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이라고 표현하긴 했는데, 약간 만화나 소설 바깥으로 범위를 넓혀보고 싶음.
'검열'이라는 용어는 너무 구체적이고
결국 '독자 검열'이라는 다소 모순적인 용어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기분이니까
이 용어를 비슷한 용어로 좀 치환해보자고, '제약'으로. 서약은 없다.
검열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도 창작자에게 얼마든지 제약이 가해질 수 있다는 건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임.
영화관에 걸리는 독립 영화는 평균 9700만원의 손해를 안겨준다는 조사 결과가 있던데
사실 어떤 검열보다도 이런 자본의 논리가 창작자의 목줄을 꽉 죄고 있으니까.
MCU가 시네마의 몫을 잠식하고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비슷한 담론일 테고.
내 생각에, 편집부의 검열을 폐지하고 장갤을 폐쇄한다고 해 봤자
현실적으로 작가에게 가해지는 제약이 얼마나 줄어들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독자가 얼마나 쏠리느냐, 투자가 얼마나 들어오느냐 하는 문제는
작가 내면에 자발적으로 검열관을 만들어내는 것밖에 더 안 되지 않을까?
이런 제약이 널럴하면 할수록 창작의 퀄리티는 높아질 거라는 주장은
이상적인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이상의 필연적인 귀결은, 최후 최강의 검열관인 '목구멍이 포도청'마저도
사회가 챙겨줘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밖에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식의 사회도 상상해보는 정도는 괜찮지 않나 생각하지만
요즘은 이런 소리 하면 빨갱이 소리를 듣는다.
즉 현실적인 의미에서, 창작자는 언제나 주어진 제약 하에서,
한정된 예산과 시간, 시장의 까다로운 요구사항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한계 하에서
타협하여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게 중공식 검열기준과 다른 것은 단 하나, 그 타협의 주체가 당이 아닌 창작자 본인이라는 점일 터이다.
그렇다면 반문하겠는데,
우리가 작가가 '시장과 타협했다'라고 욕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우리가 작가가 '예산과 타협했다'라고 욕하는 것이 타당한가?
어느 정도까지는 타당할 거임, 뱅크신이 너무 많이 나온다던가 하면.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 아닌가?
우리는 예산을 왕창 들인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블록버스터라 부르며 경외하지만,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이 항상 블록버스터이기만 한 건 아니잖음.
아니, 오히려 한 장르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은
바로 그 '제약'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니였던가?
마법소녀의 변신 장면은 셀화를 그리는 예산을 한푼이라도 줄이기 위한 발버둥이었고,
수많은 장르 클리셰들은 시간도 재능도 없었던 창작자들이
기꺼이 천재적인 선인들의 탐구를 존경심을 담아 모방하던 것에서 만들어진 것 아니었던가.
누구도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기꺼이 그렇게 했던 것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제약이란 창작의 본질적인 것이며
그 제약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회피하고자 하는 창작자들의 모든 시도는... 존경스러운 거라고 생각함.
물론 예술의 본질적 목적, 아름다움의 범주에 있어서는
그 어떤 제약조차도 방해물에 불과하다는 입장은 납득 가능하지만
나는 그래도 제한된 예산과 시간을 쪼개고 쪼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빚어내는 것,
무엇보다 검열을 풍자하기 위해서, 그 검열의 빈틈을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서
그 검열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대놓고 폭로하는 그런 것들은
설사 그 자체로 아쉽더라도, 감상자로서 기꺼이 찬탄을 보내야 마땅한 부류라고 생각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윤선생의 그 만화는
'예술이 제약 없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과
'예술 창작의 과정이 제약 없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걸 혼동한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예술가의 창작은 그저 존경스러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설거지 떡밥 좆같아서 딴 소리 하는 걸로 보인다면 실제 맞음.
글고 애미뒤진 새끼들아 할 짓이 없어서 남 글에 주작기를 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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