국 인터넷 매체의 핵심 밈을 설명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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