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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을 위해 그냥 다 긁어왔다

ㅇㅇ(180.182) 2021.11.21 09:3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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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에 장 뤽 고다르는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이었던) 샤를 테송과의 대담 끝자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을 보면서 자동차에 앉아 있는 한 커플만으로도 두 시간짜리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늘 이 사실을 하나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의 “교훈”을 자동차의 질료성에 있어 영화 작가들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해, 로베르토 로셀리니 이후의 자동차의 계보를 한 번 간략하게 그려보자. 다만 이 때의 자동차란 과속과 충돌의 운동을 야기해 화면을 감각적 포화상태로 이끄는 영화적 물체라기보다는 영화로 하여금 좌표와 좌표 사이의 틈새,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곤 하는 이 비장소를 횡단하고 떠돌고 심지어는 표류하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스스로를 성립할 수 있도록 하는 작은 영화적 (비)장소라 해야 한다. 한 가지 (이제는 적잖이 진부한) 인용, 철학자 질 들뢰즈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그가 시간-이미지라 이름 붙인) 현대 영화를 “세계 내의 어떤 용인할 수 없는 용인할 수 없는 것에 충격을 받은, 그리고 사유 안에 존재하는 어떤 사유할 수 없는 것에 직면하게 된 견자(見者)”(‘시네마 2: 시간-이미지’)의 영화라 정의했을 때, 그가 그 분기점이자 사례로 떠올린 것은 틀림없이 ‘이탈리아 여행’의 주인공인 조이스 부부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창 바깥의 세계에 우글거리는 다른 리듬, 다른 이미지들을 망연히 또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광경이었을 테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째서 로셀리니에 대한 논의로 ‘시네마 2: 시간-이미지’를 시작했겠으며, 사건과 공간들을 잇는 연결선의 붕괴와, (적극적 행동이 아닌) 산책이나 여행을 통한 영화의 진행을 이전의 영화가 맞이한 위기의 징후로 꼽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로베르토 로셀리니 이후의 자동차의 계보를 이으려는 영화 작가들이란 “와중”을 영화의 영토로 삼으면서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음을 수긍하며) 그로 인한 횡단과 떠돎과 표류를 영화의 자리를 탐색하기 위한 조건으로 받아들여 현실에서의 간이적 (비)장소인 자동차를 끌어들인 이들이다.

 

물론 감독마다 각자 다른 방식, 즉 자동차의 다른 속성을 갖고서 탐색을 시작한다. 이 “교훈”을 가장 먼저 자각한 ‘네 멋대로 해라’의 장 뤽 고다르는 자동차의 벡터에서 파국의 징후를 엿본다. 이는 문명의 운명에 대한 로셀리니의 근심을 자기식으로 확장/번안한 장치이다. ‘10’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 자동차란 세계(의 이미지)를 향해 열려있는 밀실-즉 극장에 다름 아니며, ‘홀리 모터스’의 레오스 카락스에겐 운동/변신의 역량을 갖고 있는 자동기계의 모터이다. 그런가 하면 ‘아니오, 혹은 지배의 헛된 영광’의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빔 벤더스라면 과거를 향한 타임머신으로서, ‘퍼펙트 월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면 헤인즈(케빈 코스트너)의 말처럼 “미래를 향한 타임머신”으로서 자동차를 다루어 인물들을 태우거나 내리게 해 지나쳤던 곳으로 되돌아가길 꾀할 터이며, ‘자유의 이차선’의 몬티 헬만이라면 침묵과 방황을 자처하는 표류선으로서, ‘절규’의 쿠로사와 키요시라면 (스크린 프로세스를 이용해) 구체적인 벡터를 잃은 부유령으로서 자동차를 찍을 것이다. 또한 자동차는 ‘지상의 밤’의 짐 자무쉬에겐 현실성을 일그러트리는 우발적인 마주침의 장으로서, ‘크래쉬’의 데이빗 크로넨버그에겐 똘똘 뭉친 페티쉬의 반(半)자동기계로서, ‘콜래트럴’의 마이클 만에겐 정신과의 카우치로서 등장한다. 한 편 자동차와 카메라(의 시선)를 동조화한 ‘역사수업’의 스트라우브-위예 부부와 ‘남쪽’의 샹탈 아케르망은 이를 통해 제도화된 시선과 풍경에 저항하는 반-시선을 모색한다.

 

그리고 자주 간과되곤 하지만, 데이빗 린치 역시 로셀리니 이후의 자동차의 계보를 잇는 감독으로서 여기에 언급될 만 하다. ‘블루 벨벳’부터 ‘광란의 사랑’, ‘로스트 하이웨이’, ‘스트레이트 스토리’(이 경우엔 트랙터라지만 운송수단이란 점에선 마찬가지다), ‘트윈 픽스: 더 리턴’. 물론 여기에 5분 58초 동안 그저 차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I’m Waiting Here 뮤직 비디오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런데 다른 이들에 대하여 린치의 자동차는 조금 다른 사정에 처해있는데, 그의 자동차는 밀실도, 표류선도, 타임머신도, 부유령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동차 안에서 혹은 자동차가 눈에 띄는 극적 사건을 벌이는 경우도 많지 않으며, 자동차 외부의 풍경으로 눈을 돌리거나 그 외부를 자동차 내부와 동등한 위상의 미장센으로 구축하지도 않는다. 요컨대 데이빗 린치는 자동차의 물적 속성을 영화화하는 데에 큰 관심이 없다.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자동차에 크게 주목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했으리라. 다만 그는 자동차가 그리는 동선에 관심이 있는데, 그 동선이란 기괴하게도 종종 장소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황폐한 공간에 도착하거나(‘블루 벨벳’의 ’국경 밖‘의 공터, ‘로스트 하이웨이’의 사막, ‘트윈 픽스: 더 리턴’ 8화, 11화, 18화의 숲과 사막) 사고를 당하거나(‘광란의 사랑’의 반복되는 사고 현장,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폭파된 트랙터,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충돌 사고, ‘트윈 픽스: 더 리턴’ 11화의 사고들) 출발했던 곳으로 커다란 원형을 그리며 돌아가(지만 도착하지는 못하)곤 한다(‘로스트 하이웨이’의 프레드의 집,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도로 한복판, ‘트윈 픽스: 더 리턴’ 18화의 파머 일가의 집). 도착이라는 말을 애초에 알지 못하는 것만 같은 좌초의 동선들. 한 번 이 동선의 조건을 따져보자.

 

많은 이들이 종종 데이빗 린치의 구조를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이 도형의 구조에 대해 좀 더 숙고한다면 이 비유가 ‘웬만해선’ 그리 아귀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로스트 하이웨이’를 시작점으로 삼는) 후기작들의 “출발했던 곳으로 커다란 원형을 그리며 돌아가(지만 도착하지는 못하)곤” 하는 자동차의 동선을 들어 비유하는 경우, 이 때의 뫼비우스의 띠의 비유란 시작과 끝이 일치해 그 차이가 모호해지며 이야기가 관객과는 상관없이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수미상관법의 수사로 쓰이곤 하는데, 사실 이런 방식은 뫼비우스의 띠가 아닌 일반적인 띠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당장 종이 하나를 말아 그 위에 연필로 선을 그어 확인해보라! 수미상관법으로 뫼비우스의 띠의 비유를 쓰는 것엔 개별 적용 사례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도 큰 오류가 있다. 내친김에 부연하자면 일반적인 띠와 대비되는 뫼비우스의 띠의 특성이란 하나의 띠에서 서로 마주하지 않을 것 같던 복수의 면이 어떤 균열로 인해 전체적으로 하나의 면으로 성립한다는 것이며, 그 위에서 하나의 벡터가 나아갈 때, 그것은 중단 없이 복수의 면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뫼비우스의 띠의 특성은 앞엣것과는 다른 비유, 즉 두 세계의 혼종화라는 수사를 잠재하는데, 이 경우에는 (베르트 헤르조겐라트가 자크 라캉을 경유해 설명했듯) 데이빗 린치의 동선이나 플롯 구성 방식에 대한 적합한 비유로 보이기도 한다. 서로에게서 찢겨진 세계들의 아슬아슬한 조우(‘이레이저 헤드’, ‘블루 벨벳’, ‘트윈 픽스’) 혹은 서로 무언가를 공유하는 세계들의 어긋나는 평행(‘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랜드 드라이브’, ‘인랜드 엠파이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구조를 (가령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대한 ‘대중적’ 해설처럼) 그저 현실과 환상의 대위법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이러한 통속적 독해가 놓치는 것은 무엇인가? 린치의 영화에 현실이 없다는 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심의 여지 없이 자명하고 단단한 삶의 규칙이자 중심으로서의 현실(성)은 없다. 설사 그것이 존재했고 그런 위상을 갖고 있었다 한들, 린치가 끌어들이는 형식들은 거기에 수많은 구멍을 뚫으며 ‘그럴 수는 없다’고 다그친다.

 

아마도 당신은 여기서 “우스꽝스런 숭고”라는 (데이빗 린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지자인)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을 상기할 것이다. 지젝은 ‘로스트 하이웨이’에 대하여, (르네의 욕망에 대한) 프레드의 불안이 맞이한 실패가 피트의 이야기-즉 판타지를 불러들여 그것이 프레드의 이야기와 병치 되고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과장된 시청각적 이미지의 분출 속에서 결국 프레드와 마찬가지로 실패를 맞이할 때, 판타지는 현실에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의 지지물이란 사실이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상징화할 수 없는, 그래서 불안의 근원이 되는 구성적 외부로서의 실재를 판타지가 억압-이용해야지만 현실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린치가 적확하게 구조화했다는 게다. 이때 현실과 판타지를 엄격하게 구분 짓는 게 과연 가능한가? 돌아온 프레드의 “앨리스는 어딨어?”라는 물음은 이 구분의 어려움을 적확히 토로한다. 지젝의 이러한 관점은 그 자신의 비판 작업의 근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정신분석학적 영화 비평들에 큰 영향을 행사하며 다양한 변주를 가능케 했다. 하지만 나는 본문에서 저 변주들을 마냥 반복할 생각이 없다. 이러한 변주들은 결정적인 맹점을 갖고 있는데, 앞서 말했듯 린치의 영화에는 현실이 없기 때문이다. 저 변주들이 하는 말이 그거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저 말을 정말 말 그대로 읽으려 하는 것이다. ‘로스트 하이웨이’를 ‘해석’하는 비평들에서 가장 진절머리나는 부분은 피트의 이야기 속 대다수의 등장인물들이 프레드의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영화의 많은 부분을 머리 속에서 벌어지는 망상으로, 의미의 인과율 안에 ‘봉합’하려 든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망상으로 ‘봉합’되기 힘든 초과분적 존재들, 예컨대 초반부의 파티에서 프레드와 미스테리 맨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앤디나 영화 내내 프레드와 피트를 쫓는 경찰같은 캐릭터들마저 한낱 개념의 상징으로 치환해버림으로서 말하려던 바와는 달리 (현실을 소거하는 방식으로) 자꾸 판타지와 상관없는 현실(성)을 간접적으로 지시하고 만다. 어쩌면 이런 논리들은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의 한계체험과 제대로 마주하길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여기서 떠오르는 건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한 숏이다. (아직 리타라는 이름을 덮어쓰기 전인) 이름 모를 여자가 잠에 빠져있을 때 어떤 남자들이 전화를 주고받는다. “여자가 아직 행방불명이오.” “똑같아.” 이건 저 이름 모를 여자에 관한 말인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받은 남자가 건 전화는 붉은 탁상 조명 옆에 놓인 전화기를 향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전화를 받기도 전에 씬이 바뀌어, 전화벨 소리는 희미한 메아리가 되어 화면 위로 퍼져나가고, 그 속엔 방금 막 L.A. 공항에 도착한 베티가 있(어 마치 전화벨 소리에 그가 응답한 것만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과 거의 유사한 장면을 이 이후에 본다. 카밀라를 쫓아낸 이후 -하지만 디제지스 내 시간상에서도 그 이후에 펼쳐진 일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슬픔과 분노의 뒤엉킴 속에서 다이앤이 격렬히 자위를 한다.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거칠게, 격렬히 자위하던 다이앤을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가 방해하는데, 거기에 이어지는 숏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앞에서 본 전화기, 붉은 탁상 조명 옆에 놓인 바로 그 전화기의 숏이다. 단순히 찍힌 대상만 같은 게 아니라, 틸 다운하는 구도와 숏이 지속되는 길이까지 정확하게 같은 그 숏이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건 (어느새 단장을 마친) 다이앤이며, 전화를 건 것은 (의문의 남자가 아니라) 다이앤이 정말 파티에 오는 것인지 의아해하는 카밀라다. 이 숏의 반복 배치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데, 마치 전반부에서의 마지막 남자가 건 전화를 받은 게 후반부의 다이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나는 전화를 건 남자가 음성변조를 해 다이앤을 속였으리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설명을 위해 잠깐 4번째 문단으로 돌아가자. 문단 말미에 간접적으로 드러낸바, 데이빗 린치가 영화 연출을 시작한 이래 거의 항상 복수의 세계를 겹쳐둔 채로 펼칠 수 있는 평면으로 영화를 인식하고 이용했다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이레이저 헤드’의 헨리의 세계와 라디에이터 여자의 세계, 그리고 제 3의 행성. ‘블루 벨벳’의 낮과 밤. ‘트윈 픽스’ 시리즈의 트윈 픽스와 ’검은 오두막‘(그리고 ‘트윈 픽스: 더 리턴’에서 늘어난 세계들의 수). ‘로스트 하이웨이’의 프레드의 이야기와 피트의 이야기. ‘인랜드 엠파이어’의 현실(들)과 영화(들). 평면으로서의 영화를 가로지르는 주체(주인공과 관객)에게 이 세계들은 재각기의 무게감으로 다가오며, 이는 주체로 하여금 그 무게감들을 어떻게 버텨야 할 것인지를 고통스럽게 고민하게끔 만든다. 돌이켜보면 이 고민이야말로 예술가로서의 린치의 50년이 넘는 궤적을 관통하는 핵심 효과인데, 그것이 “서로에게서 찢겨진 세계들의 아슬아슬한 조우”에서 “서로 무언가를 공유하는 세계들의 어긋나는 평행”으로 전이되어 구조적 수준으로 뒤틀린 과도기적 기점은 바로 ‘트윈 픽스: 불이여 나와 함께 걷자’였다. 드라마 ‘트윈 픽스’ 본편이 시작되기 전, 즉 로라 파머가 죽기 전의 시간대를 배경으로 삼은 이 프리퀄 영화는 ’늦게 온 이전‘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한껏 이용해, 꿈속에서 과거(로라 파머)와 미래(데일 쿠퍼)를 교통시키거나 필립 제프리스 같은 전혀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는 등 선형적 시간축을 거스르며 시즌 1 3화에서 “지금이 미래인가, 아니면 과거인가?”라는 팔(The Arm)의 물음이 일으켰던 불확정성의 인상을 한 편의 영화 전체로 확장하고 강화한다. 이전의 ‘블루 벨벳’에서도 톰 고든/노란 남자의 존재가 두 세계 사이의 보충 및 교통관계를 지시하긴 했으나, 이렇게 구조적으로 직접 뒤얽히는 방식은 아니었다.


린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이 방식을 보다 밀고 나간다. 꿈이나 텔레비전 노이즈라는 기제를 통해 교통하던 복수의 세계는 이제 구조화된 모호함 속에서 교통한다. 몇 가지 의문, 어쩌면 영화 초반부에서 사고를 당한 사람은 후반부에서 봤던 바로 ‘그’ 카밀라가 아닐까? 전반부에서 베티와 리타를 만난 이웃집 여자와 후반부에서 경찰 두 명이 자신을 찾아왔었다고 다이앤에게 말하는 이웃집 여자가 정확히 같은 사람이고, 그가 본 베티와 리타와 경찰들이 같은 사람들이라면? 이 모순적 논리를 모순이라고 기각하는 대신 역설로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이 생각을 뒷받침하는 건 베티와 리타가 사라진 직후 갑자기, 아마도 파란 상자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 (멀리 여행을 갔다던) ‘숙모’ 루스가 문을 열고 들어와 방에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나가는 광경이다. 거기에 없어야 할 것이 거기에 있는, 혹은 그 역의 광경. 이때 우리는 이 어이없는 광경을 가능케 한 게 “파란 상자가 떨어지는 소리”라는 것을 놓쳐선 안 된다. 그러니까 진정 여기서 펼쳐지는 것은 환영의 기각이 아니라, 하나의 집 안에 있던 인물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다 희미한 소리로 인해 서로의 존재를 미약하게나마 감지하게 되는 광경이며, 그 소리는 하나의 세계의 흔적이 자율화된 채 평면으로서의 영화를 떠도는, 일종의 얼룩으로서의 소리인 것이다(어쩌면 레베카 델 리오가 쓰러지고서도 어디선가 계속 흘러나오던 노래는 이에 대한 예고가 아니었을까). 이 생각을 밀고 나간다면 전화기의 숏을 둘러싼 당혹스러움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세계가 전화기라는 사소한 사물을 매개로 해 평면 위에서 어긋나게 교통하는 것, 그게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인 게다. 여기서 어긋남을 해결할 정합적인 ‘봉합’은 불가능하며, 다만 어긋남을 어긋남으로 유지해 펼치는 무자비한 조작과 그로 인한 불확정성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조작은 ‘멀홀랜드 드라이브’ 한 편에 국한되지 않고 그의 영화 세계 곳곳에 촘촘히 숨어있다. 데뷔작 ‘이레이저헤드’의 첫 시퀀스나, 5번째 문단에서 언급한 ‘로스트 하이웨이’의 초과분적 존재들을 떠올려보라. 그저 시대와 작품에 따라 조작을 담는 스타일이 바뀐 것일 뿐. 달리 말하자면, ‘행방불명인 여자’를 찾는다는 목적 속에서 세계들을 어긋나게 매개하는 전화기의 숏의 농도가 바로 린치의 영화의 힘인 것이다.

 

이러한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을 공통적으로 이루는 주요한 모티프가 있다면, 그것은 인물들을 억압해 불안을 축적시키는, 그리고 그럼으로서 다른 세계의 간섭을 야기하는 언캐니한 집과 -그의 작년 전시 제목은 ‘누군가 우리 집에 있다(Someone is in My House)’였다- , 그런 집을 잠시 떠나 여기저기를 향하는 위험천만한 모험, 이 두 가지로 나뉜다. 문장만 놓고 본다면 ‘순진무구한 아이가 집을 떠나 어딘가에 갔다가 그 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어른이 되어 돌아온다’는 빌둥스로망의 전개 과정을 거의 즉각 연상시키긴 하나, 앞서 말했듯 린치는 ‘어른이 되어 돌아온다’는 식의 동선의 완수를 조금도 추구하지 않는다.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선 (떠날) 집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험을 끝내기 위해선 꼭 (돌아갈) 집이 필요하지는 않다. 좀 과하게 말해, 길 위를 전전하다가 불의의 사고나 자살로 좌표 사이를 영원히 헤멜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한 기본적 조건은 두말할 것 없이 자동차라는 (비)장소다. 두 명의 카일 맥라클란으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블루 벨벳’에서 제프리가 근사한 올즈모빌을 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걸 몇 번이나 보았나? 혹은 ‘트윈 픽스’에서 데일 쿠퍼가 시즌 1 1화에서 차를 몰고서 트윈 픽스에 도착한 이래 마을을 벗어나 원래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나? 당연히 없을 것이다-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니까. 이들의 자동차가 그리는 동선은 좌표 사이는 물론 좌표로부터도 기묘하게 부유하며 상징적으로 모험을 (이미 그것이 가시적으로는 집으로 돌아가 끝난 이후라 해도) 유랑으로 전환한다. 린치가 “도착이라는 말을 애초에 알지 못하는 것만 같”다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한 편 ‘트윈 픽스: 더 리턴’ 1화에서 각각의 이야기들은 자동차가 장소에 임시로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특히 ‘사악한 쿠퍼(Evil Cooper)’의 에피소드가 그러한데, ‘트윈 픽스’ 시즌 1 1화에 대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이를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보이는 그대로의 상황, 즉 자동차가 이야기를 작동시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말해보자. 린치의 자동차는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충동(Drive)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기제다. 서사적 가능성이라는 연료와 ’그럴듯한‘ 결말이란 좌표를 가진. 자동차가 벡터를 갖고 나아가고 어딘가에 다다를 때, 서로 떨어져있던 이야기들 역시 그를 통해 한 데 엮인 채 나아가고 또 다다르는 것이다. 물론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린치는 자신의 자동차를 조금도 경제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자동차의 속도와 좌표로의 도착을 철저히 지연시키고, 연료를 낭비하고, 동선의 무리한 변경과 확장을 요구하고, 나아가선 동선을 좌초시켜 그것의 기능을 거의 불구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한다. 어째서?

 

에이드리언 마틴은 ‘서사의 도전’이란 글에서 ‘트윈 픽스: 더 리턴’이 “서사적으로 얼마든지 우회하고 탈선할 수 있는” TV 드라마의 “서사 지연 원리를 극단적으로 확장한 결과”라 썼는데, 이러한 논지는 이 드라마 혹은 린치가 ‘로스트 하이웨이’ 이후에 계속 TV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유를 넘어 린치가 이야기-자동차를 폭력적으로 다루는 근본적 이유를 암시한다. 그것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인간의 신체를 고기 뭉텅이처럼 뭉개서 그렸던 것과 같이, 혹은 사무엘 베케트가 자아를 끊임없이 미분하는 ‘소란스러운’ 글쓰기를 하던 것과 같이, 하나의 이미지에 내재하는 변화에의 잠재력이란 문제로 우리를 이끄려는 집요한 제스처인 것이다. 여기서의 잠재력을 가능성과 착각해선 안 된다. 후자의 변화가 성장이나 쇠락 같은 수직적 현상이라면 전자는 확산 같은 수평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이라는 수직적 현상이 지닌 가치판단의 의미를 결여하는 이 단어에는 다양한 하위의 단어들이 산재한다. 분열, 변신, 중첩 등... 연료와 좌표를 자신의 방식으로, 최대한 반-경제적으로 오남용해 가능성이 자라날 수 있는 지점을 모조리 쳐냄으로서, 데이빗 린치는 이야기-자동차를 잠재력이 펼쳐질 수 있는 불확실성의 환경으로 구성한다. 그렇게 하나의 사물(들), 하나의 표면, 하나의 평면은 서로 다른 세계를, 역으로 복수의 사물(들), 복수의 표면은 같은 세계를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조 닭과 메리의 엄마가 겹쳐지듯, 도로시와의 섹스에서 제프리에게 프랭크가 겹쳐지듯, 아버지 리랜드 파머가 괴물 밥이었듯, ’검은 오두막‘에서 나온 게 데일 쿠퍼의 도플갱어이듯, 베티와 다이앤 혹은 수잔과 니키가 하나의 배우에서 겹쳐지듯. 린치 특유의 형식이라 할 만한, (이미지에서 서정적 제의성이 아닌 대상의 기형화를 이끌어내는) 슬로우 모션과 (복수의 세계를 과격하게 겹쳐버리는) 디졸브, 그리고 기호의 (은유화가 아닌) 암호화에 대한 집착은 이것의 연장선에 있다. (여기서 린치는 장 뤽 고다르과 놀랄 만큼 유사해진다) 그런데 그 잠재력은 대체 어디를 향하는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 주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면?(‘블루 벨벳’) 익숙하다 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트윈 픽스’) 나아가, 자아가 나만의 것이나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구성된 것이라면?(‘인랜드 엠파이어’)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제기되는 질문과 형식들은 고유성, 확정성, 일원성 등 우리의 자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던 인식적 전제들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균열을 내고 붕괴시킨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 속 세계들은 서로가 존재하는 것을 모른 채 하나의 평면 위에서 서로를 암암리에 보충하며 공존하나, 어떤 균열로 인해 양자를 관통하는 짙은 얼룩을 남기며, 린치의 카메라와 붐 마이크 그리고 편집 기계는 끈질기게 그것을 쫓는다. 그런데 얼룩을 쫓으면 쫓을수록 두 세계 중 무엇이 우리가 건너온 ‘그’ 세계였는지, 아니면 애초에 ‘그’ 세계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세계다운 것이었는지 모두 의문스러워지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거창하게 세계라 부르던 것이 실은 기껏해야 자아를 안정화하기 위해 마련된 (지젝이 말한) 구조화된 판타지 중 하나일 수 있음을 암시하며 그러한 세계(들)를 다양한 방식으로 품는 광활한 평면, 퀭텡 메이야수의 말을 빌리자면 ‘거대한 외계(Grand Dehors)’의 존재와 그 나름의 ‘질서’를 (희미하게라도) 인식시킨다. 결국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평면에 난무하는 혼돈의 감각을 ‘질서’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인 게다. (농담 삼아 말하자면) 가장 가혹한 의미에서의 ‘자아성찰’. 자크 리베트가 ‘트윈 픽스: 불이여 나와 함께 걷자’를 보고 난 후 “내가 아는 건 내가 땅에서 6피트 정도 뜬 채로 극장을 나섰다는 것뿐이다”라고 말한 건 어쩌면 이 불확정성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드라마 본편이 끝난 지 25년 후에야 다시 펼쳐진, 그리고 이전과는 상판인 전개로 인해 기존 팬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 ‘트윈 픽스: 더 리턴’은, 우리가 익숙하게 인지했던 이미지들, 그러니까 ‘트윈 픽스’ 시즌1, 2를 통해 받아들였던 배우-캐릭터나 미장센이나 플롯이 거기서 벗어나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었고 또 되고 있음을 인식시키고자 한, 기획 자체로 과시적이고도 장대한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린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트윈 픽스: 더 리턴’의 (본방송에서 17, 18화를 묶어 방영한) 피날레를 살펴보자. 17화에서 시리즈의 골수 팬들로 하여금 추억에 젖어들게 만드는 전개를 비롯, 거의 바그너가 말한 총체예술의 수준으로 자신이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기술과 영상 양식을 흥청망청 구사하며 이질적인 기호들을 한 데 한껏 범람시키던 린치는 곧바로 이어지는 18화에선 그것들을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벗겨낸다. 초현실적인 세계도 보이지 않고 인물들도 사라지고 음악도 희미해져, 우리가 이전에 이 시리즈에서 본 적 없는, 건조하고 황폐하기 짝이 없는 영상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여기서 범람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동차가 그리는 동선뿐이다. 후반부에서 주체는 마침내 로라 파머 역의 쉐릴 리를 만나지만 그는 더 이상 로라 파머가 아니며, 그와 함께 트윈 픽스로 돌아와 파머 일가의 집에 도착하지만 집주인은 사라 파머가 아니고 집이 파머 일가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이전부터 이미 모든 게 바뀌어있었다. 특히 쿠퍼와 다이앤의 불길한 섹스 이후 다이앤이 남긴 편지에서 그들의 이름이 바뀌었고, 모텔과 차가 바뀌었고, 트윈 픽스의 카페 RR이 바뀌었고, ’검은 오두막‘을 이루던 요소들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고, 무엇보다 쿠퍼 자신의 성격과 행동이 (어느 정도 ‘사악한 쿠퍼’처럼) 바뀌었다. 이 때 “지금이 몇 년도죠?”라는 쿠퍼의 물음은, 미시적인 이미지의 반복에서 서로 상반되는 에피소드의 (피날레라는 명목의) 통합 배치에 이르는, 수많은 어긋남의 중첩을 동선의 완수 없이 감내하며 평면을 유랑해야만 하는 주체의 탄식에 다름 아닐 게다. 그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라 파머의 (왜곡된) 부름과 그에 응답하듯 울려 퍼지는 쉐릴 리의 비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세계들이 중첩되고 붕괴되는 새로운 혼돈의 감각으로 우리를 내몬다. 결국 로라 파머/쉐릴 리는 영원히 집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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