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삶을 바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시절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법이다. 시간이 지난 뒤에, 한 발짝 물러서서 다시금 생각해 보면, 그건 참 서글픈 일이다. 그 누군가가 지금은 없다는 것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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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말기, 진(晉)나라에 예양이라는 이름의 선비가 살고 있었다. 당시 진나라는 육경(六卿)이라고 불리는, 여섯 개의 가문이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내분을 벌이고 있었다.
춘추오패라 불리던 진 문공의 시대도 저문 지 오래로, 과거의 영화는 아스라히 사라졌으나, 그럼에도 망한 부잣집조차 삼대는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옛적의 부귀와 성가는 껍데기만 남았으나 그마저도 가히 열국의 제후들을 능할 정도였으니, 이를 손에 넣기 위한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을지는 가히 짐작을 할 수 있으리라.
예양은 식객으로 진나라를 돌아다니며, 많은 가문을 섬겼다. 처음에는 범씨를 섬겼으나, 범씨의 범길역이 그를 알아주지 않자 이내 발걸음을 중항씨의 문중으로 옮겼다. 그러나 중항씨의 중항인 역시 예양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 그럼에 예양이 지씨를 섬기고자 다시 몸을 움직였다. 지씨의 지백은 예양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심복으로 등용했다. 그제야 선비는 주인을 섬겼다.
지씨는 힘을 크게 일으켜 한씨, 위씨, 그리고 조씨를 상대했다. 조씨의 조양자가 군사를 이끌고 지백을 치니 이내 지씨는 무너지고 지백은 전사했다. 그의 일족 역시 몰살당했다. 진나라는 한나라, 위나라, 그리고 조나라의 삼진(三晉)으로 갈라졌다.
조양자는 지백의 머리를 베고 그 수급을 취한 뒤 가마솥에 넣어 오랜 시간을 삶았다. 마침내 피륙이 골상에서 떨어지자, 그는 지백의 두개골에 황금을 두르고 옻칠을 발라 술잔으로 삼았다. 하여 그러니 예양이 조양자에게 원한을 품었다.
예양은 사로잡힌 포로로 분장해 조양자의 집으로 잠입했다. 그다음에는, 집안의 노비와 옷을 갈아입고 변소의 벽을 고치는 시늉을 하였다. 조양자 역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먹고 마시고 자며, 싸야 했다. 예양은 바로 그 시간을 노렸다.
조양자 역시 범인(凡人)은 아니었다. 못 보던 얼굴의 노비가 수상한 낌새를 보이고 있으니 그는 즉시 청지기와 호위를 불러 추포하게 했다. 그래서 예양이 붙잡혔다. 가신들이 말렸으나, 조양자는 그를 풀어주었다. 그의 충을 높이 사서였다.
집으로 돌아온 예양은 양잿물을 삼키고 얼굴에 옻을 칠했다. 그리하여 목소리는 쩍쩍 갈라지고, 얼굴은 울긋불긋하게 돋아오르니, 누가 보아도 거렁뱅이였다. 그의 아내조차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자, 그제야 예양은 안심하며 길을 나섰다.
조양자가 진나라를 멸하고 조나라를 세우자, 그 도읍을 한단으로 정했다. 새 도읍에는 언제나 건물들이 새로이 지어졌다. 옥(屋)과 당(堂)의 대들보가 일어서고, 저(邸)와 청(廳)의 주춧돌이 누웠다. 들이 있으면 길이 났고, 골이 있으면 다리를 드렸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새로이 지어진 다리가 있어, 새로이 조의 국군이 된 조양자가 그 다리를 가장 먼저 지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조양자는 교각에 발을 올리지 않았다. 가신이 조심스레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불길하구나."
과연 그는 범인이 아닌지라, 하인과 군병을 시켜 주위를 샅샅이 뒤져보니, 다리 밑에 예양이 시체로 분해 숨어있었다. 가슴팍에는 날카로운 보검을 한 자루 품고 있었다. 아내도 알아보지 못한 얼굴을, 조양자는 알아보았다.
조양자가 물었다. "나는 일전에 너를 한번 풀어준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되니 참으로 놀라울 지경이다. 너는 이전에 범씨와 중항씨를 섬기지 않았느냐. 지백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범부였는데, 왜 너는 그를 위해서만 이렇게 깊은 원한을 품고 나를 해하려 하느냐."
이에 예양이 대답했다. 士爲知己者死. 선비는 스스로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이에 조양자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예자(豫子)라 칭송하였다. 그를 죽일 수밖에 없음에 슬퍼하자, 예양이 오히려 이렇게 답했다. "그럼으로써 공은 내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소. 그러나 오늘 공과 신 중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따름이니, 내가 공의 옷자락이나마 베고 죽는다면 지백께 부끄러울 일은 없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조양자는 겉옷을 벗어 예양에게 내렸다. 그러자 예양이 크게 기뻐하며 그 옷을 크게 한번 베고, 이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양자가 애석해하며 그의 가솔을 극진히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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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방이 한 고조에게 머리를 숙였고, 운장과 익덕이 한 소열제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하후복파는 죽을 때까지 조가를 섬겼으며 육군실은 송 소제와 함께 애산에서 명을 달리했다. 감히 이르니, 선비가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그들은 기뻤을 것이다.
그러니 오카자키에게 야마모토 역시 그랬을 것이다. "난 아마 야마모토의 인생에서 조연이 되기 위해 태어난 거라고 생각해." 인간은 조연으로 살기 위해 빚어지지 않았다. 조연으로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오카자키는 바로 그 길을 선택했다.
그럼으로 오카자키는 기뻤을 것이다. 이를 의심한 사람은 오직 야마모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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